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8년 소설가 복거일씨는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에서 세계화 시대의 생존전략으로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자고 주장했다. 작년 5월에는 제주도를 영어 공용어화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여당의 움직임을 두고 뜨거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찬반의견을 들어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무기화하자
김경일 _ 상명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나는 오랑캐가 그립다》 씀
영어 공용어화는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회적인 인식이 모아지고 그 다음 전문가들의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서류에서 한글을 찾아볼 수 없다. 문서 뿐 아니라 호칭이나 그 밖에 사용되는 표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도 단순히 취업을 위한 영어가 아닌, 학생들이 평소 영어를 생활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영어 공용어화는 기업을 시작으로 대학, 그리고 지역으로 문제점들을 보완하며 확산해 나가야 한다.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한 이유를 아메리칸 스탠다드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에서 다시 영어로 바꾸는 이중 부담을 덜기 위해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어 공용화가 필요한 이유를 동양에서 찾아봤다. 과거 일본은 영어 없이 일본어만으로도 세계무대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결국 미국 정보가 제 때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경기 침체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중국은 WTO 가입시 정책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간다’였다. 상하이의 모든 공무원들에게 영어는 물론 ‘국제 감각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대학에서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의 비율을 실제적으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문화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정치, 사회 등의 분야는 미국으로부터 배우며 미국과 같이 가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중국인구의 5%가 영어를 잘 구사한다고 해도 그 수는 남한인구를 넘는다. 외국계 기업들이 동북아에 투자할 때 언어적 편리함은 중국의 강점이자 문화적 인프라로 자리잡을 것이다. 한국도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처럼 문화적인 요인에 의한 경기침체를 겪고 중국에게 추월 당하고 만다.
물론 이를 반대하는 의견들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IT산업 등 과학, 기술 분야에서 첨단 산업을 한국어로 접근해 제대로 전해줄 수 있을까? 정체성도 중요하고 교육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전략이 필요하다. 영어를 무기화하면 오히려 한글을 살릴 수 있다. 영어를 끌어안고도 살아남는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 될 때 비로소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분명히 미래 세대의 삶을 규정할 중요한 도구이다. 따라서 이 도구를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골고루 나누어 줄 방법, 즉 영어 공용어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민족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
김세중 _ 국립국어연구원 어문자료연구부장
한국에서 영어 공용어화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선 공용어라는 개념 자체에 우리 사회가 혼돈을 겪고 있다. 영어를 외국어가 아닌 공용어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지금의 공용어론은 공용어의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나 검토 없이 막연하게 제기돼 왔다. 단일민족국가인 한국에서는 영어 공용어화는 개념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공용어는 다민족 국가처럼 언어가 둘 이상인 나라에서 필요한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에서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영어 공용어화가 된다면 예컨대 관공서나 법정, 금융기관에서 영어만으로도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며 각급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영어로 수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각 영역에서 영어 사용자가 아무 불편 없이 활동할 수 있어야한다. 외국어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전 국민이 다 할 필요는 없고 그러기도 불가능하다.
영어 공용어화는 적지않은 문제점들은 가져올 것이다. 언어에는 그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와 역사가 담겨있다. 영어 공용어화는 선택의 문제이고 자손들에게 영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언어로써 이어 내려가는 민족정신을 해체하자는 말과 같다. 한국어가 없어지면 한국도 없어진다. 우리말을 쇠퇴의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논의를 우리는 지금 하고 있다. 네덜란드나 스웨덴은 영어공용어화를 하지 않고도 외국어로서 영어를 잘 구사한다. 꼭 필요한 부분에서 영어를 외국어로서 능숙하게 말하는 것은 필요할지 몰라도 공용어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시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영어공용어화가 이루어질 경우 영어가 일부 중상류층이나 지식층만을 위한 것이 되어 그 밖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낙오자로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앞으로 영어 공용어화와 관련된 논의는 명확한 개념을 알고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영어 공용어화가 꽤 높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영어를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잘하자는 정도로, 공용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력한 외국어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영어는 우리에게 계속 외국어로 남아 있을 때 그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이로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나 상황에서 영어를 사용하자는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공용어화는 불필요하다.
나도 한마디
박상욱 _ 연세대 경영 3
영어 공용어화의 역기능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시도해 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열기에 비해 영어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또 경제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경제규모에 비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홍콩의 경우 영어 공용어화가 외국계 기업들의 경제적 투자 뿐 아니라 문화적 진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외교와 비즈니스 현장에서 영어에 능숙한 사람이 따로 동행하거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해도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실무자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국내에서 일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데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백윤주 _ 이화여대 독문 4
영어 공용어화가 가져올 이점들에 대해 과장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영어 공용어화가 된다고 해서 영어를 국어만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늘까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을 통해 영어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 어려운데도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배운 영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창한 대화에 쓰기보다는 입사시험을 보는 데 쓰고 있다. 또 영어 공용어화가 됐을 때 모든 국민에게 영어 교육을 시행하는 일은 예산이나 방법 등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모두가 외국어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회적 낭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영어 공용어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