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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영자 시인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 다산 초당은 조선시대 말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도어 18년간 귀향생활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완성한 곳이다. 그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세 권의 책이 유명하며 다산의 애국애민사상이 스며있는 책이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조촐한 초가삼간이었다. 얼마 전 발견된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는 초당과 동암이 모두 초가로 그려져 있는데 세월에 흐르고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와 같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와가팔작 단층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 승려인 혜장(1772∼1811)과 만나게 되고 이 유교와 불교의 학문적 만남은 후에 다산이 『大芚寺誌(대둔사지)』·『萬德寺詩(만덕사시)』등 불교관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06년(순조 6) 가을 다시 그의 제자인 강진읍 牧里(목리)의 李鶴來(이학래)집으로 옮겨 거처하였다가 1808년 (순조 8) 봄에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茶山草堂(다산초당)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茶山(다산)이 이 草堂(초당)에서 유배가 풀릴 때까지 머무는 동안 (1808∼1817) 弟子(제자) 講論(강론) 및 본격적인 학문탐구와 저술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實學(실학)을 集大成(집대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강진은 다산이 지닌 사상체계의 구상과 완성에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다산이 자주 들렀다는 백련사로 가는 길엔 넓은 들과 바다가 펼쳐지고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형 약전과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던 천일각이 나온다. 며칠 여행길에 나선 나로서도 가족들이 궁금해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어야 안심이 되건만 초당은 혼자 외로이 서서 멀리 있는 남해를 바라보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졌다.
◈ 정다산 유적지에는 「茶山四景(다산사경)」이 있다.
* 丁石(정석)」 초당의 서쪽 언덕 岩石(암석)에 「丁石(정석)」이라고 다산이 친히 刻(각)한 글이 있다. 해비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정석바위는 고고한 선비의 절개와 외로움을 담은 채 남아 있다. 정석 (丁石)
죽각(竹閣)서편 바위가 병풍같으니
부용성 꽃주인은 벌써 정씨(丁氏)에게 돌아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속에 뚜렷하다.
미로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을 천시한 증겨요
도잠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과 우혈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을 새기리오
**「靑石(청석)」
초당 바로 앞에는 솔방울을 지펴 차를 다렸다는 다조에「靑石(청석)」이란 넓적한 돌이 있다. 다산초당의 이웃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교유하면서 차생활을 시작한 다산을 국산차 예찬자로서 동다기(東茶記)를 썼다고 한다. 차를 구걸하는 유명한 걸명소(乞茗疎)도 이때 나왔다. 다신계(多信契)와 다신계 절목을 만들어 독창적인 차문화를 펼쳐나가기도 했다
靑石(청석)」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 앞에 있구나
반쯤 다문 고기목 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드러가고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길고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앞으로는 단로(丹爐)를 만들어 신선되는 길 배워야겠네
***「藥泉(약천)」
초당 뒷편으로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 「藥泉(약천)」이라고 부르는 조그만한 샘 이 있다. 다산은 이 샘물로 차를 끊여 마셨다고 한다. 약천 (藥泉)
옥정이 흐레는 없고 모래만 깔렸으니
한바가지 떠마시면 찬하보다 상쾌하다오
처음에 돌틈의 승장혈을 찾았는데
도리어 산중에서 약닳이는 사라밍 되었네
길을 덮은 연한 버들 비스듬히 물에 떠있고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곷을 달고 있네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고
나머지 또 길어다가 벽간다 끓이기에 좋다오
**** 연지석가산
초당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다산선생님께서 바닷가의 돌을 줍고 연못을 파서 연과 잉어를 키우고, 물 가운데는 석가형사으이 돌을 놓아 연지석가산이라 이름하였다.
연지석가산
갯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지구나.
가파르고 묘하게 앉힌 삼층탑 산
오목한 곳 모양 따라 한가지 소나무를 심었네
서리고 휘감긴 묘한 모습 지붕석을 쭈그리고앉힌 듯
뾰족한 곳 얼룩 무늬 죽순이 치솟은 듯
그 위에 산 샘물을 끌어다 빙둘러 만든 연못
물밑 고요히 바라보니 푸른 산빛이 어렸구나
◈ 그 외의 절경 ◈
1) 동암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마자 처음 만나는 집은 `차성각`이란 현판이 걸린 서암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집으로 동암과 함께 1974년에 중건되었다.
서암은 주로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거처와 교실로 사용했다. 초당의 연지못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동암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역시 1974년 다사유적복원위원회가 중건하였다. 다산 선생님의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다산선생님의 집자 `다산동암`과 추사 김정희의 서체 `보정산방`이 걸려있다.
2) 천일각
동암에서 언덕을 오르면 한눈에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천일각이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애닮음, 그리고 바다 건너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 형님 약전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홀로 달래던 곳이다. 후에 다산유적 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천일각을 세운 것이다.
3)초의삼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명필다운 경지를 보여준다. 다산선생의 24년 연하인 추사 김정희는 동배 친구 초의선사와 더불어 정약용을 따르며 몹시 존경했다. 한편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있다.
◈ 다산의 생애
1762(영조 38)-1836(헌종2).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하도인, 철마산인, 다산,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3세 때 풍천홍씨를 취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 학유와 서랑 윤참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는 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는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육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육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는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9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치충, 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97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게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않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시절에 마과회통, 사기찬주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통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 이로서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공세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시절은 유배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 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 춘추(1812) 논어(1813), 맹자(1814), 대학(1814), 중용(1814), 악경(1816), 경세유표(1817), 목민심서(1818)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 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 외에시경강의보 3권이 있다. 시는 풍림이라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여,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에는 매씨상서평 9권 상서교훈 6권, 상서지원록 7권이 있다. 선기옥형은 상천의 의기가 아니요 홍범구주도 정전형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12권, 사례가식 9권이 있다. 관혼상제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전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 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 소로, 특생, 특돈의 예에서 그의 변도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 대부, 사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鄒衍, 呂不韋, 劉安등의 취률정성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 취처생자의 설이나 괘기월기, 정반변반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易에는 <주역사전>24권, <역학서언>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推移, 물상, 효변, 호체로서 십이벽쾌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 소과 두괘는 오세재윤를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12권이 있다. 좌씨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책서는 춘추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는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가 너무나도 많다. 총520여장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이라 하였다. 그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부목으로서 주자의 심덕, 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鷗)의 기호와 영지(靈知)의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유가의 천명지성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의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3권, <중용강의보>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 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험>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 제, 자 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善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 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경세유표>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 군현제도, 전제,부역, 공시, 창저(倉儲), 군제, 과제, 해세(海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 봉공, 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호, 예, 병, 형, 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로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서 6경 4서로써 수기하고 1표 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아방비억고>30권(미완성)이 있고<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參 考 文 獻》 | |
첫댓글 저두 저~기서 사진 찍은거 있는데..다산초당 올라가는 길이 정감있고 아주 좋았습니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좋구요.
안녕하세요~~~다해님 사진좀 올려주세요 좀 보게요^^ 예!!!
茶(차)山(산)이랍니다.
茶 (다)---茶(차) 그럼 차차 자로 사용합니까 단뫼님^^
뭔 이야그 하시는지요...ㅠㅠ
아참!!! 산야님 작년에 신혼여행 갔을때 찍었는데 아직 못찾았습니다. 정~보고잡다면 직접 맡기시던지요 ^^*
무지길어서 읽다가 지칠거 같아요 눈도 피곤하고 하여간 역사인물공부확실히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