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2)
(가회동성당∼약현성당, 2023년 1월 29일)
瓦也 정유순
광화문광장을 가로질러 종로입구에는 광화문사거리 ‘비각’으로 더 알려진 ‘고종즉위40년 칭경기념비’가 있다. 사적(제171호)으로 지정된 이 기념비는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고 보령이 51세가 되던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비신 맨 위쪽의 전서(篆書)는 ‘대한제국이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고 사면에 둘러 새겼는데, 황태자(뒤에 순종)의 글씨다.
<고종즉위40년 칭경기념비각>
내용은 서(序)와 송(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황제가 되었으며 나라 이름을 ‘대한’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한 사실과 1902년이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자 보령이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이므로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다.” 하였다. 기로소란 나이 일흔이 넘은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을 예우하기 위해 경로(敬老)의 예로 모셨던 것인데, 조선시대 왕들은 대부분 장수하지 못하여 51세에 기로소에 들었다고 한다.
<고종즉위40년 칭경기념비각(측면)>
광화문사거리에서 의금부 터로 가기 위해 피맛골을 따라 청진동을 경유하여 종각역 쪽으로 이동한다. 피맛길(避馬+길)은 ‘말을 타고 배복을 요구하며 종로를 행차하는 양반들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로 궁으로 이어지는 대로 주변의 골목길은 자연스레 피마길이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종로1가부터 6가까지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지정되었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동(淸進洞)은 조선시대부터 관료들과 결탁한 부호들이 많이 살아 이들을 상대한 기생들이 많아 기생촌으로도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피맛골 입구>
종각역 1번 출구 밖, 지금은 제일은행 건물자리(구 신신백화점)지만 옛날에는 의금부 터다. 의금부(義禁府)는 금부(禁府), 왕부(王府), 집금오(執金吾)라고도 하였으며 순찰 등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 왕명을 거역하거나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 양반의 범죄행위 등을 처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 신앙을 지킨 증거 터다. 그리고 이곳에 신문고(申聞鼓)가 있었다고 하나 궁궐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금부 터(현 SC 제일은행)>
건너편 종각역 6번 출구 앞은 전옥서 터다. 전옥서(典獄署)는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미결수를 수감하는 곳이다. 관원이나 양반 출신의 범죄자는 의금부에서 담당하였고, 전옥서는 주로 상민(常民) 출신의 범죄자를 수감하였다. 1405년(태종 5) 형조의 산하 관청이 되었다. 천주교 박해 때는 신자들을 사상범으로 분류하여 이곳에 구금시켰다. 수감대상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때로는 형조와 의금부 소관인 지도층 신자들도 수감되기도 했다.
<전옥서 터( 현 영풍빌딩)>
전옥서 터 옆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의 좌상(坐像)이 있다. 전봉준(全琫準)은 1894년 학정에 항거해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다. 그는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다. 그 자리가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자리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다음날 새벽 2시 동지들인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다. 동상은 전봉준의 순국 터인 이곳에 2018년 4월 24일에 세워졌다.
<전봉준 상>
종각역사거리에서 세종대로사거리로 이동한다. 광화문우체국과 동아일보사 자리는 우포도청 터다. 서울의 서북부를 관할했던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들이 희생된 곳이다. 충청도 공주지방에서 사목하던 드게트신부와 신자들이 압송되어 와서는 심한 굶주림으로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르, 이용헌 이시도르 등 신도들이 옥중 아사(餓死)하여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 서간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졌다.
<우포도청(현 동아일보, 광화문우체국)>
광화문사거리를 다시 건너 <경기감영 터>로 가기 위해 새문안길로 접어든다. 새문안길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 몇 차례 그 위치가 바뀌면서 현재의 강북삼성의료원과 경향신문사 사이에 새로 문을 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문로(新門路)로 부르다가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제673호)로 새문안길로 변경되었다. 광화문사거리~서대문로터리 구간이 새문안길이다. 도로변에 경희궁·새문안교회·강북삼성병원·서울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새문안길(구 신문로)>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이다. 경희궁(慶熙宮)은 조선 5대 궁궐의 하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철저하게 훼손된다.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일본인 학교인 총독부중학교를 세운다. 이 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경희궁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축소되고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던 궁궐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 학교는 해방 후 서울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고, 1980년도에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한다.
<경희궁 흥화문>
우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 돌아왔다. 황학정(黃鶴亭)은 1890년(고종27)에 지었던 정자로,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종로구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전각들이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진다.
<경희궁 숭정전>
<동국대학교 정각원>
경희궁 안의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변신한다. 이 박물관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2002년 5월 21일 개관하였다.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18만 점 이상의 서울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운현궁에서 기증한 석물, 조선총독부청사 철거부재, 종루주춧돌, 1968년까지 운행한 전차 등이 진열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총독부건물 부재>
경희궁 입구 좌측 마을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전면 철거 후 신축’이라는 기존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난 <도시재생마을>이다. 오래된 주택과 좁은 골목, 가파른 계단 등 정겨운 옛 새문안동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자체로 박물관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지나간 과거의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앞으로 새롭게 쌓여갈 기억을 포함하는 미완성 공간으로 현재진행형 마을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
길 건너 강북삼성병원은 일명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터이고, 그 안에는 1949년 6월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이 암살된 경교장이 있다. 경교장(京橋莊)은 1938년에 지어진 양옥주택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특징이다. 성숙된 건축술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광복 후 김구선생이 한동안 사용하면서 광복 후 남북이 하나 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힘써왔으며 1949년 김구선생이 암살된 현장이기도 하다. 비교적 건물의 모습이나 기본적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경교장>
그 아래로는 자유당정권의 실세였던 이기붕(李起鵬)의 집터에 세워진 4·19혁명기념관이 자리한다.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正副統領)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이 때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붕괴된다. 그 아래로 1905년 10월에 문을 연 대한적십자병원이 자리하였으나, 최근에 그 자리를 중앙대학교병원에서 인수했다고 한다.
<4.19혁명기념도서관>
https://blog.naver.com/waya555/22300247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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