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수 차례 오를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는 천재 소리를 들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ㆍ1925~1970)가
45세이던 1970년 11월 25일 할복(割腹)으로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날 그는 도쿄 이치가야(市谷) 육상자위대
동부총감부 총감(사령관)실에 추종자 4명과
함께 난입, 2층 발코니에서 총감을 인질로 잡고
소집한 자위대원 1000명을 내려다보며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너희는 사무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라며
궐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야유와 경멸만이 터지자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더니 갑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가 일본도로 배를 갈랐다.
이어 추종자가 목을 쳐주는 사무라이 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할복 후 미시마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고,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던
군국주의를 준동케 하는 계기가 됐다.
할복 직전 자위대원들에게 연설중인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 할복 현장.
미시마 유키오는 정부 관료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에
들어갔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작가로 변신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지만
고급 관료를 역임한 아버지는 장남인 미시마가
관료가 되기를 열망했기에,
문학에 심취해 있는 아들의 방으로 찾아가
청년기 미시마의 원고를 무자비하게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시마를 격려했던 것은 어머니 시즈에였다.
그러나 결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미시마는 문단에 데뷔했다.
첫 소설인 ‘도적’을 1946년에 쓰기 시작,
1948년에 발간하여 전후 작가 2세대에 속하게 됐다.
1949년 자전적 장편 ‘가면(假面)의 고백’으로 문단에서 지위를 굳혔다.
대표작 ‘금각사’(金閣寺ㆍ1956)로 전후 일본 최고의 탐미주의 작가로 떠올랐다. 1960년 ‘우국’(憂國)을 시작으로 우익 작가로 변신, ‘영령(英靈)의 소리’(1966) 등 쇼와천황에의 동경을 드러낸 작품들을 내놓았고, 1966년에는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그리고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할복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시마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 영장을 받았지만,
군의관에게 감기를 결핵이라고 속여 부적격
판정을 받고 병역을 면탈했다.
당시에는 전쟁터에 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육체에 매우 집착하는 면을 보였다.
어릴 때 병약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그는 헬스를 통해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육체의 외형에 매우 집착했다.
또 한편 그는 양성애자로 추정된다.
그는 수시로 게이바에 드나들었고 동성
연인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미시마가 평생을 고대하며 준비해온
그리고 사전 연습과 컨셉 사진까지 촬영해
두었던 할복은 그렇게 멋지게 끝나지는 않았다.
막상 칼을 배에 쑤시고 보니 생각보다
너무 아파서 난리를 쳤고.
게다가 예정대로라면 미시마가 배를
가르자마자 부하가 그의 목을 쳐줘야 했는데,
부하가 칼을 잘 다루지 못해 목을 몇
차례 난도질한 후에야 죽을 수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 소설가 신경숙이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 표절논란이 크게 문제가 되는 이유중의 하나는,
일본의 극우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그대로
베껴왔다는 점에 있다.
또한, 문학계는 이 논란에 적절한 비판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고 제 식구 감싸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경숙이 현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던 위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학계 내부에서 일어난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문학계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할복을 사전에 시뮬레이션 해 보고 사진까지 남겼다.
일종의 예행연습인데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듯하다.
미와 아키히로란 이름의 게이로 미시마의 연인(?)
사진작가 호소에 에이코우가 촬영한
그의 누드 사진집. 무엇을 상상하는지 발기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