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천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만덕산(767m)북쪽 사면의 절골과 호리목골에서 시작된 물이 미륵사 아래쪽에서 만나 곰티재 끝의 신촌교 그리고 삼중교와 삼중일교를 지나 화심 온천 조금 못 미쳐 신원교에서 새로난 소태정 길 보룡산 남쪽 용문사가 있는 장승백이골에서 흘러온 물과 합쳐져 물길을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른다. 또 소양면과 상관면 경계의 점치에서 흘러내린 물이 화심저수지를 거쳐 흘러내린 물이 유상리 치미골에서 흘러온 물과 유상교 바로 위에서 만나 흐르다가 화심교 위에서 원 물줄기와 만나서 흐르다 화심두부집 뒤에서 다시 대승리 뒤쪽 동상면으로 넘어가는 밤재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난다. 이물은 다시 주엽쟁이들을 거치고 해월교밑을 흘러 마수교에 이르러 오성리 오도재에서 시작된 물이 송광사 옆을 지나 흘러온 물이 다리목 골짜기에서 흘러 나온 물과 만나서 용연리를 지나 소양초등학교앞 망표교, 황운교, 명덕교를 지나 소양면 마월리 은방수 저수지 앞에서 물길은 소양면을 경계를 떠난다.
소양면을 벗어난 물길은 전주시 구역에 진입하여 전주시와 완주군의 경계를 오가며 성보,용교보,상삼보, 대상삼보를 거쳐 상삼교 밑을 지나 물길을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만이보를 넘는다. 새만이보를 넘은 물길은 높이 3m의 ‘대학보’를 넘어 소양교 밑을 지나 농은보, 신길이보, 길보를 지나서 서방산(611.65km 지도에는 서대산으로 표기됨) 골짜기에서 흘러 나와 간중제에서 머물다가 상운교를 거쳐 흘러온 물을 끌어안고 호성동 한사월 마을 밑에서 신중보를넘는다.
다시 물은 이내 회천보를 넘어 서면서 물길을 서서히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회포대교를 지나자마자 고산천을 만나 고산천과 하나가 되어 소양천 이란 이름을 버린다. 그리고 신천보를 넘고 벌떡보를 넘어 하리교 밑을 지나 전미동 진기마을을 지나 삼례교 윗쪽 한내보 못 미쳐서 전주천의 줄기 가리내를 품에 끌어안고 일명 합수물이 되어 만경강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신한다.
<지행당-趾行堂>
-조선시대 사우- 지방기념물 제7호, 덕진구호성동 1가 481 한사월 마을
조선 영조 8년(1732)에 학덕이 높고 효행이 지극한 진주인 강서린(姜서麟)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영조가 ‘지행당’ 이라는 사액하고 관비로 건립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동쪽 한 칸은 3면이 터진 마루로 되어있고, 중앙 칸은 앞면에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한칸 반의 방을 두고 서쪽 칸은 두 칸 장방으로 앞면에 들창을 깔았다. 지행당이라는 지금의 현판 두개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숭정 기원후4무술년-현종4년 1838-에 공조판서와 홍문관 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익회가 쓴 현판이다.( 崇禎紀元後四戊戌 資憲大夫工曹判書 겸 知經筵春秋館事 弘文官提學 全城 後人 李翊會 謹書)
권삼득은 8대 명창(권삼득,송흥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김계철,신만염,주덕기)으로 안동권씨 양반 가문 권래언의 둘째 아들로 영조47년(1771) 태어났다. 본명은 정이라. 조선 창극사 에는 익산군 남산리로 되어있으나 그의 부친 권래언의 문집[어우당집]에는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출생으로 되어있다. 판소리 명창 하온담과 최선달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다.
▲ 권삼득묘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한 때라 노래를 부르고 광대가 된다는 것을 권씨 문중에서 수차 경고 했으나 계속하자 덕석말이를 당하고 족보에서 할명(割名)을 당하고 고향을 떠나 익산 삼기에서 거처를 정하고 방랑생활을 하면서 피나는 노력 끝에 삼득(三得) -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 -했다하여 스스로 삼득 임을 자청 하였다. 그의 가락은 동편제에 가까운 중고제로서 특히 소리의 위 아래가 분명했다. 그가 위봉폭포에서 소리를 하면 삼례 벌판까지 들렸다는 전설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짐작된다. 판소리사에서 ‘권삼득 덜렁제‘를 개발하여 매우 씩씩한 느낌을 주는 남성적 창법을 도입하여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확대 하고 다양화 함으로서 판소리의 예술성을 심화 시키는데 기여했다.
노년에 고향에 돌아와 공은 헌종(1841)일흔 하나의 나이가 되던해 5월7일 소리를 놓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권삼득이 죽자 나라는 호조 참판의 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권삼득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아였다. 한조각의 묘비하나 없이 초라한 흙무더기와 소리구멍만 있다가 153년이 지나서 1994년에서야 후손들에 의하여 비석이 세워졌다,
그는 용진면 구억리 복호 마을 맞은편 배나무정에 묻혔는데 무덤 1m쯤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멍을 해마다 막아도 계속 뚫려 권삼득 살아생전에 못다한 소리를 이 구멍을 통하여 한다고 ‘소리구멍’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의 무덤 옆 소리구멍에서 득음하기 위해 후배명창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다하니 권삼득 신창은 죽어서 살아 돌아온 전주 대사습 놀이의 영원한 주인공이 되었다고 하겠다.
권삼득의 창과 관련하여 많은 얘기가 전해지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삼득과 창(唱)의 위력>
-(1) 모심는 농부 쉬게 하기-
권삼득이 진안을 다녀오는 길에 곰티재를 다 내려와서 골짜기 논을 보니 농부들이 모를 심고 있으니 문득 ‘농부가’가 생각나 “아나 농부야 말 들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구나~” 하고 한 곡조를 뽑는 디 이 소리를 들은 농부들 모심기를 그치고 소리를 들으러 권삼득에게 몰려와 한마디 더 부르고 가라고 붙잡으니 권삼득 왈 이 바쁜 철에 모는 안 심고 왔느냐며 꾸지람을 했으나 막 무가내로 조르자 한 곡조 더 들려주고 점심밥까지 얻어먹고 왔다한다.
-(2) 정부인 전주이씨와 베틀가-
권삼득이 창이나 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아 형편이 곤란하여 이씨 부인이 베를 짜고 있는데 남편은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하는 한량이 되어 노래나 부르고 다니니 얼마나 열불이 났겠는가. 속으로 ‘이놈의 영감 집에 오기만 하면 쥐어뜯어 버리든지 해야지 하고 맘먹고 있는데 이때 집에 들어온 권삼득이 척 허니 ’베틀가‘를 부르니 머리를 쥐어뜯어 버리겠다던 방금까지의 울화는 간 데가 없어지고 “과연 우리 낭군 이구나” 하고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 했으면 그렇게 감탄했을까?
-(3)황소 웃기기-
권삼득의 명성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니 임금님 (영조, 순조, 헌종)이 얼마나 소리를 잘하면 사람들, 새들, 짐승들도 홀딱 반할까. 아마도 속임수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권삼득을 어전에 불러다 놓고 황소와 암소 한 쌍을 내어놓고 “웃겨봐라, 만약 못 웃기면 백성들을 기만한 죄로 목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난감해진 권삼득은 생각 끝에 머리에 동여맸던 무명수건을 풀러서 창을 하면서 물에적셔 암소의 샅에 대고 살살 문지르니 기분좋은 암소가 웃을 수밖에 .......그런데 황소가 안 웃는 거야 그러자 암소 샅을 문지른 수건을 흔들며 황소 앞 에서 창을 하자 황소마저도 씩 하고 웃었고 그래서 죽음을 면한 권삼득은 소를 웃기는 명창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호암 석불(石佛)>-조선시대 불상- 덕진구 호성동 3가 호암마을
호암마을은 원래 완주군 초포면 봉암리였다가,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동남쪽을 향해 용진면을 바로보고 있는데, 이 마을 서쪽 입구가 야트막한 고개를 이루고 있는데 고개를 막 넘는 왼쪽 밭 너머에 동쪽을 향한 석불이 잡초에 묻혀 있다. 석불이 있는 골짜기를 과거에는 ‘부처동골’-佛立洞-이라고 불렀다. 부처는 화강암으로 된 자연석에 눈, 코, 입을 음각했으나 오랜 세월 탓으로 윤곽이 흐릿하다. 전체적으로 입불 형태이나 상체만 지상으로 드러나 있으며 높이 1.5m, 머리에서 목까지가 70㎝이다. 목은 부러져 시멘트로 붙여 좋은 흔적이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고, 또 ‘이 부처의 목이 부러지면 골짝 안에 사는 처녀들이 미치고 바람이 난다‘고 하여 지성으로 공을 들였다고 한다. 부러진 목도 용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요즈음도 개인적으로 또는 무당들이 소원, 발복을 위해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호성군(湖城君)과 호성동(湖城洞)> 호성군 이주(李柱)는 세조의 아들 소간공(昭簡公) 덕원군(德院君) 서(曙)를 증조로 할아버지는 청부군(靑鳧君) 번(藩이)요, 아버지는 임천군(臨川君), 광(鑛)으로 명종 17년(1562) 7월 17일 이남(二男 )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방언(邦彦)이요, 호(號)는 한촌(寒村)이라 한다.
호성감이란 왕족의 준례에 따라 선조 초년에 조정에서 내린 세습적 명예직으로서 더러는 호성령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주는 임금의 지친(至親)이라는 신분이어서 국법에 따라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이주가 31세 되던 임진년(1592) 4월 13일 왜적들이 대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를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자 이주는 토지와 모든 가산을 처분하여 군비와 군량을 마련하던 중, 혼란을 틈타 6월 진도에서 이충범과 서몽린이 근왕병을 방해하자 광주판관 이충노와 협의하여 이들을 체포 후 처형하여 외환에 앞서 내란을 진압하여 수훈을 세웠다. 그 후 종제인 흥원군 의(?)등과 의병을 모집, 해로로 북상 평양을 거쳐 선조를 알현하고, 호성 도정(湖城都正)에 올랐으며 의병장 칭호를 얻었으며 평양 전투에 참가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계사(1593) 10월 선조는 의주에서 환도의 길에 올랐다. 이주는 어가를 호종(扈從)하여 한양에 되돌아 왔다.
▲ 호성동 한사우러 마을에 위치한 지행당. 강서린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정지영 전문위원.
선조는 이주에게 정의대부의 직함과 호성군에 봉하고 땅을 하사하여 선무원종공신(宣撫願從功臣) 일등으로 녹훈하여 철권을 내리셨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전쟁의 여독으로 병을 얻어 갑오년 1594년 4월 12일 향년 33세로 생애를 마쳤다.
원래 호성감이라는 칭호는 한사월 마을의 주변의 지형이 도천봉 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을 소양천이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다. 소양천을 호수로 보고, 호수가 성벽처럼 둘러싸야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1957년 완주군 초포면 신성리, 봉암리, 송전리 지역이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앞서의 호성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호성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임란의 병장 호성군 이주 한촌선생 충현록 참조>
<송씨 효자 정려각-宋氏 孝子 旌閭閣> -조선시대 정려-덕진구 호성동 3가 신중마을
팔작지붕의 정려각에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송상부지려”와“효자 돈령부 도정 송득환 지려”라고 쓰여 있다. 송상부의 정려는 순조 27넌(1827)“송득환의 정려는 철종9년(1858)에 내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동산 지석묘(支石墓)와 공기돌>-청동기시대 지석묘-덕진구 호성동3가 신동산 마을
신동산 마을 서쪽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구릉 정상부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 무문토끼가 수습되었고 정상부 및 말단부에서 지석은 5기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진시황 시절 만리장성을 쌓는디 동원되어 장사들이 바위를 들고 가다가 대간해서(힘들어서) 쉬다가 심심하니까 바위를 가지고 공깃돌 놀이를 했어, 바위 다섯 개로 말이여, 근디 진시황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질로 일어서서 바위를 여다 놓고 가버렸어 그게 지금 남아 있는 돌이여” 참 허무맹랑한 얘기지만 어쩐지 조상들의 역사 인식의 한 단면을 보는 듯 씀쓰름 하기만 하다,
<전미동-全美洞>의 유래
전미동은 송천동에서 비행장을 빙돌아 하리교를 건너 삼례를 가는 옛길 양쪽에 있는 마을로 서쪽 가리내 쪽은 전미동2가, 동쪽은 전미동1가로 건지산과 천마산 사이에서 배려 온 대미봉에서 송천동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북쪽은 고산천와 소양천이 서쪽은 가르내가 둘러 싸고 있다.
전미동 사람들이 송산 또는 고살뫼(현 비행장자리)라 부르는 대미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송천동과 경계를 이룬다.
1957년 완주군 초포면(草浦面)의 전당리와 미산리가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전당과 미산의 이름을 한자씩 따라 전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당리 마을 숲> 조선시대 수림지-덕진구 전미동2가 전당 마을
전당 마을에는 북쪽 방향으로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원래 마을이 조리 형국이어서 마을을 기운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구막이 목적으로 조성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숲을 “숲거리”라 부른다. ‘뙤집 영감’이 풍수지리상 뒷 동산이 작아 마을이 조리터 형국이라 재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심었다 한다. 원래는 30여 그루가 숲 거리를 이루었으나 많이 고사하여 몇 그루 안 남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애향회를 조직하여 1994년에 도로를 따라 50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 한다.
<전당리 지석묘 A.B> - 청동기 지석묘-전미동 2가 전당마을 북편, 동남편
지석묘A는 봉동 3공단 방면 전당마을 동편 으로 약 300m 지점 'S-oil' 주유소 지나 동편으로 약 50m 떨어진 논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경리 정리시 하부 구조가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한쪽이 들떠 입석처럼 되어 있다.
지석묘B는 전당 마을 동편으로 난 큰 길 쪽으로 주유소가 있는 사거리 북 서편 구릉에 지석묘로 추정되어 석재1기가 공동묘지 사이에 있다. 많이 파괴되었으나 쐐기 자국으로 보이는 상당히 컷을 것으로 추측된다. 상석 서쪽 면에 성혈 2개가 육안으로 보인다.
<전당리 남근석-男根石> - 시대미상-기타유물 - 덕진구 전미동2가 전당마을
전당 마을 북쪽 논 가운데 높이 1.2m, 둘레 1.5.m 화강암 입석이 세워져 있다. 이 입석을 옛날에 전주에서 봉동 방면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당산제를 지낸 후에 금줄을 두르고 치성을 드리며, 입석이 넓어지면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엄중히 단독 했으며 혹 쓰러지면 동네 남정네들이 총동원되어 바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 아들을 낳고 싶으면 이 돌에 절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하는 말이 전해 오는 것으로 보아 남근석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