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2012년의 여름 이야기(11)>
◎ 2018 년의 여름, 그리고 94 년도의 여름 기억
일찍이 경험 해보지 못한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39 도 40 도는 대구, 경북지방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내가 살고 있는 수택3 동도 40 도가 넘는 날이 두 번이나 있었다. 8 월 15 일인 오늘에도 오후 2 시 현재 기온이 38 도이다. 이제 8 월 중순이니 이런 더위가 아직 더 남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기록으로는 1994 년도의 기록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폭염일수로도 그렇고 열대야일수도 그렇다고 한다.
94 년도에 살고 있었던 우리 집은 슬라브 지붕으로 된 벽돌집이었다. 아파트처럼 윗집이나 옆집이 열을 차단해 주지 않아 집 전체가 하루 종일 뜨거운 햇볕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집안이 절절 끓는 화로 속 같았다. 집을 지을 때 넣은 단열재는 보온병 역할을 하여 한 번 덥혀진 집의 온도를 새벽녘까지 그대로 유지시켜 주었다. 벽도 뜨겁고, 방바닥도 뜨겁고, 소파도 뜨거웠다. 앉을 곳도, 누울 곳도, 서 있을 곳도 없었다.
시 원한 물에 손을 씻고 싶어도 물도 뜨거웠다. 그 당시에는 집의 수돗물이 직수가 아니라 옥상에 탱크를 설치하여 저장된 물을 썼다. 수압이 약할 때라서 대부분의 가옥들 지붕에 노란 물탱크가 얹혀 있었던 때이다. 한여름에는 물을 뜨뜻하게 해주고 겨울철에는 툭하면 얼어붙어 해빙기로 녹여야만 하는 어려움을 줬던 이 물탱크는 수도 사정이 좋아진 후에 철거해 버렸고 직수로 연결하였다 .
열을 품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하는 집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앞뒤 창문으로 들어오는 맞바람과 선풍기가 더위를 이기게 해주유일한 수단이었다. 정 참기 힘들면 지하실로 내려가 있기도 했다. 때로는 아침을 먹자마자 간단한 먹을거리를 둘러메고 삼성산으로 올라가 서늘한 그늘에서 하루 종일 있다 저녁 무렵 내려오기도 했다 .
낮은 그런 식으로 버티어도 밤이 더 문제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더위에 질식할 것 같았던 남편과 나는 뒤늦게 에어컨을 사기 위해 가전 대리점을 찾았지만 그 여름 중에는 설치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어 성능이 좋은 최신 선풍기 8 대를 대신 사갖고 왔다. 키가 큰 선풍기 3 대와 작은 것 5 대를 샀다. 키 큰 선풍기는 아래 위층 거실과 주방용이었고, 나머지는 방마다 한 대씩 들여 놓아두었다. 그 것으로도 부족하여 나는 시장바닥을 뒤져서 내 몫으로 죽부인(竹夫人) 한 개를 샀다. 내 몸끼리 닿는 것도 너무 힘이 들어 밤에는 그것을 껴안고서 잠을 청했다 .
에어컨은 다음 해인 95 년도에 스탠드형으로 2 대를 사서 아래층과 위층 거실에 설치했지만 몇 번 쓰지도 않고 장식용처럼 방치 해 두었더니 고장이 나버려서 2011 년 토평으로 오면서 처분하였다. 선풍기는 더러는 버리고, 더러는 아이들 집으로 보내고, 3 대가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바람도 싫어하고, 아무리 더워도 밤에 창문을 열고는 잠을 못 자던 내가 이번 여름은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다. 에어컨의 고마움을 난생 처음으로 느끼고 있는데, 문제는 실내와 외부의 체감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바깥출입이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사를 안 갈 수도 없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살 수도 없어 주로 새벽 시간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하루는 새벽 4 시경에 시작 된다. 남편은 그 이른 시각에 산책을 하러 나간다. 나는 정신을 조금 차린 뒤에, 평일 새벽마시가 있는 이웃 성당을 가기 위해 5 시경 집을 나선다. 월요일은 30 분을 걸어 구리성당으로, 화, 목, 금은 버스를 타고 내리고, 20 분 정도 더 걸어서, 인창동 성당의 6 시 미사에 참례한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광장동성당으로 간다. 힘이 들어도 이렇게 이웃 성당을 찾아 가는 것은 성당마다 다른 분위기와 특징이 있어 타성이 생겨버린 미사참례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면이 있어 좋다.
한낮에 인적이 드물던 거리가 새벽에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산책을 하기 위해 나오는 사람, 이미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씩씩한 발걸음,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들로 활기가 넘친다. 내가 탈 때는 비어있던 버스가 정류장마다 승객으로 하나 둘 채워지고, 매일 똑같은 시각에 타는 사람들이라 어느새 얼굴이 익다. 그 모두가 아침부터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인구가 예상 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내가 성당을 오고 가는 동 선상에는 24 시간 하는 제법 큰 마트가 세 개나 있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 나는 백팩을 메고 가서 돌아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필요한 물품을 조금씩 사갖고 온다. 걸어 다니다 보면 마트뿐이 아니라 24 시간 하는 김밥 집, 국수 집, 콩나물국밥집이 있다. 뼈다귀 해장국 집, 감자탕 집, 소머리 국밥집도 아침에 여는 곳이 있다. 주로 지하철 공사나 아파트 건설 현장 주변이다. 빵집은 7 시에 문을 연다. 우리 부부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나는 아침에 여는 이곳들을 이용한다.
불을 써야할 일들은 10시 이전에 끝낸다. 그러고 나면 긴긴 하루를 놀면서 보내는 것이다. 몸도 생각도 늘어질 대로 늘어져 지낸다. 7 월 중순부터 내가 나가는 모임이 전부 방학을 하여 외출할 일이 없고, 어머님을 찾아뵈러 갈 일도 더 이상 없다.
덥다는 핑계로 조석도 간단히 해결하고 있으며, 햇빛과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창문마다 커튼과 블라인드를 쳐서 컴컴하게 해 놓은 실내에서 오수를 즐긴다.
얼마든지 게으름을 부려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이 계절이 한편 고맙다. 8 월말까지 한시적인 것이기는 해도 이런 생활은 내 나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리 태양이 이글거려도 생활 전선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그런 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사치스러워 보일까봐 염려도 된다.
시부모님은 모두 폭염이 시작되기 바로 전 에 돌아가셨다. 어머님과 동갑이셨던 아버님은 94년도 5월 15일에 84세를 일기로, 어머님은 2018년도 6월 4일에 108세로 돌아가셨다. 공교롭게도, 94 년도의 더위는 아버님의 탈상일인 94 년 7월 3일부터 시작 되었었고, 2018 년의 더위는 어머님의 탈상일인 7월 15일 이후부터 갑자기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 분 다 오랜 병상 생활에 체력이 소진되고 욕창이 심한 상태였는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폭염을 겪지 않도록 그 직전에 데려가 주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94 년도의 더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맞다. 24년 전의 일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2018년의 더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 2018년은 1994년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특별한 해이기에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라도, 절절 끓었던 그 여름의 더위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8년, 1994년의 더위와 못지않게 더웠던, 아니 그 이상으로 찬란하게 더웠던 2012년은 결코 잊지 못할 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2018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