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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청춘의 꿈을 계속 간직하라. 지금 아이처럼 미쳐라.
우리 어른들 대부분은 여러 가지로 아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가면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과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쉽게 느껴질 테지만, 아이들은 지금 하는 일에 완전히 빠진 채로 싸우고 달리고 웃고 서로 놀려대면서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문제는 당신에게 그렇듯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현실적인 문제다. 가령 아이들은 곧 교실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또한 시험준비도 해야 하고 성적도 올려야 하며 친구와 풀어야 할 문제가 있기도 하며 닦달해대는 선생님들을 견뎌야 한다. 그 외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많고 많은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에 대해 고민하길 보류하며 홀가분해지는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며 노는 것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요컨대, 아이들은 아직은 현재를 사는 기술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이 그런 기술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면서 단지 당신이 현재 어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기술을 다시 되찾을 수 없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운동장을 지나가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릴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혹은 이 말이 아니라도 다른 명언들을 떠올리면서 재미있게 놀기를 체념하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변명을 갖다 붙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질투를 넘어 원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오는 부모들을 수년 동안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데 대체로 부모들은 레스토랑을 아이들이 아이답게 행동하는 곳이 아니라 ‘어른처럼 행동’해야 하는 곳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십중팔구는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전에 아이들에게 ‘애처럼 굴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해두었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이것은 개를 데리고 공원에 가면서 개에게 개처럼 굴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당연히 아무 효과도 없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느라 바빠서 식사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그 냅킨 도로 무릎 위에다 대, 부스럭대지 마! 작게 얘기해. 다른 사람들 신경쓰게 좀 하지 마. 그 시금치 안 먹으면 과자도 뭐고 없을 줄 알아. 고기를 한두 조각 썬 다음에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포크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라니까. 도대체 몇 번이나 얘기해줘야 알겠니?” 이렇게 쉴 새 없이 꾸짖다 보면 아이들이 더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일부러 ‘말을 안 듣도록’ 부추기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다. 아무리 말을 잘 듣는 아이라도 어차피 한두 가지 정도는 잘 따르지 못하기 마련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다루면서 로봇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다보면, 급기야 아이들은 더 고분고분 따르지만은 않으면서 징그럽게 “말을 안 듣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으레 부모들은 냅킨을 테이블에 내팽개치고는 아이들을 끌고 레스토랑을 나가버린다. 어쩌면 이때 몇 대 때리기도 하거나 다들 식사를 다 끝내지 못한 상황일 수도 있다. 부모들은 이처럼 자신들은 물론 완벽한 애 어른들이 되어주길 강요했던 아이들을 큰 구경거리로 만드는 와중에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곤 한다. “널 데리고는 다시 레스토랑에 안 올 줄 알아!”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속으로 “잘됐네요. 나도 레스토랑은 정말 질색이라고요!”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반면 음식점에서 아이들을 비교적 덜 엄격하게 다루는 부모들도 있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이 밥을 ‘께적거리는’ 모습을 보면, 다시 말해 아이들이 먹을 만큼 먹어서 더 이상 가만히 붙잡아두기 힘들 것 같아지면, 함부로 나대지 않는 선에서 돌아다니거나 화장실에 갔다 오는 등의 정도는 봐준다. 덕분에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허락 받은 선에 한해 레스토랑을 탐험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게 따라붙기 마련인 온갖 규율들을 풀어주면, 아이들은 상냥한 손님들에게 말을 붙이기도 하고 친절한 종업원들에게는 주제넘게 칭찬하며 주방을 슬그머니 들여다보고 하면서 레스토랑이 굉장히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한편 이런 부모들은 자신들도 느긋하게 앉아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음식도 실컷 배불리 먹을 수 있다. 물론 때로는 건성으로 얘기를 나누면서 눈은 여전히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주시하며 누굴 성가시게 굴지나 않는지 살피곤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행동이 미숙한 것 같아(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은 세상에 찌든 것 같아) 마음에 좀 걸리더라도, 아이들을 항상 어른처럼 행동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체념한다.
부모들이 엄격함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면,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될 만큼 마구 뛰어다니도록 방치하지야 않겠지만 레스토랑에서도 마치 자신들의 주방에서 디너파티를 여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아이들을 평상시대로, 즉 아이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식사시의 규칙이 갑자기 더 엄해지지도 않으며 평상시라면 식탁에서 일어나도 되는 시간인데 느닷없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지도 않는다. 부모가 이런 태도를 보이면 대체로 아이들도 얌전하게 군다. 아니면 최소한 집에서 하던 정도의 선에서 얌전하게 굴며, 사실 이것이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수준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한에서 최선의 예의를 지키려고 주의한다. 통로로 나가더라도 어떤 어른들이 다가가도 괜찮고, 어떤 어른들이 근처에도 가지 않아야 할 사람인지를 아주 정확히 감지해낸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잘 받아주는 유형이라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다가도 “꼬마야, 안녕! 누구랑 왔어? 잠깐 이리 와볼래?” 라고 선뜻 말을 건넬 만한 어른을 알아본다. 이것은 집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다른 바 없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지만, 아이들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아이들이 가까이 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무오류지대형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들을 어떠한 상황에서든 ‘어른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해도 무방하다는 주의를 취하면서 그들 자신이 이런 주의를 취하지 않을 경우엔 아이들이 아니고 그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식의 권위주의적 개념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무오류지대형 부모라면 아이들이 자신들이 아는 한 최선의 일을 하고 있음을, 즉 아이답게 처신하고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른처럼 행동하길 기대하는 어른들이라면 어른이면서도 다시 아이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생각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무오류지대형 인간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인식할 테지만, 어른들이 아이를 통해 배우면서 자신도 아이 같은 속성들(가령 이것저것 캐묻기를 좋아할 줄 알기, 새로운 친구들 사귀기, 따분한 대화 피하기, 과식이나 유독성분의 과잉섭취 파하기 등)을 좀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외식이 휠씬 더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사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아이 같은 본능들을 적절히 쫓는 무오류지대형 인간이 바로 무한계형 인간이다. 레스토랑에 가면 식사나 아이들이나 둘 다에 완전히 몰두하면서 그 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모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집에서 하던 것과 똑같이 테이블 앞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부모들이나 가까이 앉은 동석자들과 장난 섞인 말을 나눈다. 아이들이 먹을 만큼 먹고 돌아다니고 싶어 하면 부모들을 뒤에서 따라다니면서 원래 아이들을 좋아해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도 한다. 그러다가 상대만 잘 만나면 여종업원을 따라 주방을 잠깐 보고 나올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이 되도록 기꺼이 놔두면 본인 스스로도 기쁜 마음으로 잠시 동안 다시 아이로 돌아가곤 한다.
당신 내면에 깃들어 있는 아이가 그립다면 그 아이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인식함으로써 다시 그 아이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소통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그 아이를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당신 자신의 마음뿐이다.
아이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과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생각해보라.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하고 가장 생기발랄한 사람들 부류에 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행복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가능함을 망각하지 않으며, 내면의 아이가 맘껏 활개를 펴게 해주는 요령에 관한 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잘 알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으며, 때때로 유년기 때처럼 공상에 폭 빠지기도 한다. ‘현실적인 삶’이란 일만 하고 놀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장과 놀이를 최대한 병행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것 임도 잘 안다. 삶에 대해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호기심을 간직하고 있어서, 훌륭한 어른이 되는 요령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내면의 아이를 존중하고 장려하기도 한다. 나는 바로 이런 이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최상의 귀감이며, 무한계형 인간이라고 불려 마땅한 어른들이라고 본다.
아이들을 좋아하는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모든 아이들, 다시 말해 당신의 아이들과 타인의 아이들, 그리고 특히 당신 내면에 상존하는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삶의 무한한 가능성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근처에 있으면 성가시거나 짜증나거나, 심지어 시샘이 나거나 하는가?
주변에 보면 아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무한한 에너지를 주체 못해 아이들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단지 이웃 아이들이 자신의 집 뒷마당이나 잔디에 들어오지 못하게 내쫓기 위해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있는 노인들도 있다. 또한 차마 아이들을 데려가지 못할 만큼 너무 세심하고 정교하게 집을 꾸며놓는 젊은 부부들이나, 말썽꾸러기도 아닌 보통의 아이지만 뭔가 귀중한 물건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려고 심하게 압박해야 할 만큼 완고한 집주인들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곧잘 한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위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골라서 부수는 것이야.” “아이들의 문제는 음량조절 능력이 없다는 점이야.” 이 밖에도 자신들이 아이들보다 얼마나 우월한가를 강조하는 신랄한 말들을 내뱉곤 한다. 코미디언 W.C. 필즈는 아이들을 질색하는 이들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좋아서 미칠 지경이죠” 라고 답한다고 풍자한 바 있는데, 그야말로 정곡을 콕 짚은 표현인 것 같다.
반면에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꼭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금방 친밀감을 갖게 되는 편이라, 즉시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최대한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한다. 노인들 중에는 현관에 나와 앉아 있다가 학교에 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작은 노크 소리에도 응해주며, 정원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저게 토마토 나무란다. 토마토가 뭔지는 알지? 자, 저기 새싹들 보이지. 한 달 정도 더 지나면 저 새싹들이 토마토로 변할 게다!”라고 일러주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젊은 부부들 중에도 “아이들도 데려오세요! 귀한 물건들은 아이들 손이 안 닿게 치워두면 되요. 그 정도야 10분이면 더 치울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지니를 못 본 지도 벌써 여섯 달인데, 그 동안 정말 많이 컸네요!”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의 지인들이 어떤 편인지 검토해보는 한편 당신 자신이 아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도 살펴보라. 그러면 아이들을 좋아하고 즐겁게 어울리면서 ‘아이들과 잘 지내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자신과도 가장 사이 좋게 지내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지독히 심술쟁이고 불만 가득하며 만사에 비관적인 이들이기 십상이며, 대체로 당신이 아는 이들 가운데 불행한 편에 속할 것이다.
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얼마간은 신경증적이고 불행한 것이 다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는 ‘병적’ 인간 심리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나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행복하고 튼튼하고 건강하며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우리는 모두 완벽한 정신건강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단지 문화적 압력을 통해 일상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하고 불행한 것이 정상이라는 난센스를 실제로 믿게 됨으로써 불행하고 병적인 상태로 전락하는 법을 익히게 되는 것 같다.
행복은 본능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취해보면, 현재 알고 지내는(혹은 지금까지 만나봤던) 사람들 중에 비참하고 신경증적이며 우울하고 문제가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단지 불행하고 신경증적이 되는 법을 배울 기회가 아직 없어서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상태의 아이들을 유심히 보면서 좀 더 아이들 같아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오류지대를 보이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무오류지대형 및 무한계형 삶을 회복할 기회도 얻기 전에 그런 삶의 영역으로부터 단절 당하는 셈이다. 또한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어린아이들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아직 불행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매뉴얼을 참고하거나 전문가와 상의해보지 않고서 현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본능과 충동에만 의존한 채로 자신들이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바대로 행동한다. 한마디로 가정 내에서나 학교에서 그리고 TV를 비롯해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보게 되는 ‘성인’의 신경증적인 모델의 영향에 들지 않은 상태라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영향에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까지 아이들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인간 무리 가운데 가장 전적으로 발전하고 최상의 기능을 발휘하는 축에 속하며, 무한계형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방면으로 구현하고 있다. 바라건대 나이와 경험을 막론하고 독자 여러분 모두가 다음을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즉 당신 안에는 아이가 살고 있고 그 아이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탈출할 날만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이 그 아이나 다른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힘들어지는 쪽은 당신이라는 사실.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그 아이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 아이를 유산시킬 수 없다. 양자로 보낼 수도 없다. 물론 방치해둘 수는 있다. 아이가 울 때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서 놀라고 내보내주지도 않으며, ‘천진난만한’ 질문들(“하늘은 왜 파래요? 저 아래쪽으로 가면 뭐가 있어요?”)에 대답을 안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두 살짜리 아이를 집에 혼자 놔두고 술집에 가버린 부모 같은 아동유기죄를 저지르면서 내심 그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당신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니면 더 적절히 말해 아이들이 하는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편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어른들 역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기는커녕 당신 자신이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협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상대가 어떤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때, 당신에게 가십거리를 제공해줄 법한 어떤 불행이나 취약점이 있을 때, 상대의 단점을 이용해 우월감에 우쭐할 수 있을 때라면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지만, 상대가 전인적인 인간으로서 당신보다 열등한 요소를 찾기 힘들어 위협감을 준다면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동유기자들’이 아이 같은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얻고자 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은 ‘무책임한’ 사람, ‘미숙한’ 사람, 혹은 심지어 ‘지나치게 희희낙락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파고들자면, 건강한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아이 같은 특성들에 대한 이런 멸시는 잘난 자부심을 위한 질투 때문이다. 무한계형 어른 특유의 ‘분별없는’ 쾌활함, 자발성, 웃고 즐기는 능력 등의 ‘아이 같은’ 특성들은 사실 모든 어른들이 자신들도 가지고 싶어하는 것에 해당하지만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결과 아이들이나 아이 같은 어른들로부터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더 쉬운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파괴적인 아이유기 관행이 사회 내에서 영구히 돌고 돈다. 아이 같은 모습에 대해 지속적으로 멸시를 받게 되면 항상 ‘성숙하게’ 행동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부모가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지. 언제 어른이 되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철 좀 들어라!” 같은 말로 끊임없이 아이를 나무라면 이것은 어린 자식에게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를 버리도록 가르치는 격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강요되는 ‘어른스러운’ 태도들은 권위주의적 태도와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똑같이 그런 권위주의적 태도와 행동을 낳게 되어, 아이는 지나치게 억제적이고 완고하며 경직되고 비판적이며 유머가 없는, 즉 아이답지 않은 아이가 된다. 이로써 아이는 계속 어린아이로 머물러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자신의 천부적인 열망을 경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인위적인 성숙함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나는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말을 들어왔다. “kabbu, 너는 언제 어른이 될래. 아직도 애 같구나.” “kabbu, 너 미쳤구나. 나이에 맞게 좀 행동하면 안 되겠니? 그렇게 많이 배우고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분별이 없니? 이렇게 중요한 일을 놔두고 애들이랑 희희낙낙 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구나!”
내가 ‘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 너무 유치하다는 말을 계속 듣게 되는 한, 그것은 내가 정말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아이가 되는 기쁨을 누린다. 나는 아이들 곁에 있기에 좋아한다. 어떤 아이든, 그리고 내 기분이 어떠하든 간에 마찬가지다. 어른들로 꽉 찬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 속에서도 언제나 아이나 동물부터 찾아볼 것이다. 나는 장난치고 놀며 ‘푹 빠져’ 탐구하는 등의 어린아이 특유의 행동을 사랑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를 분석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런 취향을 지니게 된 이유를 대라면 본능적인 것이라는 답변에는 해줄 수 없지만, 그로 인해 내가 휠씬 더 신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아주 정직하고 자유분방하며, 누군가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려는 욕구에 얽매이지 않으며, 잘난 체하거나 남보다 우월한 척하려 들지 않으면서 거리낌 없이 놀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바로 이런 모습 속에서 아이들이 어느 무더운 날의 차가운 우물물과 같다고 느낀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더라도, 내 도움으로 좀 더 아이 같아지게 되었던 여러 환자들이나 독자들, 지인들 모두가 그 덕분에 자부심과 삶의 성취도가 높아졌는데,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은 당신 내면에 살고 있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내 안의 아이를 찾아라.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 그리고 아이들을 깔볼 때 흔히 쓰는 방법은 ‘유치하다’고 폄하하는 것이다.
유치하다는 말과 아이 같다는 말은 때때로 서로 대체 가능한 말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별개의 말이다. 나는 유치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 하나는 아이가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의미로서 조금도 나쁠 것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또 하나는 어른이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의미로서 오래 전부터 성장이 멈춰 당연히 당사자나 타인들에게나 이로울 것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어른에게 적용할 경우엔 ‘유치하다’는 말과 ‘아이 같다’는 말이 동의어가 아니라 반대말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다는 말의 본질적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주입시키려 하는 어른스러움의 기준에 대한 이상하고도 권위적인 개념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 근거도 없이 타인을 불신하도록 유도하는 권위주의적 편집증을 키우지 않는 맥락에서 견줄 때 사람을 잘 믿는 것이며, 남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꾸밈이 없는 것, 즉 솔직하고 ‘순수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더 어린아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기를 단념해야 한다는 식의 제멋대로의 생각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아이가 되라는 것은 유치해지거나 조금도 책임감을 갖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아가 완전히 통합된 사람은 어른이면서 동시에 아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되려면 의지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유년기로 돌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특히 ‘의지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고 어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은 채로 유년기로 돌아갔다간 그야말로 유치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이 같은 생활로 의지적이고 긍정적으로 복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저 조금 느슨해지고, 때때로 어리석은 모습도 보이고, 웃고 농담하면서 유머감각을 키우며, 뭔가에 미칠 만큼 푹 빠져 놀 줄 알면 된다. 놀고 즐길 때는 어른스러움의 탈을 내던지는 한편 언제나 근엄하고 규율 바르며 진지하고 위엄 있는 모습만 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면 된다. 세상과 세상만물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지각하며 흥분에 들뜨곤 하던 본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장엄한 우주에 대해 경외심과 경탄의 마음을 품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아이 같은 극단적인 호기심에 탐닉해서 호기심을 따라가면 끝없는 발견의 세계가 펼쳐짐을 깨달으면 된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풍티는 내가 뜻하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에 대해 그 본질에 꼭 들어맞는 별칭을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는 이것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사고방식을 일으키는 근원적 정신상태라고 여겼다. 나 역시 같은 의견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내 경우엔 어린아이 같은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을 무엇보다도 단순한 재미로서 여긴다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다시 아이가 되고 싶긴 하지. 하지만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잖아.” 현재의 ‘어른으로서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야 다시 아이가 되어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하지만 먹여 살려야 할 가족도 있고 살펴야 할 책무들도 부지기수야. 재정 문제와 그 밖의 갖가지 문제들은 또 어떻고. 그러니 아이가 될 여유가 어디 있어. 꿈 같은 얘기라고.” 이런 식으로 주장을 펼치는 것은 당신의 온갖 문제들을 늘 삶의 변명거리로 만들 뿐이다. 당신이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책무 가운데 가장 막중한 책무 중 하나는, 좀 더 아이 같아지는 것이다! 아이인 동시에 어른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면, 당신 마음속에서 인위적으로 아이와 어른을 분리시키도록 조장해온 이분법적이고 권위적인 사고 패턴을 극복하고 전체론적 사고를 취해 원래 아이와 어른이 하나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모든 일상적인 직무들 속에서 좌절감이 아닌 즐거움을 맛보게 될 수 있다. 또한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보다 직접적이면서도 덜 심각하고 덜 음울한 태도로 착수할 수 있으며,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모든 책무들에 더 재미있게 임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어른’이 되어야 하고 매사에 엄숙하고 심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옹호한다면 당신 문제들은 언제나 미결 상태로 남은 채 점점 더 쌓여만 갈 것이다.
현재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어른이 되어버려서 ‘성숙하고’ 위엄을 갖춘다는 미명하에 언제나 아이같이 잘 놀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고 있다면, 창의성을 발휘하고 사회적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궁극적으로 더 뛰어난 문제 해결사가 될 수 있는데도 그런 능력을 잃어버렸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해온 그런 인위적인 ‘어른스러움’을 어느 정도 버리려는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특히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은 욕구충족을 뒤로 미루는 습관과 정규교육으로 받는 영향들이 될 것이다.
오늘의 꽃을 보라.
대학 신입생들이 ‘아동심리학’을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은, 아이 때는 아직 욕구충족을 뒤로 미루는 법을 배우지 못하지만 어른이 되면 이런 소중한 기술을 익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전 세계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는데, 아이에게 오늘 막대사탕 하나를 먹겠느냐 아니면 내일 막대사탕 세 개를 먹겠느냐고 물으면 항상 지금 막대사탕 하나를 먹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로써 수 세대에 걸쳐 심리학 기초를 배웠던 학생들은 자신들이라면 내일 막대사탕 세 개를 먹기로 택하는 훌륭하고 성숙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므로(이것은 대다수 어른들의 경우엔, 말 그대로 평생 막대사탕을 먹어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신들이 아이들보다 얼마나 우월한가를 느끼며 ‘졸업’했다. 말하자면 ‘아동심리학’의 이런 유치한 개념이 무수한 사람들을 그들 내면의 어린아이 같은 자신과 이간시켜왔다.
임상의로 일하던 수년 동안, 나는 여러 사회복지사, 교내 상담사, 심리학자, 교사들로부터 ‘정서장애’나 ‘분열’을 겪고 있는 여러 아이들의 진찰을 의뢰 받았다. 그런데 선의에서 비롯된 그 진찰의뢰서에는 어김없이 ‘욕구충족을 미루는’ 것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공식쯤으로 간주하는 글들이 담기곤 했다. “조니는 모든 물건을 너무 경솔하게 다루지 않고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이 아이의 기본적인 문제는 욕구충족을 뒤로 미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바로 그때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고 많은 불행한 어른들과 차별화시켜 주는 그런 자질을 제거할 수 있게 가르쳐주라고 의뢰하는 셈이었다.
‘욕구충족을 미루도록 주입시켜’달라며 진찰 의뢰가 들어온 이런 아이들을 만나보면 예견한 바대로 전통적인 ‘성숙도’의 기준에 의거할 때, 즉 화장을 한다거나 뽕 넣은 브래지어를 찬다거나 뛰어다니지 않는 등의 기준에 의거할 때 또래 집단에서 ‘뒤처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장난꾸러기였고 ‘그 반의 까불이’였으며 몇 시간을 계속해서 ‘어른들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또래 아이들 중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아이들로 보였으며, 더러는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가장 성숙한 아이로 보이기도 했다. 추측하건대, 그런 아이들은 선생님이 매를 들더라도 매번 순순히 복종하고 수업에 집중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또한 선생님이 등을 돌리면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리거나 다른 아이들과 쪽지를 주고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그 아이들은 공부를 가장 잘하는 축에 들고 반에서 ‘제일 영리한’ 학생들이기도 했다. 학업과 관련해서는, 학업을 성가신 일처럼 받아들이며 어른들이 직장 일에 대해 투덜댈 때 들은 그대로 공부에 대해서도 질질 끌고 투덜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에 도전하듯 접근함으로써 더 ‘성숙한’ 또래들은 상대도 안 될 만큼의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두 시간을 낑낑대며 해온 숙제를 주변이 어수선한 학교 계단에 앉아서 수업 시작 15분 전에 뚝딱 해내곤 하여 다른 아이들을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시험을 치를 때도 금세 답을 다 쓰고 나서 답을 제대로 잘 썼는지 확인까지 하고는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시험지에 매달려 있을 때 연필을 똑똑 두드리면서 앉아 있거나 종이비행기를 접기도 했는데, 그러면 주위에서는 이런 식의 태도를 두고 ‘과시’라는 말을 붙여서 ‘미숙하다’는 말로 돌려서 표현했다.
아이들 삶의 불꽃을 꺼뜨려주길 원하던 경직된 어른들의 진찰 의뢰에 따라 내 진료실을 찾아온 아이들을 나는 최대한 존중하며 대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 배움을 얻는 한편 그 아이들이 즐거움을 영원히 미루기보다는 현재 삶을 즐기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도록 돕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욕구충족을 미루는’ 일은 굉장한 난센스라고, 삶 전체를 미리 계획을 짜두는 바람에 마침내 계획들이 실현되어도 즐길 줄 모르는 어른들이 피워 올린 연막에 불과하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강박적으로 미래화에 매달리는 ‘어른’ 신드롬이 낳는 극단적인 이상화와 계획수립의 악순환을 피하게 해주려고 애썼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심한 갈등에 빠져 있었고 정말로 부모, 또래친구들, 선생님들을 비롯한 그 밖의 온갖 권위자들의 비난에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가능성은 줄이면서 어린아이 같은 속성들을 지키게 해줄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다음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생의 아이를 대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의 전형적인 사례다.
필자: 책 읽기를 좋아하니?
조니: 조금요. 모험소설이나 개척 이야기를 다룬 책을 좋아해요. 아주 좋아하는 작가도 몇 명 있어요…….
필자: 수업이 지루해질 때 종이비행기를 접는 대신 무릎 위에 그런 책들을 펴놓고 읽는 건 어떨까?
조니: 저도 그러고 싶지만 선생님이 절대 봐주지 않으실 거예요.
필자: 그건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될까 봐 염려되어서거나, 아니면 선생님이 너를 호명했을 때 네가 선생님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모를 것 같아서겠지?
조니: 모르겠어요. 어쨌든 선생님은 봐주지 않으실 거예요.
이어서 다음은 담당 교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필자: 조니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수업시간을 대체로 지루해하는 것뿐입니다. 욕구충족을 미루도록 강요하려 하지 말고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게 해줘 보세요. 조니가 수업에 별 흥미가 없을 때는 그 아이가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게 해주세요.
담당교사: 그럴 순 없어요. 좋지 않은 본보기가 될 거예요. 얼마 후에 다른 아이들까지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들도 책을 읽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조니만 특별한 경우로 봐주면 특혜를 줄 수는 없잖습니까.
필자: 하지만 의뢰서를 보니, 조니는 계속해서 수업을 방해하고 장난을 치고 다른 아이를 호명할 틈도 없게 질문에 큰 소리로 답한다고 되어 있던데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지금보다 더 수업에 지장을 줄거라 고 생각하십니까?
담당교사: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계속 그 아이를 주시해야 하기 때문에 조니 책상은 교실 맨 앞에 있어서 반 아이들 전부가 그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요.
필자: 그러면 책상을 교실 뒤로 옮기세요. 그리고 조니에게 지루해질 때만 책을 읽겠다는 것과, 조니가 선생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선생님도 조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두세요.
담당교사: 하지만 제가 호명해도 조니는 제가 무엇을 질문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러다간 그앤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교사로서의 제 임무를…….
필자: 제가 보니까 조니는 지난번 성적표에서 모두 A와 B를 받았고, ‘낮은 평점’은 자제력과 수업 태도뿐이던데요.
담당교사: 맞습니다. 그애는 집중만 하면 공부를 아주 잘하지만 자신을 통제할 줄 모릅니다.
필자: 사실 그 아이의 문제 중 하나는, 선생님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답을 다 알고 있는 터라 다른 아이들이 대답하기까지 참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불쑥 답을 말해버리는 거죠.
담당교사: 그렇긴 해요. 그 과시하는 버릇은 구제불능이에요.
필자: 그앤 구제불능이 아닙니다. 교실 뒤로 보내서 원할 때 책을 읽게 해주시고 책을 읽고 있을 때는 호명을 하지 마세요! 정 호명을 하셔야겠다 면 아이가 고개를 들고 “네?”라고 말할 때 질문을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선생님이라면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전부 수업시간 중 절반은 책상 밑에다 소설책을 숨기고 읽으면서도 A와 B를 받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러라고 건투를 빌겠어요.
이런 기법들은 성공할 가능성을 열어두면 대체로 큰 효과를 나타내지만, 그러려면 반드시 권위자들에게 인정을 받아내야 할 부분이 있다. 즉 ‘조니 같은 아이들의 문제’는 욕구충족을 미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일종의 미래적 사고에 중독시키려 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여기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니, 바로 이 부분을 인정받아야 한다. 실제로 부모, 교사, 사회복지사들이 기꺼이 실험을 해보기로 결정했을 경우엔 조니 같은 아이들은 십중팔구 그 동안 집에서 책을 읽던 것보다 학교에서 책을 더 많이 읽으면서 더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고 수업을 휠씬 덜 방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등히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로운 삶을 갖게 되었다.
이번엔 조니의 ‘욕구충족을 이루지 못하는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사실 상당수 어른들은 아이들을 불완전한 인간으로 보면서 아직 진정한 인간(어른)이 되어가는 도중에 있는 ‘수습생’쯤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그 주요인이다.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사고로 인해 아이들까지도 자신들이 불완전하며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있을 뿐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칫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다. 따라서 아이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이전보다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껴질 경우 좀 더 앞날을 기약하며 자신이 마침내 삶을 즐길 수 있는 시기를 저 멀리 30대쯤으로 잡게 된다. 그러나 또 30대에 이르면 ‘완전함에 이르는 나이’는 또다시 40대가 되고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 결국 노인이 되면 자신의 삶이 다 어디로 가버렸고, 어째서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그 환상적인 느낌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경악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삶의 분투만 있을 뿐 도달점이 없는 과정의 반복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해법은 우리가 나아가 사회적 기대치에 상관 없이 언제나 완벽하고 전인적인 인간임을 인정하는 길뿐이다. 언제나 우리 자신을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로 인정하고, 현재의 순간을 한껏 살아가고 즐길 수 있는 시간으로 인정해야 한다. 단지 당신 안의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기만 해보라. 그러면 욕구충족(만족감)을 미루는 속임수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썼다. “지성을 기르기 시작하기 전의 소년보다 매력적인 모습이 또 있을까? 그 시기의 소년을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아름답다. 젠체하지 않으며 예술과 문학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은 자신의 삶을 즐기고 남들은 또 그들의 삶을 즐기도록 놔둔다.”
당신 안의 어른이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아이의 능력을 무시한다면, 그때 그 어른은 당신의 적이나 다름없다. 명심하라. 삶을 즐길 줄 아는 면에서 그토록 감탄스러운 능력을 지닌 아이들은 당신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당신 안에도 그런 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 문제는 그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느냐, 아니면 큰 위협을 느껴 주위의 진짜 아이들을 당신과 비슷하게 바꾸어 놓아 욕구충족을 미루고 당신이 그러하듯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려고 고집하느냐이다. 사실 무한계형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말 그대로를 의미한다. 즉, 욕구충족을 미룸으로써 스스로에게 부과한 한계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적이게도 욕구충족을 미룰 수 있도록 가르쳐달라며 내게 아이들을 보냈던 여러 교사들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다음 시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오, 오늘의 꽃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불확실한 수확같이
멀고 먼 일을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저희를 그저 한 해의 도약인 봄 속에 머물게 하옵소서. –[봄의 기도]
잘못된 교육에 저항하라,
당신이 받은 정규교육은 무한계형 인간이 되도록 돕는 방향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아주 운 좋은 경우가 아닌 한, 당신은 오히려 그 반대의 권위주의자가 되도록 정교하게 훈련 받은 셈이다. 정규교육은 진정한 지적 발달, 즉 스스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스스로 최고의 답을 찾거나 추론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데 역점을 두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당신이 받아야 했던 교육방법들 가운데는 더러 뭔가를 배우도록 돕는 데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들도 있었다. 가령 당신은 제도적 시험에서 도로 쏟아낼 수 있도록 여러 사실들을 줄줄이 암기하도록 훈련 받았다. 이런 사실들이 당신 삶이나 다른 이들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시험이 끝나자마자 암기했던 사실들을 잊어버리고는 역시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새로운 사실들로 주의를 돌렸다(‘오늘 대수학 시험을 잘 본 것 같은가? 세계사 시험은 어떤가?’ 같은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당신이 받은 교육방법은 당신의 자연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에 조화되는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랬다면, 예를 들어 미국 독립전쟁의 역사나 개구리의 순환계에 대해 배운 후 그 부분에 대한 당신 나름의 질문들을 던질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당신은 오늘날까지 당신이 배웠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픈 사실이지만 당신이 받은 정규교육은 대체로 교사와 행정관들을 기쁘게 하는 법을 배우는 쪽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글을 쓰며 한계선을 정하지 않으며 당신 나름의 관점에서 문제를 공략해보도록 장려 받은 일은 없었다. 아니,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아주 드물었다. 당신은 어떤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무엇보다도 그 프로그램 규칙에 순응하도록 배웠다. 아니면 구제불능 문제아로 찍혀 ‘내쫓겼다.’ 또한 창의성보다 순응이 더 장기적인 만족감을 가져다 주며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학교에서나 삶에서나 가장 확실한 성공방법이라고 배웠으며, 독자적으로 생각하거나 남다르게 굴거나 권위자에게 도전하면 핀잔을 들었다. 당신은 훌륭한 아이가 되기를 단념하도록 용의주도하게 유도되었다. 또한 앞으로 10년 후에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혹은 그 밖의 오류지대적 행위에 가담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당신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을 단념하도록 유도되었다. 당신은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학습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로써 학창시절에 당신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시험에 통과하고 성적표에 특정 점수를 받으며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는 등 외면적인 것들의 추구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구 속에 깃든 공허함이 당신 안의 아이에게 정규교육에 더욱 더 강하게 반항하도록 자극했고, 선생님들 대다수가 엉터리여서 당신을 진정으로 좋아하거나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거나 자신들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결국 당신은 교실에 앉아 ‘다른 아이들처럼’ 굴욕적 대접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신 안의 아이는 수업방식의 부조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가령 당신이 어떤 긴 단원을 다 이해했는데 선생님이 전체 학급에게 다른 단원을 가르칠 준비가 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게 되는 경우, 그것은 시간낭비임을 잘 알았다. 수업 중 다른 아이들보다 더 쉽게 이해되는 과목들이 있음을 의식할 때도, 모두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아이들도 그 과목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당신과 같은 수준이 되길 기대한다면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 임도 잘 알았다. 당신은 어떤 과목에서는 반 아이들보다 ‘앞서’ 있었고 또 어떤 과목에서는 ‘뒤쳐져’ 있었지만, 언제나 ‘학급의 일부’로 ‘수습생들’ 중 한 명으로 취급 받았고, 선생님들로부터 자기만의 고유한 관심, 본능, 잠재력, 열망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모두와 똑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당신은 교육제도가 당신과 당신 급우들에게 강요한 인위적인 경쟁이, 선생님들이 규칙을 지키게 하려고 휘둘렀던 채찍과 다른 바 없는 커다란 모욕이었음도 알았다. 자신의 전 과목 성적에 게시되거나 큰소리로 불려졌는데 단지 그 당시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 과목에 흥미가 떨어졌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과목에서 C-를 받았을 때면 그 기분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배우는 속도가 다 같지는 않으므로 C-를 받은 학생은 몇 달 후 그 과목을 숙지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게 되더라도 그 학생에게는 여전히 그 C-가 평생토록 따라다니게 될 터였다. 당신은 이런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당신은 정규교육의 그런 경직된 비교와 경쟁 체제에 대해 분개했다. 그러면서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각자 개별적인 존재이므로 분별 있는 사람이나 제도라면 획일적인 권위주의적 지위에 따라 연대에 편입된 병사들처럼 그 누구에게도 개체성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십중팔구 당신은 ‘그 제도’가 유일한 길처럼 보였기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교육’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고 권위주의적 반주지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그 당시 당신 안의 아이는 그보다 더 분별력이 있었고 그래서 정규교육이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았다. 즉, 당신은 만물에 대한 당신의 자연스럽고 아이 같은 호기심을 다시 깨워 그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성적을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고, 당신의 아이 같은 호기심이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탐구에 조금도 구속을 두지 않는 한편 아무도(특히 당신 안의 권위적 어른이) 당신 위에 군림하며 당신의 학습활동이나 성장활동에 통제를 가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정규교육으로부터의 영향을 넘어서서 무한계형 인간이 되고 싶다면 극히 소수였으나 훌륭하고 아주 의욕적이었던 선생님들을 떠올려보라. 당신을 정말로 걱정했고 당신 삶에 변화를 주고자 원했으며 당신의 자연스럽고 아이 같은 호기심이 발동할 때 그 호기심을 채워주고자 헌신했던 그런 선생님들을 떠올려보라. 그런 선생님들이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소수 자였다는 것은 잊어라. 그들이 학습지도나 교실의 ‘틀에 박힌 일상’ 측면에서 각 학생들의 필요에 맞추려고 애썼을 때 체제 붕괴 자로 불렸던 것도 잊어라! 다만 그런 특별한 선생님들이 당신을 도와주었던 방법을 기억하고, 교육 역할에 대해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본보기는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라!
나는 수년간 학교 교사와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온갖 유형의 교육자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 가운데 담당 학생들 모두에게 마음을 쏟으면서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지적 호기심을 길러줄 줄 알고 자신들의 소임에 프로의식이 투철했으며 학교에서 누구에게나 인기 있었던 교사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권위주의적 특징 면에서 최하위 등급에 속했다. 특히 ‘전통적’인 방침에 따라 담당 학급을 이분화하는 면에서 가장 뒤떨어졌다. 이처럼 고차원적으로 기능하는 교사들 중에는 학생들을 착한 학생과 나쁜 학생, 똑똑한 학생과 멍청한 학생, 성숙한 학생과 미숙한 학생, 말썽꾸러기 학생과 온순한 학생, 성적이 기대 이하인 학생과 기대 이상인 학생 등으로 교사의 편의에 따라 분류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이처럼 뛰어난 교육자들은 좀처럼 만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있기는 있다. 따라서 이 나라의 교육제도를 얼마간이라도 체험해봤던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들과 다소 비슷한 선생님들을 최소한 서너 명은 만나봤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선생님들은 일단의 학생들만 편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무한계형’ 선생님들은 각양각색의 모든 학생들에게 물론 끊임없이 제도와 충돌하는 학생들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수업에 잘 빠지곤 하는 학생들에게나 전 과목 A인 학생들에게나 똑같이 든든한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런 선생님들에게는 방과 후에 학생회 임원들이든 “깡패기질 있는 아이들’이든 스스럼 없이 다가와 잡담을 나누곤 했다. 다시 말해, 이런 대단한 선생님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아이 같은 속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관심사항이나 파벌을 막론하고 모두가 이런 선생님들에게 모여들었고 선생님을 특별한 친구로 여겼을 것이다.
이런 선생님들은 아이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과 다른 관점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며 어른이든 아이든 타인이 가진 차이점에 관대하며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분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기본적으로 전체론적이고 열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비범한 선생님들이었다.
당신은 별 탈 없이 ‘표준적’ 교육 과정을 치러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아무리 그 과정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교육제도를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틀림없이 날이면 날마다 순응에는 상을 주고 독자성에는 벌을 가하는 제도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혹사당할 수는 없었을 테고 그런 가운데 때때로 지루함에 젖으면서 ‘문제아’가 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규교육을 받는 와중에서도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며, 그 깨우침은 아마도 소수의 무한계형 선생님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신은 분명 그들로부터 무한계형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웠을 것이다. 정규교육에서 받은 부정적 영향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당신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배움에 따르기 위해서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최대한 전인적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도록 맞추어져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이상적인 학교제도는 등급도, 성적표도, 학점도, 커닝도 없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는 대신 스스로 학습하게 한다면 어떻게 부정행위가 가능할 것인가? 아무도 당신 공부를 도울 수 없고 당신이 남보다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비교 시스템이 아예 없다면 애초에 ‘부정행위’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제도라면, 구체적으로 말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창의적으로 존재하며 전적으로 기능하면서 살아갈지를 배우는 데 관심을 갖게 되는 제도에서라면 등급, 시험, 학점 등 ‘성공’의 외면적 척도들은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이상적인 학교에서의 학습과제는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이것저것으로 엄격히 가르기보다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법, 이것저것으로 엄격히 기르기보다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법, 신경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법, 즉 한마디로 행복한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상적인 학교는 아이의 전인적 교육을 사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제약 받고 순응적인 사람, 즉 사실상의 ‘어른’이 되도록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장려해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가 완전한 불간섭주의 태도나 분위기를 지닌 자유방임적인 곳이 되어야 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에 호의적이며 자신의 삶은 자신이 통제하도록 가르치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학교가 이 점을 이해하는 교사들로 가득 찬, 관심과 애정 어린 곳이 되어야 한다는 애기를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이런 이상적인 학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무한계형 선생님의 경우도 그래. 그런 선생님을 몇 분 기억하지만, 그건 옛날 시대였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그런 말은 말아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학교는 당신 머릿속에 있는 학교다! 당신은 현재 전인적 인간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몇 살이든 간에 당신은 이 세상에 온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었다. 당신이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니든 간에 오늘부터 당장 정규교육의 파괴적인 시도를 초월하는 출발점에 설 수 있다. 그러자면 당신이 어렸을 때 ‘그 제도’가 당신에게 했던 일에 대해 분개하고 있어봐야 지금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울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그러한 어릴 적의 부정적 경험으로부터 혹사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그 누적된 영향들을 극복하고 소수의 무한계형 선생님들과 그들이 지지했던 교육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여전히 당신 안에는 아이가 살고 있음을, 그러한 제도 하에 부과된 고난, 학대 전략, 인위적 구속을 견디고 살아남아 있음을 잊지 마라. 당신 안의 아이는 당신이 과거를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단지 예전에 훈련 받았던 식대로 계속해서 당신 자신을 학대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다시 그런 아이로 돌아가길 힘써라. 그러면 그 아이가 감정을 조정하는 법, 스스로 생각하는 법, 당신에게 중요하거나 흥미를 끌 만한 질문들을 묻고 답하는 법을 가르쳐줌으로써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효과적으로 살아가고 삶 속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그로써 당신은 남은 삶을 참되고 행복하게 교육받으면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지 않는 청춘의 샘
신화 속에서는 세상 어딘가에 마법의 샘이나 연못이 있으며 그 물을 마시면 청춘을 되돌려주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가 곧 잘 나온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생각을 젊게 하면 사는 것도 젊어진다’. 즉 자신의 아이 같은 속성을 즐기는 법을 아는 80세 할머니, 로스쿨에 다니면서 재미라고 모르는 채로 상위권에 들려는 목표를 향해, 10년이나 15년 후 대형회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하려는 목표를 향해, 그리고 어쩌면 삶에 대한 깊은 증오를 향해 신경쇠약과 궤양의 가능성마저 떠안은 채 고군분투하는 20세 청년보다 본질적으로 볼 때 더 젊고 활기차고 생기 넘칠 수 있다.
청춘의 샘 신화 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따로 있어서, 어쩌면 잃어버린 젊음을 바위 밑, ‘저 너머 산’, 한 잔의 물, 화장품 병, 기업 회의실 등 무조건 당신 외면에서 찾으려는 미신적인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한편 당신 내면에 무한한 청춘의 샘이 있으며, 그 샘물은 단지 당신 자신이 다시 아이로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 뽑아 마실 수 있다는 상식을 상기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오랜 된 찬송가에는 ‘성으로 들어가는 열 두 개의 문’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청춘의 샘에 이르는 길은 그보다 더 많다. 사실 당신 안의 아이가 평생토록 탐구하면서 성숙해낼 수 있는 수만큼의 길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우선적으로 당신의 탐구해보고 싶어할 만한 일곱 개의 길을 골라서 살펴보자.
1.열심히, 부지런히 웃어라,
당신 안의 아이는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웃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신이나 삶에 웃음으로 달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아이들은 더 많이 웃으며 살아갈수록 삶이 더 좋아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잘 웃기고 농담을 잘 받아주는 사람들과는 오랜 시간을 함께 있고 싶어한다. 또한 심각하고 따분하며 늘 퉁명스러운 어른이 “하나도 재미없어” 라고 말하는 것들을 보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곤 한다. 때로는 순전한 삶의 기쁨을 느껴서, 또는 본능으로부터 “자, 웃을 때야!”라는 신호를 받아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웃음을 터뜨린다.
수업이 정말로 재미있어서 수업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던 선생님들을 기억해보라. 뛰어난 유머감각 덕분에 그 수업시간 때는 교실 분위기가 다른 수업시간보다 덜 지켜왔던 그런 선생님들이 있지 않았는가? 학생들의 장난도 잘 받아주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나 은행 전산이 미쳐서 모든 예금주들에게 백만 달러짜리 수표를 보냈던 일화 등을 들려주던 그런 선생님들이 있지 않았는가? 바로 그런 선생님들이 스스로 학습하는 것을 독려해줄 능력을 갖춘 선생님들이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유머와 웃음을 갈구한다. 그것이 언제든 우울증, 무력증, 심지어 공황까지 사라지게 해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웃는 동안에는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초조할 수가 없다. 유머감각이 살아 있어 하루에 3~40번씩 호탕하게 웃는다면, 신경증이나 슬픔에 그보다 더 확실한 예방약도 없다. 게다가 웃음은 공짜이고,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지 않아도 되며, 약국에 갈 필요도 없다.
주위를 보면 “그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여긴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꼭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이루 말할 수 없이 엄격하고 ‘완고한’ 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웃어넘길 줄 모른다. 아니, 실수 자체를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다 보니 미리 짜둔 인생계획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까봐 두려운데다 자신의 고정된 가치관에 예외를 두기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확실한 일반화가 가능한 부류로서, 권위주의적 인물의 모든 특성에서 ‘상위군’에 드는 사람의 표상이다. 또한 다른 부류 사람들을 보면서 큰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직업 생활을 아주 잘 해내면서도 사랑스러운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보여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나 만사에 대해 ‘느긋함’만 가지면 휠씬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유머감각을 좀 가지고 삶을 관망하면 모든 것이 확 달라 보일 텐데.”
주변에서 유머감각을 가지고 삶을 관망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그런 태도로 인해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는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당신 자신은 그런 패턴과 얼마나 맞는지,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자문해보라. 당신은 오늘 얼마나 웃었으며 무엇 때문에 웃었는가? 이번 주나 지난주에 정말로 우스웠던 일이 있었는가? 최근에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에 실소를 터뜨렸던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거나 미숙하거나 덜 떨어져 보여서, 비열하게 남들 흉을 보면서 낄낄 웃었던 적은 있는가?
당신에게는 삶이 하나의 지겨운 고역인가, 아니면 더 바랄 나위 없을 만큼 웃음으로 충만한 행운인가? 최근에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는가?
2. 다시 공상의 세계에 빠져라.
아이들은 꿈꾸기와 이야기 꾸며내길 좋아하며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는다면 당신 역시 그러할 것이다. 기억을 떠 올려보라. 어린 시절 밤이면 당신 방안이 새끼 뱀장어나 꼬마 요정들을 가득 차거나, 혹은 숲 속이 인디언이나 너구리털가죽 모자를 쓴 개척자들로 가득 차곤 하지 않았는가? 가지가 마술 지팡이가 되고 빗자루가 말이 되지는 않았는가? 실제의 놀이친구 못지않게 생생했던 상상 속의 놀이친구들이 있지는 않았는가? 분장 놀이는 어떠했던가? 당신은 아버지 모자를 쓰곤 은행 사무원이 되고 한 놀이친구는 가짜 돈을 가지고 금전출납 원이 되며 또 다른 놀이친구는 종이철을 수표장으로 삼아 고객이 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림 그리기, 노래 지어내기, 이야기 듣기, 독특한 게임 만들어내기, 얘길 듣거나 같이 떠나고 싶어하는 누군가와 함께 환상 유람을 나서서 정처 없이 방랑하기 같은 것들을 아주 좋아하지 않았는가?
공상 가득했던 유년기 삶은 대체로 크나큰 즐거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건강한 삶이었다. 공상은 성장이라는 괴로움 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탈출구를 제공했고 그 즉시 지루함을 쫓아 주었으며, 그 당시 그 속에 더 깊이 빠지면서 더 큰 용기를 얻었을 수록 현재 당신은 그만큼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다 큰 어른이라도 그 시절과 같이 공상하고 꿈꾸는 사치를 마음껏 누리면서 그때와 똑 같은 즐거움과 ‘정신건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순전히 공상으로 시작되었던 그런 꿈들 가운데 몇몇은 결국 현실이 되기도 한다.
삶에서 이루어지는 최상의 현실들은 ‘아이 같은’ 공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가령 멋진 휴가 여행은 모두 그 시작이 공상이다. 실제로 집을 지을 수 있으려면 먼저 공상 속에서 집을 지어야 한다. 새로운 직장을 얻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등 개인적으로 소중한 모든 일도 먼저 공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고 꿈꾸는 눈빛이 되어 자유롭게 공상에 잠길수록 삶을 더 멋지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상에 빠질 때는 공상 그 자체를 즐겨야지 그것이 미래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공상을 언젠가 실행해야 하거나 성취해야 할 계획으로 묶어놓음으로써 그 공상의 가치를 훼손하는 한편, 그 꿈이 정말로 실현될지에 대한 걱정까지 떠안게 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함정만 피한다면, 당신 안의 아이에게 때대로 자신만의 공상의 세계로 탈출하도록 허용해줌으로써 당신의 부정적이고 경직된 태도가 풀어지고 삶 속에서 심리적 압박도 크게 줄어들 것이며 당신 가능성의 영역이 완전히 새롭게 열릴 것이다.
3. 조금은 미쳐라. 엉뚱해져라.
확실히 당신 안의 아이를 비롯해 모든 아이들은 조금은 미쳐 있다. 가만 보면 그들은 곧잘 ‘바보 같거나 어이없는’ 행동을 한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아이들 특유의 ‘미친’ 짓으로 꾸지람 받는 행동을 아주 멋진 경험을 기억한다. 당신 안의 아이가 ‘성숙하고 분별 있는’ 모습을 더 좋아해 삶 속에서 그런 ‘미친’ 순간을 제거해도 괜찮다고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따금 씩은 조금 어릿광대 같고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될지라도 다음을 명심하라. 당신 안의 아이는 웃긴 옷을 입고 파티에 나가거나 새벽 네시에 수영하러 가거나 강도 잡는 경찰 놀이를 하거나 그 밖에 남들이 ‘정말 미쳤나봐!’라고 말한 만한 일들을 하는 것을 정말로 즐거워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만한 그런 ‘미친’ 상태도 있다. 즉 삶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고 공황에 빠져 결국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지경까지 마치고 싶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미친 상태란 이런 상태는 아니니 안심하라. 내가 말하는 미친 상태란 비유하자만, 간혹 꽃병의 표면에 살짝 ‘갈라져 있는’ 잔금과 유사하다. 즉 이따금씩 ‘아이 같은’ ‘엉뚱한 행동’과 웃음으로 당신 자신에게 금이 좀 가도록 허용할 때 빠질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미친’ 상태란 당신 삶을 제한하는 몇 가지 강박들을 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직무에 진지하고 성숙하게 대면해 정직함과 엄숙함을 요하는 문제를 성실하게 처리하면서도, 이따금씩은 느긋함을 가지고 자신을 좀 풀어줘라. 그러면 당신 자신도 사는 재미가 더 커질 뿐만 아니라 사무실 전체가 느긋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임해야 할 순간에 더 높은 능률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4. 즉흥적, 자발적이 되어라.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 안의 아이도 항상 미리 계획된 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이고 모험적이 되고 싶어한다. 자발성은 여러 가지로 모든 아이 같은 행동의 핵심이다. 뭔가 흥미로운 것이 포착되면 무턱대고 길가에 멈춰서는 아주 어렸을 때 어쩌다 새로운 것을 봤을 때처럼 눈을 말똥말똥 뜨며 흥분할 줄 아는 능력, 바로 이런 능력이 아이 같은 즉흥성과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감수성이 둔해진 ‘어른들’이 스스로는 물론이요 아이들에게까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기도 하다. 그것도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거나 늘 대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는가 하면, 어른이 ‘짜놓은 산책로’를 따르지 않고 낯선 길로 벗어나기라도 하면 “이리 돌아오지 못해!” 라고 소리치는 등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키고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너무도 쉽게 억누르고 있다.
물론 사적인 자유로움의 자질을 잃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아이들은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충돌을 무력화시키지 못한다. 뭔가 새로운 길을 탐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당신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자마자 이런 저런 식으로 달아나곤 한다.
이런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뭐든 이것저것 모아 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달팽이, 풀쐐기, 도마뱀, 꽃, 낡은 렌치, 못, 동전 등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온갖 것을 집에 가져오곤 한다. 이런 식의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수집벽은 이와 같은 각별한 아이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런 버릇을 때려서라도 기어코 고쳐놓는다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집이 ‘그런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집보다 더 나은 것처럼 믿는 척 가르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이 같은 호기심과 흥미로운 것들을 모으는 자발적 충동심은 그들 내면에 언제나 살아 있게 된다. 그래서 언제가 그들에게 딱 제격인 고고학자나 박물관 큐레이터, 미술품 수집가나 식물학자, 골동품 혹은 ‘잡동사니’ 거래상이 되어서, “안 돼, 집 안에 그런 것을 들여놓을 수 없어”라고 말하던 어른을 언제까지나 극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 안의 아이는 그 자발성을 통해 언제라도 어떤 것으로든 당신을 즐겁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다. 실감개, 돌멩이, 분필, 혹은 낡은 야구공 따위를 집어 들고도 몇 시간 동안이나 당신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다. 당신은 길가에 차를 대놓고 200년 된 오크나무 밑에 놓인 역사적 명판을 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도록 배워왔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런 충동은 여전히 당신 안에 살아 있다. 지금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놓고 매 순간 목적지를 향해 철저히 계획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면, 매사에 체계 있고 청결하며 정돈된 상태를 갖추려고 집착한다면, 이제부터는 그러지 마라. 당신은 아이가 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5. 실수를 두려워 마라.
당신은 어렸을 때만 해도 실수를 저지를까 봐 겁먹지 않았다. 뭐든 시도해보려 했으며, 처음엔 실력이 모자라 번번이 50마리의 쥐를 놓치는 새끼고양이처럼 서툴더라도 매번 시도할 때마다 조금씩 더 영리해지고 빨라지다가 마침내 아이스 스케이팅, 바느질, 혹은 수프 끓이기 등에 숙달하게 되었다. 사실 아이스 스케이팅을 배울 때 몸이 가장 먼저 터득해야 하는 것은 빙판에서 다치지 않고 넘어지는 법이었다. 다시 말해 머리가 깨지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으려면, 넘어질 때마다 웃으면서 일어나 또다시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려면, 어떻게 다리의 긴장을 풀고 몸을 구부리는지, 혹은 어떻게 뒹굴거나 미끄러져야 하는지부터 배웠다. ‘실패’는 창피한 일도 피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처음에 실패를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렸을 때만 해도 당신은 자연적으로 실험자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서, 시도를 해보고 실수를 저지르고 또다시 시도를 되풀이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공을 던지거나 깊은 물속에서 헤엄을 치거나 자전거를 타는 법 등을 터득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애초에 인간이 실패를 두려워해서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을 꺼리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아이들은 평생 아기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어른들은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꺼린다면 그것은 곧 성공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시도를 하다가 단념할 때는 언제나 딱 두 경우뿐이다. 즉 자신들이 아무래도 실력이 처진다는 신경과민적 생각이 들거나, ‘초보자’로서 처음 착수하려는 그 무언가에 대해 이미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른 사람과의 실력 차이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일 때뿐이다.
어렸을 때 수영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어른이 되어서도 수영을 배우려 들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일에서건 ‘초보자로 분류되는’ 것이, 다시 말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초보 단계의 서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어른의 경우엔 자기 안의 아이에게 통제권을 내주기만 하면, 아이들처럼 쉽게, 혹은 아이들보다 더 쉽게 수영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어른의 몸은 성인으로서 협응력이 충분히 길러져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른들, 특히 초급반에 들어간 어른들은 대다수 아이들보다 휠씬 더 서툴러서 적정 강습 기간보다 휠씬 더 오랜 기간이 걸려서야 수영을 배우곤 하는데, 이것은 단지 수행불안(performance anxiety)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에 익숙해지면서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요령을 익히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해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나이 들면서 ‘실패’가 따를 만한 일들을 점점 더 회피하도록 배워오지는 않았는가? 항상 모든 일에서 ‘좋은 등급’을 얻도록, 그래서 어느 일에서든 하급에 들면 자신을 서투른 사람으로 판단하도록 배워오지는 않았는가? 어떤 일이든 이미 잘하는 것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 아이 같은 충동, 즉 상상력을 자극하는 뭔가를 시도하고자 하는 충동, 즉 상상력을 자극하는 뭔가를 시도하고자 하는 충동을 좀먹어오지는 않았는가? 그랬다면, 그리하여 여전히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무엇이든 그것을 배울 수 있으려면 불가피한 것, 즉 실패를 회피하고 있음을 인정하면 된다!
6. 세상사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세상사가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과 다를 수 있다거나 달라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세상을 그저 경이로움과 황홀 감으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점점 크면서 컵으로 물 마시기, 잔디 깎기, 친구들 이기기, 혹은 특정 사람들에게 영향력 행사하기 등 일정한 일들의 통제 요령을 차츰 익혀나가며, 바로 이때부터 문제의 화근이 생성된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이르러 일의 마땅한 절차에 대한 권위주의적 경직성이 생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기대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세상에 분통을 치밀면서 자칫 앵그리 영맨(angry Youngman,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소년)신드롬에 빠질 수 있다. 이 신드롬에 빠지면 인간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도 그 통제 불가능성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 인간으로선 어떻게도 통제할 수 없는 자연현상 중 가장 대표적인 날씨를 예로 들어, 그런 날씨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날씨가 그 특유의 신비스러운 방식에 따라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며, 아무리 투덜거려봐야 날씨를 특별하게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눈보라가 겨울의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사실 눈보라를 반기며 한껏 즐기기도 한다. 반면 어른들은 서로 ‘고약한 날씨야!’라는 말을 주고받기에 바쁘며 날씨로 인해 차질이 빚어진 계획들 생각에 심란해한다.
“그야 아이들은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지. 하루치 일이 날아갈 걱정이 없으니 눈보라를 즐길 수 있는 거라고”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명백한 다음 사실을 무시하는 격이다. 즉 아무리 심란해 해봐야 당신을 위해 눈보라가 방향을 둘려 하늘도 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화를 낸다고 해서 하루 일을 못하게 된 것이 보상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덕에 얻은 휴가를 망치고 말 뿐이다. 당신 안의 아이는 그냥 밖에 나가 눈 속에서 뛰놀고 싶어할 테지만, 당신 안의 어른이 눈을 짜증스럽게 생각하면서 집 안에서 하늘만 저주하고 있으라고 강요할 것이다.
물론 당신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어떻게 손써볼 수 있는 세상사에 한에서라면, 최선을 다해 맘에 들지 않는 일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가령 당신의 지역, 혹은 당신의 주나 나라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힘을 보태거나, 세계적인 군비 경쟁을 멈추도록 촉구하는 데 기여하거나, 굶주리는 고아나 노약자를 위한 복지사업에 가담하거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퉁이의 정겹고 오래된 건물을 지키는 일 등 관심이 있는 그 밖의 어떠한 일에든 기여를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일을 할 때의 마음가짐이 그 일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인해 세상에 대해 분개하지 않으며, 또한 분노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거나 비참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말에도 이런 기도문이 있다. “주여,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힘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감수할 인내력과 이 둘을 구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당신 안의 아이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그대로 감수하는 요령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로 인해 세상이 근본적으로 사악한 곳이라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에 기를 쓰고 매달리다가 도저히 해내지 못하면 무력증이나 공황에 빠짐으로써 좌절감에 휩싸이지 않을 줄도 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본능적이고도 즉각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추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지혜는 새롭게 배워야 할 지혜가 아니라 망각하고 있던 지혜이므로, 당신 안의 잃어버린 아이를 불러내기만 하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상처를 주거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보라. 아이들은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 이따금씩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날씨는 그저 날씨인지라 때때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비로 흠뻑 젖게 만들곤 한다는 것을 용납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몇 시간이 지나면 용서하고 잊어버릴 자세가 되어 있다. 반면에 자멸적인 어른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에 평생 동안 앙심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앙심을 품고 있어봐야 자신만이 고통스러울 뿐인데 말이다. 당신 안의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용서하고 잊어버리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 안의 비판적인 어른이 승리한다면, 그것이 당신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는 개의치 않은 채로 평생 증오심을 떠안고 살게 된다.
당신 안의 아이를 인정하면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모든 경험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즉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시점에서 가장 분별 있어 보이는 방식에 따라 처리하게 된다. 당신은 아이였을 때만 해도 원래는 모든 일과 사람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눈을 뿌려대는 먹구름, 원하지 않는 곳에 버티고 있는 길가의 장애물들, 강물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준 어머니, 올해에 새 TV를 구입하지 못하게 만든 인플레이션 따위를 저주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이런 자세를 되찾을 수만 있게 된다면 삶의 숱한 불행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 자연스런 신뢰감을 가져라.
기회가 된다면 꼬마 아이들이 첫 만남에서 어떻게 하는지 한번 유심히 지켜보라. 아이들은 서로 감을 잡기 전까지 처음엔 다소 주뻣거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이 맞는다면(이 점에 관한 한 꼬마 아이들의 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5분쯤 지나서부터 서로 관계를 갖는다. 그것도 어른들이 평생 친구들하고만 나누는 관계를 갖는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서로를 전적으로 믿는다. 한 아이가 조금 억지가 센 편임이 드러나면 상대편 아이는 그 아이가 원래 그런가 보다고 순순히 수용하고는 일일이 마음에 두지 않고 ‘잊어버리는’ 방법을 이내 터득하거나, 억지스러운 아이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뭔지(억지 쓰지 않기)를 눈치 채기까지 그 아이에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아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능력이 닿는 한 지금 순간을 최대한 재미있게 보내도록 해줄 그 밖의 다른 방법을 동원해 해결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1시간만 어울려도 대다수 어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는 것보다 더 친밀한 교감을 나눈다.
이제 이것을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당신이 취하는 접근법과 비교해보라. 당신은 ‘초반의 주뻣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긴가? 아이들 경우엔 대체로 몇 번 흘긋 보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면 냅다 달려가서 침실 한 귀퉁이를 우주선으로 바꾸어놓고는 3분도 안 되어 서로를 최상의 파트너로 인정한다. 그러나 당신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과하게 들이대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거나, 이미 너무 많은 관계를 맺고 있어 신경쓰기 힘든 마당에 ‘또 하나의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이 꺼려질 것이다. 아니면 어떤 이유로 상대방의 동기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에 새로 만난 사람을 절친한 친구에게 하듯 똑같이 대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하기보다는, 냉정하거나 냉담해져서 어른들 특유의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편을 선호하게 된다.
(기름을 넣으면 몇 마디를 주고받는 정도의 주유소 종업원일지라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냉정’ 한 반응을 보이는 편이라면, 당신은 어느 정도 권위주의적 편집증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원래 잘 믿는 아이 같았던 본능을 우선 사람들을 의심하고 본다면 당연히 당신 자신도 우선 의심하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당신도 ‘모든 사람들’ 중 한 명이지 않는가). 따라서 남들을 불신하는 태도는 대체로 당신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로써 고통스러운 내면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순진하게 굴었다가 ‘큰코다치게’ 될까 봐 불안할 때 당신 안의 아이가 건네는 귀띔을 듣고 당신의 동물적 본능이 전하는 말을 믿어보라. 그러면 (아마 실제로 큰코다치게 되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것이며)그 고통스러운 내면적 충돌의 요인을 제거하는 동시에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법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낯선 사람들과 대면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신뢰감을 가져보라는 얘기를 꺼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낯선 사람들과 대면할 때 당신이 보이는 반응을 어린 아이들 반응과 비교해보는 것이, 당신이 아이 같은 순진함, 즉 자연스러운 신뢰감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고 권위주의적 편집증에 얼마나 잠식당했는지를 가늠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친구들이나 지인들, 가족이나 업무상 동료들에게 대하는 태도도 낯선 사람들에 대한 태도 못지않게 중요하며, 그들을 불신한다면 당신이 근본적으로 당신 자신을 불신하는 것은 아닐지, 혹은 당신 안의 아이를 심하게 학대하고 무시하며 따돌려온 것은 아닐지에 대한 의문이 휠씬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다시 아이처럼 사람을 잘 믿고 싶어. 의심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아이 같은 태도를 취했다간 평생 모은 돈을 사기꾼한테 털리고 필요하지도 않은 수리를 받거나 제대로 수리도 못 받은 채 수리비를 지불하는 등 갖가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기단을 잡아들이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말하듯, ‘낯선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사기꾼이 돈을 갈취해갈 만한 여지를 주지 못한다. 사기란 근본적으로 희생자의 탐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희생자는 자기 자신을 기만한 채 잘못된 생각에 빠져, 정말로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돈이 갑절로 불어날 수 있다거나 뭔가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거나, ‘한밑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여긴다. 우선 이 정도까지 어리석지만 않다면, 당신이 아무리 사람들을 믿더라도 위험천만한 일확천금의 책략에 모은 돈을 쏟아 붓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말하고 있는 아이 같은 신뢰감은 사기꾼들을 감지해낼 태세를 더 잘 갖추도록 해줄 텐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동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신한다면, 또한 모든 사람을 어딘가 쥐새끼 같은 인간으로 여긴다면, 진짜 쥐새끼 같은 인간의 낌새를 맡을 수 있는 본능적 능력이 제 기능을 못하게 해놓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본능이 당신에게 경고를 주려고 하더라도, 당신은 탐욕에 눈이 멀어 그 경고를 무시한 채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쥐새끼 같은 인간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없어”라고 말하고는 평생 모은 돈을 그 사람에게 넘겨주고 말지도 모른다. 자동차 수리공, 방문 판매원 같은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신 자신을 믿고 타인들을 믿는 능력은 사실상 태도 개발의 문제다. 세상이 썩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속이려 드는 것처럼 여긴다면, 오히려 진짜 쥐새끼 같은 인간들에게 ‘속을’ 가능성이 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주위의 모든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킴으로써 이미 당신 스스로에게 ‘속는’ 꼴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같은 신뢰심에 따르면서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거의 다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대체로 바로 그 긍정적인 태도가 당신을 끝까지 도와줄 것이다.
적어도 내 견해로는, 지금까지 설명한 ‘청춘의 샘에 이르는 일곱 가지 길’이야말로 당신 안의 잃어버린 아이와 오랫동안 미뤄온 재회를 시도하기에 가장 확실하고도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기쁨에 넘치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외에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다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 당신 안의 아이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적당한 삶’이 될까를 궁리하느라 문화적 강요나 학습된 행동, 과대망상적 판단에 속박되지 않으며, 그 덕분에 어떻게 해야 이 지구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행복하게 상대할 수 있을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당신 안에 있는 어린아이 특유의 본질만 되찾는다면 당신은 ‘언제까지나 마음은 청춘’으로 머물 수 있을 텐데, 아마도 이것이 이 장 전체에 흐르는 기본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당신이 하루하루 날마다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아이 같은 속성들은 당신 손바닥과 손가락의 거리만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에게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도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그런 속성들을 억압하려 한다면, 당신 안의 아이를 계속 무시한다면, 당신 발에 그 어떤 노예보다도 더 많은 족쇄를 채우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 안의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가 말하는 방식대로 다시 아이가 되고자 진심으로 바란다면, 반드시 당신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자신과 화해함으로써 내면의 평화를 얻으면 거의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오늘 당신 자신에게 그런 아이 같은 내면의 평화를 늘려주어라. 주저하지 말고, 순진하고 놀기를 좋아하던 그 그리운 아이로 다시 돌아가서 더 이상 잃어버린 아이를 그리워하지 않으면 된다. 아니면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읊었던 “그대 청춘의 꿈을 계속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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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인다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