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원작자 박철홍 전남 도의원임을 밝혀둡니다^^
----------------------
위화도회군!
우리나라 역사 중 가장 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을 몇 개 꼽으라면 나는 위화도회군( 1388, 우왕14 )을 그 중 하나로 꼽는다.
위화도회군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요즈음도 TV드라마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에서 위화도회군은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가끔은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우왕이나 최영 장군 뜻대로 요동을 점령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먼저 당시 배경을 살펴보자!
918년 고려건국 이후 고려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부했다.
또한 중국에 사대적이었던 신라를 흡수하기는 했지만 대륙을 주름잡던 발해까지 받아들여 거란의 침입도 막아냈던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만큼 고려는 항상 요동땅을 노렸고 고려의 땅으로 여겼다.
하지만 13세기 원나라의 7차례 침공을 받은 후에는 원나라 식민지처럼 지냈다.
그 후 14세기에 세워진 명나라는 원과 전쟁을 벌였고 원의 힘이 약해지자 고려 공민왕은 철령이북을 점령하고 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자주국방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14세기 후반 명나라는 원을 북쪽 몽골로 밀어냈으나 요동 때문에 골치 아파했다.
요동에는 원의 지방 태수 나하추가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나하추는 용비어천가에서도 나오는 인물이다.
이성계가 물리친 것으로....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면서 명의 요동에 대한 근심은 사라지고 명은 북쪽으로 축소된 북원에만 전략을 집중한다.
더불어 명은 나하추의 투항으로 요동의 공백이 생기자 1387년, 명나라는 오만불손한 태도로 공민왕이 원에게서 빼앗은 철령 이북의 함경도 땅을 다시 내놓으라는 서신을 전해왔다
명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발끈한 우왕과 최영은 힘의 공백이 생긴 요동을 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요동정벌은 우리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이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중국의 작은 국가들을 정벌한 일은 있지만 중국 본토를 제압한 패권국가를 상대로 먼저 공격을 시도하고 진짜 군대까지 파병한 것은 우리 역사상 아마 유일무이한 일로 생각되어진다.
조선 효종때 북벌론이 있었지만 그것은 계획으로만 끝났다.
당시 고려 내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최영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양쪽 모두 친하지는 않았지만 우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반면 이성계는 최영과 연합하여 우왕을 옹립하기는 했으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최영을 견제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요동정벌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 이유는 이긴다고 해도 최영의 입지만 강화시킬 것이며 만약 진다면 이성계가 그 책임을 뒤집어 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을 하기 전에도 두 차례나 회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진격을 명했다.
만약 우왕과 최영의 뜻대로 이성계가 요동으로 진격을 했다면 어땠을까?
우선 당시 5만의 군사로 요동정벌이 가능했을까? 부터 살펴보자.
이성계는 아래처럼 4불가론을 내세웠다.
첫째, 작은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려서는 안된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이르켜서는 안된다.
셋째, 온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에 나서면 그 틈을 노려 왜구가 쳐들어 올 것이다.
넷째, 장마철이라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사실, 이런 이유들은 어떤 나라든 전쟁 전에 걱정할만한 일반적인 이유들일 뿐 특별한 내용은 없다. 지금봐도 그렇게 큰 불가의 이유는 없다.
당시 요동은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명나라는 한동안 요동지역의 원나라 세력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동이 평정되고, 고려가 요동정벌을 시도한 1388년 쯤에는 북쪽으로 쫓겨난 북원마저 소멸해 가는 시기였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요동보다는 북원에 좀 더 집중을 해야 할 시기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새 왕조의 입지를 다질 시기였다.
즉 요동의 힘의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이용해 요동과 명에 고려의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것이 우왕과 최영의 계획이었다.
물론 고려가 동원한 겨우 5만의 군사로 수십만의 동원 능력이 있는 명나라를 전면전으로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최영은 명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요동에서의 국지전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국지전은 전쟁 뿐 아니라 이후의 외교협상력도 중요한 전략이다.
이미 고려는 서희가 담판으로 강동6주를 찾아 온 전력이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요동정벌은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이다.
명도 당시 상황으로서는 고려가 요동을 정벌하고 협상을 했다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요동정벌은 그 이후의 외교협상까지 가 봐야 하는 국가전략인데 이성계의 4대 불가론에서는 이런 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요동정벌은 점령 후 명나라와의 협상에서 고려가 얼마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당시 요동상황으로 봐서는 고려가 요동정벌을 쉽게 성공할 수 있었고 그 이후 고려는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명과의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명이 대군으로 반격하여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번지거나 요동을 다시 내 놓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겠으나 그것 또한 얼마든지 외교 전략으로 실리를 취하며 지능적으로 후퇴할 수도 있었다.
당시 객관적 요동정세가 그러했기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는 위화도회군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안타까운 일로 보고 있다.
정도전 드라마에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설득하여 위화도회군을 한 것으로 나온다.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그 당시만 해도 고려에 충성스러운 무장 출신인 이성계가 단독으로 위화도회군을 결정하고 후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야겠다는 야망이나 포부도 없었고 세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도전 설득으로 이성계도 돌아섰고 이성계는 같은 급 사령관인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이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는 고려에 반역의 깃발을 치켜들고 새 나라를 건국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이성계나 신진사대부와는 반대로 최영은 오히려 당시 대외정세가 고려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의 필요성 4가지를 말했다.
첫째, 명나라가 크다 하지만 북원과의 관계가 있어서 요동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다.
둘째, 요동의 방비가 매우 허술하다.
셋째, 요동은 매우 기름진 땅이므로 여름에 공격하면 가을에 충분한 군량을 얻을 수 있다.
넷째, 명나라의 군사들은 장마철에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요동을 쳐서 땅을 되찾을 떄는 바로 지금이다.
지도자는 나라가 위기일떄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나라를 위한것인지 스스로 따져야 할 것이다.
요즈음 북한의 핵실험, 로켓발사, 사드배치등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에도 딱 해당되는 말이다.
위화도회군!
최영과 이성계,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누구의 의견이 더 옳았을까?
이어서 고려말 1 이 이어집니다.^#♡
카페 게시글
연재물..
위화도회군..최영과 이성계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