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봄을 읽다 / 신형호
잿빛이다. 꽃잎이 아직 눈을 비비지 못하는 시간, 아스팔트 위는 회색 물감을 뿌린 듯 어둑어둑하다. 모처럼 나들이가 아닌가. 여행의 즐거움은 맑은 날씨가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선잠에다 들뜬 마음은 몰라주고 하늘은 장대비가 한줄기 하려는 듯 울상이다.
종일 비가 내리면 어쩌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한참을 달린다. 다행히 차창 밖에는 울긋불긋 봄꽃들이 또렷하게 눈에 안긴다. 구름이 멀리 달아난 모양이다. 가볍게 옆으로 돌아보며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삽시간에 차 안은 우물에 두레박을 내린 듯 조금 시끌시끌해진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얼마나 기다리던 여행길이던가! ‘여행은 사람을 순수하게 그러나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바라본 남도의 들판은 연한 파스텔을 칠한 듯 가슴을 환하게 밝힌다.
버스는 두어 번 덜컹거리더니 얌전하게 주차 자리를 잡았다. 상큼하다.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일까? 선암사 주차장에서 본 하늘은 쪽빛보다 맑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참배객이 많지는 않다. 가벼운 걸음으로 절집을 향해 오른다. 왼쪽 어깨너머로 조계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정겹다. 문득 삼십여 년 전 겨울에 온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큰 배낭을 메고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간 추억이 아스라하다. 그때는 얼음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동무 삼았었지. 심호흡하며 걸음을 옮긴다. 상큼한 풀꽃 향기를 품은 공기가 싱그럽다. 촉촉하게 젖은 땅에서 싱싱한 봄기운이 올라온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울창한 삼나무 숲을 지난다. 보물로 지정된 승선교에 다다르니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에 발이 얼어붙는다. 가장 한국적인 절집으로 알려진 선암사 들머리에 있는 승선교. 선녀가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거짓말 같지 않다. 마흔 개의 화강암을 주춧돌로 삼고 자연석을 포개어 무지개 형상의 아치를 이룬 승선교! 흐르는 듯 고인 듯 거울보다 투명한 개울에 제 모습을 비추고 멀리 강선루의 수려한 모습을 포근하게 감싼 정경은 꿈속에서 만난 도원경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지켜온 개울가 바위의 푸른 이끼들 속삭임이 들린다. 수많은 선승과 시인 묵객들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주문을 지나면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인 김익겸이 쓴 ‘육조고사’라는 묵직한 예서 현판을 만난다. 예서체이건만 중후한 육조체의 무게와 단아한 예서체가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눈을 행복하게 한다. 삼층석탑을 앞에 두고 중문을 활짝 열어 중생을 맞이하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 옷깃을 여민다. 대웅전은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고색창연한 그윽함과 은은한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편안하다. 항마촉지인 석가모니불의 자애로운 미소가 경건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주고 있다. 천장에는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 몸을 뒤틀며 용틀임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른 곳과 달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호위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도 특징이다.
선암매仙巖梅! 봄철 선암사를 찾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가 선암매 때문이 아닐까? 선암매란 원래 운수암 오르는 길인 종정원 돌담길에 핀 매화를 말한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줄지어 핀 백매화와 홍매화들의 잔치에 황홀하다. 절정이다. 하나하나 모두 고목이다. 반 이상 핀 매화들이 바람결에 놀라 한두 잎 떨어지고, 참배객의 탄성에 대여섯 잎 꽃비가 된다. 분재한 듯 자연스레 뒤틀린 가지마다 탐스러운 꽃들이 향기를 뿜으며 봄날을 노래한다. 눈보다 흰 백매화와 석류꽃보다 은은한 홍매화의 하모니! 잠시 눈을 감고 오감을 열어 마음속으로 매화 향의 향연에 빠진다. 지금 이 순간이 매화의 절정이고 내 인생의 절정이다. 내 언제 다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눈을 감고 매화 향기에 젖는다. 갑자기 조선 말기 조희룡님의 <매화서옥도>의 풍경이 떠오른다. 매화가 눈꽃처럼 흐드러지게 날리는 날 아담한 집에서 선비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그 매화 눈을 뚫고 그리운 벗이 친구를 찾아오는 그림이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나를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늘 같이 매화 흩날리는 날은 학창 시절 우정을 주고받던 고향 친구 생각이 더 절실하다. 그 옛날 매화도 오늘과 다르지 않으리라. 찾아가지는 못해도 저녁에는 안부 전화 한통이라도 해야겠다.
짙은 매화 향기 그늘엔 참배객의 추억 만들기로 분주하다. 꽃잎처럼 웃음 짓는 얼굴, 눈동자엔 푸른 하늘이 어린다. 편하게 뻗은 매화 가지마다 단아한 선비의 기품이 묻어난다. 해마다 봄이 오면 매화 축제로 이름난 곳이 많지만 대부분 인위적으로 가꾼 매화밭이라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선암매를 보고 있으면 문득 전통 탈춤이 떠오른다. 느긋이 마음대로 뻗은 가지, 탈춤 속에 나오는 우리 백성의 슬기와 거슬림 없는 파격이 그려진다. 연륜이 묻어나는 둥치에선 팝콘 터지듯 생명을 피운 힘. 깔끔하고 정갈함의 매력 뒤에 감춰진 아름다움에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서민의 끈기도 전해온다.
절에서 내려가는 걸음은 가볍다. 올라올 때 못 본 나무들과 눈인사 나눈다. 어깨너머 하늘거리며 날리는 매화가 동영상처럼 뒤로 밀려난다. 살아온 꿈이, 살아갈 내일이 꽃잎 속에 반짝인다. 선암매와 함께 춘 춤이 꿈결 같다. 발걸음은 편안하고 느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