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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격변의 흐름에 내달리다
120여 년 전, 작고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 개항이 되었고 외국인과 서구문물이 빠르게 밀려들어 오게 되자 정부에서는 긴급히 인천해관, 인천감리서등 개항장의 관세와 사무를 관장할 기관을 설치하였다. 굉음을 내는 증기기관차, 서구식 복층 건물, 신식학교, 교회, 호텔, 은행, 무역상점등의 공간적인 변화와 다양한 근대문물을 숨 가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제물포. 제국주의에 의한 날카로운 발톱에 강제수탈의 문을 열게 되었던 곳. 오늘에서 가장 가까운 시점의 100여 년 전, 피멍자국의 나날들이 흔적으로 곳곳에 드러나 있을 것 같은 인천안의 개항장 일대가 알고 싶었다. 얼마 전의 산성탐방이 아쉬워 다시 한 번 홀로 인천을 찾아본다.
미리 인천광역시청에서 자료정보를 얻었다. 개항장을 무인관광정보안내기와 휴대용 u-Tourpia 단말기를 빌려 자동관광안내 해설을 들으며 직접 도보로 여행하는 서비스가 있었다. 두려움 없이 출발~~. 서울에서 송도까지는 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이번에 개통된 제3경인 고속도로를 이용하였고 인천역까지는 전철을 탔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각국의 이권 쟁탈전의 하나인
개항장의 전체적인 윤곽을 미리 지도로 살펴보았다. 조계라인으로 형성된 각국영역에 현재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투어가 구성되어 있었다.
응봉산 즉,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적색라인)을 만들어 왼쪽은 청국조계, 오른쪽은 일본조계로 나누고 또 홍예문을 중심으로 일본조계 옆으로 각국조계지 경계석(청색라인)을 두었다. 외국인(청, 일, 미, 영, 러, 독)들이 자유롭게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조계구역을 설정하고 지방 행정권을 그들에게 부임하는 것이다. 이 조계는 1884년 일본을 시작으로 설치되었다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난 1914년 모든 조계를 폐지하고 인천부 관할 행정구역으로 편입을 시키게 된다.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와 그들만의 건물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근대문물에 휘청거렸을 이곳이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별천지스런 곳이었을 것 같다. 청국과 일본조계지 중심으로 탐방을 계획했다.
역 앞의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돌로 만든 중국풍의 제1패루牌樓가 차이나타운의 입성을 알려준다. 그 전에 세웠던 1, 2패루는 붕괴위험으로 해체 후 자매도시 중국 웨이하이(威海)시에서 돌 패루를 기증받았다고 한다. 높이 11m로 중화가中華街라 자기의 역할을 알린다.
길 따라 좌우의 붉은 색이 단연 돋보이는 중국풍의 상점과 상품이 이어지고 이곳 북성동의 주민 센터도 황금색과 중국 색을 입고 휘황히 등을 걸고 한다. 그 언덕의 끝에는 공화춘共和春이 손님을 안내한다. 자장면의 원조라 하여 CJ에서 공화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1호점이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1905년 공화춘의 모태인 산동회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자장면박물관으로 공사 진행 중이었다.
화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청나라의 특권으로 일관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부터이다. 청국조계를 형성하면서 청관거리, 청요리라는 생소한 단어가 생겨나고 화교들이 중국 무역상과 부두 근로자를 상대로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자장면을 만들게 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장면 맛은 별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편이었다. 어릴 적 연중행사로 어린이날 먹었던 그 맛이 약간은 느껴지는 듯했다. 거리에는 차이나타운 거리행사를 알리는 선전물과 등이 하늘을 가렸다.
제3패루까지 높은 계단을 오르니 우측에 인천중화기독교회가 보였다. 청국조계지가 폐지 된 후 중국인 목사가 부임함으로서 교회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입지가 약해진 후이니 화교들끼리의 단합의 장소가 되기도 했을 듯하다. 현재는 새로 신축되어진 건물이 있고 건물 뒤편에 기념비만 있다고 하는데 찾지를 못했다.
인천화교중산학교는 차이나타운의 화교 자녀들을 위해 세워진 초등학교건물이다. 개항 기에는 이 자리에 청국영사관이 꽤 높은 위치의 세워져 있어 청국조계지가 한 눈에 들어 왔다고 한다. 영사관이 철수한 지는 오래 되었지만 건물만 재보수를 거쳐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담장에는 중국풍의 혼례모습이 국어 교과서 삽화처럼 그려져 있다. 너무 늦은 시간에 갔더니 학교 입구를 봉쇄해 놓았다. 입구에 사자상 두 마리만 뻘줌하게 보게 된다. 그 옆 건물은 현재는 화교 협회 건물이 있고 건물 뒤편으로는 당시 영사관 회의청만 남아 있다고 하나 들어 갈 수는 없었다. 길거리에 화교인 들이 나를 보며 중국말로 속닥인다. 너무 늦게 왔다고 하는 건지, 아님 영사관 자리를 찾은 방문객을 맞이한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그네들 언어에 다시 한 번 차이나타운임을 몸으로 느껴본다. 조선에 처음 입성하여 지은 청국영사관이라 얼마나 잘 지었을까 생각하며 조선인에게는 위축감이, 화교에게는 든든한 보호기관이었을 게다.
학교뒷담골목의 양편 벽에는 삼국지 벽화거리가 약 150m 거리에 대형 타일 벽으로 꾸며져 있다. 삼국지의 명장면을 그림과 글귀를 삽입하여 붙인 것이다. 160개의 삼국지 장면이 양 옆으로 기록되어진 것이 장관이다. 시간 할애를 많이 해서 봐야 할 듯하다. 양 벽을 두리번거리며 내려오니 붉은 칠을 한 화교중산학교 후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걷다보니 곳곳에 낯익은 골목길이 눈에 보인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목포다. 어릴 적 목포항 근처 일본인 거주지에 형성된 다다미식 주택을 보며 신기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 일본식 주택과 더불어 우리들이 사는 동네의 집들은 깔끄막의 좁은 계단 따라 유달산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는 계단위의 집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시절이 생각나 계단 골목으로 뛰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두려움이 생겼다. 눈으로만 이리 저리 뒤집고 있는 나는 이제 이방인이다.
제 1 패루에서 우측 길따라 약 100m 내려가면 한중문화관이란 5층 규모의 중국풍 건축물이 당당히 서 있다.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의 활성화를 위해 기획전시실, 우회도시 홍보관, 공연장, 체험장 등을 마련하여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제 2 패루와 함께 차이나타운의 심벌의 기능을 하고 있다. 청국조계지의 마지막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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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의 광장 너머로 인천항의 선박들이 거대한 자태로 오고가고 있다.
계단을 조금 내려오니 제물포구락부
단말기 안내가 없으니 지도 보며 계속 뱅글뱅글 돈다. (구) 일본영사관을 찾느라 계속 헤매며 돌아다니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르신들에게 여쭈었더니 다 모른다 하니 이를 어찌하나. 일본영사관이라 하면 다 알 텐데 참 이상하다. 우연히 오토바이 신문배달원에게 물었더니 직접 오토바이로 이리저리 다니며 알아 오셨다. 현재의 인천 중구청 건물이 일제 강점기의 일본영사관이라 한다. 현재의 서울시청처럼 말이다. 뒤늦게야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중구청 건물은 그냥 보면 근대 건축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고 주민이 모를 정도로 증축과 신축이 이루어졌나보다. 강점기엔 이곳에서 재판소와 경찰서, 소방서도 같이 있었다 한다. 조선인들이 지나가고 싶지 않았을 거리이다.
일본 영사관 바로 앞 블록에 일본 은행들이 즐비하다. 한줄로 일본 제1은행, 일본18은행, 일본58은행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일본의 은행엔 이런 숫자가 들어가는 이유는 국립은행으로 허가받기 위한 허가번호가 주어지게 되었고 이 이름을 계속 승계해서 쓰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국립이지만 나라가 운영하는 것이 아닌 민간이 운영하는 은행들이다. 건물 구조나 양식은 각각 다르고 은행의 색깔도 약간씩은 다른 역할을 했다.
(구) 일본 58 은행 인천지점은 오사카에서 창설되어 우리 조선정부의 화폐제도 개혁을 위한 화폐교환 업무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 가 보았다. 여직원 한명이 앉아 있길래 이것저것 질문했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여기는 사무실이에요" 나 같은 방문객을 수차례 겪었던지 지겨워하는 눈치이다.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프랑스풍 벽돌조 2층 건물이라 적혀 있다. 이 일대의 일본은행 건물은 벽돌위에 돌을 붙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각국조계와 일본조계의 경계선이 되는 홍예문이다. 원래는 이곳에 거대한 암석이 산처럼 가로 막혀있었고 이 홍예문 너머가 조선인 거주지였다. 하지만 일본인구의 증가로 조계지 앞의 해안을 매립하여 사용하여도 땅이 부족하게 되고 또 현재의 동인천역을 가기 위해서는 길을 우회하는 것이 불편하게 되자 이곳의 암석을 뚫어서 홍예문을 만든 것이다. 위험한 공사였기에 많은 중국인과 조선인 인부들이 대형사고로 매몰되기도 했던 아픔의 길이다.
각국조계지에 형성된 근대 건축물은 늦은 시간 때문에 다음 기회로 밀어야 했다.
작은 어촌에서 일기 시작한 근대의 물결을 가장 먼저 경험했던 제물포. 지리적인 요인으로 과거의 개항장의 역할을 너무나도 쓰라리게 부여안고 살아야 했던 이곳이 21세기에는 하늘로, 바다로, 육지를 통한 세계의 관문 역할을 할 미래의 도시로 성장 준비 중이다. 과거 이곳의 기억이 추억으로써가 아닌 한민족 역사의 단절이었음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의 탐방을 마친다.
첫댓글 정리를 정말 잘 하셨군요. 전 올해초 아는사람이 인천해설사로 계셔서 그곳을 처음 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접하게 되니 정리가 되면서 그날 답사가 생생합니다. 감사해요.^^
참 잘하셨네요. 발품 팔아서 나온 글이 훌륭해요.
딸이 인천에 살며 손주가 중산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꼭 인천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이렇게 정리 해주시니 고맙습니다.그 외에도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 월남 이상재가 근무했던 우체국 가천 기념관 월미도 이야기 시립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