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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6월 14일 일반법회
<우리의 세가지 병점>
◆ 김호명 교도님의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에 대한 보산 김제원 교무님의 강평
반갑습니다.
호명님 강연 잘 들으셨지요?
호명님 강연이 투박하면서도 정감있고 진실한 강연이었습니다. 질문이 아주 많이 나오네요.
호명님 강연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 드셨어요?
(시원시원했습니다. )
호명님 강연 들어보니 세속적인 것들은 다 하셨네요. 산전수전 다 겪었지요. 어릴적에 학교도 잘 못가고 열등감 수치심도 많이 느끼셨고요. 담배는 증학교 때부터 했고 술은 고등학교부터 하고 당구도 300을 치시네요.
알콜 중독까지, 카드는 카드대로 돈 다 날리시고 중국으로 가서 장사를 하는데 잘 안되고 학교에 들어가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학교에 안다니고.... .
제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우리 호명님 부모님들께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라면 몇 번 쥐어 박았을 텐데 ...(한번도 안맞았습니다. )
그렇습니까 ? 저라면 몇 번 때려주었을 듯 합니다.
공부를 안해두고 연구가 안되니까 이것저것 하는 것 마다 일이 꼬이고, 일이 꼬이다 보면 속이 뒤집어지니까 화병이 나서 병원에 가게 되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가만히 보니 우리 호명씨가 복이 있습니다. 인물도 잘 생기고 어머니 아버지도 끝까지 호명교도님을 믿어주셨습니다. 지금 하시는 가게도 어머니 아버지께서 도와주셔서 하고 계십니다. 또 인연복이 있어서 김광호씨를 만나서 이렇게 원불교에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 분께 항상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관세법을 잘 몰라서 1억원이 넘게 추징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세금이나 추징자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현재를 보면 호명님은 우리 안암 교당의 활력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교당 여러분들 모두 열심히 하십니다. 하는 듯 안하는 듯 정성심을 놓지 않고 공부하시는 분들이 사실 정말 큰 도인입니다. 그런데 초입자나 중간에 과정속에서 환기심이 나서 열심히 하시는 교도들의 모습도 중요합니다.
언제 한번 뜨거워 본적도 없는 교도님들도 많습니다. 어떤 시인이 연탄제를 두고 시를 썼지요.
(연탄제를 발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저 연탄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본 적이 있느냐 )
한번도 뜨거워 본 적이 없이 일생을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리저리 번잡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 호명님이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당에 부산에서 삼성전기에 다니는 교도 한 명이 있습니다. 박원허교도입니다. 카이스트 대학원 다니면서 박사과정에 있는 중에 교당에 오게 되었던 교도입니다.
가만히 제가 보니까 박원허 교도는 청년법회때 질문을 잘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좀 거북한 마음이 들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 장황합니다. 나중에는 질문을 하려고 하면 제가 (짧게 해) 라고 호되게 이야기 하는데도 맘 상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질문하기를 좋아합니다.
점차 질문하는 것이 요령이 있게 되면서 질문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서서히 진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허를 데리고 온 다른 박사과정 한명은 박사과정의 지도교수를 못참고 나와서 중소기업 다니고 있고 원허교도는 참고 학위를 마쳐서 대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교수들 중에서는 학위를 빨리 주는 분도 있고 대학원생이 잘 못하니까 늦게 주는 분도 있고 성격적으로 늦게 주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것들을 잘 참아내어야 합니다.
원허교도는 얼마전에 결혼도 해서 열심히 생활합니다. 바자회때도 자기가 뭘 사서 내기도 하고 합니다.
원허교도가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항상 묻고 배우고자 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명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법회가 끝나면 호명님은 대각전 문 근처 저기 서 계시면서 뭘 적어서 저에게 묻곤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제 방까지 따라오십니다. 그렇게 까지 하면서 여러모로 묻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묻고 싶어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교무님이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하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못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 호명님께서는 아무 상관없이 묻습니다. 어떨때는 질문이 좋기도 하지만 정말 이것도 모르나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묻고 공부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그 마음이 부처입니다. 부처님들은 호학자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자의 특징중에 하나가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이 어렵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그 사람은 계속 발전하게 되있습니다.
권동화 선진님의 예를 들겠습니다. 권동화 선진님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글을 떼고 한문도 떼셨습니다. 강연도 잘하셨습니다. 자녀들도 다 잘되어 대학학장, 검사, 서울대 영문학과 나와서 출가해서 원광대 부총장 까지 한 딸도 있습니다.
아타원님의 어머님께서 바로 권동화 선진님이십니다.
제가 전농에 있을 때 교도 한분이 한글을 모르셨습니다. 그분이 한글을 모른다는 것은 가족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한글을 떼셨는지 아십니까?
독경을 자세히 듣고 독경에 맞추어 한글을 떼셨습니다. 지금은 열반하신 분입니다.
운타원 이운숙 교무님께서 독경을 특이하게 하십니다. 발음을 정말 정확하게 하십니다. 운곡은 없지만 한글을 모르는 이 분에게는 오히려 그 독경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한글에 맞추어 독경을 들어서 한글을 떼어버리게 되셨지 않습니까.
초입 교도님들 중에는 한문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 소태산 대종사라고 하니 어디 소태산에 있는 대종사라는 절인줄 알았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삼학 이야기 하니까 목포 삼학 소주를 이야기하는 줄 알고 그게 뭐 어쨌다고 저러신다냐 하고 생각하셨다는 교도님도 계십니다. 그렇게 무식한 분들이 오셔서 이렇게 원불교 공부해서 달라지십니다.
우리 호명님도 저렇게 신이 딱 내려지고 지금부터는 감사생활을 하시면서 교법이 시키는 대로 하시면 아마 이 생에 큰 불보살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다가 경계가 오면 또 낙오가 될지 모르지만 잘 지키시면 정말 이생에 환골탈태 하실 겁니다. 굼뱅이가 나비가 되듯이 범부가 깨치면 성자가 되고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가 일체유심조를 알고 법률은을 알고 불생불멸을 알고 나면서 생활 자체가 폭음 집착을 놓고 관대함 긍정심을 키우고 한편 부모님과의 관계, 건강이 달라졌다고 하지요.
한 마음이 변하니까 몸도 달라지게 되고 주위 인연 관계도 달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바꾸어지면 이렇게 모두가 바뀝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려면 유무념을 통해서 몸의 기질이 더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까 호명님이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루하루를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이게 일상수행의 요법이고 상시 응용 주의사항입니다. 그것이 무시선이고 그것이 사사불공입니다. 이게 좌산님 법문에서 말하는 일과에 득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주의 진리가 충만하더라도 진리가 어디서 나타납니까? 일상속의 순간순간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경계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쓰며 어떻게 상을 내지 않고 살아가느냐 ? 이것이거든요. 이게 마음공부이거든요. 저도 오늘 호명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정말 행복했고 우리 교도님들께서 재밌게 들어주셔서 보기 좋았습니다.
이제 제가 호명님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1) 첫째는 부인한테 잘하십시오.
호명님께는 좋은 것이지만 부인에게는 화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불공이라는 것은 첫째가 역지사지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기 이지요. 그래야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잘해서 뭐하자는 겁니까? 내 마음을 밝혀서 내 중생심을 제거하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나는 대상에게 은혜가 되고 덕이 되자는 것이 마음공부하는 이유 아닙니까? 그러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제 생각에 마누님 입장에서는 우리 신랑이 원불교에 미친 것 아니냐, 벌어서 원불교에 다 갖다 주는거 아니냐. 이런 걱정 하실 듯 합니다. 부인의 걱정에 맞게 최대한 불공하는 것, 그것이 마음공부를 잘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마음공부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그런 분들 많습니다. 주변은 모두 화가나 죽겠는데 자기는 좋다고 합니다. 헛것입니다. 마음이란 국한이 없이 하나인데 왜 내 마음만 좋습니까? 상대 마음이 좋아야 내 마음까지 좋은 것이지 어떻게 내 마음만 좋을 수 있습니까? 미경님한테 어떻게 불공을 잘 할것인가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호명님 입장이 아니라 미경님 입장에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2)둘째는 두 아들에게 잘 하십시오.
아들 선영이와 선제가 있는데 불공을 잘 하셔야 합니다. 우리 교법에 맞게 아이들에게 불공해서 신앙길에 일찍 들어서 호명님이 겪은 수많은 경계들을 겪지 않고 바로 옳은 길로 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언제 한번 예로 든 적이 있습니다.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내가 성질이 날 때마다 나무에다가 못을 하나씩 박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미안한 마음에 참회를 하여 못을 뽑았습니다. 그러면 박은 못 뽑았으니 본전이지요? 그런데 본전 아닙니다. 상처가 남았죠.
우리가 짧은 한 생을 살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의 못자국을 줄이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잘못하다 보면 인생이 못 빼다가 시간이 가고 못자국 상처 메꾸다가 모든 시간 다 보내고 관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범부들의 삶은 탐진치로 여기 저기에 계속 못을 박고 나중에는 그 못을 빼면 단줄 알지만 못자국이라는 빚을 갚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이 정법회상을 만나서 언제 보은할 것이며, 내생을 위해 언제 복을 축적할 겁니까..
여러 핑계를 대기도 하지요, 집안, 아들, 환경탓 기타등등이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언제 사리연구 작업취사 하여 복덕을 쌓을 것입니까? 염라대왕한테 나중에 <한번만 봐주세요> 할겁니까? 해보았자 필요 없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인과는 호리도 틀림이 없습니다.
(3) 젊을 때부터 재색명리에 걸리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범부들은 99%가 거의 재색명리에 걸립니다. 설사 걸렸더라도 참회를 통해서 대 진급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그냥 또 적당히 얼버무립니다.
여러분이 자녀가 뭘 잘못하여 혼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이가 뚱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떤 기분이십니까? 자녀가 잘못했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바램이 있으십니까? 아이가 반성을 하고 다시 잘하기를 바라시는거 아닌지요? 우리가 한 생을 탐진치로 또는 재색명리로 업을 지었으면 그것을 참회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해야지요.
우리 혜관님께서 늦게 원불교에 들어오셔서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늦게 만났으니 더 해야죠. 원진교무님께서 출가를 늦게 하셨지요? 전성욱교무가 먼저 출가하고 박원진 교무가 그 다음에 출가하고 윤효근 교무가 출가를 합니다. 나이는 전성욱 교무가 어린데 출가를 먼저 해서 교무 생활을 먼저 했지요. 교무 생활을 하다보면 나이와 교무의 서열이 뒤집어져서 가끔 불편하기도 하고 그렇게 때문에 늦게 출가한 사람들은 좀 더 일찍 출가할 걸 하고 후회도 되고 합니다.
제가 원진교무가 억울해 할 때 이렇게 말해주곤 합니다.
<너는 옆에다 여자 태우고 차타고 놀러다닐 때 성욱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좌선하고 그랬어. 성질 내지마 . 너 여자태우고 돌아다녔잖아. 너 놀고 즐길 때 성욱 교무는 오는 잠 참고 좌선했다 > 라고요.
늦게 만난 분들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호명님 열심히 하시겠지요? 박수 한번 크게 해 주십시오.
◆ 대산1집 수신강요 102 우리의 세가지 병(病)점
오늘 제가 이걸 소개하고 하고자 합니다.
다 같이 회보 1면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세 가지 병점(병이되는 문제점 )
1. 겸양할 줄 모르는 것
상등인일수록 몸을 낮추고 사양할 줄 알아야 한다.
겸양은 평화의 근본이 되고 교만은 난리의 시작이 된다.
2. 예절을 모르는 것
상등인일수록 예절을 잘 지킬줄 알아야 한다.
스승, 제자, 남자, 여자, 어른, 젊은이 사이에 반드시 예절이 있어야 사람된 고귀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3. 부드럽지 못한 것
상등인일수록 다숩고 부드러워야 한다.
저 물같이 부드러워서 만물을 다 활용해주고 ,
저 허공같이 부드러워서 만물의 주재자가 되고,
저 성현들의 마음같이 다숩고 부드러워야 일체 생령의 귀의처가 된다.
이 세가지 병만 고치고 보면 새 세상 창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1. 겸양할 줄 모르는 것
상등인일수록 몸을 낮추고 사양할 줄 알아야 한다.
겸양은 평화의 근본이 되고 교만은 난리의 시작이 된다.
겸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만심을 내지 말라는 계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품은 크게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성품이지만 세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대’ 크다, 하나다 , 부분의 조합이다.
성품의 대자리는 전부가 다 하나가 된 자리입니다. 남녀노소 구분이 있지만 구분이 없고 선악이 있지만 선악이 없고 귀천상하도 없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성품의 대자리입니다. 우리가 왜 솔성을 잘해야 하냐면요, 성품의 원리를 모르면 겸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원래 하나다 라는 것을 알면 무상이 됩니다. 하나 그 자리는 위아래가 없어서 겸양이 절로 되고 따로 상이 없습니다.
둘째는 ‘소’자리입니다.
소자리에서는 철저하게 이것들이 구별이 되고 차별이 됩니다. 성품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입니다. 대포무외이고 세입무내 인 것이 마음입니다. 소자라는 철저하게 구분해 주어야 합니다. 소자리에서 예법이 나오게 됩니다.
셋째는 ‘유무’자리입니다.
있어졌다 없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생로병사이고 우주의 성주괴공, 일의 흥망성쇠 등을 말합니다. 온갖 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항상하지 않고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겸양할줄 모른다 하고 했습니다. 상등인일수록 몸을 낮추고 사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양은 평화의 근본이고 교만은 싸움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크게 놓고 보면 누구나 다 소중하지만 소자리로 보면 철저하게 강약,지우,위아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심신작용에 따라 바뀌고 변화가 됩니다. 이 변화가 무상의 이치이고 음양상승의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겸과 양은 안과 밖입니다. 내겸외양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겸은 내 안에서 스스로 엄청 조심하는 마음이고 이 마음은 철저하게 소자리입니다. 챙겨야 합니다. 방심하면 안됩니다. 밖으로는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겸외양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주도 음양상승하면서 바뀝니다. 날씨도 음양상승의 이치로 바뀝니다. 초복이 지나면 양기가 올라오고 말복이 되면 음이 시생하여 올라옵니다. 더운 와중에 음기가 딱 생깁니다. 이것이 말복입니다. 변화를 하지요. 양지가 음지가 되고 범부가 중생이 되고 말단이 사장도 되고 사장이 평범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이것이 변화의 이치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 써먹는다고 하지요. 권력을 너무 부리면 나중에 외로워지고 비참해 집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내용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산이 있고 물이 있고 그 아래 강이 흐릅니다. 흘러서 나중에 바다가 됩니다. 강이 왜 크고 넓지요? 낮기 때문입니다. 바다나 강은 낮은 곳입니다. 사실은 낮고 낮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강과 바다가 된 것입니다. 겸손하기만 하는 것은 안됩니다. 치심의 겸손이 있습니다. 용기가 없는 겸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 팔산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종사님보다 12살이 많습니다. 훈장이시고 잘 사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시자 사제의 의를 맺으시고 예를 철저히 지키시고 언어동작이 매우 겸손하고 마치 아버지 대하듯이 대종사님을 대하시고 아무리 일이 바빠도 대종사님이 일이 있어서 부르시면 그 일 먼저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대종사님의 수용품 마저도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정산 종사님께서도 더 잘하셨습니다.
얼른 볼때는 팔산님이 지혜가 부족하고 못나서 그런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은 강자가 할 수 있습니다.
약자의 겸손은 아첨하기 쉽고 비굴해 지기 쉽습니다. 나를 대자리로 비워버리고 소자리로 그 사람이 부처임을 인정을 할 때 비로소 고개가 숙여집니다. 보통 사람은 대자리를 몰라 상이 나옵니다. 아랫사람을 무조건 무시하고 여자라고 무시하고 못났다고 무시하고 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회사나 종교 다 마찬가지인데요, 일을 진행을 하다 보면 형제나 친척을 일터에서 고용을 해야 하는 경우가 옵니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왕이면 내 친척이나 내 형제를 고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여 고용을 해야 할 때가 오긴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도 내가 나 아는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 것이 이치입니다. 사실은 내 동생이 뛰어나도 천거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언뜻 생각하시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해를 받거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하려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자님이나 노자님은 법문을 하실 때에 노자님은 공자님보다 법이 더 높아서 자신의 존재는 숨기면서 법문을 설파하는 이치로 하시는데 공자님은 <노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시면서 노자를 드러냅니다.
원불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공부도 교당에서 배우고 대종사님 덕으로 배우는 것이지 자기가 공부가 뛰어나 배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한거라 생각하면 그건 무지입니다.
2. 예절을 모르는 것
상등인일수록 예절을 잘 지킬줄 알아야 한다.
스승, 제자, 남자, 여자, 어른, 젊은이 사이에 반드시 예절이 있어야 사람된 고귀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자리에는 철저하게 사제가 있고 남녀가 있고 노소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인사 소개 등등 인간사의 모든 면에 예절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에 바탕해서 예절이 있어야 합니다. 예절이 빠지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겸양하여도 인간관계에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예절은 소자리에 대한 공경이 없으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소는 대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대상도 무시할 대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공경의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예절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시절의 습관은 한번 굳어지면 어른이 되어서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예절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염치를 아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고 염치가 있어야 예절이 지켜집니다.
평범한 관계속의 예절을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신앙의 대상으로 알고 지켜야 합니다.
수덕회를 조직하라 하시면서 정산종사님께서 대의에는 물같이 합 해주어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절은 구슬같이 투명하고 분명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간 군신간 노소간 친구간 부부간...이런 관계는 크게는 하나입니다. 제일 편한 대상이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 결국은 은혜로운 관계가 됩니다. 형식적인 예절이 아니라 대에 합일하는 예절이야 말로 진정한 예절입니다.
제가 처음에 서울에 와서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쁘고 늘씬한 아가씨가 웃으면서 <어서오세요> 하는데 마음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웃기는 웃는데 그게 진정으로 웃는 것이 아닌 웃음이지요.
어색하고 형식적이고 이기적인 예절이지요? 교육받은 예절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예절은 그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부처님이라는 것에 바탕한 형식을 넘어선 예절입니다.
3. 부드럽지 못한 것
상등인일수록 다숩고 부드러워야 한다.
저 물같이 부드러워서 만물을 다 활용해주고 ,
저 허공같이 부드러워서 만물의 주재자가 되고,
저 성현들의 마음같이 다숩고 부드러워야 일체 생령의 귀의처가 된다.
이 세가지 병만 고치고 보면 새 세상 창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부드럽고 다스워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온유입니다. 다습고 부드럽다. 부드러운 것을 세 가지로 예를 들으셨습니다. 물같이 부드럽다. 부드럽기만 합니까? 물같이 부드럽기 때문에 강하기도 합니다. 물이 부드러운 그 물이 바위도 뚫고 산도 뚫습니다. 허공같이 부드럽다. 허공은 부드럽다 않다 할 것도 없지만 만물이 다 자라고 만물이 다 화육하게 만드는 것이 허공입니다. 최고로 부드러운 것은 성자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생령의 귀의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산종사님에게 어떤 시자가 묻습니다. 공자님도 노나라의 관직에 있을 때 소정묘라는 사람을 사형이 처한 적이 있습니다. 시자가 정산종사님께 공자의 이 과보에 대해서 묻자,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현은 과보를 받더라고 대의를 위해서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움이 원근친소에 끌리거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발현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경영자에게 이러한 면이 꼭 필요합니다. 관리자는 부드럽지만 냉정하고 칼같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드러움입니다. 이해를 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산종사님도 성품이 부드러운 듯 하지만 화가 나시면 호랑이처럼 눈썹이 올라가셨습니다. 제자가 잘못하면 정산종사님도 호랑이처럼 혼내셨습니다.
부드러우면 다른 사람이 자칫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부드러움은 도에 맞는 부드러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 하나 들고 마칩니다. 초한지를 보면 한고조가 나라를 세웁니다. 이 사람이 나라를 세울 때 아주 뛰어난 장양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고 한나라가 세워집니다.
원래 통일을 할 때에는 군사들에게 (논공행상 이라고 하지요) 통일의 공에 비추어 공에 해당하는 땅이나 논을 나누어 주고 그것을 관리하라 나누어 줍니다. 한고조가 장양한테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다른 사람들은 다 좋은 땅을 원하는데 장양은 제일 이름없고 가난하고 토질없는 박토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장양의 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장양은 아들에게 박토를 취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 합니다. 아들이 (가난을 취하는 것이 무슨 복이냐)고 물으니 (너의 생명을 가져가려 하는 이가 없을 테니 그것이 복이다. ) 라고 합니다.
예를 지키고 부드럽게 하심하면 그것이 정말 강하고 복 있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을 위하는 큰 일을 하는 부처입니다. 오는 복, 오는 지위 다 받으면 그것은 큰 도인 아닙니다. 오직 옳은 일만 하면 그런 복은 알아서 옵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그냥 잘난체 하고 오는 복 다 쓰고 그런 복 쫒아 다니기만 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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