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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옥수수 하모니카
날씨가 찌뿌듯한 건 물론 불쾌지수 또한 높았다.
'이럴 땐, 뭔가에 몰두하는 게... 더위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 하면서 기로는,
지난번에 끝내지 못한 ‘산 그림자’ 캔바스를 꺼내면서 바로 유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그림(이전에 칠했던 물감)은 산뜻하게 말라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두어 시간 일에 몰두한 결과,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돼 보였고,
무엇보다도 시원한 텃치와 색감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서명은 한 번의 더 물감 말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음에 하기로 했는데,
유화를 하느라 펼쳐 놓았던 재료와 도구도 그냥 치우기 싫어서,
'하나를 더 하자!' 하면서, 이미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자화상’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자화상은, 합판 캔바스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걸 이용하기로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즉석에서... 색깔을 입힐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도 일단 탄력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되어주기도 하지......' 하고 미소를 지었을 정도로, 어느새... 윤곽선만 남겨 놓은 빨간 색만의 그림이 되어나왔던 것이다.
물론 기로 자신이 방금 전에 끝내놓은 그림이기는 하지만, 해놓고 봐도... 매우 단순한 자화상이었다.
안경을, 테만 검은 색으로 했고, 유리부분은 바탕의 흰색을 그대로 살려... 전체적으론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의 그림에, 기로는 썩 흡족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야, 이 자화상은... 그냥 주운 거나 다름없네?' 하고도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덥고 후텁지근한 날씨에 그림작업을 정리하려다 덤으로 했던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러니,
'허기야 그림이란 게, 나 자신도 모르는(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기도 하는 거니까......' 하면서 희색이 만면에 가득해지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수채' 드로잉만을 위주로 하다가, 이렇게 유화를 해 놓고 보니... 뭔가 묵직한 무게감도 느껴져서,
'이젠, 슬슬... 유화도 해봐야겠는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그것만도 반절의 성공일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의욕이 샘솟게 해주는 그림이 생겨난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캔바스가 없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둔터니'로 이사온 이래, 유화작업은 뒤로 미루기만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전주에 나갈 때... 캔버스하고 유화 재료도 좀 더 사와야겠구나.' 하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즉흥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끝내 놓은 뒤라서... 기로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야, 이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이런, 날아갈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니!' 하고 흥분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말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기분을 연장하기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를 꺼내 자동으로 자신의 작업하는 모습을 담아놓기까지 한 뒤,
그제야, 천천히... 그림 작업의 뒤처리도 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한 뒤, 기로는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쉼터로 나왔다.
우선 눈에 띄던, 학돌에서 한창 자리를 잡아가는 '부레옥잠' 이파리 하나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데...
"이 봐!" 하고, 옆집 할머니가 기로를 부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던 기로가,
"예, 무슨 일인데요. 할머니?" 하자,
"이리 좀 와 봐." 할머니는 손을 저으며 기로를 불렀다.
"무슨 일이신데요..."
"어서 와 봐!" 하고 할머니는 자꾸만 성화였다.
그러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저 먼 산장쪽에선,
산장 아주머니 김 순임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쪽을 보니,
"이따가 오세요!"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
일단 그 쪽으론 손을 흔들어 주면서, 할머니 집에 가 보니,
할머니는 방에다 수박을 꺼내놓으려는 중이었다.
"할머니, 저 수박 안 먹어요."
"왜?"
"저도 있어요."
"그려도 먹어 봐. 왜, 내가 주는 건... 안 먹을라고 혀?"
"그 게 아니라, 저도 수박이 있거든요. 그렇잖아도 점심때 쯤엔 할머니께 수박 좀 갖다드리려고 했는데, 있으시니까 안 가져와도 되겠네요......" 하면서도, 겨우 수박 한 쪽을 들고, 그걸 먹으면서,
"할머니, 저... 저 쪽 집에서 불러서, 가 봐야겠어요. 그럼, 또 봬요......" 하고 인사를 하면서 '夢想?'으로 돌아왔다.
기로가 잠깐 통나무집으로 가서 소변을 보고 나오는 사이에,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김 순임이었는데,
"화가 선상님, 곧 오세요. 밥 차려놓을 테니..."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면서도,
"예? 저는 이따가 산장 아저씨하고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했는데요..." 하자,
"그랬어요?" 하고,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어감으로 묻는 것이었다.
"예, 어제 전화왔었는데... 오늘,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 하시기에......"
"아! 그려도 와요, 밥 차려놓을 테니."
"아저씬 계세요?"
"지금은 없어요."
"왜요?"
"이것저것 사러나갔어요."
"그런가요?"
"없어도 괜찮아요. 오세요."
"예... 알았습니다." 하면서, 뭔가 약간은 부자유스러운 걸음으로 기로는 산장에 갔다.
그런데 기로가 도착하니, 막 산장아저씨 박 만석이 돌아온 뒤였다.
엊그제 잡았다는 '너구리' 고기를 볶아 놓은 밥상이 차려진 모양이었고.
그러니까 너구리 고기 때문에, 박 만석이 어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더니, 이렇게 점심 식사로 이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기로의 입장에서는,
'웬, 너구리 고기?' 하면서, '안 먹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김 순임이 전화까지 걸어와(귀한 음식이라며) 상을 준비해놓았을 터라, 그렇게 싹둑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처하긴 했지만, 기로는 '울며 겨자먹기'로...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육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필이면 또... 아직 그 집에 남아있을 줄 알았다던 막걸리가 떨어지고 없다고 해서, 그냥 소주를 반주로 마시기로 했다.
무슨 맛인지도 못 느낀 채 고기를 질겅질겅 씹기는 했지만, 기로에겐 일종의 곤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쨌건, 소주 세 잔을 걸치는 걸로... 그 식사를 끝내기는 했는데,
그 자리에서 박 만석은,
"내가 배로 호수를 돌다가... 뿌리가 멋지게 생긴 참나무를 하나 봐 두었는디, 그걸 뽑아 오기로 저기... 어떤 사람허고 약속을 혔는디..." 하며, 기로에게 자랑 비슷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참나무를 심으시게요?" 하고 물으니,
"글쎄, 심던지... 아니믄 나무를 깎아서, 두고 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얘기가, 박 만석은 기로더러 거기에 같이 가보자는 식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둘이 같이 가기로 했는데...
어?
기로는 차를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 박 만석이 호수로 내려가니,
"배를 타고 가나요?" 하고 묻자,
"잉, 배타고 가는 디여..."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배를 타고 산장 아래쪽으로 거슬러 내려갔는데...
현지에 가서 보니(호수 위 배에서 보니), 그 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라... 아랫둥지가 몽툭하고 위에는 가지 두 개가 옆으로 뻗어있는, 썩 볼품 있는 나무는 아니었다.
다만, 그 옆의 바위 때문에... 한 덩어리로 보면, 그 자체로는 어울려 보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박 만석은 그 나무를 캐다가 심던지(그 것도 기로가 ‘심으시게요?’하고 물었을 때에야, '그래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던 것이다.), 아니면 잘라다 나무자체 껍질을 벗겨내... 칠을 하여 관상용으로 두고 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로는 깜짝 놀라,
"아니, 왜... 자연 속의 나무를 캐다가 심으려고 합니까? 그렇다고 살 가능성도 많지 않을 거 같은데......" 하면서도, "그 옆의 바위는 어떻게 할 건데요?" 하고 물으니,
박 만석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깨 부술라고, 망치도 가져 왔잖여?" 하는 것이었다.
"예에?" 기로는 깜짝 놀라, "왜 산장 아저씨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려고 그러세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질타성의 항의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박 만석이 잠시 주춤! 하는 것 같더니, 기로를 바로 바라보면서도... 뭔가 낌새를 차린 듯(이전에 기로가 낚시꾼들이 이 마을에 왔을 때, 호되게 싸워가면서 돌려보냈던 것을 봐왔던지라),
"아이! 내가 장씨하고 잘 못 왔나 벼!" 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박 만석은 배를 내려, 그 바위로 올라가더니... 가져갔던 지렛대로 그 옆의 바위를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이, 그러지 마세요!" 기로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자,
박 만석은 또 다시, 멈칫하면서,
"에이, 내가 장씨를 데려온 게... 잘못혔나 벼." 하며 기분이 안 좋다는 식으로 인상까지 쓰는 것이었다.
물론 박 만석이 기로에게 그렇게 짜증스럽게 얘기한 건 처음이었 듯,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멈추지 않고,
"그 게 잘못이 아니라, 그런 자연의 나무를... 개인이 캐 간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 거든요? 그 나무가 그만큼 자라려면, 적어도 몇십 년은 걸렸을 텐데... 그렇게 한 순간에 파서, 산장 아저씨 맘대로... 죽일 건가요?" 하고 기로가 묻자,
"죽이기는 왜 죽여. 캐다가 심는당게..." 박 만석도 여전히 짜증스런 어투로 인상을 찌뿌렸다.
"아니, 왜 캐갑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지가 알아서 잘 자랄 텐데... 그리고 그게 산장 아저씨네 겁니까?" 하자,
박 만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로를 바라보는데,
"그건, 국가 재산이고... 모든 국민의 재산일 수도 있는, 그러니까... 산장아저씨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자,
"에이, 내가... 장씨 데려온 게 잘못헌 거여." 또 다시 박 만석은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아니요. 어떻게 보면, 잘 하신 거지요." 하고 기로도 인상을 쓰면서, "저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니, 산장 아저씨가... 내 눈으로 직접 볼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하는데도,
박 만석은 계속 지렛대로 바위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러시지 말라니까요!"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정말 그러시깁니까? 그러지 마세요!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니까요." 한 다음에, "그리고 만약에... 산장아저씨가 그 나무를 계속 캐시면, 이제 나는 산장가든과는 남입니다. 아저씨가 그 나무를 건드리기만 하면, 앞으론... 산장가든엔 발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을 하자,
박 만석은 순간 당황한 것 같았다. 얼굴빛마저 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매우 난처한 기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 만석은 기로에게 그걸 자랑 삼아 보여주면서, 나무가 보기 좋다거나 하는 식의 호응을 바랬을 터고, 또 어떻게 하라던지 하는 조언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이건... 호응이나 칭찬은 고사하고, 얼토당토 않은 절교선언(?)까지 받고 있는 상황으로 돌변한 꼴이다 보니,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어쩔 줄 모르고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려 알었어. 아무튼 장씨를 데려다 줘야겠고만..." 하면서 일단 지렛대를 옆에다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로를 집에 데려다 준 뒤, 다시 와서 본인 혼자서 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기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알아서 하십쇼! 만약, 앞으로... 산장 집에 이런 것 자꾸만 캐다 놓고 하는 게, 제 눈에 띄기만 하면... 앞으로 난, 그 집엔 절대 안 갑니다. 그러니까, 산장 아저씨! 사람을 잃든지 나무를 캐가든지... 본인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아예 배에 앉아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박 만석 본인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라는 투였다.
박 만석의 얼굴이 상기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색하게 짓는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이...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킨 사람과 흡사했다.
그런데도 기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둔터니 마을에 산장아저씨가 안 계시면, 이가 빠진 듯... 굉장히 허전할 걸요? 이 마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저 나무들도 마찬가지지요. 저 나무도 저기서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 그 나무를 캐가면, 그 주위의 나무들이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하자,
"그렁게, 안 뽑았잖여?"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지만... 나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정말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산장가든은 저런 것 없어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잘 사시고 계시거든요. 지금 산장가든 있는 그대로 가꾸셔도 되는데, 웬 쓸데없는 욕심을 그렇게 부리십니까? 그리고 그건 산장 아저씨 개인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 국가 재산입니다. 국가 것을 개인이 함부로 그리고 맘대로 가져가는 건, 안 좋은... 아니, '불법'이지요. 그 말은, 산장아저씨가 '도둑'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국가 재산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해 가져가는 건 도둑의 행태지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산장아저씨께서, 여태까진 그렇게 사셨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사신다면..." 하는데,
"그렁 게, 안 뽑는당게... 내가 장씨 데려다 주고, 연장 가지러 다시 오믄 되잖여? 그려서 이 배는 다시 갖고 가야허잖여..." 하는 식으로, 다시 박 만석이 노를 젓는데,
배에서는 긴장이 이어졌고,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박 만석은 기로가 내리도록 둔덕에 배를 세웠는데, 기로는...
휭!
뒤도 안 돌아보고 '夢想?'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 뒤로 기로는 그 이후의 상황을 모른다.
박 만석이 그 나무를 캐왔는지, 아닌지......
'막은댐'에 사는 본인보다 조금 젊으면서 산을 잘 타는 친구 하나에게 이미 나무를 캐는데 도와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는데, 그를 불러 나무를 캤는지, 아니면 오지 말라고 취소를 했는지......
그렇지만 기로는,
'내가 나중에 그 자리에 가서 확인해 보리라......'는 생각까지는 해두었다.
그런데 만약, 그 나무에 어떤 이상이 있다면?
기로는 자신이 한 말대로, 산장가든과는 아예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그럴 경우엔 정말 끝이다.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리라.' 고 다짐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로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기도 했다. '원칙주의자'로 자신이 하는 말이나 또 주장하는 게 그르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끝까지 밀고나가는 사람이니까.
격이 밥을 먹지 않고 비실비실댔다. 그러면서 잠이나 자는......
엊그저께 떼거리로 찾아왔던 기로의 제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먹을 것에 신경을 쓰는데도, 여전히 먹지를 않다 보니,
'제자 녀석들이 고기를 구워먹다가 준 게 탈이었을까?'
기로는 개를 우두커니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개가 하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그래, 차라리... 목욕이나 하거라." 하면서, 격을 불러 호수가로 가서 줄을 풀어주고는,
평상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 오자, 기로는 그대로 누웠다.
낮잠을 한 숨 자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기로는 조금 전에 이미 낮잠을 자고난 뒤였다.
우체부가,
"편지요!"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 나와보니 미국인 S한테서 영국에서 온 엽서 한 장이 마루에 있었던 것이다.
영국관광을 마치고 이제 처의 친척이 있는 프랑스의 ‘아를르’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어이!"
산장아저씨 박 만석이었다. 집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배 있는 쪽이었다.
기로가 대꾸도 없이 바라보자,
"나, 연장 가질러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 정말 나하고의 약속을 지키려나 보네?' 기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제야,
"예..." 하고 대답은 해주었다.
"지금, 연장 가질러 간당게." 하고, 묻지도 않았는데... 박 만석은 다시 한 번 그 말을 강조했다. 그 모습이 또 마치 애 같기만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로는 빙그레 웃으며,
"그럼... 나도 가요." 하고 소리를 지르자,
"같이 갈판여?" 하고 박 만석이 묻기에,
"예. 같이 한 번 가보기로 하죠......" 마치 인심을 쓴다는 식으로 기로는 말을 하면서,
노트북 작업하던 걸 저장시키고는, 노트북을 끄고... 집으로 와 마루에 올려놓고, 박 만석이 배를 대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박 만석은 혼자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근데, 웬 노래?..' 하면서도 기로는,
"안 베기로 했습니까?" 하고 다소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물으니,
"글씨..." 하고 말은 하면서도, 박 만석은 기로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멋쩍어서 그러리라. 이렇게 혼자서 일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나와 직접적으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것도, 나무를 꺾는 일을 그만 둔 것에 대한 멋쩍음이리라......' 하고 기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고 제법 큰소리로, 역시 단호하게 말을 하자,
"뭐가?" 하고, 박 만석이 움찔 놀라며 물었다.
"나무를 안 베는 걸로 결정해줘서요......"
"그 게 뭐가 고마워?"
"고맙지요. 제 말을 들어주신 거니까요......"
"아직은 몰라, 가 봐야 알어." 여전히 박 만석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 듯했다.
"왜 그러세요. 어르신이...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기로 역시 여전히 단호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그건, 그려..."
"근데, 실컷 저하고 약속을 해 놓고 계속 이러실..."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었어. 근디... 히히히..."
10 년도 어린 기로에게 굴복(?)하는 일이 아무래도 박 만석 스스로도 겸연쩍었을 터였다.
'그래서, 괜스레 이리 꼬고 저리 비틀어 보기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기로는 박 만석에 대해 웬만큼은 알 것도 같았다.
박 만석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일단... 기로의 말에 수긍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 기로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며... 신뢰를 쌓으려는 자세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데 웬 절교 선언까지 했담?' 하고 기로도 피식! 웃으면서, '내가 너무 단호했나?'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한 번쯤... 이런 식으로 부딛힐 거라는 것도 예상(?)했던 일일 수는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이거나, 또 어떤 상황에서거나......
한 평생 다른 생각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왔던 사람 사이에,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둘이는 다시 배를 타고 호수로 내려갔다.
"거 참! 저놈 살랑게, 이상스럽게 사네..."
바위틈에 묘한 모양으로 자라난 참나무에게 하는 박 만석의 말이었다.
"그러게요." 하면서 기로는, "야, 너는 나땜에 산 거다!" 하고 약간 웃음 섞인 한 마디를 해주자,
"아직은 몰라. 살지..." 하고 또 뭔가 미련을 감추지 않는 박 만석을 보고,
"정말 그러실 겁니까?" 기로가 눈과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하자,
"알었어, 알었어... 연장만 빼서 가믄 되잖여?" 하는 박 만석은, 여전히 나무에 미련이 남나보았다.
'이 게 뭐야? 장난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기로는 이쯤에서 박 만석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하루 아침에 그런 일을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분인데... 그래도 이 정도라도 생각이 바뀐 건, 뭔가 그런 것에 대한 수긍이거나 앞으로의 자세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이 양반이,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서 그렇지, 한 번 인정한 것은 끝까지 지켜나갈 사람이기는 하니까...... 어쨌거나, 내 말에 따라 준 건 분명하다. 내가 다시는 산장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 결과적으로 먹힌 것이다. 산장아저씨는 그 게 싫은 것이리라. 자신의 고집을 꺾는 굴욕을 당하더래도, 그 것(내가 발길을 끊는 건) 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것만으로도 저 양반이 날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산장아저씨는, 자연에서 그런 걸 개인적으로 채취하는 게 옳지 못하다는 행위를 인식하게 되었다기 보다는, 내가 절교를 선언한다는 게 더 두려워서... 그러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면서 기로는,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제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만이라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박 만석은 오늘따라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만 흥얼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또 생뚱맞게,
"장씨도 노래 한 번 불러 봐?" 하는 거 아닌가.
"노래라니요.. 무슨?" 하고 펄쩍 뛴 기로가, "저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합니다." 하자,
"그려도, 한 곡 뽑아봐."
"그럼, 제가 나중에 하모니카 불어드릴 께요."
"싫어, 하모니카는... 노래 혀 봐."
"못한다니까요!"
"그럼 내가 허까?"
"그러세요."
그렇게 박 만석의 입에서 노래가 다시 나오는데, 기로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랜지도 몰랐다.
사나이가 우는 사연 그 누가 알아줄까?
하는,
그런 가사는 들어본 것 같은데... 다른 노래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노래 몇 곡 중 본인이 좋아하는 구절만을 모아 혼자서 짜깁기해서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기로는 그런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디선가 들어봤던 가락에, 엉뚱한 가사만을 자신이 갖다 맞춰...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나무를 캐기 위해 준비해 가져갔던 연장이 너무 많아서, 기로는 그 연장의 일부를 들고... 박 만석을 따라 산장집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김 순임이 옥수수 찐 것을 가지고 나오던데,
"아주머니, 벌써, 옥수수가 나왔어요?" 하고 기로가 묻자,
"예. 저 건너에서 이른 옥수수를 따다 팔길래 샀어요." 하는 것이었다.
'벌써, 옥수수 철이라니......' 하기는 했지만,
허기야 이 동네의 옥수수들도 이제 알이 툭툭하게 익어 그 모습이 볼록하게 보여 머지않아 옥수수를 따서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은 기로도 이미 했었다.
그런데 한 알을 씹어 먹어보니, 맛이 제법들어 있었다.
"맛있는데요?" 하고 기로가 좋아하자,
"예, 조금 비싸게 주고 샀어요. 근디, 이 농사지은 사람은 올 해 돈 벌었다네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려?" 박 만석의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 것이었다.
돈 벌었다는 얘기에, 귀가 혹한 것이었다.
기로는 그런 박 만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기 건너 사람인디, 새로 개발한 옥수수를 심어 일찍 따서... 이렇게 팔응게, 돈을 상당히 벌었다고 혀."
"그려? 그러믄, 우리도 내년에 감자 심지 말고 옥수수 심으까?"
"내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다 심을틴디..."
"그려도, 옥수수 좋은 걸로 두어 개 냉겨 놔. 내년에 심게."
"아직 안 여물었는디?"
"그게 더 좋아. 너무 여문 것보다, 조금 들 여문 것이 싹도 잘 나고 좋아."
부부가 그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기로가 옥수수 하나를 다 해치우자,
김 순임이 하나를 더 꺼내왔다.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기로는 그 옥수수 하나를 받아 들고,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배에 올랐다.
산장언덕을 벗어나면서, 기로는 노 젓기를 멈춘 뒤... 배에서 옥수수를 먹었다.
그런데 그 맛도 일품이었다.
배를 물에 띄워놓고(두 손을 사용해야했기 때문에) 옥수수를 먹는 맛......
오늘은, 하모니카는 아니었지만... '옥수수 하모니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