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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끼
정진명
1
“정 교두님, 도끼가 나타났어요.”
“도끼라니요?”
“왜, 그 도끼 있잖아요? 10년 전 정간 사건!”
“…….”
“동문회 이 회두가 직업이 건축 설계사잖아요? 직업상의 일로 공주에 갔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가 활을 쏜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 도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래요. 지금은 활을 안 쏘는데 정 교두님이 정간 찍을 때 그 현장에 있었나 봐요. 그게 뭘 기념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걸 갖고 있다는 거예요. 말만 잘 하면 가져올 수도 있다는데요.”
퇴근하고 어둑해진 방에서 혼자 하루를 돌이켜보는데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접힌 허리를 편 핸드폰에서 다급하게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온깍지활쏘기학교의 류근원 교두였다. 도끼라? 벌써 10년 전의 일인데, 그 도끼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비켜!”
사무실에서 나오던 이현자 여무사가 도끼를 들고 나타난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 여무사가 멈춘 그 자리가 하필 정간의 바로 아래였다. 살기등등한 내 말에 이 여무사는 옆으로 얼른 비켜섰다. 도끼를 치켜들었다. 출입구 위에 붙은 판자때기를 찍었다.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탓인지 ‘정간’은 허깨비처럼 쪼개지며 떨어졌다. 설자리에서 활을 내던 활량들과 과녁에 쏠렸던 그 주변의 사람들이 이 갑작스런 소동을 깨닫는 데는 불과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초가 내게는 한없이 늘어져 사람들은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두 조각으로 쪼개진 판자때기를 집어던졌다. 나뭇조각은 활량들이 선 사대 앞쪽의 안마당으로 날아가며 바닥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소리 쪽으로 쏠렸다. 내가 쫓아 나가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을 마당 밖으로 걷어차 낼 때, 장영학 사두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정 선생,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함은 잠시 뿐이었다. 사대 뒤에서 활량들을 구경하던 장 사두가 내게 다가오며 다시 한 번 나무라자, 비로소 전야의 무서운 정적을 깨는 폭풍처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어디서 남의 집 제사에 밤 놔라, 배 놔라야? 오기 싫으면 안 오면 그만이지, 남의 정에 뭘 달아 달라 말아 따지고 있어. 씨팔!”
날선 내 말이 유리파편처럼 흩어지자 비로소 사람들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장 사두가 마이크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소동이 일었습니다. 곧 정리를 할 테니까 동요하지 마시고 대회를 계속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대회는 계속되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장 사두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뭐라고 따졌고, 사람들은 그러는 그들을 바라보며 동향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자 김 사범이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정 선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집에 와서 정간 달아라 마라, 하는 건…….”
김 사범의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심판대의 마이크를 잡고 지지발언을 하려는 김 사범을 장 사두가 말렸고, 그 소동의 기미를 눈치 챈 누군가 마이크를 끈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웅성거렸다. 아침나절에 활터 사무실로 찾아와서 정간을 달아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다시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도끼로 ‘정간’을 찍은 나와, 그것을 방조한 사두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사무실 바깥의 사람들은 활터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렸다. 흥분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대회가 더 진행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하나둘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도끼로 찍은 여파인지 장 사두에게 따지면서도 감히 나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눈에 독기를 잔뜩 품고 어떤 놈이든 걸려들기만 해라는 식으로 비수를 벼리는 자에게 굳이 봉변 들겠다고 함부로 다가들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자리를 뜰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내 행동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30분이 채 안 되어 사람들은 활터를 거의 다 빠져나갔다. 본정 사원들이 부산히 돌아다니며 어수선한 활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나는 성토장으로 변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도끼에 찍히고 싶은 놈이 어떤 놈이냐고 한 마디 할 생각이었는데, 낌새를 챈 누군가 재빨리 나를 사무실 옆의 활방으로 이끌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자, 바로 옆의 사무실에서 중구난방 떠드는 이야기가 그대로 들려왔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오늘 사건은 저희도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약속드리겠습니다. 곧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중징계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반드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관해서는 저에게 일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장 사두의 애절한 부탁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떠드는 가운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감히 도끼로 정간을 깹니까? 그것도 대회장에서! 이런 자는 협회 차원의 징계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교사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경찰에 고소하고 교육청에도 알려서 교직에서도 몰아내야 합니다. 선생이 어딜! 공공시설 파괴 죄로 경찰에 고소해도 됩니다.”
단순히 화가 나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보다 한참 더 앞서나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 자였다. 그 자신이 교사 신분이니, 교사인 나의 약점을 더욱 잘 알아서 그곳에 비수를 들이대자고 꾀를 내는 중이었다.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는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나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장 사두는 다시 한 번 애절하게 사죄했다.
“오늘 깨진 ‘정간’은 활터 재산이 아닙니다. 대회용으로 제가 따로 만든 것이니 제 물건입니다. 그러니 공공시설물 파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보다도 사건을 원칙에 맞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그 일에 관해서는 저에게 일임해주시고 돌아가셔서 결과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꼭 통보해드리겠습니다. 물의를 빚어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나는 사물함으로 에워싸인 벽에 기대어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김수연 접장이 들어왔다. 곧장 내게로 다가오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주시죠!”
작고 차분했지만, 날이 선 목소리였다. 자리를 비켰다. 김 접장은 내가 기댔던 사물함을 열더니 활 가방이며 옷가지, 활과 관련된 소품들을 모두 꺼냈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내가 김 접장의 이름이 쓰인 사물함에 기대어 앉은 것이었고, 그는 나에게 하기 싫은 말을 건넨 것이었다.
“에이 씨,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도끼라니! 못 쏠 게 활이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 내가 있으니,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과 말은 활을 그만두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정간을 떼자는 나의 주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정작 정간을 떼려는 움직임이 일자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에게 붙어 활터 내부의 동향을 샅샅이 보고하고 또 지시를 받고 그대로 행동하던 사람이었다. ‘입에 담아선 안 될 그’ 자는 자기네 일도 아닌 남의 활터 일에 안테나를 뾰족하게 세우고 다른 활터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정간을 뗀 우리 활터를 공격하게 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김 접장은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정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정간을 떼려는 우리와 정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계로 나아갔다. 문제는 그가 정 안의 문제를 정 밖의 문제로 끌어내려는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의 불손한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잠간 만에 자신의 짐을 챙겨 활터를 ‘영원히’ 떠나는 김 접장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간’이라는 귀신에 씌어 또 한 사람이 활터를 등지는 셈이었다. 함부로 도끼를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무뢰배로 나를 낙인찍었겠지만, ‘정간’이 도끼에 찍히기까지 그들이 저지른 권모술수는 도끼로 찍은 행위 이상의 것임을, ‘정간’에 홀린 그들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부인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도끼로 ‘정간’을 찍었고 역사 앞에 당당하며, 그런 나를 상식의 잣대로 재어 ‘몰상식한 자’로 보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장 사두의 진정어린 간청에 1시간 가까이 핏대를 올리던 사람들은 결과 통보를 약속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2003년 형주시장기 도내 궁도대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활터 사람들은 대회 때문에 설치한 천막이며 집기들을 철수하는 중이었다. 활방에서 사무실로 나서자 장 사두가 나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 선생, 가서 소주나 한 잔 하자!”
장 사두는 나에게 그 말을 건네고 활터 건물 뒤로 돌아갔다. 거기엔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려고 준비한 육개장이 끓고 있었다. 장 사두의 뒤를 따라서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내 손을 꼭 잡았다. 뜻밖에도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였다. 그 절묘한 상황에서 그가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더욱 깜짝 놀란 것은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정 선생! 여기서 굽히지 말고, 신념대로 밀고 나가.”
이 말은 계속해서 지금처럼 대들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장 사두와 싸우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는 그의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개기름이 좌르르 흐르고 세월의 살이 얼굴 여기저기에 두툼한 골짜기를 만들어, 마음이 어떻게 추해야만 몸이 저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얼굴. 철면피라는 말이 어찌 이리 실감날 수 있는지, 말이 지닌 표현력이 새삼 놀라웠다.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고소하게 여길 자가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였다. 그런 자가 나를 격려하다니! 이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 각 정의 대표들이 활터로 몰려와서 정간을 달아달라고 생떼를 쓰도록 뒤에서 부추긴 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날더러 신념대로 밀고 나가라니! 자신이 발광하듯이 반대한 ‘정간 철폐’를 계속해서 주장하라는 얘기 아닌가? 정간 철폐를 밀어붙인 우리를 그토록 욕하면서, 정작 나한테는 정간 철폐를 굳게 밀고 가라니?
상황이 급박하게 돌변한 것은 불과 하루 전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도내의 모든 활터가 대회에 참석하겠다는 대답을 했고 그대로 준비했다. 그렇지만 2-3일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괴산과 충주의 활터에서 정간을 달지 않으면 대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통보가 왔고, 이틀 전에는 보은과 단양이 여기에 가세했다. 영동과 진천으로 전화를 해보니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었다. 영동에서는 다른 곳에서 형주 대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회유를 받았는데 그 동안의 도리 상 자신들은 참석하겠다는 것이었다. 몇 군데 전화를 해보았는데 상황은 비슷했다. 누군가 대회 보이콧을 획책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이 ‘입에 담아선 안 될 그’라는 건, 대회를 준비하는 관덕정 사원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관덕정에서 정간이 떨어져나가는 과정 내내 그가 그림자처럼 끼어든 것이고, 방금 전 활 가방을 싸가지고 떠난 김 접장이 충실한 허수아비 춤을 춘 것이었다.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전화로 오래도록 통화하는 그의 모습이 여러 차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런 상황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통화 대상은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였다.
‘입에 담아선 안 될 그’가 직접 나서지 못하고 그림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과 며칠 사이에 관덕정에서 도내의 유급 선수로 적을 옮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특별한 직업이 없는 자의 호구지책이었다. 적을 옮겼다는 것은 남의 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 마당에 이미 남의 활터가 된 곳에서 정간을 뗀다는 소문이 돌자 돌연 흥분하여 자신의 주변 사람들한테는 물론 인터넷에까지 관덕정을 공격하고 되도 않는 소문까지 덧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엄연히 남의 일이었다. 관덕정 사람들이 앞뒤 선후도 맞지 않는 궤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응대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남의 집 개가 짖는 소리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더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 개소리에 공명이 일어난 것이다. 매년 관덕정에서 주최하는 형주시장기 활쏘기 대회 때문이었다. 정간이 없는 관덕정에서 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정간 없이 대회를 하느냐, 아니면 정간을 달아달라고 하느냐 하는 묘한 문제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이것은 정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딸린 문제이다. 정간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정간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정간은 활터에 본래 없던 물건이다. 근래에 생긴 것을 옛날부터 있던 것이라고 우기며 정간을 달아야 한다는 정신 나간 인간들의 주장이 집단폭력의 형태로 현실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집단 광기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입에 담아선 안 될 그’ 자였다. 결론은, 일단 대회당일 아침 일찍 형주로 모이되 정간을 달아달라고 하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정간’은 내걸렸고, 내걸린 그 판자때기가 내가 휘두른 도끼에 찍혀나간 것이었다.
이런 그가 나를 지지한다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천지가 개벽해도 그럴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간책이 분명했다. 내 감정을 자극하여 싸움을 좀 더 극렬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이런 속 들여다보이는 이간책이 먹혀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게 와서 그런 말을 친한 척 건네는 그가 한심스러웠지만, 너무나 뻔뻔한 표정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 말이 빈 말이고 얼뜬 이간책이었음은 몇 년 후에 저절로 드러났다. 『충북국궁사』에서 ‘충북국궁지’로 개악된 책이 나왔는데, 관덕정의 역사를 기록하는 대회 일지에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그 날의 사건과 징계 항목이 적혔고, 그 책이 나올 때의 관덕정 편집자 이름이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였다.
철갑을 두른 듯 뻔뻔한 그의 낯짝을 뒤로 하고 활터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장 사두가 소주잔에 술을 가득 채워서 건넸다.
“자, 받아!”
하고는 자신도 쭉 들이켰다. 그렇지만 그가 술을 끊은 지 벌써 2년째였고, 오늘 그 동안 잘 지켜졌던 금기를 스스로 깬 것이었다. 얼마 전 간 경변 판정을 받은 장 사두에게 술은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술을 잘 못하는 나도 넘겨받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두님한테는, 죄송하네요!”
“이미 벌어진 일인 걸 뭐. 괜찮아. 그런데 지금은 정 선생이 약자야. 정 선생이 아무리 옳아도 저들이 경찰에 교육청에 물고 늘어지면 결국 피해는 정 선생한테 가. 이깟 활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면 안 되잖어? 그래서 내가 비굴하게 무릎 꿇은 거여. 술이나 한 잔 하고 풀자고.”
가슴 밑바닥에서 목구멍으로 무엇인가 울컥 하고 치밀었다. 그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술기운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날아든 돌에 TV 화면 가득 유리창이 깨진다. 잠시 후 돌을 던진 소년이 나타나고 인자한 어른이 소년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한 방향으로 서서 환히 웃는다. 그리곤 이어지는 선언. 우리는 유리창이 깨졌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창을 깬 사람을 살피겠다는, 한 신문의 TV 광고. 유일하게 그 신문에 다음날 도끼 사건이 2단 기사로 보도되었다. 언론의 조명을 받는 일이 좀처럼 없는 국궁 계에서는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자는 활터에 오지 않았다.
"정간이 뭐길래" 궁도협회 내분
충북 형주시궁도협회가 대회 기간 중 정간(正間: 활쏘기 전 목례를 하며 예를 갖추는 현판) 훼손 사건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형주시궁도협회는 지난 14일 형주 관덕정에서 제2회 형주시장기 차지 충북 지역 궁도대회를 열었으나 행사 도중 한 간부가 궁도장에 설치된 정간을 도끼로 부수자 대회가 중단됐다.
형주, 괴산 등 충북지역 곳곳에서 모인 130여명의 궁사와 관람객 등은 협회 등 대회 주최 측에 항의하다 자진 철수해 대회는 자연 무산됐다. 형주 관덕정 소속의 해당 간부는 관덕정 회의를 통해 제명됐지만 대회에 참석했던 다른 궁사 회원 등은 대한궁도협회 홈페이지 등에서 사이버 시위를 하는 등 협회 차원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영학 회장은 18일
"평소 활터에 정간을 다는 것을 반대해온 한 간부의 우발적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파장을 우려해 곧 상벌위원회를 열어 처벌 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2
정간(正間) [건축] 건물의 중앙에 있는 칸. 또는 그런 방. : 국어사전
3
-명종 18년 10월 23일(무진), 도감의 뜻은 명륜당의 정간에 관관(館官)도 앉을 수 있도록 허락한 일에 근거하여 회계한 것이니…….
-명종 18년 10월 24일(기사), 삼간병문의 정간도 역시 어로(御路)이고 좌우간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굴곡이 있어…….
-광해 10년 4월 24일(계축), 당실의 체제는…… 도리창방이 정간이 12척, 변간이 11척…….
-광해 13년 11월 8일(을사), 관리는 정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늘 돈화문의 정간에 이미 허위를 배설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정조 19년 4월 30일(경술), 왼쪽과 오른쪽 칸과 가운데 칸(정간)을 비교해보면 제도상으로 조금 협소할 뿐만 아니라……. 정간이 워낙 넓기 때문에 큰 상탁을 설치하고 제기를 많이 올려놓아도…….
-순조 2년 7월 22일(경인), 선조의 어진을…… 오랫동안 정간에 봉안하던 터에…… 제1실의 어진은 종전대로 정간에 그대로 봉안하고 선조의 어진은 서간에 봉안하여……. : 『조선왕조실록』에서.
4
정간에 대한 해의 및 정간 배례에 대한 기원은 확실치 않고 각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지만, 3가지 설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호남 지역에서 내려오는 설로서 정간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정(正)이라는 것은 활쏘는 사람이 진퇴주선할 때 안으로 뜻을 바로 잡고(內志定) 밖으로 몸을 바르게(外體直)한 뒤 궁시를 가지고 각자 마음을 풀어 놓으면 활을 잡고 쏠 때의 자세가 매우 심고(審固)한 즉 발사하는 자세를 완전하게 갖추는 것을 이름이로다. 간(間)이라는 것은 천지도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정지하는 순간(一動一靜之間)이 있고 우리 인간도 일동일정지간이 있으니 이것이 천인합치이다. 천지가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일동일정은 활을 쏘면 반드시 적중하는 그 순간이다. 이러한 이유로 활쏘는 사람이 정간아래에서 배례하는 의미는 발이필중의 기원함이로다.」
그러나 이 같은 정간 해의는 예기 사의 편과 악기 편에 언급된 사(射)와 악에 대한 의미를 정간에 맞추어 풀어놓은 것으로 정간 자체에 대한 의미로는 볼 수 없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영남 지역에서 전해오는 정간에 대한 해의로서 그 내용은 만물의 영장인 이간을 평간이라 하고 인간을 초월한 존재 즉 신을 정간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평간인 인간이 초월적 존재인 정간을 향하여 배례하는 것은 인간은 심약하고 부절제한 면이 있어 인간 이상의 큰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며 인간은 이를 통하여 자기 인격완성을 추구해 나간다고 한다. 두 번째 설 역시 정간 자체에 대한 해석이 불확실하고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서울지역에 전해오는 설로서 본래 정간은 정자 한 가운데 있는 간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무과를 치를 때 전관, 혹은 민간사정에서 사두가 앉는 자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간배례는 무과를 치르기 전이나 평소 사두 앞에서 활을 쏘기 전에 응시자 혹은 일반 사원들이 전관이나 사두에게 절하던 것이 오늘날과 같이 변천되었다는 것이다.
이상 3가지 정간 해의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마지막 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정간이 사정의 중앙에 있는 간을 지칭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과거에 무과를 치를 때 혹은 민간사정에서 과연 그러한 예식이 행해졌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정간배례라는 이름으로 현재와 같이 정간에 대하여 절을 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정간배례라는 말은 고제인 향사례 대사례 등의 의식을 기술한 중국의 예기 조선시대의 국조오례서례 등의 고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1920년대 당시 궁도의 전반적인 사항을 기술한 『조선의 궁술』에도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일반적으로 행해졌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정에 속하는 서울 황학정이나 전주 천양정 등에 정간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정에서 정간은 찾아볼 수 없고 황학정에서는 고종황제의 영정에, 천양정에서는 선생안이 모셔져있는 사정의 중앙을 향하여 절을 한다.(일설에는 전북 남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현재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고 함.) : 『한국의 궁도』, 대한궁도협회, 1986.
5
-성낙인(서울 황학정, 1927년생, 1941년 집궁, 1997.02.04.녹취) :
정, 뭐요? 정간이 뭐요? 그런 건 없어요.
-김현원(인천 무덕정, 1918년생, 1941년 집궁, 1997.07.18 녹취) :
정간? 그런 건 없었고. 활터에 처음 올라와서 인사하는 게 있었어요.
-안석흥(인천 연무정, 1918년생, 1940년 집궁, 1997.11.11.녹취) :
정간은 없었어요. 전주 가서 첨 봤어. 여긴 한참 뒤에 생겼지.
-김병세(수원 연무정, 1916년생, 1934년 집궁, 1997.11.18.녹취) :
정간? 없었어요. 해방 전에 장단에도 없었고, 여기 수원에도 없었어요. 해방 후에 봤어요.
-김봉학(고양 봉호정, 1918년생, 10대 집궁, 1997.07.09.녹취) :
정간? 그런 거 없었어요. 옛날에는 들판에서 쏘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이종수(고흥 문무정, 1918년생, 1938년 집궁. 2001.01.30.녹취) :
첫 번이 할 때는 정간이 없었어. 정간 생긴 지는 얼마 안 디.
-이정천(경기도 고양, 1922년생, 1943년 집궁, 2003.08.14. 녹취) :
정간....... 그거는 근래 일이예요. 얼마 안 됐어요.
-백남진(대전 대덕정, 1919년생, 1940년 집궁, 2003.08.07.녹취) :
정간은 없었어요. 이 근래 생긴 거예요.
-윤준혁(곡성 반구정, 1914년생, 1936년 집궁, 2000.08.07녹취) :
나가 봉덕정이서 총무를 혔어. 그때 정간이래는 글씨를 받어다가 나무에 파서, 서각 말여, 걸었어.
-김복만(울산 청학정, 1914년생, 1941년 집궁. 1998.04.15.녹취) :
정간은 있었지. 있었나? 없었나? 그게.......
-박경규(금산 흥관정, 1924년생, 1955년 집궁, 2001.07.01.녹취) :
정간이라구 지금처럼 저렇게 써 붙이고 그러진 안 했어요.
-이용달(평창 대관정, 1915년생, 1957년 집궁, 1998.04.05.녹취) :
정간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요 근래 일이래요.
-고익환(서울 석호정, 1921년생, 1956년 집궁, 1999.01.25.녹취) :
정간은, 활터가 여기로 올라와서 생겼어. 그 전 건물이 요 아래 있었는데, 그때는 없었지.
-김박영(부천 성무정, 1929년생, 부천궁장, 1998.04.18.녹취) :
정간은 옛날에 없었어요. 나중에 생긴 거지.
-권영구(경북 예천 궁장, 1940년생, 1998.06.19.녹취) :
정간? 그런 게 어딨니껴? 정간은 요 근래 생긴 기래요.
6
퇴근하고 돌아오니, 우편물이 나를 기다렸다. 발송지는 서울 황학정이었고, 뜯은 봉투에서 책이 나왔다. 『국궁교본』. 표지를 열자 속지에 붓펜으로 정성들여 쓴 글자가 나타났다.
‘정진명 혜존
황학정 사두 김시종’.
떨 듯 흔들린 획에서 그의 병이 깊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전화를 들었다. 몇 차례 신호음이 가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나타났다.
“정 접장님, 잘 지내셨어요?”
“예. 저는 잘 지냈는데, 사두님은 좀 어떠세요?”
이렇게 물은 것은 그의 근황이 아니라 병세였다. 그가 폐암 판정을 받은 것은 황학정의 내분이 거의 다 수습된 직후였다. 사소한 재정 문제에서 촉발된 불만이 점점 커져 사원들이 두 편으로 갈리자 이를 보다 못한 사람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렸고, 평소 군말 없이 조용히 활만 쏘고 내려가는 그에게 위원장 수락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온깍지궁사회 곡성 모임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그런 직책을 맡지 말라고 권했고, 그런 뒷수습은 어떻게 하든 욕을 먹기 마련이라고 토까지 달았다. 그렇지만 사람은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소속된 존재임을 그 후에 또 한 번 확인했다. 사양하면 사양할수록 황학정 사원들의 요구도 거세어져 결국은 그가 앞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약국을 운영하며 간신히 시간을 쪼개어 활터에 올라가는 처지였는데도 그가 팔을 걷고 나서자 불과 몇 달 만에 황학정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일을 잘 마무리한 사람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능력 때문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힘든 법임은 머지않아 쉽게 입증되었다. 황학정의 사두 직을 맡았다는 연락이 왔고, 우리는 그의 취임식에 온깍지궁사회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보냈다. 나는 줄기차게 ‘조용히 활만 내라’고 했지만, 건강이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 그를 황학정의 상황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물론 그가 황학정의 사두 직을 수락한 데는 꼭 그 ‘상황’만의 일이라고 보기는 힘든 면도 있다. 그 자신에게도 국궁 1번지라 불리는 황학정의 사두 직은 나름의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온깍지궁사회 모임에 그가 처음 왔을 때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천이 고향이라고 했고, 선친이 예천에서 활을 쏘았다고 했으니, 활쏘기는 아버지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숙제였던 것이다. 약국의 유리벽 속에 갇힌 서울 생활에서 그가 인생의 막바지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활이라고 생각했고, 그 꿈은 부부가 함께 황학정에 등정하는 것으로 마침내 완성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품었던 오랜 꿈이 인생의 막바지 하늘에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는 중이었다. 그에게 이 꿈은 단순히 시간이 나서 그 시간을 때우려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만큼 순수하고 열정에 불타올랐다. 그의 이 같은 수순함과 뜨거운 열정이 확인된 것은 곡성에서 열린 초대 사수 취임식 때였다.
전통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자는 뜻으로 출범한 온깍지궁사회는 대표가 없는 교장과 행수 체제로 운영되다가 2년만에 유당 윤준혁 고문을 사수로 모시고 그의 집궁처인 곡성 반구정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김시종 접장이 온깍지궁사회에 가입한 것은 그 직전이었다. 아버지가 활량이었지만 자신은 직장생활이며 자식 키우고 뒷바라지하는 일에 떠밀려 늦깎이로 집궁한 까닭에 활을 정말 진지하게 배운다는 각오로 전통 계승을 표방한 모임에 가입한 것이었다. 온깍지궁사회 초대사수 취임식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 전날 30년만의 폭설이 내린 것이다. 곡성으로 가는 길은 시베리아로 가는 길 같았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앞서간 차가 아니라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도랑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 폭설을 뚫고 곡성의 한 찜질방에는 30여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내일모레면 백수(白壽)라는 90이 되는 윤준혁 사수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 폭설을 뚫고 온 회원들의 열정에 크게 감동했다. 이런 감동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김시종 접장이었다.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접한 서울 황학정의 온깍지궁사회 회원 넷은 비행기로 광주 공항까지 와서 거기서 광주 한량들의 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기로 계획을 잡았다. 곡성의 찜질방에서 땀을 빼며 이제나 저제나 오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광주까지 온 비행기가 폭설로 공항에 착륙할 수 없어 서울로 회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막힌 소식에 우리는 처음엔 어이없어 하다가 나중엔 웃었다. 이 또한 나중에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잠시 후에 더 기가 막힌 소식이 핸드폰 속에서 흰 비둘기처럼 날아올랐다. 공항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넓은 찜질방 한 구석에서는 함성이 솟구쳤다. 폭설 소식으로 잠시 어수선해진 활쏘기 세미나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세미나가 거의 끝날 무렵에 목화송이처럼 떨어지는 눈발을 뚫고 네 명이 도착했다. 성순경, 김시종, 김진옥, 박현우. 찜질방의 시계바늘은 자정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비슷합니다. 이렇게 전화 주시고 고맙습니다. 얼마 전에 국궁교본을…….”
“아, 예!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지금 그 책을 받고서 생각나서 전화 드리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지금 막 펼쳐보고 가슴이 벅차서 전화 드리는 거예요. 사두님하고 말하다가 보니까 제가 옛 추억에 젖어서 잠깐……. 곡성 생각도 나고.”
곡성 얘기에 김 사두는 크게 웃었다. 그에게도 그 추억은 새삼스러운 모양이었다.
“책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김 고문님한테 듣기로는, 협회에서 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황학정에서 냈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아유, 정 접장님.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팠어요. 김집 고문님이 원래는 협회에서 내기로 하고 원고를 쓴 건데, 나온 원고를 검토해보더니 협회에서 못 내주겠다고 해서, 우리가 종로구청에 재정지원 요청을 해서 이번에 내게 된 거예요. 그 바람에 책이 좀 늦게 나왔어요. 능력도 없는 제가 그 일까지 떠맡아가지고.”
“아! 그래요?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일 하는 사람 따로 있다니까요. 하하하. 고생하셨네요. 그러고저러고 김 고문님은 지금 여전히 동해에 계신가요?”
“예. 낚시 하고 활 쏘고 하면서 즐겁게 지내시는 거 같아요. 삭회가 있거나 애경사가 있으면 제가 연락을 가끔 하는데, 서울에는 거의 발걸음을 안 하세요.”
“제가 한 번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네요.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책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그렇지만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몇 달 뒤, 그의 부인 김진옥 여무사로부터 부고가 날아들었다. 생의 마지막 불꽃이 황학정에서 뜨겁게 타올랐고, 그 뜨거움이 그의 서산에 장엄한 노을을 드리웠다.
7
『국궁교본』을 천천히 펼쳤다. 활쏘기 책의 완결판으로 만들려고 한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훌륭한 책이었다. 『황학정 100년사』를 읽을 때의 감동이 또 다시 살아났다. 지은이 김집. 『황학정 100년사』는, 기록을 하지 않아서 놓친 근대 국궁사의 첫 고리를,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와 사람들의 고증을 거쳐 간신히 열어놓은 역작 중의 역작이었고, 2001년에 완성된 그 작업의 물꼬를 튼 것은 1994년부터 시작된 연간지 『국궁1번지』였다.
처음 활을 배웠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도대체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흔한 교재도 없어서 활터마다 먼저 배운 사람이 다음 사람을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치는 상황이었다. 도 협회의 임원들도 모르고 활터 생활을 제법 오래한 사람들도 지닌 자료가 없었다. 이런저런 수소문 끝에 『조선의 궁술』이란 책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은 도서관에서 잠자는 중이어서 만나는 데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요약하여 현대어로 번역한 『한국의 궁도』란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서점이나 활터 사람이 아닌 운동 장비를 파는 장사꾼을 통해서 구해 읽었다.
이렇게 해서 활쏘기 전체의 얼개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후의 상황은 첩첩산중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면 근대 활쏘기의 산실은 서울 황학정인데, 궁금증은 거기서 벽에 부딪혔다. 협회의 간부들은 물론 황학정의 임원들조차도 활터의 초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1920년대에 『조선의 궁술』의 산파역을 한 성문영 사두가 황학정의 몇 대 사두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근대 활쏘기의 첫 번째 고리가 기록 부재와 후학들의 무관심으로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이런 황당한 처지에 처음 만난 책이 황학정에서 나온 『국궁1번지』라는 얄팍한 책이었다. 그 책은 김집 접장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고를 쓰고 그 원고들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안목이 있어야만 책은 이루어진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김 접장의 독특한 이력 때문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했고, KBS 기자생활을 하던 중에 국궁을 접했으며, 퇴임 후에 황학정에 입사하여 노후 생활을 활쏘기에 전념했다. 그 뒤로 『국궁1번지』는 세 차례 더 나오고 곧 종간 되었다. 황학정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궁교실을 열면서 김 접장은 그간의 성과를 모아서 『궁도입문』이라는 교재를 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이런 기록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단양공고에서 국궁반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활을 가르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까닭이었다. 아이들에게 활을 가르치자면 입으로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활터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정리해서 얄팍한 교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교재는 이듬해 『우리 활 이야기』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서점에 깔렸다. 무려 64년만에 활쏘기 책이 처음 나온 것이었고, 『궁도입문』보다 1년이 더 빨라서, 불과 1년을 사이 두고 두 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출판된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64년만의 출판물이라는 신기록을 1년 사이 두고 내가 가로챈 셈이었으니, 김집 총무로서는 어찌 보면 땅을 칠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도 이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두 번째 방문하여 『우리 활 이야기』를 건넸을 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 전의 다정다감했던 것과는 어딘가 달라도 달랐다. 그 차이가 만든 궁금증은 『궁도입문』이 나온 후에야 해소되었다. 그것은 최선을 다 한 자가 얻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고, 그 욕심이 만든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을 익히 아는 까닭에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예상대로 그 감정은 나에 대한 격려로 바뀌었다. 『우리 활 이야기』의 후속작인 『한국의 활쏘기』를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그는 3시간도 더 걸리는 단양까지 와서 축하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활 관련 자료를 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이제 쉬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목적을 이룬 자의 자랑스러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 말이어서 나도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황학정. 광화문역에서 내려서 인왕산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사직공원이 나온다. 그 뒤편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종로구 도서관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서 사직공원을 왼쪽으로 내려다볼 때쯤이면 숲 속으로 들어가는 예쁘장한 입구가 나온다. 그곳이 사직동 산1번지 황학정이다. 서울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라서 입이 쉴 틈이 없지만, 활터 입구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그 동안 국궁반 활동을 하면서 배운 습사무언이 활터 입구에 이르자 저절로 배어나온 것이리라. 조금 올라가자 팔작지붕 한옥 건물이 늠름하게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대에서는 한량 몇 명이 활을 내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고즈넉한 활터 정자 옆에 서서 자신들과 똑같은 동작으로 활 쏘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조용했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그대로 둔 채 뒤쪽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미리 전화한 김집 총무는 보이지 않았다. 남의 정에 가면 먼저 정간배례를 해야 한다고 배웠던 나는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는 한 여무사에게 정간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그 여무사는 내 질문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을 해야 했다. 활터에 처음 올라와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는 그 정간배례에 대해서.
“아, 그거요! 여기는 없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분들이 가끔 그걸 찾는데, 황학정에는 그런 거 없어요. 저기 기와집에 가면 고종황제의 어진을 걸어놓았는데, 정 하시려거든 거기다 하세요.”
순간, 이 사람들은 예절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여긴 유서 깊은 국궁1번지 황학정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다고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목조건물의 정 중앙으로 갔다. 안을 들여다보니 가운데에 아주 조그만 흑백사진이 한 장 유리 액자에 걸려있었다. 역사책에서 보던 고종황제였다. 곤룡포를 입었지만, 어디서 복사해온 것인지 주변이 많이 잘렸다. 거기에다가 대충 인사를 하고 돌아섰지만,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 활터를 둘러보는데 김집 총무가 작은 카메라를 하나 든 채 사모정 옆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단양이라는 시골에서 국궁반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 온다고 하니까 사진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찍은 사진은 이듬해 『국궁1번지』에 화보로 실렸다. ‘단양공고’의 ‘공’이 빠져 ‘단양고’로 소개된 채.
“바쁘신데 이렇게 사진도 찍어주시고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단순히 활터의 총무를 맡았다고 해서 주말에 시간을 내어 우리를 맞아준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아이들이 설자리에서 활을 쏘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보낸 의문에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런데, 정간이 없네요?”
“여긴 정간이 없어요. 원래 없었어요. 몇 년 전에 서울시궁도협회장 김 아무개가 황학정에 잠시 적을 둔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친구가 자꾸 정간을 달아야 한다고 해서 정간이 달릴 뻔했어. 그거 말리느라고 그 친구하고 입씨름 꽤나 했어. 그런데 여긴 원래 정간이 없었는데, 뭘! 원래 없던 걸 왜 달아?”
“고종 황제 어진은 언제 단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저거 너무 낡아서 사진을 좀 새 거로 갈려고 해. 사진을 찾는 중이에요. 어디 칼라사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활터에서 인사하지 않으면 쫓겨난다고 한 그 정간이 황학정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정간 대신 인사를 받은 그 고종황제의 어진은 이듬해 붉은 색 칼라 사진으로 바뀌었지만, 그날 황학정에서 생긴 의문은 내내 내 생각의 한 끄트머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내가 생각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이 며칠 후 일어났다.
황학정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여교사 한 명이 내게 활쏘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고, 활과 화살을 구해준 뒤 날을 맞추어 활터에 나갔다. 활을 내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활터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규약을 알려주기 위해 활터 벽에 걸린 ‘정간’을 향해 배례를 하고 따라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선생님은 멈칫했다.
“이 절을 하지 않으면 활을 못 쏘나요?”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되묻자 여선생은 마음이 찜찜하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여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내의 각 활터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일요일에 대회가 있으면 새벽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은 정간배례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 선생은 그날 활을 쏘지 않고 내려갔다. 다음날 그 여선생은 활을 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 믿음에는 그 인사가 꺼려져요. 마음에 찜찜한 느낌이 있는데 그걸 계속 하면서 활을 쏠 수는 없어요.”
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난 후에 한 동안 머리가 띵 했다.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함으로써 활터는 사람들의 발길을 스스로 막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정간에 가로막혀 활을 배우려다 그만 둔 사람이 우리 활터에서 두 명이나 더 나타남으로써 내가 정간을 두고 취해야 할 방향은 너무나 분명해졌다. 정간은 활쏘기의 앞날에 큰 장애가 될 존재였다. 그리고 그 뒤 성낙인 선생을 만난 후에 이런 의문은 완전히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성낙인은 『조선의 궁술』을 만든 서울 황학정 성문영 사두의 외동아들이었고 해방 전에 집궁했는데, 내가 고종황제의 어진에 대해 묻자 어이없게도 그의 대답은 이러했던 것이다.
“고종 어진도 건 지 얼마 안 돼. 그 전에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었지.”
내가 김집 고문을 다시 만난 것은 10년도 더 지나 파주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궁도장 징심관 개관식 때였다. 물론 이따금씩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묻고 지냈지만 내가 대회에 쫓아다니지 않고 칩거한 까닭에 직접 만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서울 황학정 사두를 지내고 활에 관한 책을 몇 권 낸 뒤 동해시로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한 것이 신기해서 묻는 내게 그의 대답은 간단하고 아름다웠다.
“이젠 좀 쉬어야지. 그래서 일부러 시골로 간 거야. 요새는 낚시나 하고 틈나면 근처 활터에 가서 활 쏘고 그래. 재미있어. 원래는 제주도로 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좋지만 우리 집 애들이 번거롭잖아?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하다가 강원도 동해로 갔어. 아주 좋아.”
직장에서 정년을 마치고 노후 생활로 활쏘기를 하면서 그 분야에 남들이 따라가지 못할 업적을 이루고 난 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막바지를 낚시와 활쏘기로 즐기는 원로 무사의 여유가 느껴졌다. 고요한 낚시터로 내리는 노을의 순간순간이 물위에서 보석처럼 빛나리라. 늙는 일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언저리가 먹먹해졌다. 그렇지만 그런 막연한 감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김 고문을 만나면 꼭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질문이 고개를 치밀었다.
“국궁교본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거 전에 협회에서…….”
“그래! 참, 나! 그거 이상한 놈들이야. 그 책이 말이야. 몇 년 전에 협회장이 나한테 와서 그러더라구. 볼 만한 국궁 교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나더러 좀 써달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마고 했지. 그래서 쓴 거야. 다 쓴 뒤에 원고 다 됐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가져갔어. 몇 달만에 오더니 이 책 못 내겠다는 거야. 왜 그러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정간 부분이 잘못 됐다나? 그래서 안 내주겠다는 거야. 화가 나서 원고를 달라고 했어.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종로구청에다가 얘기해봤지. 국궁교실 때문에 교재가 필요하거든. 그랬더니 구청에서 멫 백만 원 마련해주더라구. 그래서 황학정에서 낸 거야. 김시종 사두가 고생했지, 뭐.”
가슴에 맺힌 게 있었던지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격앙된 말을 쏟았다. 그런 맺힘은 나도 익히 아는 바였다. 애써 글을 썼는데, 퇴짜 맞을 때의 기분이란…….
그랬구나! 정간은 활터에서 활 배우러 오는 사람을 내쫓을 뿐만이 아니라, 이미 청탁된 원고마저 퇴짜를 놓는 대단한 힘을 지닌 망령으로 등극하는 중이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간은 이미 활 쏘고 있는 한량까지 내쫓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이 고영무 접장이었다. 나는 『국궁교본』의 출판 주체를 바꾼 그의 정간론을 천천히 읽었다.
8
“정 선생님, 고영무 접장이 앞으로 활을 못 쏠 것 같아요.”
등산을 갔다가 샛길로 빠져 관덕정에 잠시 들렀을 때 류근원 교두가 커피를 한 잔 타주면서 한 말이었다. 도끼 사건 이후 나는 활터에 나가는 일을 그만두었고, 시간 날 때마다 산에 올랐다. 관덕정은 와우산과 시가지가 만나는 경계의 바로 위쪽에 자리 잡았고, 산꼭대기에 올랐다가 하산 방향을 서쪽으로 잡으면 관덕정 무겁 앞으로 내려오게 된다. 무겁으로 내려가기 전에 오른쪽의 희미한 자욱길로 빠지면 활터에 이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고 접장이 직장 문제 때문에 고향으로 가게 됐어요. 원래 집이 주덕이에요. 주덕엔 활터가 없으니까 충주로 가야 하는데, 충주에서 이적을 안 받아주기로 결의했대요.”
“왜?”
“그쪽 사람들이 고 접장한테 정간배례를 하겠느냐고 묻길래, 고 접장이 고지식하게 기독교인이라서 안 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못 받아주겠다고 하더래요.”
정간배례를 하겠냐고 굳이 물은 것은, 고 접장이 형주 관덕정 소속인 것을 의식한 것임이 분명했다. 당연히 정간을 떼어버린 것에 대한 응징의 차원일 것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적이라는 게 있다. 적을 옮긴다는 말이다. 활터는 시군 단위별로 각 지역마다 거의 하나씩 있다. 그래서 이사를 한다든지 하여 지역을 옮길 경우에는 그곳의 활터로 옮겨서 활을 쏜다. 이것은 활터가 전국에 걸쳐 비슷한 풍속과 조직 구성을 지닌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활터가 대한궁도협회에 팀으로 가입한 상태여서 이적을 할 경우에는 관리카드도 자동으로 넘어가서 활 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적은 보내는 정에서 특별히 문제 삼지 않을 경우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그를 보낸 정의 사두에 대한 예우 차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관례를 충주에서 깬 것이었다. 그것은 고 접장을 보낸 관덕정의 사두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무례의 뒤에는 정간이라는 귀신이 있었다. 아니, 정간 귀신이라기보다는 그 정간 귀신을 빙자한 인간들의 유치한 보복심리라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일 것이었다. 모든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며, 승자의 잔혹한 학살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법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유치한 보복행위의 뒤에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 자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인간의 본성은 평상시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급박한 상황, 특히 남을 해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질 때 또렷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정간은 활터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본성을 업경대에 비추인 듯이 극명하게 나타내주었다. 남 목숨 조이는 데 앞장서서 날뛰던 제천의 황 아무개, 이런 분위를 틈타 평상시 감정이 있던 관덕정의 사두를 공격하던 진천의 김 아무개, 평소 소외당하던 회의석상의 발언권을 일거에 회복할 기회로 여기고 목청을 높이던 보은의 박 아무개……. 정말 뜻밖의 사람들이 날선 발언의 수면 위로 날치처럼 뛰어올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슴속의 한풀이가 행동의 맨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 화려한 칼솜씨를 보이며 나타난 자가 바로 충주의 ‘입에 담고 싶지 않는 그’였다. 집궁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사였지만, 처신은 원로급이었다. 교장답게 교사라는 나의 직책이 지닌 약점을 찾아내어 교육청에 항의해야 한다고 꾀를 낸 것도 그였고, 고 접장의 이적을 막은 것도 그였다. 그가 이렇게 정간 문제에 민감하게 날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교장으로서 생애 최악의 굴욕을 평교사인 나한테 당했던 것이다.
그 날도 와우산에 올랐다가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가려고 활터에 들른 차였다. 건물 뒤쪽에서 접근하게 진입로가 난 활터로 들어서는데 설자리 쪽이 평상시와 다르게 습사무언이 무색할 만큼 시끌시끌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낯선 사람 하나가 관덕정 사원들과 어울려 활을 내는 중이었다. 나는 사무실 쪽으로 가면서 간단히 목례를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나오는데, 건물 뒤쪽 모퉁이에서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와 마주쳤다. 그도 화장실에 가려고 한 모양이었다. 나는 모른 체하고 돌아가려는데 그가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입니다. 정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인사나 합시다.”
틀에 박힌 교장 말투였다. 오랜 교직 생활과, 평교사들에게 떠받들린 교장의 자리가 빚어낸 틀이리라. 그렇지만 이미 정간 사건으로 나를 공격한 그의 악수를 내가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저는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뜻밖의 반응에 내민 손을 거두지 못하고 서있는 그를 놔두고 나는 설자리 쪽으로 돌아왔다. 건물 앞쪽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도 그는 내민 손을 거두지 못하고 청동상처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후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사랑방에는 정간을 옹호하는 그의 긴 글이 올라왔다. 초등 교장답게 아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훈계조 일색이었다. 그리고 주덕으로 이사 간 고영무 접장은 충주의 활터에서 쏠 수 없어 영영 활을 접고 말았다. ‘정간’은 사람들의 감정과 이기심이라는 습기를 빨아먹으며 이미 활을 쏘는 사람까지도 활터에서 내쫓는 괴력을 지닌 대형 태풍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사탄이 몰고 온 그 태풍에 고 접장이 성냥개비처럼 휩쓸린 것이었다.
9
“정 선생, 새로운 정간론이 출현했다, 야.”
“예? 새로운 정간론? 그게 뭔 소리래요?”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그’가 도내 모든 활터에 편지를 보냈어. 충주의 김 접장하고 통화를 했는데 김 접장이 그 편지를 받았다고 하더라고. 어때? 편지 사본 보내줄까? 팩스 번호 알려줘.”
활터의 총무를 맡은 이 접장이 전화로 전해온 말이었다. 팩스가 납작하게 토해놓은 글을 읽어보니, 『한국의 궁도』에 나온 호남설과 영남설을 적당히 짜깁기하고 요약한 2쪽짜리 글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정간은 구전으로 내려왔고, 그러니 잘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점이었다. 그러나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그’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충북 국궁계의 원로로서 자신은 관덕정의 정간을 떼는 일에 동조하지 않았음을, 도내의 이른바 ‘궁도인’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이 편지로 하여 그 날 비밀투표 때 그가 무슨 표를 던졌는지 더 분명해졌다. 정간 표결을 할 때 비밀투표로 했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슨 표를 던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가 정간을 떼는 쪽으로 났을 때 발뺌용으로 쓴 그 글은 자신의 표에 찍힌 의사를 공표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간 폐지에 분명히 동조를 한 사람이었다. 국궁계의 원로로서 떼지 않겠다고 그가 강하게 밀고 나왔다면 관덕정의 정간은 떨어질 리가 없는 물건이었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활을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뜻밖에 책을 몇 권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제가 여러 구사분들을 만나고 자료를 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정간은 1970년대 말에 생겨서 1980년대 전국대회를 매개로 각 정에 퍼져간 것입니다. 문제는 정간이 특별한 의미도 없이 권위주의 화하여 국궁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점입니다. 신사들이 활터에 처음 올라와서 의문을 갖는 게 바로 정간입니다. 왜 하느냐고 다 묻죠. 그렇지만 이 단순한 질문에 적당히 설명해줄 근거가 없다는 것이 여러분들도 겪는 일일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정에서 먼저 정간을 떼어 사풍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월례회 때 안건을 제출하여 총회 때 가부를 결정하고 정간을 떼자고 제안을 합니다.”
사람들이 숟가락을 거의 다 놓았을 때 내가 일어나서 한 말이었다. 10월 월례회가 끝나고 관덕정 사람들은 무심천 가의 한 보리밥 집으로 옮겨서 뒤풀이를 했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활터 모임에서는 누구나 안건을 제안할 수 있고, 그것을 아는 내가 정간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내가 제안을 해도 사두를 비롯한 고문이나 사범 같은 활터의 원로들은 한 마디로 거절할 것임이 분명했다. 설령 그렇게 퇴짜를 맞아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시도 또한 활터의 역사를 바꾸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정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국궁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정간이 어찌 되든 순수한 뜻이 제안되었다는 행위와 기록은 이 땅 어딘가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 그 말을 할 때의 내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사태가 눈앞에서 벌어졌다. 관덕정의 원로 중 어느 누구도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짧은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공은 원로들에게 넘어갔고, 원로들은 이 뜻밖의 제안에 대해 무언가 누군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음 월례회 때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서 총회 때 결정하도록 하지요.”
내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간 말이었다. 나는 ‘텍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핀잔만 들을 줄 알았던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관덕정의 정간은 다음 달쯤 떨어져나갈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급작스런 결정은 회원들 간의 갈등을 유발할 것이 뻔했다. 예절에 관한 문제이니 회원들 간에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만장일치로 내리자는 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넉 달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도끼 사건까지 발전할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 식당을 나섰다.
관덕정 원로들이 정간 폐지론에 대해 입을 다문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임원 총 사태 때문이었다. 그들 스스로 그 동안 만들어놓은 약점 때문에 총 사퇴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후에 임원회를 꾸린 젊은 사원들 대부분이 정간 폐지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기세를 어쩔 수 없으리라고 지레짐작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정간은 예상대로 그 의도의 순수성을 짓밟힌 채 정치 상의 흥정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모임이 끝나고 무심천 둔치에 댄 차로 걸어갈 그 뒤늦은 시각에 ‘입에 담아선 안 될 그’가 나타났다. 오늘 논의된 내용을 내가 간단히 전했다. 가로등에 비친 내 그림자를 밟으며 그가 중얼거린 것을 나는 내게 좋은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었음은, 역시 넉 달 뒤 뜻밖의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은 떼기로 한 겨? 음, 관덕정도 황학정의 뒤를 잇게 되는구만!”
그날 저녁의 평온한 말투와 달리 정간이 떨어져나갈 상황에 이르자 ‘입에 담아선 안 될 그’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었다. 그의 느닷없는 선전포고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몇 년 동안 그와 함께 해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우리가 그의 행동을 선의로만 해석하려는 버릇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를 예상치 못하고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이었다. 사법에 대해서, 혹은 활터의 운영에 대해서,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언제나 의견이 충돌했다. 수십 차례 그 의견 대립을 겪으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의 주장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안 사람들은 결코 그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말을 섞는 순간, 내게서 나간 말이 어느 덧 그의 논리로 변하여 그 다음 번에는 그의 이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경험으로 볼 때 ‘입에 담아선 안 될 그’가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핵심 원리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절로 패가 갈리면서 소란이 일고, 덕분에 갈린 그 패들 사이에서 자신의 노릇이 생기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골 때리는’ 처세술이었다. 이 논리를 파악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에게 노출시켰다. 그리고 그 순수했던 호의성 노출은 그의 공격 포인트로 돌아왔다. 그러기에 상처는 더욱 쓰라렸다.
그의 이런 처세는 ‘정간’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고, 이 경우 그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왕따 당하던 활터에서 정간을 빌미로 국궁계 전체를 향해 자신의 입지를 세워 양명까지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정간 앞에서 아쉬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그는 하루아침에 사냥개로 돌변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간 폐지론자들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정간이 도끼에 찍혀나간 것이다. 서슬 푸른 역사 앞에서, 죄인이 될 사람이 과연 ‘나’일지 ‘그’일지는, 지루하리만큼 흘러가는 세월이 천천히 말해줄 일이었다. 그리고 둘 중의 하나는 훗날의 역사에서 활터의 풍속을 망친 반역자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정간이 도끼에 찍힌 이후 10년 동안 점차로 분명해지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마빡에 도끼자국 선명한 정간이 논리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그’의 편지글은 첫 번째로 나타난 소박한 주장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왔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소망이 투영된 것으로, 실제 내용을 보자면 무슨 이론이랄 것까지도 없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 후에 궤변으로 발전한 이야기에 비하면 소박해서 순진한 면이 있다. 그 후에 좀 더 논리를 갖추어 나타난 주장들은 작은 빗물로도 쓸려갈 모래 위에 너무나도 큰 건물을 지어 올렸다. 논리의 형태는 크게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덧칠하기, 둘째는 떼쓰기, 셋째는 골라먹기 방식이었다.
‘덧칠하기’ 방식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그’와 같은 방식이다. 정간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막연히 구전되어 내려왔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먼저 가신 선배 궁도인’들께서 옛날에 어디선가 모여서 결정하셨을 꺼라는 것이다. 애절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한 편 써보는 것이다.
‘떼쓰기’ 방식은 천양정의 해방 전 규약을 근거로 드는 방식이었다. 규약에 정간이라는 말이 나오고 거기에 예를 올리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천양정에 정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다. 10년 정도 걸려있던 정간을 그마저도 얼마 전에 떼버렸다. 정간이 없는 활터의 규약을 들어서 정간을 입증하려는 것이니, 꿈속에서 본 황금덩어리를 근거로 땅을 계약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행동으로, ‘입에 담아선 안 될 그’가 내내 인터넷에 유포시킨 방법이었다.
‘골라먹기’ 방식은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을 골라먹어서 배를 불리는 방법으로, 문화관광부에서 발주한 전통무예진흥법 조사보고서에 적용된 방식이었다. 전국의 활터를 돌아다니며 사두나 총무를 면담한 다음에 그들의 주장에 따라 정간이 활터의 의례라고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교수들이 정리한 이 보고서에 의하면 전국에 정간이 없는 활터는 모두 25군데로 이 정도의 숫자는 전체의 7.7%에 불과해서 무시해도 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활터의 평사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에서 간부 상층부들의 견해만 반영된 것임을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의 산물에 불과했다. 글쓴이들이 교수여서 그걸 모를 만큼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결과를 보면 조사에 참여한 교수들은 자료의 뒷면을 살피지 못하거나 일부러 안 함으로써 자신을 무식한 사람으로 결정해버렸다. 디지털 국궁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활터에 정간이 꼭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25%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는 논리였다. 문제는 그 25군데 활터 중에는 풍속사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정들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근대 활쏘기의 산실인 서울 황학정, 관청의 뜻을 지역에 실현한 민간사정의 표본인 전주 천양정, 사포계의 원형을 간직한 영암 열무정…….
그러나 어떤 주장을 해도 정간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정간’이라는 말과 판자때기를 혼동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증상은 떼쓰기 방식을 택한 사람들한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천양정 규약에 있는 ‘정간’이 그냥 건축용어인 것을, 판자때기에 쓰인 글씨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정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고 고려시대 책에도 나온다. 이 ‘말’을 ‘판자때기’로 오인한다면 정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갈 것이다.
그렇지만 떼쓰기 방식을 택한 사람들은 이 둘을 좀처럼 구별하지 않았다. 구별할 능력이 없는 건지, 구별을 하지 않으려는 건지, 구별을 하고 싶지 않은 건지 분명치 않은 것은, 거기에 서린 집착과 욕망 때문이리라. 그들은 정간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싸가지 없는 젊은 신사들을 군기 잡으려는 구사들의 왜곡된 가치관에서 오는 것이어서 활쏘기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이런 기본 중의 기본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주장에 대해 응대를 한다는 것은 달을 보고 짖는 개와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정간을 뗀 사람들이, 정간이 떨어져나간 후에 입을 딱 닫은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 침묵을 떼쓰기 방식을 취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했다. 그리고 그 착각은 정간을 신성한 신의 자리로 밀어 올렸다. 정간은 여호와나 알라와 동격에서 머리 조아리는 신도들을 내려다보았다. ‘궁도인’들은 활터에서 날마다 신사참배를 하는 중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나 있을 법한 그 신사참배를 신사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했다. 임원들이 벌린 가랑이 밑을 기어서 통과한 자에게만 전통무예 활쏘기를 접할 자격이 주어졌다.
10
“지금 10월이니께니, 우리 진해로 가입시다. 진해 가믄 짱뚱이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 하는 집이 하나 있어요. 까짓 거 진해라고 해야 여기서 밟으믄 한 너댓 시간이면 갈 티니께니, 일어나서 가입시다.”
형주 용암동의 정할매집에서 황태구이 정식을 먹고 마무리 입씻이로 나온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 무렵에 이석희 행수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그 순간, 다들 ‘진해?’, 하는 표정들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반도의 배꼽쯤인 형주에서 남쪽 바다 귀퉁이인 진해까지 가자면 지금 밤 10시가 된 마당에 빨라도 내일 아침에야 도착할 일이 분명했다. 그 무모한 여행을 하자고 지금 이 행수가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대뜸 ‘그러자!’고 대답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 자리에 모인 한량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온깍지궁사회 회원들이 느닷없이 제주도로 놀러간 일도 몇몇이서 맥없이 그러자고 맞장구 친 결과가 불러온 후폭풍이었고, 몇몇 회원이 부부동반으로 태국까지 놀러가서 코끼리 트래킹을 하고 온 일도 무심하게 대답한 결과가 불러온 일대 사건이었다. 이 행수는 가끔 느닷없는 제안을 해서 엉뚱한 일로 번져 결국 나중에는 거기 참여한 사람들의 추억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한 색깔로 만들어내는 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진해 얘기가 나오자마자 모두 이번에는 안 속겠다는 결의가 사람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보며 크게 웃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내게 쏠렸다.
“행수님, 또 무슨 얘기를 하실려고……. 이러다가 내년에 몽골 가게 되는 거 아니에요? 진해는 무슨!”
그러자 사람들의 내 의도를 눈치 채고 다들 크게 웃었다. 물론 이 행수도 피식 웃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사람들이 잠시 당겨졌던 긴장을 늦추고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섰다.
식당 문을 나서며 이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나 나누며 밤을 지새웠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차에 이 행수가 또 한 번 파문을 일으킬 발언을 했다.
“그라만, 진해까지 가는 건 무리니까니, 노래방에 가입시다. 노래방!”
진해와 노래방 사이에 놓인 커다란 논리의 심연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어디로 생각이 튈지 몰라서 사람들은 노래방을 서둘러 찾기 시작했다. 큰 길 네거리 건너편에 노래방 간판이 참새불알 같은 전구를 번쩍거렸다. 열 세 명이 어두워진 거리를 걸었다. 형주에 사는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넷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국 각지에서 온 활량들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부산 활량 이 행수의 영향이 컸다. 정간 사건으로 인터넷이 발칵 뒤집힌 데다가 당사자인 내가 관덕정에서 제명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다. 온깍지궁사회의 회원들은 정확한 정보 없이 그런 뜬소문에 당황하여 마음 상하는 중이었고, 적어도 그들에게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할 필요를 느꼈는지 부산의 이 행수가 움직인 것이었다. 그 주 주말에 열린 육군사관학교 주최 전국대회에 회원들이 많이 참여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고 이 행수가 부산에서 서울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먼저 황학정에 들러 온깍지궁사회 회원들을 만나 저녁을 먹으며 안부를 묻고 정확한 사연을 전했으며,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육사 대회에 갔다가, 거기에서 만난 회원들 사이에서 우총무인 나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이 말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1주일 뒤에 형주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나는 정간 사건 이후 3주째 두문불출했다. 인터넷도 끊고 모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토요일 오전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활터에 나간 것이었다. 마침 관덕정에서는 신사인 이준희 접장의 몰기례를 하는 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입사한 신사가 둘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았다. 한자까지 똑같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을 ‘큰 준희’, 적은 사람을 ‘작은 준희’라고 부르며 웃고는 했다. 그 중에 작은 준희가 첫 몰기를 한 것이다. 가족까지 동원하여 불고기와 찌개를 차려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돌려 오랜만에 관덕정은 따스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올랐다. 이제 당당히 접장이 된 그의 손을 잡으며 축하를 하고 사과의 말도 전했다. 정간을 도끼로 찍었으니 이제 입사 한 달이 된 그가 받았을 충격에 못내 가슴 아팠던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입사 후 얼마 안 되는 기간을 우리와 친하게 어울린 까닭인지 그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고 단호했다.
“정 접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활 배운지 한 달밖에 안 된 신사지만, 정 접장님이 왜 도끼를 들었는지 그게 무얼 뜻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은 있습니다. 저는 정 접장님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말이었다. 그러는 중에 성순경 남상인 두 명무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갑게 맞으며 악수했다. 그리고는 활을 얹어서 관덕정 사원들과 함께 활을 냈다. 대구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단양의 매포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다시 충주의 호반도로를 타고서 오는 중이라서 돌아도 한참을 에돌았다. 저녁 6시경에 겨우 도착해서는 길도 못 찾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남는 게 없는 여정이었지만 다들 즐거워했다. 그리고 용암동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 참이었다.
갑자기 들어온 도우미 아가씨 셋 때문에 놀란 것도 잠시, 한 아가씨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브루스를 추게 된 이태호 접장의 얼굴이 딱딱하리만큼 굳었다. 아가씨가 귓속말로 직업인 이태호 접장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선생님, 저 기억 안 나세요? 제잔데요.”
그 표정을 보며 이 행수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벌게질 지경이었다. 네거리를 건너서 노래방을 향하면서 내가 이 행수에게 한 말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교사인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뭐겠냐고 내가 반문했고, 궁금증이 바짝 오른 얼굴로 모른다고 한 이 행수에게, ‘술집에서 제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내가 설명했다. 그것이 노래방에 들어와서 이 행수의 머릿속에서 불꽃을 퉁긴 것이었다. 몰래 도우미 아가씨를 부른 뒤에 노래 몇 곡이 나가서 흥이 돋을 무렵, 이 행수가 작달막한 아가씨를 불러서 천생 교사인 이 접장에게 그렇게 속삭이라고 주문한 것이다. 눈치 빠른 장창민 접장이 얼른 다가와서 옆구리를 찔렀고, 내가 간단하게 설명하자 결국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이 접장이 놀란 표정을 아직도 지우지 못한 채, 배꼽을 잡고 뒹구는 우리 셋을 쳐다보고 무언가 일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그제야 아가씨가 사실을 실토하면서 웃는 우리에 합류했다. 그러자 노래방에 있는 열 명 넘는 사람들이 이 행수를 손가락질하며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대구의 신해준 명궁은, 노래방에서는 마실 수 없는 맥주를 자꾸 나에게 권하며 ‘정 접장님, 가만히 있으이소, 절대 엉뚱한 짓 하면 안 됩니더. 내가 가만 안 둘 끼라.’를 되풀이했다. 내가 폐궁할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대답을 회피했지만, 끝없이 반복되는 강요에 마지못해 그러마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이 행수 때문에 생긴 왁자한 웃음이 정리된 후로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돌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1970년대 노래가 연달아 나왔다. 모두들 옛 추억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슬픔에 젖어들었다. 그들은 하고픈 말을 모두 가슴 깊이 감춘 채 오직 나만을 위해서 먼 거리를 달려와서 저렇게 노래하고 즐거운 ‘체’ 하는 것임일 알기 때문이었다. 몸은 이미 돌아섰으면서도 이들의 깊은 정 때문에 마음은 아직도 홀가분한 발걸음을 떼지 못했고, 그것은 오래도록 나의 번뇌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그렇게 보내면 안 돼. 내가 아침을 해놓을 테니까 우리 집으로 모셔.”
이렇게 신신당부한 어머니의 말에 못 이겨 다음날 아침 타지에서 온 손님들은 아침을 먹기 위해 모두 우리 집으로 모였다. 큰 상 둘을 펴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이석희 행수 부부, 남상인 명무 부부, 성순경 명무, 이자윤 교장, 신해준 명궁이었다. 형주 활량들은 어젯밤 늦게 집으로 돌아갔고, 아침을 먹은 후에 관덕정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마당이었다. 이 행수 부인과 남 명무 부인은 아내와 함께 집에 남아서 오랜만에 만난 자신들의 회포를 풀기로 했고, 사내들은 다시 활터로 올라갔다. 그 무렵에 강경 덕유정의 한영국과 유근상 두 접장도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즈음이라 다들 다시 반가워하며 시답잖은 얘기로도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즐겁게 활을 냈다.
“그 노마는 결국 안 나왔네! 내가 부산에서 출발하면서 관덕정 가니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전화를 했구만…….”
“누구요?”
“누구긴? 뻑큐 말이지. 내가 전화로 그랬다! 니는 혼자 있으믄 안 된다! 내가 옆에 있시야 니가 엉뚱한 짓 모하지. 니는 우째 그라노? 그라니까 사람덜 다 싫어하는 기라. 남들이 다 싫다믄 안 하믄 되지, 뭐 할라꼬 꼭 반대로 하노? 이 노므 자슥아. 니는 그래서 욕을 얻어묵는 기라. 그럴 줄 알고 니 아버지가 이름 하나는 잘 지었는 갑다. 뻑큐가 뭐노, 뻑큐가…….”
“뻑큐라니요?”
“그 노므자석 이름이 뻑큐 아닌교? 뻑큐!”
영어의 'furk you'와 ‘입에 담아선 안 될 그’의 이름이, 빨리 발음하면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 말한 것인데, 나는 뒤늦게야 깨도가 되어 이 행수의 말재간에 크게 웃는 사람들 속으로 합류했다. 그게 좀 이상했다. 이 행수는 ‘입에 담아선 안 될 그’가 자신과 친한 관덕정 사람들을 비열한 방법으로 공격하는데도 ‘비난할지언정 미워하지는 않는’ 태도를 취했다. 날뛰는 사냥개에게 더욱 자주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 형주 행을 하면서도 한 번 얼굴을 보자고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입에 담아선 안 될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아쉬움을 말한 것이었다.
“점심 먹으러 갑시다.”
뒤늦게 온 한 접장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정오를 넘긴 지가 꽤 되었다. 두부 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무슨 애기들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쉬운 작별. 다들 떠나고 부산으로 갈 사람들만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표를 끊고 근처 빵집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켰다. 이행수와 이 교장은 이렇게 저렇게 말을 돌려가며 나를 어떻게든 잡아두려고 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이미 식을 대로 식은 마음에 다시 군불이 들어올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떠나버린 마음에 온기가 돌려면 어차피 세월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구도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이런저런 망상으로 헤매는 내 앞의 커피 잔도 차츰 식어갔다.
11
“정 교두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류 교두가 말했다. 형주 금천동의 ‘독도횟집’. 활을 배운 김효진 여무사가 몇 달만에 1중을 하여, 득중례로 산 저녁을 함께 먹은 뒤, 온깍지활쏘기학교 동문회 문제 때문에 장무를 맡은 정해득 접장과 만나 술을 한 잔 하던 중이었다.
“뭐가요?”
“정 교두님이 방금 말씀하신 거요. 저는 정간을 도끼로 찍었을 때 정 교두님의 심정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사람들은 정 교두님이 홧김에 찍었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한 순간의 생각으로 욱하는 심정에 그랬을까 하고 내내 생각했습니다. 아니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늘 그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나니까 가슴속이 다 뻥 뚫리네요.”
류 교두는 성당에서 20년 넘게 성가대 활동을 해온 성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정해득 접장도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것이었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감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한 것이었다.
“정 교두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서도, 혹시나 사람들이 말이 맞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손발을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활을 배우면서 생긴 생각이었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느 하나 할 수 없는 것이 삶이었다. 활터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활터 사람들을 만난 일, 나에게 활쏘기의 역사와 전통을 알려준 모든 구사들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인연 같지만, 그 우연을 통해서 필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 필연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일을 관장하는 궁극의 손길을 나는 ‘제3의 힘’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제3의 힘을, 류 교두와 정 접장은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으로 번역해서 받아들였다. 그 점은 나에게도 이의가 없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정 교두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밖에도 그런 분이 있을 수 있음을 처음 확인시켜 준 것은 정 교두님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특이한 경우네요. 하느님의 손길을 교회 밖에서 본다는 게.”
그 제3의 힘이 바로 코앞에서 작용하는 것을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느낀 것이 바로 정간 사건이었다. 대회 날 정간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그들이 달아달라면 달아주자는 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대세는 달면 안 된다는 쪽으로 흘렀고, 도끼가 정간을 찍는 그 순간까지 1분 1초가 모두 내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나는 가기 싫은데도 상황은 나를 그리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눈은 딴 곳을 보고 있는데도 몸은 홍수에 휩쓸린 듯 그리로 떠내려갔다. 그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서 도끼를 집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했다는 그 말을 나도 그대로 했던 것이다.
“이 잔을 거두실 수 있다면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지만 이 잔이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12
‘도끼론’
활을 신나게 쏠 무렵에 나하고 가장 친한 척하던 자가 그 후 이름 붙인 이른바 ‘정간도끼만행사건’을 두고서 왜 하필 도끼였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도끼가 아니면 무엇으로 하냐고 되묻지만, 꼭 그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살다 보면 생긴다. 이런 걸 일러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리라.
사람은 감정과 이성이 뒤범벅인 존재이다. 감정은 기분을 맡지만, 이성은 판단을 맡는다. 당연히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상식이고, 상식은 또한 지극히 당연하게 이성에 기초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 감정에 휩싸이는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일에서는 감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이성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때의 해결방법에는 상식이 가장 중요한 잣대로 적용된다.
우선, 생각이 다르면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말을 들어서 그의 말이 어디가 잘 되고 잘 못 되었는가를 지적해서 나의 생각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안 듣고 악에 받쳐서 자신의 말만 반복할 경우에는 어떨까?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먼저 감정으로 가치판단을 해놓고 모든 이성의 기능을 자신의 감정이 내린 판단을 위해 마구잡이로 동원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내세워서 감정을 자제하는 경우이다. 뒤의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런 사람의 판단은 상식에 기초해있고 상식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이성과 상식과 법은 그의 감정에 일그러져서 재해석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에서 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상대를 이기기 위해 서쪽에서 뜬 것 같은 증거만을 수집하여 공격한다면 그것은 목적이 이미 대화가 아니라 싸움인 것이다. 싸움이라는 미친 짓을 하기 위해서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는 것이니,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다.
논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견해를 전제로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내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서 미래를 향해서 합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약속이 있다. 사람과 의견을 구분하는 것, 범주를 혼동하지 않을 것, 논점을 분명히 할 것 같은 여러 가지 상식 말이다. 이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때그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 천 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합의된 일종의 화법이다. 이 약속 위에서 인류의 문명은 꾸준히 진보해 왔다. 사실 이런 약속이 전제되어야만 뭐가 돼도 된다.
그런데 이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건 논쟁이랄 것도 없는 말싸움이나 입씨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간을 떼자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너는 활을 얼마나 쐈느냐고 되물으면 그게 답이 되는가? 이건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는 방법의 한 가지이다. 의견의 묵살은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피하는 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논의를 해봤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감정을 관철시켜 반전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논쟁의 의미는 없다.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목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이성은 마비된다. 말하자면 미치는 것이다.
일이란 것은 돌이켜보면 묘하게도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점은 참 신기할 정도이다. 남의 정에서 정간을 뗀 것을 두고 몇몇 정신 나간 자들이 자기네 집 정간이라도 떨어져나간 양 미쳐 날뛰면서, 그런 정에서 대회를 주최하면 안 가겠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그런 미친놈 몇 놈쯤 있는 것도 심심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에 각 정의 모든 사두들이 동조를 하고, 전화를 하여 정간을 왜 떼었냐느니, 정간을 달지 않으면 대회를 무산시키겠다느니 하고 나서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릴 생각은커녕 미친놈의 장단에 같이 미쳐 날뛰는 꼴이기 때문이다. 같이 미치면 자신들이 미친 줄도 모르는 것이 광란의 생리이다.
정간은 집의 부속물이다. 액자나 현판과 같아서 그것을 떼고 붙이고 하는 것은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딸린 일이다. 남의 집에서 숟갈질을 왼손으로 하든 오른손으로 하든 그걸 상관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을 흉볼 수는 있다. 자신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들을 기준으로 잘난 체하는 것이 흉이라면 그건 그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흉보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오른손으로 숟갈질을 하지 않으면 늬 집 잔치에는 안 가겠다느니, 반드시 오른손으로 밥을 먹으라느니 하면 그건 흉보기가 아니라 간섭이 되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대회가 열리는 날 아침에 사두들이 정으로 몰려와서 정간을 달아달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당장 돌아가겠다고 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들의 배짱 뒤에는 대회에 손님으로 초청된 외부 인사들이 있다. 이들 앞에서 주최 측을 망신시키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쪽에서 점잖게 이건 내정간섭이며 남의 집안일에 그런 식으로 관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 정도로 설명을 하면 아무리 흥분하고 사리판단이 흐려진 자라도 나름대로 생각이 들 수 있는 일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설명에 많은 사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중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본정의 원로 한 분이 들어와서 ‘이건 내정간섭이니, 여러분들 그러면 안 된다’고 한 마디 충고를 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 때 겸손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다시 한 번 사태의 본질을 생각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의 한 마디에 발끈하여 정간을 달라고 결정해버린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원로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고깝게 여긴 자들이 그 자리에 더 많았다는 증거이다. 우리 집의 금덩어리가 당신네 집에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집뒤짐을 해야겠다고 억지주장을 하며 달려드는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들에게 이성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준 셈이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더 이상의 말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회초리? 작대기? 야구방망이? 채찍? 망치? 다 부질없는 짓이다. 답은 딱 한 가지이다. - 온깍지궁사회 ‘사랑방’에서.
2012.11.16. 탈고. 2013 충북작가 겨울호.

첫댓글 오랫동안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제 가슴 속엔 시퍼런 강물이 흘렀습니다. 눈물로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그 정간 때문에 사람이 잘려나가는 것을 벌써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나 정간은 사라질 것입니다. 글 읽으니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정간이 뭐길래...
독립운동사를 보는것 같았읍니다. 오랜만에 글을 보니 정진명 접장님의 업적이 새삼 크게 다가옵니다.
황학정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제일처럼 스쳐 지나갑니다...타계하신 김시종 사두님.. 정말 훌륭하신 분이셨답니다..오래 사셨다면 황학정이 좋은 방향으로 갔을텐데..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