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스의 로사리오 성당(경당)
칠십이 넘은 노년의 앙리 마티스(1869~1954)는 1941년 정월, 리옹에서 십이지장 암수술을 받고
작품을 마무리 할 수 있게 삼사 년만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간청했다.
마티스는 바닷바람을 쐬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니스 북쪽 시미에의 높은 곳에 위치한
대형 호텔 레지나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 호텔은 영국에서 오는 겨울 관광객을 위해 1897년 지어진 호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묵은 적이 있는 특급 호텔이다. 하지만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시미에 공습이 있은 뒤 마티스의 한 시기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니스 시대는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입은 채 졸고 있는 모델을 그린 <꿈>(1940)과 함께 끝났다.
마티스는 니스를 떠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중세도시 방스의 별장 ‘르 레브’로 작업실을 옮겼다.
노대가 마티스는 앓아눕는 일이 잦았다.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담배로 인한 폐색전증과 위하수증 때문에
쇠로 된 벨트를 차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나는 잠시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하고 점심을 한다.
점심 후 낮잠을 간단히 잔 다음 오후 2시에 다시 붓을 들고 오후 내내 저녁 때까지 줄곧 일을 했다.
상상이 안 갈 것이다”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들고 휠체어에 앉아
종이 오리기 작업을 하였다.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생명의 나무> 작업의 초안을
시미에 레지나 호텔 천장 높은 그의 작업실에서 완성했다.
프랑스 니스(Nice)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언덕지대 방스(Vence)
마티스가 말년에 모든 열정을 쏟은 로사리오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을 만드는 일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길의 끝에서 운명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마티스-
프랑스 남부,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이곳은 1947년 마티스가 77세 때 처음 건축 계획을 세워
1951년 성당이 축성될 때까지 모든 노력과 열정을 기울인 곳이다.
" 나는 이 십자가가
기도하는 자 머리 위의 구름 속 하늘로 향해 있기를 바란다"
-마티스-
로사리오 성당의 인연은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옹의 젊은 간호사 모니크 부르주아는
마티스를 간호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드로잉과 유화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마티스 만년의 걸작 <재즈>의
종이 오리기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1946년 수녀가 되어 자크 마리로 불리게 된 그녀는
방스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마티스와 인연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1947년 말 자크 마리 수녀의 추천으로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레시기에 수사가 마티스에게
방스에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을 알려 왔다. 자크 마리 수녀는 수녀들의 예배당 스테인드글래스를
마티스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티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삶과 예술을
‘건축학적 그림’인 스테인드글래스로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대가의 의지는 열정으로 불 타 올랐다.
성당은 가로 15m에 세로 6m 높이 5m로 ‘ㄱ’자 형의 작은 공간이었다.
마티스는 요한계시록 22장 2절 에 나오는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그 강은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서 일 년에 열두 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을 주제로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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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의 시미즈 호텔 레지나에서 팔십이 넘은 만년의 마티스가
십이지장 암수술을 받고 휠체어에 앉아 종이오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생명의 나무> 작업의 초안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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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의 생활
레지나 호텔의 마티스를 가까이 지켜 볼 수 있었던 자클린 뒤엠은
훗날 자신의 기록인 <선과 그 밖의 것들>에서 마티스의 하루 일과와 계절에 따라 파리와 니스를
오가던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니스 작업실 풍경과 빛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시 (파리에서) 니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레지나 호텔에서 묵을 차례였다.
그 호텔의 로비는 으리으리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고,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이나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박물관 같은 공간을 이루는 다른 방들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고색창연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니스와 방스의 마티스 거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이한 빛,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반쯤 드리운 얇은 커튼에
여과되어 들어오는 그 부드러운 빛은 마치 수도자가 생활하는 그리스 어느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티스의 작업실은 실제로 수도자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방스의 도미니쿠스 수도회 성당의 모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티스의 성당 드로잉 작업은 종이에, 자크 마리 수녀가 마티스가 원하는 녹색 노랑 파랑의 과슈 물감을 칠하면
마티스가 연필로 드로잉하고 그에 맞추어 종이오리기를 한 다음 벽에 풀로 붙여 나가는 방식이었다.
언뜻 보면 마티스가 대가의 노련함으로 쓱쓱 쉽게 잘라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종이를 원화의 의도에 가깝도록 수없이 자르고 덧 부쳐 <생명의 나무>를 완성했다.
그 뿐 아니라 세라믹 타일에 그려진 드로잉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팔십 노대가의 눈으로 그려낸
마티스 최후의 만찬이다. 마치 추사의 절필 봉은사 <판전(板殿)> 편액을 보는 듯하다.
예술 최고의 경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가 보다. 고졸함이 바로 그것이다.
마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린아이가 사물에 다가갈 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서도 세상의 사물로부터 에너지를 길어오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길로 올라가면 마티스가 제작한 지붕과
그 위에 놓여진 십자가 종(bell)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십자가 종 밑으로 마티스가 제작한 특별한 지붕이 있다.
대형 흰색과 파란색으로 종이 자르기를 붙여놓은 듯한 지붕이다.
성당 출입구 '성 가정' 드로잉
전면에 보이는 <성모자상> 아래 <생명의 나무> 스테인드글래스가
아이비 넝쿨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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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으로 펼쳐진 방스의 풍경
언덕 위로 성을 쌓고 도시를 경영한 중세도시의 전형으로 성곽 너머
니스의 지중해가 그림처럼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하얀 타일을 붙인 벽에 검고 진한 선묘(線描)로
입과 코와 눈이 없는 성 도미니쿠스 상이 그려져 있다.
사실 마티스는 로사리오 성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프레스코 작업을 하기에는 그의 기력이
너무나 쇠퇴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제단,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십자가 안치소, 법의 등
로사리오 성당의 모든 것은 마티스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하얀 벽, 하얀 바닥, 하얀 천장이 소박하고 단순하여 경건한 느낌을 준다.
성당의 장식은 마티스의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
색과 드로잉만을 사용하여 완성하고자 하였다.
초록색, 노랑색, 파랑색의 세 가지 색으로 장식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하얀 대리석 위에서 가볍게 일렁이며 예배당에 성스러움을 더해준다.
"이 성당 건물의 주된 목표는 고형의 벽 위에 비치는 빛과
흑백의 색 사이의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티스-
촛대는 마티스가 디자인하고 방스의 장인이 만든 것
스테인드 글라스는 지중해 푸른 바다와 식물, 태양을 표현
제단의 십자가상
성당 후면 - 십자가의 길..(그림에 1에서 14까지 고난의 순서가 표시되어 있다)
꽃밭 속의 성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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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성당은 너무나 단순해 어찌보면 무성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성당 옆의 작은 전시실에 들어서면 마티스가 성당 건축을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미술의 거장 마티스는 저 단순한 그림들을 위해 수백 장 분량의 드로잉을
반복 연습했고, 완성작을 얻기까지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쳤다.
"나는 이 성당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고 그들이 번뇌에서 치유되기를 바란다."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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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성당 제단... <생명의 나무>와 <성 도미니쿠스 초상>과 제단 그리고 십자가 촛대등
모두 마티스가 직접 드로잉하고 디자인한 것들이다. 中/ 성당 후면... 마티스가 드로잉하여 세라믹으로 구운 벽면에 <십자가의 길>과 <성모자상>이
<생명의 나무> 스테인드글래스에서 나온 빛에 환하게 빛난다. 下/<십자가의 길> 드로잉은 어린아이 그림처럼 단순 천진하게 그려져 있다.
대가의 숨결은 평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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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한편에는 축소한 로사리오 예배당의 모습이 있다.
뚜껑을 닫으면, 실제의 모습이 된다.
제의 祭衣 특히 사제의 동작에 따라 예기치 않게도 찬란한 색채조화를 발산하는 미사복은
16세기 이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가장 매력적인 성직복장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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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나무-(성당 동편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
로사리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물고기는 기독교의 상징이자 지중해를 표현
하얀 나무로 조각된 고해실 문
<알아둡시다>
마티스 예술 세계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로제르(로사리오) 소성당은
엄밀하게 말하면 성당이 아니라 경당이다. 프랑스어로 'Chapelle'은 성당보다 작은 규모의
미사 전용 공간, 즉 미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경당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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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로사리오)의 유래
묵주기도(로사리오)의 뜻은 '장미꽃다발' 또는 '장미화관'이라는 뜻이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교도들은 자기자신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쓰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져 신자들은
기도 대신 장미꽃을 봉헌하곤 했다. 특히 박해 당시 콜로세움에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데 합당한 예모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순교자들이 썼던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 가지씩 바쳤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이 죽은자들을 위해 시편 150편을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둥들게 엮어 하나씩 굴리며 기도의 횟수를 세었다고 한다.
이 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 대신 '주님의 기도'를 150번 바치기도 했으며, 수를 셀 때
불편하였기에 열매나 구슬을 150개 노끈이나 가는 줄에 꿰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습들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12세기 삼종기도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성모신심의 영향으로 주님의 기도 대신
성모송으로 대체되어 바치다가 13세기부터는 영광송이 삽입되었다.
또한 이 당시 '알비파' 이단의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자 성모님이 도미니크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이단을 없애는 무기로 묵주를 주셨고, 성인은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알비파 이단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묵주기도'라는 정식명칭이 생겼고, 그후
15세기 부터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 성모신심의 기도가
'매괴회'가 생길 정도로 공식화 된 기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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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로사리오 기도'(라틴어 Rosarium, /이탈리아어 Rosario, /영어 Rosary)라고 부르는
묵주기도를, 중국과 한국 교회에서는 매괴경 이라고 부른다.
서양 꽃인 장미를 중국에서는 매괴 때찔레 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모짜르트 미사 3번 다장조 K.66 '도미니쿠스'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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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Dominic) 또는 도미니쿠스(라틴어: Sanctus Dominicus)
도미니크(Dominic) 또는 도미니쿠스(라틴어: Sanctus Dominicus, 1170년 - 1221년 8월 6일)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자이자 도미니크회의 창설자이다. 본명은 도밍고 데 구스만(스페인어: Domingo de Guzmán)이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8월 8일. 도미니크는 기독교 사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날’을 뜻하는 도메니카(domenica), 즉 일요일이란 단어와 관련이 있다.
미술작품에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회의 하얀 수사복에 검은 망토를 입고 있으며, 이마에는 별이 있고 손에는 백합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후대의 그림에는 그가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설립한 도미니크회의 명칭이 ‘신의 개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미니칸(Domini canes)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개가 입에 횃불을 물고 있기도 한다.
생애
도미니크는 1170년 스페인의 북부 카스티야 지방의 궁핍한 농촌에서 그곳 총독인 펠릭스 데 구스만과 요안나 폰 아자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도미니크가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 요안나는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고, 개가 태어나자마자 온 세상이 불 붙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요안나는 이 꿈을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말로써 세상을 불태우게 될 태몽으로 해석하였다.
후에 그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이마에서 빛나는 달 혹은 별을 보게 된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훌륭한 자랐으며, 7살 때에는 사제였던 숙부한테서 일찌감치
성직 교육을 받았다. 14살에는 교육의 중심지로 유명한 발렌시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10년 간
열심히 문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24살 때에 오스마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203년 남부 프랑스에 부임하여 열의와 웅변으로 알비즈와파의 개종에 힘썼다.
1204년 그는 주교 디에고 데 아제베도와 함께 덴마크 등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도미니크가 툴루즈에서 알비파의 이단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되는 기회였으며,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의 일부가 될 소임, 즉 알비파 신도들을 다시 교회와 화해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설교 수도회를 설립하여 로마 가톨릭 문화의 연구 중심지로 삼고
설교 수도사들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215년 성직자들에게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는 교단을 만들어 1216년 도미니크회라는 명칭으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승인을 받았다.
도미니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율을 받아들이고 다른 규칙들을 추가했다.
도미니크회는 서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220년에 도미니크회의 첫 번째 총회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렸으며
도미니크는 이듬해인 1221년에 사망하였다. 123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한편 도미니크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1210년에 그의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로사리오를 주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널리 전파하도록 지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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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성 도미니크에게 묵주를 주는 마리아
The Virgin Giving the Rosary to Saint Dominic
(목판에서 옮겨진) 캔버스에 유채
206x156, 1630년대
1. 해설
구름 속에 앉아 무릎 위에 서 있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가 땅 위에 서 있는 성 도미니크에게 묵주를 건네고 있다. 그 왼쪽에 서 있는 이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여 방대한 신학 이론의 체계를 수립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오른쪽에는 총주교의 지팡이를 든 세비야의 신앙심 깊은 일꾼 성 이시도르와 가톨릭 교회를 신봉했던 헝가리 왕 성 라디슬라우스가 서있고 그들 사이에는 폴란드 왕 성 블라디슬라브가 무릎을 꿇고 있다. 앞쪽에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그림 주문자로 추정되는 이름 없는 도미니크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성 도미니크의 이마에 빛나는 별은 지혜를 상징한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흰 수사복과 검은 망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책은 설교수도회인 도미니크 교단의 상징이다. 앞 쪽에 이미 묵주를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복을 입고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회원이었던 카타리나는 기도와 회개의 삶을 살았으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헌신했다고 한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1216년 성 도미니크가 설교를 통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수도회이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1210년 성 도미니크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단을 극복할 묵주를 내렸다고 믿는다. 마리아가 도미니크 수도회의 성 도미니크와 성녀 카타리나에게 묵주를 전하는 장면은 가톨릭 선교에 좋은 그림이었다. 1569년 로마 교황 비오5세는 종교 의식에서 묵주기도의 구성과 방법을 표준화했는데 이는 가톨릭 선교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성 도미니크에게 묵주를 주는 마리아」는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서양미술사에서 거장 중의 거장인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 작가로서 대담한 명암 표현과 생동감 있고 관능적인 표현에 능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 플랑드르로 돌아온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대규모 화실을 운영했는데 이곳은 곧 플랑드르 미술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쏟아지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루벤스는 자신의 제자나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독립적인 화가였고 몇 명의 경우에는 반다이크, 요르단스, 스니더르스 등과 같이 이름을 날린 위대한 화가들이었다.
피터 폴 루벤스는 대형 제단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다. 원래 릴 도미니크 수도원 교회 제단 장식화인 이 그림은 1669년에는 판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1630년대쯤에 루벤스가 그의 화실에서 제자들과 함께 완성했다. 이 작품을 도운 제자는 아브라함 판 디펜베이크나 소 에라스뮈스 퀘엘리뉘스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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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포르타 Nicola Porta
로사리오의 성모 Madonna del rosario |
묵주(默珠) 또는 로사리오는 라틴어로 장미 화관을 뜻하는 ‘로사리우스’(Rosarius)[1]에서 유래한 말로, 가장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가톨릭 신심이다. 구슬이나 나무 알 등을 열 개씩 구분하여 다섯 마디로 엮은 환(環)으로 끝에 십자가가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묵주를 이용하여 기도를 하는 신앙 예절은 묵주 기도라고 일컫는다. 넓은 의미에서 묵주와, 묵주를 갖고 소리 내며(또는 조용히) 기도문을 암송하며 묵상하는 행위 모두 로사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고 그다음에 성모송 열 번 암송 그리고 영광송을 한 번 암송하는 식의 순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암송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행적과 관련된 묵상과 신비의 회상이 덧붙인다.
전통적인 15단의 묵주 기도의 신비는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신비는 총 환희의 신비, 영광의 신비, 고통의 신비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200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존의 신비에 빛의 신비를 새로 추가함으로써 묵주 기도는 총 20단의 신비를 지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론에 관한 중점의 일부인 묵주 기도를 강조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와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가 개척하여 확립시킨 ‘성모 신심’이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으로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역사 |
묵주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전통적으로 1214년 프루이유의 한 성당에 있던 성 도미니코 앞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이단인 알비파를 무찌르는 무기로 묵주를 주었다는 전설이 믿어져 오고 있다. 이 성모 환시에는 ‘로사리오의 성모’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다른 설들은 묵주의 점진적이고 계통적인 발전 양상을 암시하고 있으며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초세기의 수사들이 날마다 시편을 150번 외우며 기도하던 중에 이를 본 평신도들이 수사들을 흉내를 내려고 묵주와 비슷하게 구슬을 이용해서 기도하던 것이 습관화되어 오늘날의 묵주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평신도 대부분과 일부 수사들은 글을 읽지 못하여 기도서를 봐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150번 암송하는 것으로 시편 암송을 대신하였으며, 때때로 정확한 계산을 위해 매듭과 함께 구슬 150개를 실로 이은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세 동안 기도 알과 함께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암송할 것을 권하였다는 증거도 있다. 7세기, 성 엘리지오는 ‘마리아의 시편’의 성모송 150번 암송을 할 수 있도록 지인에게 150개 못이 박힌 의자를 선물했다고 기록했다.
묵상하는 동안 성모송 암송을 실행한 것은 카르투지오회의 수사 프로이센의 도미닉(1382-1461)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묵주의 유래와는 상관없이 프랑스, 플랑드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신심을 유포시키는 데 일조한 도미니코회 사제인 복자 로체의 알라노의 설교에 의해 1460년과 그가 선종한 1475년 사이에 크게 활성화되었다.
16세기 초에서 20세기까지 묵주 기도의 기본 구조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15단씩 신비를 바치기 알맞게 열다섯 개의 묵주 알이 있었다. 20세기에는 묵주 기도 매 단이 끝날 때마다 파티마의 기도를 추가하는 것이 보편적이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2002년에 빛의 신비를 제정하기까지 달리 어떠한 변경도 없었다.
17세기부터 묵주는 가톨릭교회의 마리아를 다룬 성 미술에서 주요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대개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작품에서 많이 나타났다. 무릴료의 작품들인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성화와 밀라노의 산 나자로 마조레 성당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성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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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성모자와 묵주Virgin and Child with a Rosary 1650-55 / Oil on canvas / 164 x 110 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Museo del Prado,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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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에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회의 하얀 수사복에 검은 망토를 입고 있으며,
이마에는 별이 있고 손에는 백합가지와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벨리니 지오반니 Bellini Giovanni
홀리 도미니쿠스 Holy Dominik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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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그림에는 도미니크가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좌측 하단)
그가 설립한 도미니크회의 명칭이 ‘신의 개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미니칸(Domini canes)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개가 입에 횃불을 물고 있기도 한다.
이 그림에도 횃불을 입에 문 개가 그려져 있다. 도미니크가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 요안나는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고,
개가 태어나자마자 온 세상이 불 붙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요안나는 이 꿈을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말로써 세상을 불태우게 될 태몽으로 해석하였다.
후에 그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이마에서 빛나는 달 혹은 별을 보게 된다.
프라 안젤리코 作
마돈나와 아기예수, 성 도미니크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1424~30
프레스코화 / 에르미에따쥐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프라 안젤리코 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성 도미니크 1441~1442년 경
프레스코화 / 340X206cm / 산 마르코 미술간 / 피렌체
도미니크는 1221,8,6, 이탈리아 볼로냐의 수도회에서 선종했으니 (1234,성인으로 시성)
현 볼로냐에 있는 바실리카 디 산 도메니코가 그곳이다.
1220년에 열린 도미니크회의 첫 총회도 볼로냐에서 열렸으니, 명실공히
볼로냐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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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심더 항상고생하시는 베로니카자매님께 주님의 은총이,,,,,,,,아ㅡㅡㅡ멘
덕분에 삶니다. 모세부부님은 주님 안의 한 형제 자매라는 것이 바로 '기쁨' 임을 생활로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남은 여생도 함께 나누며 살게 될 것이라는 행복한 예감이 듭니다 ^^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
은총이 가득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언니 조은 내용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성령이 가득해서 디자인 하고 건축하고 그림을 그리고... 했을 그분들의 손길이 상상 됩니다.
스텔라자매님은 작품을 보자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 은총이 가득하신 주님'이라고 노래 하시는 군요.
자매님은 분명 남다른 눈과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도미니크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성모마리아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간구하였다" - 위 글에서-
방스의 로사리오 경당을 지은 마티스와 성모마리아에게 로사리오기도를 전파하도록 지시를 받은 도미니크와
해평성당에 다니는 우리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축복 안에 우리가 있다니요.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통해 늘 고백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