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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굼 !
본문 : 막5:21-24, 35-43 (신 60)
(마 9:18-19,23-26, 눅 8:40-42,49-56)
공자에게는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해서
수제자 1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수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질문했답니다.
“선생님, 나라가 잘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그리고 신(信)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 여기서 족식은 생활의 안정이고...,
족병은 자주 국방이며..
신은 국가의 공신력을 말합니다.
자공이 또 묻기를
“그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병을 버리겠다”고 말했답니다.
“남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더 버려야 하신다면
선생님은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라고 자공이 다시 묻자
공자는 “식을 버리겠다.
왜냐하면 나라는 경제력이 없어도 살고
군대가 없어도 살 수 있으나 신이 없으면,
공신력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자님은 인간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서로 신뢰하는 것, 곧 믿음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요즘 우리들은 극단의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불안과 염려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사주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자녀들조차 부모님을 믿지 못하고....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와 선생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신의 시대에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자기 세력을 모으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화가 단절되고
나라가 온통 시위문화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너도 나도 힘으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피차 극단적인 폭력도 불사합니다.
신, 곧 믿음이 깨어진 우리 사회가
정말 막장으로 내달리는 것은 아닌지....
참 위기를 느끼고 마음이 아픕니다.
<믿음으로 사십니까?>.....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실 가장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것이 이 ‘믿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병
에 걸릴 수 있고....,
사업과 일에, 그리고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의 문제들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으며,
영생을 얻게 하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셔서 매순간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했습니다.
성도님들에겐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은 염려와 걱정으로
이 땅을 삽니다.
‘사람이 어떻게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나?’ 라고 말합니다.
또 염려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서로 감사의 인사를
할 때도 ‘염려 덕분에 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
하나님의 자녀들은 염려로 이 땅을 살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이 땅을 살고 기도로 이 땅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염려 덕분에~’라는 말 대신....
‘기도 덕분에~ 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런 믿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광인을 고치신 후
다시 배를 타고 맞은 편으로 돌아오셨을 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리어 간구합니다.
22-23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회당장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당이 단순한
종교적 기능만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기관으로서.....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학교역할도 했고 심지어 재판소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비슷한 역할까지...
회당장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장에게는 사회적 명예가 있었고...,
사회적 존경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는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젊은 예언자(야인)로서.....
어떤 이단의 교주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 아래 엎드리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를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을까요?.....
아마 그는 사랑하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경제력,
혹은 지위를 가지고 별별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를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질병의 고통이나 실패나 걱정근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
생각해 보세요 회당장이 어린 딸로 인한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 앞에 나왔겠습니까?
아마 우리 가운데도 질병이나 경제적인
고통이 없었다든지......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허하게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그의 행동을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고
야이로를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뜻하지 아니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싼 것입니다
(24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게다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고
치료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고....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시간입니까?.....
그런데 단 한 사람, 이 은혜로운 시간이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딸의 생사가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일분일초가 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길에서 지체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초초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야이로의 집에서 한 사람이 와서
야이로에게 다급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말을 들은 야이로가 얼마나 절망했을까 ?...
희망이 크면 절망도 큰 법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력있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가니
내 딸은 살겠구나”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서둘러 주셨다면
자신의 딸이 살아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시간을 끌게 만든 혈우병 걸린 여인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
그러면 왜 예수님은 시간을
지연시키셨을까 ?
저는 예수님께서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키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강화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어떤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당황하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우리도 야이로와 같은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은 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만 나오면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었는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잘못되었나?’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조차
‘왜 주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가? ....
왜 기도하는데도 더 문제가 더 커지냐?’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
만약 성도님들이 이런 경우를 당하셨더라도...,
절대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일이 꼬이는 것 같아도....
오히려 기도 응답이 늦어지고......
문제가 더 커지는 것 같아도 ...
그런 일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내 생각에 안 될 것 같으니까...
하나님도 못할 줄 압니다.
내 논리에 안 맞는다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 살아계십니다.
보세요..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으니까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와도 아무 소용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먼저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마귀는 늘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현실을 보라고 속삭입니다.
“현실을 봐라 너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너 지금 배고프지 않느냐?
그러다가 굶어 죽을지 몰라”,......
“지금 이 아이는 죽었다.
죽은 것을 인정하라.
예수님이라고 별수 있겠냐.”
그러나 성도님들 !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산 것이나 죽은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있는 현실만 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
주님은 너무 명확하게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믿기만 하라’는 단어는
원문에 보면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끝난 것 같고 절망만 있지만,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지금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달리다 굼>.....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은 온 가족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울고 떠드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언제든지
깨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 상황만 아니라
그 이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40절).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사람들은 다 내보신 후에 부모와 함께
한 제자들만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하고
선포하셨습니다.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참고>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일상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예수님도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달리다 굼’이라는 아람어는 아침에 부모가
자녀를 깨울 때 “애야 일어나라”라고
하는 말입니다.
“달리다”라는 말은
‘작은 아이야’ 라는 뜻이고...
“굼”이라는 말은 ‘일어나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마치 잠자던 아이가
일어나는 것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야이로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자.....
주님은 그에게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기적,
딸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능력이고 기적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짜 믿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게 놀라고 놀라운’
기적을 보여줄 것입니다.
<맺는 말씀>.....
오늘 우리 중에는 야이로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처럼 내 삶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
주님은 그런 상황에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 굼’이라고
외쳤습니다.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그 순간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
믿음을 잃지 않는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금산교회에 ‘달리다 굼’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같은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성도님들이....
육적, 영적 잠에서 깨어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나 걸어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