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말
넷째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내용들은 모두가 이웃들과의 관계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새로운 삶은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하는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28절은 손과 결부되어 있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29절은 이웃들과 교제하는 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은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지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인간들에게만 주신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과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간악한 사탄이 인간의 입을 가만히 놓아 둘리가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공격하여 악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습관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체(肢體)가 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 중에는 언어에 대한 경계가 특히 강조적입니다. 사도는 말의 중요성과, 중요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될 경우 그 해독이 얼마나 가공할 결과를 가져오는 가에 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권면도,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25)했는데 또다시,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29)고 경계합니다. 5:3절에서는 재차,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다짐합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5:4) 합니다.
로마서에서도,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3:13-14)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경계는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야고보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면서 배가 지극히 작은 키에 의해서 조종되고,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하는 점을 예로 들면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2-6)고 경고합니다.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않는 이렇게 행하는 것은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라, “이는 성도(聖徒)에게 마땅한 바니라”(5:3),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철이나 어떤 모임에서 그들 중에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들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이 지금 무엇을 쫓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TV의 오락 프로그램이나 신문 잡지에 실린 까십들을 읽느라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빠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생각하는 바가 바르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하지 말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하)고 말씀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합니다. “우리의 사귐”, 즉 형제들과 만나면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일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나누고 있습니까? 상대방에게 은혜를 끼쳐줄 뿐만 아니라, 이 형제를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일까 하고 상대방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이와는 반대로 성도들이 모였음에도 먹거리, 옷 타령, 성형수술 얘기, 그러다가 급기야는 남의 험담이나 하는데 그 귀중한 혀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디모데전서 5:13절에서는,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합니다. 이는 “거짓”된 삶인 것입니다.
학자의 혀
이사야 50:4절을 인용함으로 이 단락을 마치려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혀와 말은 이렇게 치료하는 도구, 즉 복음을 증언하고 은혜를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말에 은혜가 있고 덕을 끼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이 곤핍하고 상하고 찢긴 심령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혀가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말로 그들을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합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말로 누군가를 도와 줄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귀를 열어서 깨우쳐 주시는 깨달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입니까? “아침마다”, 즉 고요한 아침, 경건의 시간입니다. 골방에서 나오는 그는 마치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과 같이 영감과 은혜에 젖어 있어,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29) 될 것입니다.
첫댓글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