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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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학교 수료 간증) 출생부터 온 인생이 부조리와 불공평, 고통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참혹한 죽음. 도대체 왜? 의문과 원망. 하나님은 왜? 원망의 마음이 기복신앙에서 나온 것? 날 때부터 맹인된 자 설교. 장례식, "어떻게 죽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 결과로 판단하지 말 것. 그렇게 하면 예수 / 세례요한 등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한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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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사도행전 지난 주 종료. 내년부터 이사야 묵상 예정. 오늘만 사무엘상의 요나단을 묵상. 왠지 끌림. 충분한 묵상은 아니지만.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노래 제목처럼. 혹시 우리 인생에서 그와 연관된 사람이 있을 것. 힘을 가지게 하는 사람들. 주님이 우리를 부를 때 그런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 것임. 사람은 나를 그렇게 기억할까? 특별히 아내(남편)으로부터, 또는 자녀로부터는?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하면 거기에 묶일 가능성. 그보다는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빚어가는 것.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 살면 됨.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건. 초대형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세울 때, 수많은 사람들 중에 2만 남았을 때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지지. 그래서 지지 받은 사람이 담임목사 그리고 추천자를 부목사로 지금까지 봉사. 전율과도 같은 감동. 동시에 들었던 목사님은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낌. 요나단은 불가사이한 사람이라는 생각. 용기/지혜를 가진 자. 다윗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다른 사람. 왕의 아들. 왕위 계승자. 인격과 실력이 있는 자. 그런 사람이 일개 목동 출신 다윗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나? 우리에겐 미묘하고 은밀한 경쟁심. 속물적인 욕망에 휘둘리고 있는데. 25년에 그런 사람을 얻거나 내가 그런 사람이 되거나.... 하는 시간이었으면. 급진적인 신학자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애정은 동성애적인 것... 근거 약함. 그러면 '우정?'. 목동 다윗에 대한 왕자 요나단의 사랑이라는 것이 더 적절. 다윗의 요나단에 대한 것보다 그 반대가 더 컸음
삼하 1:26, 사랑함이 기이하며 여인의 사랑보다 더 컸다는 내용. 요나단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 사람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전쟁통. 교회에서는 안 그렇지만, 가정이나 직장에서 본성이 드러나기도 함. 왜냐하면 치열한 경쟁, 전쟁통 같은. 요나단은 전쟁에서 여러가지 기질과 속성으로 통해 그의 진정성이 드러남.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적진에 들어간 요나단.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 요나단이 한 말. 하나님에 속해 있는 것이 구원의 관건이라는 인식. 살아있는 신앙의 소유자. 언약에 대한 기억을 가진 자. 그는 다윗과 언약을 계속해서 맺음.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맺어진 것에 대한 기억의 반증. 사울이 혼미하고 애매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단호하고 정확하게 처신.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나올수 있는 것. 요나단은 그의 부하들과 한 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사람의 핵심은 '사람을 중히 여기는 사람임.' 그것이 없으면 '법'으로 움직이게 됨. 사람을 중히 여기는 힘은 사람의 본질을 기억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나에 대한 정확한 모습, 타자의 귀함 등 등. 정확한 기억. 책자 '벌거벗은 xxx" 그레그리우수, 노예가 보편적이던 시절,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께 맞서 싸우는 것, 저항하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묻혔지만 이후 먼 훗날 윌버포스나 등 등의 인물에게 영향을 주어 노예해방. 요나단이 위기를 당할 때 백성들이 일어나서 구함. 백성들의 신임을 받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하여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람. 그런데.... 이러한 요나단이 목동 다윗에게 완전히 매료됨. 정말 순수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음. 왕의 수종을 드는 어린 소년 다윗. 1절, 3~4절. 골리앗으로 인해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요나단은 다윗과 의형제. 자신의 배타적인 권리를 버리고 다윗에게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알았을 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요나단은 왕위 기회를 제공. 정반대. 23장 17절,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너의 다음...' 사울로부터 피신시키고 피신된 것으로 찾아가 한 말. "네가 다음 왕이야!" 다윗이 주체.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원천이 무얼까?
요나단에게 결정적 사건. 역사적 배경. 그리스도가 오셔서 바뀌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변화가 있음.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전혀 없음. 예수님 오신 시점과 이후가 변화 없는. 받아들임이 관건. 엘라 골짜기의 전쟁이 요나단에게 결정적 계기. 골리앗과의 전투. 변화된 사람은 요나단 밖에 없음.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음. 전투에서 골리앗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좋았지만 나타나자.... 완전 위축. 벌레와 같이 자신들을 생각. 요나단도 그때는 그랬음.(용기, 담대함, 믿음이 무력화 됨). 요나단의 마음이 어땠을까? 완전한 절망과 무기력감...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순간.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나는 우리 백성을 지킬 자격이 되지 않겠구나?'라는 좌절. 바로 그때 다윗이라는 인물이 섬광처럼 들어온 것임. '사자와 곰의 입에서 양을 건져내었으니 하나님이 골리앗의 손에서 우리를 구할 것임.' 시편 23편이 성경 밖으로 나온 사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나는 부족함이 많은 존재이다. 그 차이가 역사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임. 우리는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임.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 근본적인 준비가 필요했을 것. 그것이 요나단의 쓸쓸한 죽음임. 너무나 충격적일 정도로 쓸쓸하게 죽음. 그의 실력과 품성을 고려하면 그렇게 죽으면 안 되는 사람임. 이럴 때 세례 요한이 겹침. 어떻게 쓸쓸하게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왕비의 꼬임으로 목이 베임. 주연이 빛나게 하려고 조연이 낮춰주는. 끝내 돌이키지 않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려운 전투에 자신들의 동생들을 다 끌고 참여. '죽으러 간 것'일 것. 요나단이 살아남았으면 현실적으로 다윗의 왕위 계승은 복잡했을 것. '요핵관(?)'이 많았음. 왕위를 찬탈한 배신자 프레임에 걸렸을 것. 쓸쓸한 요나단의 죽음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음. 영원의 관점에서 요나단은 오히려 다윗보다 흠 없는 인생이었음. 완전하고 깨끗한 그릇.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한 다윗의 기억,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사울과 요나단의 생전에 그리 아름다웠더니..." 함께 기억함으로써 사울마저도 좋은 기억으로. 그러니 요나단의 행적이 위대함. 결국 요나단은 예수님을 기억하게 함. 목사님 자신도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숨을 쉴 수 있음. 연말의 어수선함이 요나단을 통해 스스로를 축하. 그 친구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음. 자신에게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해 봐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