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50년 전,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쯤 나는 진해 대야 초등학교의 햇병아리 교사였다. 방황했다. 만 21세---.천지 분간도 못하는 나이에 교단에 섰으니, 내가 교사 자질이 없음을 한탄하며 그렇게 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백송이란 고향 선배인 가수가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 위인 그는 큰 키에 미남, 게다가 美聲을 지니고 전국의 극장가를 휩쓸고 다녔다. 쇼단, 그보다 세 살 아래인 남일해(남일해는 비행기 전세를 내어 공연을 다닐 정도)만큼은 못해도 남백송은 어디 가나 인기였다. 그의 히트 곡 '방앗간 처녀'는 지금도 고향 삼랑진에서는 남녀노소에게 애창되고 있었다.
나는 까짓 교사라는 직업은 때려치우고,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더러 있다. 백ㅇㅇ라는 여자 코미디언의 부군 밴드마스터(색소폰 연주자)인 죠비 ㅇ와, 다방에서 극적으로 면담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애송이인 나와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의기투합될 리 만무하였다. 집안에서도 극구 반대! 형님한테 뺨따귀까지 맞았다. 부모님은 울기만 하시고---.
나 원 세상에. 천재가 모인다는 부산사범학교 졸업 성적 5/120, 한 순위 차이로 부산에 발령을 못 받고 진해에 떨어진 게 모진 시련과 화근이 될 줄이야. 스포츠 칼라 머리를 하고, 해군 카키복을 뒤집어 개조한 옷을 입고 출근하였다. 밤낮없이 그래도 노래는 불렀다. 틈만 나면, 별관 교실에 젊은 교사들을 모아 놓고 독판으로 놀았다(?) 그 시절 트위스트는 나로 인해 우리 학교에서 유행되었으리라.
<반세기 뒤에 그 남백송 원로 가수를 지난 9월 28일 용인 문화회관 가수 대기실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도 2주일에 한 번씩 서로 얼굴을 마주대한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남백송 예술단 공연장에서/ 내 옆에 앉은 가수는 왕년에 인기 절정에 올랐던 김하정이다. 얼마 전에 '대찬 인생'에 출연하여 쓰리보이와 강제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사연을 털어 놓더라. 교통사고 네 번에, 성형 수술 일곱 번? 사는 게 그렇게 모진가 보다. 나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지난 반세기가 내 손안에 있다?>
그때 밤마다 나는 진해 시내의 극장을 훑었다. 쥐꼬리 만한(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그랬으니 남는 게 있을 턱이 없고. 봉급을 받아 한 푼도 안 보내 주니 형님은 노발대발할 수밖에. 그래도 나는 잡은 극장 인생이었다. 쇼뿐만 아니라, '노란샤스의 사나이' 등의 영화며 서부 활극에 푹 빠져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했다, 아, 불쌍한 한 젊은이여!
한명숙은 노래도 잘 했지만, 참 아름다웠다. 진해에 머무르던 무렵, 한명숙은 스물아홉 살? 쇼에서 영화에서 한명숙은 농염하고 현란한 몸짓을 휘둘렀다. 섹스어필? 나는 아니 우리 또래 젊은이들이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랴. 연예인 세금 1위라는 돈방석 위에 앉기도 했고. 한명숙은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둔다. 그러나 자녀들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더라. 지금 여든 고령에 월세 4만원짜리 방에서 산다. 통장 잔액 286원.
여담이다. 반세기 전 한명숙을 극장에서 한번 스쳐만나기만 해도 행운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훨씬 더 잘산다. 나는 350만원쯤의 연금을 받으니까. 여자 동료 B 가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 선생님, 한명숙 선생님을 좀 도와 주세요. 마음씨가 곱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맞다. 도와야 한다. 인생의 부침이 어떤 것이가를 가르쳐 준 그에게 일년에 단 20만원이라도 지원하는 게 도리(?)다 싶다. 그때의 남백송 가수도 이제 늙었다. 나는 그를 형님이라 서슴없이 부르고, 그가 마련한 무대에서 트로트를 부른다. 인생은 무상하다, 이렇듯!
다시 이야기를 돌린다. 가수가 되려는 교사, 엄청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 명문 부산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결심하고 기차를 탔는데 형님께 붙잡혀 도로 주저앉았다가 겨울 졸업을 하였으니 한 해 재수를 한 탓에 고향에서 공부보다 노래에 정신을 앗김으로써 얻은 실력이다. 그러니 내가 노래 시합으로 남에게는 질 수 없었다. 지금 대중가요만 500곡을 소화하는 정도---.나는 외람되게 김지하 시인과 이동순 시인(영남대 교수), 나 셋이서 노래 대결을 했으면 하는 어뚱한 생각을 가끔한다. 양자 대결에서는 이동순 시인이 김지하 시인을 이겼다던가?
그러니 나보다 10년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난 '홍콩아가씨'를 모르겠는가? 폭스 트로트 춤곡인 홍콩아가씨를 진해의 골목마다 거리마다 때로은 중국집에서 뿌렸다. 물론 남백송의 '방앗간처녀'는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8개월 만에 나는 교직을 잠시 떠나야만 했다. 공부를 잘해서 진해에 발령받은 게 탈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임시 교사. 시골에 발령장을 들고 간 친구들은 정교 교사.
4개월 뒤에 다시 고향 삼랑진 송진초등학교에 정식 교사가 되어 부임한다.
홍콩아가씨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는 꽃파는 아가씨/ 이 꽃을 사 가세요 그리운 영란 꽃/ 아아아아 꽃잎처럼 다정스런 그 사람이면/ 그 가슴 품에 안겨 가고 싶어요. 50년 전이면 금사향 원로 가수가 36살이었다. 그 중년 여자 가수가 86살이 되었다. 21살 청년은 어느새 72살, 초로를 훨씬 지났고. 그리운 '영란 꽃'의 영란꽃은 은방울 꽃이란다. 금사향 원로 가수는 거침이 없었다. 나도 그에 못지 않아 파안대소하고 끌어안고 했다. 누가 둘을 초면이라 하겠는가? 은방울 자매라며 내 앞에 섰는데 글쎄 그 옛날 '마포종점'으로 다가서던 두 여인이 아니다. 하여튼 내친김에 은방울도 찰깍!(조금 쉬다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