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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4-27회
늘재-청화산-갓바위재-조항산-고모치-괴산 삼송마을
20230129
1.청화산과 조항산 산줄기의 진수를 보다
날씨가 흐릿하다. 백두대간 늘재-고모치 구간 산행을 위해 늘재에 왔다. 일곱 번째로 늘재에 왔다. 늘재에 처음 왔을 때 허겁지겁 늘재의 시설물을 살피고 늘재의 위치와 주변 지리에 관심 쏟던 모습이 그려진다. 세상의 모든 일은 첫 만남의 감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년 전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하며 분주했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이제는 산행 속도가 더 느려지고 주변에 대한 관심은 옅어져서 앞선 일행을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순리라고 하면 순리에 따라야 한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갈령에 '우복고을 관광화북'이라는 문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갈령에서 백두대간을 산행할 때 만나게 되는 이 문자조형물은 '소의 배(牛腹)' 속처럼 편안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환상에 젖어들게 한다. 상주시에서는 우복고을 화북을 에워싸는 산줄기를 '우복동천(牛腹洞天)'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이 산길 산행은 '갈령-형제봉-속리산 천왕봉-문장대-늘재-청화산-시루봉-도장산-갈령'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두대간은 갈령에서 청화산까지 우복동천길과 동행하며, 청화산 아래서 우복동천과 헤어진다. 우복동천 산행을 마무리하고자 하면 갈령-도장산-시루봉-청화산을 잇고서 청화산에서 청화산농원으로 하산하면 된다.
오늘 산행은 늘재에서 청화산까지 우복동천(牛腹洞天)길과 동행한다. 우복동(牛腹洞)은 흉년, 전쟁, 전염병의 삼재(三災)가 들지 않아 사람들이 살기에 '소의 배(牛腹)' 속처럼 편안한 길지(吉地)라는 십승지(十勝地)에 속하는 땅이라고 한다. 그 우복동이 어디일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청화산 지역이 우복동일 것이라 여겼을 것이며, 속리산 동쪽 화북면 상오리 일대 용유천이 흐르는 곳을 우복동이라 이르는 사람도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우복동가(牛腹洞歌)'에서 우복동(牛腹洞)을 이렇게 읊고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그 속에 우복동이 숨어 있다고들 하네. 산봉우리 골짜기물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도 없는 듯하네. 날아 흐르는 폭포가 성난 듯이 떠들어대며 덩굴 가시나무가 얼기설기 막고 있으며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어 송아지가 배를 깔아야 겨우 들어갈 정도, 그곳에 들어서면 가파른 절벽이 여전히 깜깜하다네.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의 광채 퍼지며, 잔잔한 시내 끊긴 산자락 그림자 싣고 흐르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이 농사짓기 알맞네."
청화산에 오르며 속리산 동쪽 화북면 장암리 일대를 내려본다. 속리산 동북쪽이요, 청화산 서남쪽 저곳이 우복동(牛腹洞)일까? 이 땅의 이상향 우복동이 저곳이며, 세상의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곳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이상향을 상상하며 그리워한다. 특히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상향을 찾아 떠난다. 이상향,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마을을 이상향으로 가꾸고자 하는 실천이 중요하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상향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다산은 '우복동가(牛腹洞歌)'에서 이렇게 읊었다. "삼한의 나라 개국한 지 얼마나 오래인가. 종이 위에 누에 깔리듯 인구가 너무 많아 나무하고 밭 일구어 발 안 닿은 곳 없는데, 어찌 묵어 있는 빈 땅이 있겠는가. 적이 쳐들어와도 나라 위해 죽어야지, 어찌 처자식 데리고 떠난단 말인가. 아내를 독려해 방아 찧어 나라 세금 바치게 해야지. 아아, 세상에 어디 우복동이 있을 것인가!"
우복동천(牛腹洞天)을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라기보다 절승의 한 곳으로 생각한다. 속리산 산줄기가 서쪽에서 감싸고, 물줄기가 마을을 안고 흐르며 청화산이 북쪽에서 사철 푸르게 솟아 있는 곳, 상주시 화북면 일대의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래서 이중환도 청화산 인근에 은거하며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이라 하였을 것이다.
몇 곳의 어려운 암릉지대를 힘겹게 통과하여 청화산에 오른다. 해발 970m 청화산(靑華山)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문경시 농암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청화산은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뒷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고 청화산을 칭송하였다. 이중환은 청화산 근처에 은거하여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 산에 산죽과 소나무가 많아 사철 푸르다고 하여 靑華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청화산 정상은 암릉으로 협소하며, 전망은 활짝 열려 있지 못하다. 오히려 정상 직전의 헬기장에서 시루봉과 연엽산 능선이 멋지게 조망된다. 시루봉과 연엽산 능선은 조항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끊임없이 눈길을 끌었다. 백두대간 청화산-조항산 능선과 우복동천 청화산-시루봉 능선이 서로 호응하고, 시루봉-연엽산 능선이 북쪽 조항산과 둔덕산과 마주한 형국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청화산 정상에서 내려오면 시루봉과 조항산 갈림목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백두대간은 우복동천길과 헤어져 북쪽 조항산으로 향한다. 조항산 가는 능선에서 날이 흐려지더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을 맞이하며 암릉과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통과하였다. 눈구름 속에 잠긴 청화산과 걸어온 능선의 산봉들이 사랑스럽다. 내가 발딛고 걸어온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음도 활짝 열린다. 이 능선에서 백두대간 청화산 능선과 청화산-시루봉-연엽산 능선은 겨울산행의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절정은 청화산 능선에서 가장 높은 858봉 아래의 암릉지대와 암릉지대에서 올라선 801봉 전망바위, 그리고 테라스바위가 있는 곳에서이다. 지금까지 날이 흐리더니 이곳에서 햇빛이 반짝이며 그동안 얼굴을 감추었던 청화산이 얼굴을 내보이며 활짝 웃는다. 청화산에서부터 걸어온 능선길이 더 환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걸어갈 조항산 능선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반긴다. 아름답다. 감탄한다.
청화산-조항산 산행에서 이렇게 활짝 열린 풍경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근골의 겨울산이 제 실체를 보여주는 능선에서, 청화산과 조항산의 온전한 모습을 감상하며 가슴이 벅찼다. 지난 세 번의 청화산-조항산 산행에서 이 멋진 풍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청화산과 조항산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을 칭송하지도 못했다. 오늘에서야 청화산과 조항산의 실체적 모습, 이웃한 친구들과 이어진 능선을 모두 살펴보는 행운을 누렸다. 산행은 그 정상에 올라서는 감격과 그 산의 전체를 살펴보는 감동을 모두 누려야 한다. 이제 이 감격과 감동을 누리기 위하여 조항산에 오른다.
테라스바위에서 바로 앞에 솟은 조항산에 쉽게 이를 수 없다. 갓바위재를 거쳐 아주 위태로운 암릉지대를 통과하여 힘겹게 올라가야 한다. 이 고통 속에 환희가 찾아온다. 이번 산행의 최절정 위험 구간을 통과한다. 오금이 저리는 낭떠러지 암릉지대를 가까스로 통과하여 올라서 뒤돌아보면 오, 청화산과 주변 산들, 백두대간 능선이 장쾌하게 한 폭의 그림으로 수놓아진다. 이 풍경이 상상의 우복동을 능가한다. 이 절승이 산행의 고통을 환희로 바꿔준다. 조항산 정상 직전에서 이번 산행의 최절정 풍경을 맛보며 조항산 정상에 올랐다.
해발 951m 조항산(鳥項山)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조항산 북쪽 마귀할미통시바위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갓바위봉이 새의 부리, 조항산이 새의 목덜미로 보이는 형국이라 하여 조항산(鳥項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옛날 천재지변으로 이 지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 산 정상이 물 위에 떠있는 새의 목덜미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 위에 떠있는 ‘갓(조선 시대 성인이 된 남자가 머리에 쓴 의관)’ 모양처럼 보였다고 하는 전설에서 조항산과 갓바위봉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조항산 앞쪽에서 청화산으로부터 여기까지 이어지는 남쪽 풍경을 조망하고 정상표석 뒤쪽으로 가서 북쪽의 환상적 풍경에 무아지경이 되었다. 바로 앞에는 마귀할미통시바위와 손녀마귀통시바위가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왼쪽 뒤로 가까이 대야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과 중대봉, 멀리 덕가산과 그 오른쪽 앞으로, 장성봉, 구왕봉과 희양산이 가늠된다. 가슴이 벅차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청화산-조항산 산행의 풍경을 이번에 축복처럼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감히 말한다. 청화산과 조항산의 진수(眞髓)를 맛보았다고. 어느 날 청화산과 조항산의 다른 비경(秘景)을 발견하는 순간 이 말은 틀린 것이 될 것이다. 그래도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번에 청화산과 조항산의 진면목(眞面目)과 진수(眞髓)를 보고 맛보았다고.
2.산행 과정
전체 산행 거리 : 14.3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56분
문경 출신의 이강년 의병장의 무덤은 과천에 있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독립투사들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상주 화북 유림들이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충북 제천에 옮겨 가매장했다가 2년 뒤인 1910년 현재의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묘소로 이장했다고 한다.
가파르지 않고 평영하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의 늘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백두대간 속리산 문장대-늘재 구간은 출입 금지 지역이다.
백두대간 늘재-청화산의 거리를 2.1km로 적어 놓았으나, 오른쪽 이정목에는 2.6km라고 적혀 있다.
늘재는 해발고도 380m의 고개로 속리산 문장대를 지나 밤티재를 거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청화산은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뒷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청화산으로 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상에 위치하고 있다. 늘재는 경상북도 상주시 하북면과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을 연결하는 32번, 42번 국도가 지나는곳으로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개 가운데 진고개, 진재는 긴 고개라는 뜻이고, 늘티, 늘재, 늘고개는 고갯길이 가파르지 않고 평평하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으로 이 늘재 또한 '길게 늘어진 고개'를 의미한다. 늘재 입구에는 "백두대간의 정기 받은 영역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라고 시작하는 성황당 유래비가 서 있다.
백두대간보호지역
본 지역은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백두대간보호지역" 입니다.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자리인식 체계이며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로서, 총 길이는 약1400km에 이릅니다. 지질구조에 기반한 산맥체계와는 달리 지표 분수계(分水界)를 중심으로 산의 흐름을 파악하고 인간의 생활권 형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산지인식체계입니다.
백두대간 표석 옆에 금강학원 이사장 김맹석과 영동대학교 총장 채훈관의 후원으로 2008년 4월에 백두대간碑를 세웠음을 밝히는 표석비가 있다. 그 내용을 옮겨 놓는다.
늘고개는 청화산과 속리산을 이어주는 인후지지(咽喉之地)요 경상과 충청의 경계이며 낙동강, 한강, 금강의 삼파의 분수령인 이곳 영지에 정기를 모아 인걸의 배출을 기대하고저 우리 고장 출신 학교법인 금강학원 심우당 김맹석 이사장과 영동대학교 총장 채훈관이 대간비를 세우다.
조선 후기 문신 백남 김시빈의 칠언절구 漢詩 '속리산(俗離山)'과 번역문이 새겨져 있다.
백두적맥주동수(白頭嫡脉走東陲) 백두산 큰 산맥이 동으로 뻗어와서
형시금강제속리(兄是金剛弟俗離) 금강산 먼저 서고 속리산 뒤에 섰네.
미륵관음관세계(彌勒觀音寬世界) 미륵관음 양봉 높아 자비세계 너그럽고
충청경상장근기(忠淸慶尙壯根基) 충청·경상도의 경계한 산 장엄하도나.
백두대간의 정기 받은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 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 신앙으로 승화되어 당(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이러한 유서를 지닌 신당이므로 그 위치가 환경유적과 사실(史實)이 찬연하다. 이를 개관하면 이 늘재는 낙한(落漢) 양대강의 분수령이다. 강의 원류 따라 개통된 도로는 동남으로 영호남, 서북으로 충청도와 서울로 통하는 장정(長程)의 기점이며 고대에 라제(羅濟)의 국경으로 각축지대라 견훤산성이 축성되었고 근세에는 정기룡(鄭起龍)장군의 임란전첩지가 용화동에 있으며 세조대왕께서 백관과 함께 노니신 문장대와 용화 온천을 비롯하여 고승(高僧)과 명장(名將)이 수련한 유적이 있다. 특히 한말 경술국치 후에 의사(義士)들이 창의하고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통로가 되고 쉼터이며 도창의 대장 이강년(李康年) 선생의 묘소가 지척에 있다. 그리고 때맞추어 늘티에 전상석(全相錫) 처사가 우국일념으로 이 성황당을 창건하여 동민과 함께 지성기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백여 년이 지난 이제 그의 증손 충환(充渙)이 유지를 받들고 이상배(李相培) 국회의원과 김근수(金瑾洙) 상주시장이 산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堂)을 중창하여 선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수범하고 후진의 교육장이 되게 하여 백두대간의 영기(靈氣)를 실감나게 하였다. 이에 그간의 유래와 성황당 중창의 경위를 약기하여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우주만물 하늘이 열리고 백두대간 구비쳐 천하명산 청화산 솟았네. 청화산인 이중환 택리지 우복동 십승지 여기 펼쳐지네.
속세에 지친 나그네 길손들이여 이곳 성황당에 마음 비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대자유인이 되소서.
마음을 비우는 대신 욕망을 불태우며 백두대간 종주대를 따라 힘을 쏟는다.
청화산 1.8km 지점의 이정목을 지나서 전망바위에서 남쪽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일대를 조망하였다. 저곳이 우복동일까?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비석과 제단, 제단 양 옆으로 돌향로가 설치되어 있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비문 오른쪽에는 '백의민족(白衣民族)(민족중흥(民族中興) 성지(聖地), 부실기조(不失基祖) 삼파수(三巴水)', 왼쪽에는 '백두대간중원지(白頭大幹 中元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이곳은 우리 민족이 중흥하는 성지이다. 세 갈래 물줄기(한강, 낙동강, 금강)가 갈라지는, 뿌리의 근원을 잃지 않는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중심이요 으뜸의 땅, 백두대간의 중앙이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은 정국(靖國)을 기원하는 제단으로, 정국(靖國)은 어지럽고 혼란스런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정국(靖國)이 빈다고만 될 일은 아니다. 비는 마음은 정성의 실천이 따라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온 국민들이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화합할 때 정국(靖國)은 온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 야스쿠니(靖國) 신사(神社)를 뜻하는 일본 양식이므로 이를 철거해야 한다는 호소문이 붙어 있다. 정국(靖國)이란 말이 과연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말인지 이미 조선에서도 사용된 말인지 그것부터 고증해야 할 것이다. 정국(靖國)의 뜻은 좋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선 정국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본 야스쿠니신사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국민정서와 맞지 않는 기원단입니다. 이런 기원단이 왜 이곳 청화산에 버젓이 설치 되어 있는지 의문입니다. 21년 작년에 개인적으로 상주시에 전화 해서 이것 설치한 소유자에게 연락해서 철거 조치해 주십사 요청하였지만 누가 설치하였는지 알 수 없고 개인이 설치한 시설물을 상주시에서 함부로 철거 할 수 없다는 이상한 답변을 하더군요. 국유지 또는 지방지에 허가받지 않은 불법시설물이 축조 되어도 철거를 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설치하신 분들이 좋은 뜻으로 설치하였다면 비석의 글자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산우님들
전국의 명산을 다니시다 보면 이런 우리나라의 정서와 맞지 않는 일본의 쓰레기 같은 유품이 남아 있어 마음 아픕니다. 좋은 뜻으로만 알고 계실텐데 내용을 알면 이게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두들 저와 같은 마음일 듯합니다.한분이라도 이 글을 읽고 공감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곳 청화산까지 다녀 갑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찾아 보고 이런 말도 안되는 시설물이 존재한다면 철거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마운틴벨리
날이 흐리고 눈발이 날리면서 속리산 서북능선은 흐릿하다.
왼쪽 뒤의 속리산 서북능선은 흐릿하게 보인다.
청화산 가는 데 마지막으로 위험한 암릉 밧줄 구간을 통과한다.
늘재에서 오른쪽으로 2.1km 올라온 지점이다. 청화산까지 500m가 남았다. 왼쪽길은 원적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중앙 왼쪽 뒤에 청화산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길이 보인다. 백두대간은 청화산 뒤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아래 늘재에서 올라와 능선으로 올라서 잿등바위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
왼쪽 산봉이 청화산이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우복동천길, 백두대간은 청화산 뒤쪽으로 이어져 북진한다.
오른쪽이 시루봉, 그 뒤 왼쪽이 연엽산이다.
늘재 2.6km, 조항산 4.2km, 왼쪽으로는 청화산농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청화산(靑華山, 970m)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문경시 농암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은 청화산 근처에 은거하여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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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오른쪽은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길이다. 늘재에서 이곳까지 백두대간과 우복동천길이 동행하고 이곳에서 헤어진다.
조항산 3.7km, 백두대간 조항산 방향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오른쪽 뒤가 청화산, 왼쪽 뒤 산봉에서 우복동천길과 헤어져 이곳으로 왔다.
중앙 뒤 구름 속에 숨어 있는 청화산에서 이곳으로 걸어온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맨 뒤 왼쪽 능선은 우복동천길이다.
아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송면저수지(의상저수지)이다.
청화산은 눈구름 속에 숨어 있다.
조항산 역시 정상이 눈구름 속에 잠겨 있고, 그 오른쪽 둔덕산은 흐릿하게 실루엣으로 보인다.
청화산이 모습을 보여준다. 맨 뒤 오른쪽 청화산에서 그 왼쪽 우복동천 갈림목에서 이곳으로 이어온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걸어온 길을 조금 더 오른쪽으로 돌리면 청화산 능선에서 가장 높은 858m 산봉을 내려온 길이 보인다. 아찔하게 위험하다.
맨 오른쪽 청화산과 그 왼쪽 백두대간 갈림봉에서 우복동천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우복동천길이 중앙의 시루봉을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맨 왼쪽은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연엽산이다.
조항산 오르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뒤의 산은 둔덕산이다.
암릉지대에서 조항산을 조망하며 그 왼쪽 맨 뒤 구름 속의 대야산, 그 왼쪽으로 빤질한 뾰족봉인 중대봉을 가늠한다.
청화산에서 길게 이어져온 능선의 최고봉 858m 산봉에서 위험한 암릉 구간을 거쳐 암릉지대로 내려왔다.
동쪽으로 내려본 경북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일대 풍경, 맨 오른쪽 뭉툭한 시루봉, 중앙에 우뚝한 연엽산이 확인된다.
계속 이어지는 암릉구간을 통과하여 전망바위 방향으로 올라간다.
앞을 가로막는 801m 암봉에 기가 질린다. 저 암봉에서 전망이 좋다.
맨 뒤 청화산에서 그 왼쪽 우복동천길 갈림목에서 이어온 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 858m봉에서 이곳까지 힘이 들었다.
서쪽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일대를 내려보았다. 의상저수지(송면저수지)가 표지가 되어준다.
중앙에 움푹 파인 갓바위재와 오른쪽에 조항산, 그 오른쪽에 갓바위봉이 보인다. 중앙 맨 뒤에 대야산과 그 왼쪽에 뭉툭한 암봉인 중대봉이 가늠된다.
조항산 암봉이 뾰족하고 그 오른쪽에 갓바위봉이 보인다. 오른쪽 뒤는 둔덕산이다.
맨 뒤 청화산과 오른쪽 858m 산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장쾌하고 맨 뒤 왼쪽 능선은 우복동천길이다.
조항산 오른쪽에 갓바위봉이 멋지다. 중앙에 둔덕산이 편안하다.
앞의 암릉지대를 테라스바위라 이르는 듯. 중앙에 조항산과 갓바위봉, 왼쪽 뒤에 빤질한 바위봉 중대봉이 보인다.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宮基里)는 북쪽에 둔덕산, 남쪽에 연엽산(오른쪽에 보이는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궁기(宮基)는 궁터라는 뜻으로 후삼국시대 때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이 이곳에 궁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중앙 왼쪽에 움푹 파인 곳이 갓바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해발 769m 갓바위재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갓바위재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의상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다.
헬기장이라고 하지만 폐헬기장 같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13:33
맨 뒤에 우복동천길 능선이 펼쳐져 있고, 중앙 앞에 백두대간에 우뚝한 858m 산봉, 맨 왼쪽에 801m 암봉이 확인된다.
왼쪽 뒤에 연엽산, 중앙에 시루봉, 맨 오른쪽에 백두대간 801m 산봉인 전망 좋은 암봉이 확인된다.
중앙 왼쪽에 조항산, 그 오른쪽 아래에 바위봉인 갓바위봉이 분명히 확인된다.
왼쪽의 암봉과 위태롭기 그지없는 암릉지대를 통과하여 조항산에 오른다.
중앙 맨뒤 청화산, 그 앞 중앙 오른쪽에 858봉, 그 왼쪽 앞에 전망바위가 있는 801봉, 바로 앞에 위태로운 암릉지대, 뒤쪽 우복동천길 맨 왼쪽에 시루봉이 확인된다. 오른쪽 맨 뒤에 속리산 서북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화산은 왼쪽 뒤에 둥그스름하고 그 오른쪽 뒤에 속리산 서북능선이 펼쳐져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 의상저수지가 있다.
오른쪽 뒤의 청화산에서 왼쪽 뒤의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길이 멋지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며 맨 뒤 오른쪽은 속리산 서북능선이다.
서쪽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일대와 의상저수지를 내려보았다. 왼쪽 뒤에 속리산 서북능선이 펼쳐져 있다.
왼쪽 암릉지대를 거쳐 오른쪽의 조항산에 오른다.
이번 구간에서 가장 위험한 암릉지대이다. 위태로운 낭떠러지 암벽이 있는데 밧줄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조항산에서 737m 산봉으로 산줄기가 급하게 내리벋고 있다. 왼쪽 뒤에 대야산, 중앙에 장성봉, 그 왼쪽 뒤에 덕가산, 장성봉 오른쪽 뒤에 희양산을 가늠한다. 중앙 앞에는 마귀할미통시바위와 손녀마귀통시바위가 보인다.
중앙 앞의 737m 산봉 뒤에 대야산과 상대봉, 그 왼쪽 빤질한 바위봉이 중대봉, 중앙 오른쪽 뒤가 덕가산, 오른쪽 뒤가 장성봉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 앞의 산 뒤 아래는 고모치, 오른쪽에 마귀할미통시바위와 손녀마귀통시바위가 확인된다.
바로 아래 이번 산행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암릉지대를 가까스로 통과하여 조항산으로 오르며 뒤돌아보았다. 왼쪽 뒤에 청화산과 그 오른쪽 뒤에 속리산 서북능선이 흐릿하지만 분명히 조망된다.
조항산(鳥項山, 951m)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북으로 대야산과 남으로 청화산과 이어져 있는 고모령과 갓바위재 사이에 위치한 암봉이다. 조항산과 청화산 사이에 난 남쪽의 가파른 고개가 갓바위재로서, 청천면 삼송리에서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항산의 동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는 궁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궁기리라는 마을 이름은 견훤이 궁터를 조성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우리나라에는 '새(鳥)'를 산 이름으로 쓴 경우가 많다. 날렵하거나 높이 솟아 있는 산의 모양새에 따라 붙여진 것들이다. 조항산이란 이름 또한 봉우리가 새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졌다고 한다. <구한말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지형도>에서는 현재와 같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발 951m 조항산(鳥項山)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왼쪽 737m 산봉에서 그 오른쪽 아래 고모치와 마귀할미통시바위 갈림목인 889m 산봉을 거쳐 대야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중앙 왼쪽에 대야산과 상대봉, 그 왼쪽에 중대봉, 오른쪽 뒤에 장성봉, 그 왼쪽 뒤에 덕가산이 가늠된다. 오른쪽 앞은 마귀할미통시바위(왼쪽)와 손녀마귀통시바위이다.
오른쪽에 둔덕산, 앞 왼쪽에 마귀할미통시바위(왼쪽)와 손녀마귀통시바위, 산줄기 중턱 중앙에 큰 채석장, 통시바위 아래에 작은 채석장이 있다. 맨 왼쪽 뒤에 덕가산, 마귀통시바위 뒤에 장성봉, 중앙에 반짝이는 희양산과 그 왼쪽에 구왕봉이 가늠된다.
중앙에 청화산과 오른쪽 뒤에 속리산 서북능선이 흐릿하다.
정상 표석 뒷면에 "백두대간을 힘차게 걸어 땀 속에서 꿈과 희망을. 아아! 우리들 산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대한산악연맹 경북연맹 산들모임산악회에서 단기 4335년에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왼쪽 앞의 737m 산봉을 넘어 오른쪽 아래의 고모치로 내려간다. 조항산-고모치는 1.4km 거리이다.
737봉으로 내려가며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일대를 내려보았다. 중앙 왼쪽 뒤에 목적지인 농바우마을이 보인다.
왼쪽 조항산이 새의 목덜미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조항산 0.5km, 고모치 0.9km 지점이다.
오른쪽 산봉은 737m 산봉, 왼쪽 뒤에 있는 산봉이 해발 951m 조항산이다.
고모치(고모재)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며, 고개 오른쪽 아래에 고모샘이 있다. 고모치는 옛날에 곰이 있었다고 하여 고미재로 전해오다가 고모치로 변했다고 한다. 고모치라는 지명에 슬픈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져 전해 내려온다.
한겨울철이었다. 문경의 농암면 궁기리에 사는 고모가 고개 너머 괴산의 청천면 삼송리에 사는 조카를 만나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폭설이 쏟아졌다. 고모가 떠난 뒤 폭설이 쏟아지자 조카는 고개를 넘어가는 고모가 걱정되어 뒤따라 올라갔다. 고모는 고갯마루 근처에서 탈진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조카는 고모를 부축하여 함께 고개를 내려가려고 시도했으나 폭설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결국 고모와 조카 둘 다 얼어죽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고개를 고모치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은 궁기리에 부모를 여읜 조카와 고모가 살고 있었다. 고모는 조카를 잘 보살폈지만 병사하고 말았다. 조카를 잃은 고모는 이 고개에 올라와 목을 맸다고 한다. 이후 고개 이름이 고모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백두대간 늘재-고모치 구간 8.2km의 산행을 마치고 괴산군 청천면 고모재골로 하산한다.
백두대간 늘재-고모치 구간 산행을 마치고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고모재골로 내려가며 고모치를 뒤돌아보았다. 오른쪽에 있던 돌무지가 사라졌다.
고모재골을 내려와 임도와 만나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왼쪽 산에서 채석하여 모아놓은 돌들이 가득하다. 중앙 뒤에 보이는 산봉은 조항산이 아니라 조항산 앞에 있는 737봉이다.
석산 개발지역으로 발파, 낙석 등 위험이 크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중앙 오른쪽 암봉은 중대봉, 그 뒤 오른쪽에 대야산 암능이 보인다. 중대봉-대야산 구간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과수 농장이 있는 못골 입구에 예전에 없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의 백두대간 산줄기가 중앙 왼쪽 뒤 대야산 암릉으로 이어지고 있다. 왼쪽 전봇대 뒤의 암봉은 중대봉이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三松里)는 명품 소나무 세 그루가 있다고 하여 삼송(三松)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농바우교를 건너 청천면 삼송리 삼송3구 지역 농바우마을로 들어간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삼송3구 농바우마을 이장님댁에서 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