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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고추장 익어가는 곳, 순창 민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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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cyberrang (2005-08-2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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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옥천(玉泉)고을이라 불릴 만큼 물이 맑고 산세가 수려한 순창(淳昌). 전라북도 최남단에 자리한 이곳은 노령산맥의 산간지대에 위치해 있는 고장으로 그 흔한 기차역 하나 없다. 정읍이나 전주, 임실을 거쳐 차도 뜸한 길을 한참 가다보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일하는 아낙네들과 경운기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는 농부의 모습이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게 한다.
섬진강과 화문산의 멋스런 풍치도 순창의 자랑이지만, 어느 것도 '순창 고추장'의 명성을 대신할 수 없다. 조선시대 궁중에 진상하던 식품으로 유명한 순창 고추장은 검붉은 색과 은은한 향기, 감미로우며 알싸한 맛으로 천하일미(天下一味) 고추장의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추장 한 숟가락 뚝 떠 밥을 썩썩 비벼 먹으면, 입맛 돌게 하는 그 맛엔 어떤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걸까. 순창 전통 고추장의 맛을 찾아 순창읍 민속마을에 들어서니, 집집마다 마당 가득 커다란 옹기에서 고추장이 폭~ 맛있게 익어간다.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경관 속에서 하룻밤 묵어가기 좋은 순창에 가면 맛있게 매운 고추장을 꼭 한 번 맛볼 일이다.
태조 이성계, 순창 고추장 맛에 반하다(?)
순창 고추장이 유명해진 내력을 알려면 먼저 만일사로 가야 한다. 순창읍에서 27번 국도를 따라 임실방면으로 올라간다. 구불구불한 재를 넘으면 길이 평평해지면서 왼쪽으로 빠지는 길에 만일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회문산 자연휴양림 가는 길을 따라 가다 왼쪽으로 꺾어갈 수 도 있고, 좀 더 직진해서 산내마을을 통해 가는 방법도 있다.
순창 고추장 진상유래와 만일사 중건 기념 내용이 적혀있다는 ‘만일사비’는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돼 판독이 어렵고, 전란 때 3등분으로 파손된 것을 간신히 복원해 놓은 모습이다. 지난 1978년, 순창 고추장의 역사적 상징이자 문화유산인 ‘만일사비’를 복원하면서 판독한 비문은 추정에 의한 내용이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등극을 위해 만일동안 기도를 올렸다는 내용과 이 때 이성계가 어느 농가에서 점심을 먹고 그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하고 후일에 왕이 되어 진상케 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비문 내용 가운데 태조대왕과 무학이라는 말만 알아볼 수 있고, 순창고추장의 유래는 조상 대대로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내력이란다. 순창 고추장을 취재하다 들은 얘긴데 조만간 ‘만일사비’의 내용을 판독하기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계획이란다. 어딘가 이상한 점도 없지 않다. 공식적으로 고추는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해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성계가 고려 말에 고추장을 맛보았다는 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창고추장’ 이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할까.(고추장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원래 '고추'는 후추와 비슷한 매운 맛을 가졌다고 해서 '매운 후추'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추장은 조선시대 중엽,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고추재배가 일반화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된장을 만들던 콩 가공기술과 새로운 고추라는 식품이 만나 우리의 창의성이 발휘된 독자적인 고추장으로 탄생되었다. 고추장 담금법에 대한 최초 기록인 영조 때 이표가 쓴 <수문사설>(1740년)중 식치방의 '순창 고추장 조법'에는 곡창지대인 순창 지방의 유명한 고추장 담금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전복큰 새우홍합생강 등을 첨가해 만들며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중기의 <증보산림경제>(1766년)에는 막장과 같은 형태의 장으로, 오늘날의 고추장과 다름없이 콩의 구수한 맛, 고추의 매운맛, 찹쌀의 단맛, 청장에서 오는 짠맛의 조화미를 갖춘 고추장이 선보이고 있다. 또 고추장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말린 참깨, 생선, 다시마 등을 첨가한 기록도 보인다. <규합총서>(1815년)에 기록된 고추장은 좀더 진보된 형태로서, 고추장 메주를 따로 만들어 담그는 방법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방법 등 오늘날의 고추장 담금법과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꿀육포대추를 섞는 등 현재보다 더욱 화려한 내용의 고추장 담금법을 제시하고 있다. 소금 대신 청장으로 간을 맞추는 방법은 보다 질이 좋은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이라 하겠다. 그 이후 점차적으로 고춧가루의 사용량이 늘어나 오늘날과 같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청장을 이용하여 간을 맞추던 방법이 점차 소금물로 바뀌어, 요즘은 소금물로 간을 맞추는 방법이 주류를 이룬다.
아름드리 장독마다 고추장 익어가는 마을
순창 고추장의 ‘메카’, 민속마을. 순창군이 지정한 순창 전통고추장 제조기능인의 손끝에서 고추장 맛이 계승되고 있는 마을이다. 순창읍에서 고추장 마을까지는 차로 5분 거리. 광주방향으로 24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보면 왼편으로 민속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민속마을은 50여체의 기와집들이 즐비해 큰 양반마을에라도 들어온 듯하다. 마을길을 따라 찬찬히 한바퀴 돌아보니 집집마다 열어 놓은 대문 사이로 마당 가득 장독대가 시선을 끈다. 양지바른 마당에 정성스런 관리와 다독임으로 만들어진 아름드리 장독마다 고추장이 잘도 익어간다.
이기남 할머니, 문옥례 할머니, 문정희 할머니… 80년대 후반부터 고추장 맛으로 명성을 날린 할머니들의 이름을 내건 상호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재래식 전통 방법으로 고추장을 담그는데 희한하게 맛이 약간씩 다르다. 고추장에 들어가는 원재료와 재료배합비율, 그리고 손맛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고추장 가격은 모두 똑같다. 찹쌀고추장 1kg에 1만2천원. 장맛이 좋아 장아찌 맛도 일품인데, 마늘종, 매실, 더덕, 오이, 도라지, 굴비 등 20여가지가 넘는다. 맛있는 장에서 2∼3년 동안 숙성시켜서인지 약간 짠 듯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 입맛이 절로 돈다.
‘순창 전통 고추장 민속 마을’의 내력은 이러하다. 지난 1997년 순창군에서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고추장 제조 농가를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265번지 일대에 한데 모아 산업단지를 조성한 것. 민속마을 고추장의 자가 품질검사와 철저한 위생 및 품질관리를 위해 순창군식품과학연구소도 운영중이다. 초기에는 민속마을에 54개 업체가 입주했으나 현재 38개 업체가 영업중이다. 전통고추장 기능인 자격이 있어야만 제조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데, 순창군청에 기능인으로 등록된 사람이 무려 1백20명이나 된다. 순창군청에 등록된 전통고추장 제조업체는 모두 48곳으로 지난 한해 총 생산량은 고추장이 3백톤, 된장과 청국장 3백3톤, 절임류가 8백82톤이다. 이 지역의 장류 수출물량을 보면 전통 고추장이 대부분으로 51톤(2002년 기준, 4만9천 달러)에 달한다. 순창군은 향후 일본 및 미주지역의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 해외 홍보도 강화할 계획이란다.
달달하고 알싸하게 매우면서 감미롭고 깊은 그 맛은 공장에서 밀가루와 수입 재료로 만드는 고추장과는 분명 다르다. 이곳 사람들은 순창 고추장의 인지도가 모 식품회사 브랜드 고추장 덕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맛과 품질만큼은 전통 고추장이 단연 으뜸이라고 자부한다. 한가지 꼭 알아둘 게 있다. 재래식 비법으로 국산재료로만 만든 순창고추장엔 자세히 보면 ‘전통’이란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 있다. 민속마을에서는 찹쌀고추장, 보리고추장, 매실 고추장, 복분자 고추장 등 순창 지역 특산물로 만든 다양한 고추장을 맛볼 수 있다. 순창군식품과학연구소는 순창군의 고랭지 청정지역인 쌍치면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단호박을 이용한 고추장도 새롭게 개발중이다. 순창군 식품과학연구소 정도연 연구사는 “순창지역은 발효에 관여하는 바실러스균과 메주 곰팡이 아스퍼질러스 등의 생육이 활발한 기후조건이라 장맛도 좋고 공장에서 생산된 고추장에 비해 몸에 좋은 미생물들이 월등히 많다”고 말했다.
맛있게 맵다!!!
순창 고추장 담금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민속마을의 광전통고추장집. 시루에 찐 찹쌀밥으로 ‘찰떡고추장’ 담그는 법을 시연하는걸 보니 마치 잔칫집에라도 놀러온 기분이다. 서툰 솜씨지만 절구질을 몇 번하고 나니 흥이 절로 난다. 28년 전 광주에서 시집을 와 시어머니에게 장담금법과 음식맛내기를 전수 받아 8년 전 고추장기능인이 된 순창 태광전통고추장의 서영순 사장이 일러준 순창 고추장 담그는 법이다.
먼저 물에 담가 놓았던 찹쌀을 시루에 쪄서 된밥이 됐을 때 돌절구에 옮겨 엿기름을 넣어가며 메로 친다. 메로 친 찹쌀밥에다 메주가루, 고추가루, 물, 간장 등을 적당한 비율에 맞게 잘 섞는다. 간을 맞출 때는 3년 이상 묵은 간장을 쓰고 너무 질거나 검은 빛이 날 때는 소금으로도 간을 맞추는데 그 비율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렇게 담근 고추장은 장독에 담아 햇볕에 내놓고 나무주걱으로 저으면 삭게 되는데, 10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맛있는 전통고추장이 된다. 순창 고추장의 깊은 맛을 내는 중요한 재료가 바로 ‘고추장 메주’. 음력 7월 처서를 전후(양력 8∼9월)해서 콩과 멥쌀을 6대4 (또는 5:5)의 비율로 섞어 이것을 찐 다음 빻아서 메주를 빚는다. 빚은 메주는 짚으로 싸서 통풍이 잘 되는 곳에 걸어 말린다. 한 달쯤 뒤 이것을 다시 조약돌만하게 작게 쪼개어 3일∼ 4일 정도 햇볕에 쏘이는데, 잘 말린 후 고운 가루를 내어 다시 말리고 여러 번 손이 간 이 메주가루가 고추장 맛을 좌우한다. 메주는 겉이 말라 있고 색깔이 노르스름하고 눌어 보았을 때 약간 말랑말랑한 것이 좋단다. 고추장은 만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재료의 비율이 달라지지만 순창에서는 보통 고춧가루 10% 이상, 찹쌀가루 30% 이상, 떡메주가루 10% 이상, 엿기름, 깨, 대추, 육포가루, 간장, 식염 등 50% 이내의 표준배합 비율(순창군청, 순창전통고추장 제조방법) 로 맛을 낸다.
그렇다면 순창 고추장맛이 아주 특별한 이유는 무얼까.
우선 순창에서는 고추장 담그는 시기가 다른 지방과 다르다. 다른 지방은 음력 10월에 메주를 쑤어 이듬해 봄에 담그지만, 순창에서는 음력 7월 처서(늦여름철로 곰팡이가 활발히 분해되어 단백질분해 효소와 당화 효소가 잘 용해됨)를 전후해서 메주를 쑤고, 고추장도 음력 동짓달 중순에서 섣달 사이(추운 겨울이어서 당화속도가 느리고 유산균 번식이 억제되어 신맛을 내지 않고 감칠맛을 냄)에 담근다. 또 다른 맛의 비결은 순창 쌍치면에서 나는 맛좋은 고추 덕분이다. 순창 고추의 주산지인 쌍치면은 해발 350m의 깊은 산중 비탈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추는 잘고 매운맛이 더 나는 일명 토종 고추인데 순창 전통고추장은 바로 이 고추로 맛을 낸다. 순창의 맑은 물과 기름진 토양에서 생산된 고추, 콩, 찹쌀 등의 재료를 사용해 이 지방에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독특한 전통 제조방법으로 만드니 그 맛이 특별한 것이다. 순창은 옛부터 옥천(玉川)고을로 불릴 정도로 물이 좋은 고장이며, 일제시대에는 유등면 건곡 마을 앞에 술을 만드는데 필요한 누룩공장(그 당시 전국에 두군데 있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 고장이 발효식품에 적합한 기후와 물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순창 사람들은 고추장맛의 비결을 하나같이 ‘순창의 물’로 꼽는다. 섬진강 상류의 오염되지 않은 지하 암반수가 맛있는 순창 고추장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순창 고추장은 예부터 궁중에 진상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맛과 향기는 순창에서 사용하는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은 사람이 동일한 방법으로 타지방에 가서 담궈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순창 고추장 맛의 비밀은 오염되지 않은 순창의 물맛과 이 지역의 기후조건의 조화가 아닐까. 맛있게 매운 고추장 맛이 생각나면 물 맑고 산 좋은 순창 민속마을에 가보자. 매운맛, 짠맛, 단맛이 어우러진 검붉은 고추장의 조화미가 그 곳에 있다.
순창 고추장 만들기 시연장면
순창민속마을 태광전통고추장집 마당에서 시루에 찐 찹쌀밥으로 담그는 ‘찰떡고추장 만드는 법’을 시연해 주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