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터, ‘청풍설악’ 정자에서 여름을 시원하게
마을은 온통 거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멍이 뚫린 밤나무, 아름드리의 소나무 숲이 장재터에서는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거목이 방문객에게 차를 세우고 내려 걷게 하였다. 길옆에도 거목이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 놓은 길 중간에까지 거대한 나무가 꽂혀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상당히 고풍스런 마을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돌담은 정말 정겨웠다. 어쩜 집집이 이렇게 예쁜 돌을 주워서 돌담을 했을까? 돌담의 돌은 모두 둥글고 예쁜 물돌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장재터 옆 쌍천에서 주워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예상은 빗나갔다. 그 돌담은 집집이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닦으면서 나온 것이란다. 옛날 이곳이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의 물길이었을 때가 있었단다. 바로 말무골에 살던 장재터의 주인공 장자가 떠내려 간 그 포락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병자년 포락이라고 했다. 비가 얼마나 내렸으면 포락(浦落)이라 했을까? 멀쩡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하늘에서 물을 퍼부어 밀고 내려 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는 태풍 루사, 매미처럼 가끔 포락이 있었던 것 같다. 병자년 포락은 루사나 매미 때보다 더 했을 것이다. 포락이 밀고 가는 통에 이곳은 모두 모래땅으로 변했다. 그 때문에 장재터에는 사흘 걸러 비가 와야 농사가 된다고 한다. 모래땅이라 물이 빨리 빠지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듬뿍 배어나게 하는 돌담에는 그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돌담은 정말 예뻤다.
큰 나무와 돌담에 넋이 나간 사이 벌써 발길은 설악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마을정자에 와 있었다. “淸風雪嶽(청풍설악)”, 마을의 정자에는 누군가 한자로 그렇게 써놓았다. 글씨도 아주 달필이었다. 종이에 써서 비닐을 씌워 정자 서까래에 붙여 놓은 멋들어진
장재터서낭당
글씨였다. 돈을 들여서 현판에 붙여 놓은 고급스러운 것보다도 더 마음에 와 닿았다. 한 여름 온통 더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장재터 사람들은 시원한 설악의 맑은 바람으로 더위를 모르고 살 것이리라. 청풍설악의 글씨만 봐도 그렇게 시원했다.
청풍설악정자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눈에 띈 또 다른 시골의 풍경을 읽을 수 있었다. 솔무정을 이루고 있는 숲속에 놓여있는 마을 성황당이었다. 장재터를 지켜주는 성황신이 깃든 곳이다. 콘크리트에 함석지붕과 함석으로 만든 문을 달아놓은 작은 건물이다. 성황당 뒤에는 얕은 돌담이 쳐져 있고, 저 멀리 설악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황당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성황당 안에는 신주와 예단과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 붙여놓은 실타래와 한지 뒤에는 판자를 걸어놓았는데, 예단을 들 출 수 없어 보지 못했다. 신주에는 문이 닫혀 있는데, 그 속 글자는 “장재평 남성황님 여성황님”이라 했단다. 참으로 정겨운 위패가 아닌가. 남녀성황이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주고, 재액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있음을 이곳 성황제 축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人依於神 神依於人 人神相資(인의어신 신의어인 인신상자)”라는 글귀이다. 번역하면 “사람은 신에게 의지하고,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너무나 멋진 한마당 잔치를 이른 것이다. 신과 인간이 어울러 놀고 있는 축제의 난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축문에는 환웅천황 때부터 이어온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弘益人間(홍익인간)’, ‘人乃天(인내천)’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사람 중심 사회이며, 음주가무를 좋아해 축제를 즐겼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장재터 사람들은 신의 집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1960년대 어느 해였다. 마을 사람들은 동제를 지내도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고 하여 당집을 과감하게 옮겼다. 마을 가운데 있던 당집을 마을 위쪽으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일까? 신은 고마움을 마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집을 옮기고 당제를 지낸 후로는 천재지변과 재앙이 모두 사라지고, 화합과 번영과 대풍(大豊)을 가져다주고, 설악산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입의 증대를 가져다주었단다.
성황당을 나와서 마을 안길로 접어들자, 정말 멋진 마을우물이 눈에 들어왔다.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이었다. 분명 이 샘에는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었다. 거목과 돌담이 늘어진 가운데 있는 마을 샘이었다. 마을길을 포장하던 어느 해 시멘트로 단장을 했다. 시멘트 포장을 하기 전에는 정말 정감있는 마을 샘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마을 아낙들은 말했다. 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그야말로 샘의 본질을 구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의 우물이면서 빨래터이고 민속의 현장이었다. 한 겨울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니 훌륭한 빨래터였다. 죽 늘어서 빨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우물방송(?)’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순이와 순돌이가 연애하는 이야기며, 시아버지 잔소리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시삼촌의 투전까지 못 나올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우물에만 오면 그렇게 방송이 되었으니, 일명 우물방송이라 한 것이다. 우물방송을 하면서 리듬을 맞춰 두드리는 빨래 방망이질에 어느 덧 스트레스는 다 풀린 것이다. 동네 이야기는 그렇게 빨래를 하면서 모두 퍼져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또 여름이면 냉장고 구실도 하였다. 모 낼 때 먹으려고 콩나물을 키웠는데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웃자람을 막고자 찬 우물에 거꾸로 엎어놓기도 했다. 여름철 집집이 담근 김치는 통에 넣어 당연히 우물에 담가졌다. 그러면 동네 청년들이 밤에 모여 김치를 꺼내 술안주로 삼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 김치를 가지러 갔을 때 빈 통이 샘터 아래에 둥둥 떠 있으면 필경 동네 청년들의 소행이었다. 내 집 식구가 김치통을 비우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가장 맛있는 김치가 든 통이 가장 먼저 비는 것은 말해 뭣하랴. 아침에 김치를 가지러 갔다가 빈 김치통을 보며 허탈해서 허허 웃으면, 옆집 아주머니가 자신의 김치통에서 김치를 덜어주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우물 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이 우물은 여름날(정월 14일) 새벽이면 지푸라기를 든 마을 아낙들이 누가 일찍 오나 내기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힐긋 옆을 보면서 잽싼 걸음으로 우물까지 내달린 것이다. 그러고 휘영청 우물에 뜬 달을 바가지로 퍼서 동이에 담았다. 달은 풍요를 뜻하니 일 년의 풍요를 먼저 떠 잘 살기를 바란 것이다. 솟구쳐 흐르는 우물이라 장재터의 우물은 많은 집에 그렇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날이 샌 후에 보면 아낙들이 놓고 간 지푸라기가 마을 호수(戶數) 만큼이나 우물 아랫녘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것은 개의할 필요가 없다. 내가 떠 온 물이 제일 먼저 뜬 달물이니까! 그 물로 오곡밥을 지어서 조상들께 제사하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오곡밥을 마을에 돌린 것은 마을의 정을 나눈 것이다. 달물을 제일 먼저 떠서 지은 오곡밥을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정으로 함께 나눈 것이다. 나처럼 마을사람 누구나 똑같이 복을 받고 풍요를 누리기를 마음으로 바란 우리의 전통관습이다.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그 마음!
우물을 감상하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마을회관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남정네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낙들만 있었다. 선뜻 들어선 남정네를 반겨주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불쑥 들어간 것이다. 남정네라 해봤자 아들 같으니, 스스럼이 없었겠지. 금방 방문객과 동화가 되었고 서로 마을에 대해 아는 지식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물터 자랑, 마을유래, 지명유래, 마을민속,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한없이 흘러 나왔다. 점심 식사를 못했으면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으며, 커피는 기본이었다. 마을회관에서 먹는 라면, 정말 맛있었을 건데, 괜히 사양했나? 알콩달콩 마을이야기는 정말 좋았다. 마을회관에는 벽마다 마을의 역사가 붙어 있었다. 언제가 마을사람들의 체력을 위해서 건강체조도 했음을 자랑스럽게 벽에 사진을 붙여 놓았다. 함께 웃으며 체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설악산자락 고요한 마을 장재터 사람들의 삶은 여느 산골마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사짓고 산나물 뜯어서 살아갔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설악산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설악산이 수행여행과 신혼여행의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이다. 외설악 입구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장재터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호재였다. 20여리만 걸어가면 지금의 소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장재터에서는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설악산의 호황은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장재터사람들은 매일 물건을 이고지고 소공원까지 걸어 다녔다. 그렇게 장사를 하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하늘에 뜬 달이 지기 전에 물건을 이고 걸었다. 고되지만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에 늘 흐뭇했다. 어느 날은 호랑이를 만나서 간담을 졸인 적도 많았다. 새벽에 호랑이가 길을 막고 눈에서 불을 밝히고 모래를 던질 때는 정말 오싹했다. 그러면 막 빌었다. “자식들 공부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등짐장사를 하니 산신령님 봐주십시오.”하고 한없이 빌다보면 호랑이가 어디로 가고 없었다. 그러면 또 다시 짐을 이고 설악산입구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아마도 설악산 신령의 보살핌이리라.
장재터사람들은 봄이면 화전놀이를 하고 여름이면 천렵을 했다. 사람들이 함께 즐겁게 사는 모습을 구가한 것이다. 화전놀이는 보통 낙산사나 설악산 비선대로 갔다. 찬합에 갖은 먹을거리를 넣어서 꽃놀이를 가서 놀다가 왔다.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마을놀이였다. 그 전에는 마을 뒷산에서 꽃전을 구워 먹으며 놀이를 했다.
천렵은 속초상수원구역이 되면서 없어졌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에는 고기가 참 많았다. 메기, 은어를 비롯해서 별의 별 고기가 다 있었으나 지하댐을 건설하고 난 후 연어가 찾아들지 않고 아예 천렵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하댐은 쌍천이 돌이 많아 물이 지하로 흐름으로 속초에서 상수원을 확보하려고 수상 아래에 댐을 건설해서 상수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장재터의 명물로는 벼락바위가 있다. 이 벼락바위는 쌍천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문과 장재터 중간이다. 정확히 따지면 도문이 가깝다. 그런데 장재터사람들은 벼락바위가 장재터 것이라 한다. 이 바위는 전설이 둘 있다.
벼락바위
하나는 옛날 도사가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파계승이 부처님 씨앗을 요구했다. 도사는 파계승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하자 내기가 시작되었다. 파계승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화를 숨기고 도사가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도사가 약속한 기일이 되도록 파계승이 숨겨둔 금은보화를 찾지 못하자, 그의 딸이 하늘에 빌었다. 딸의 간절한 소망에 하늘이 감동하여 파계승이 바위에 숨겨둔 금은보화를 찾도록 벼락을 쳐서 바위를 깨트린 것이다.
또 하나 벼락바위는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등 신성한 바위였다. 그런데 마을에 처녀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청춘남녀는 신성한 그 바위위에서 부정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을 내려 두 남녀를 죽이게 되었는데 그때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장재터! 설악산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직한 설악산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이다. 설악산을 삶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더욱 멋지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