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마을에서 내 편은 한 명도 없다.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유일한 사람, 담 임선생님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선 생님의 입술은 예전처럼
미소를 띠고 있었 지만,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 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겠니?”
“저는 그냥 윤호가 태권도를
가르쳐달라 고 해서 발차기를 하다가 실수로 얼굴을 찬 거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때 리려고 했다면 왜 교실에서
그랬겠어요. 안
그래? 송윤호?”
눈이 마주치자 윤호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 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코피가 멎지 않은
모양이었다. 콧속을 틀어막은 솜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윤호 티셔츠에도 교실
바 닥에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이렇게까 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왔다.
“윤호는 태권도 가르쳐달라고 한
적 없어요. 정민이가 먼저 발차기하는 거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재민이가 말했다. 재민이 저 녀석은 어째서
자기 일도 아닌 일에 끼어드는 걸까. 따지고 보면 아이들과 사이가
나빠진 것도 모두 재민이 탓이다. 사사건건 참견하면서 옳으니
그르니 하고 사과를 해라 어째라 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법원 가서
판사질이나 하라지. 왜 이런 촌구석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담.
“정민이는 운동장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선생님은 친구들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선생님도 등을
돌리겠지. 나는 이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외톨이가 될 거야.
윤호가 학교에 터닝메카드를 가지고
왔다. 윤호 아빠는 윤호가 사달라는
것은 뭐든 사준다.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윤호는 제일 먼저 그걸 사 들고 왔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터닝메카드 트레인세트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야, 송윤호, 그거 좀 줘
봐.”
사실 터닝메카드 같은 거 관심도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리즈가
나왔지만, 엄마는 단 한 개도 사주지
않았고, 나는 만화만 몇 번 보았을
뿐 작동법도 잘 몰랐다. 그냥 아이들이 재미나게
가지고 노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자꾸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는
터닝메카드가 싫었고, 그걸 사주는 윤호 아빠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자기들끼리만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꼴 보기 싫었다.
“어, 이건 안
되는데. 이거 어제 샀단
말이야.”
“누가 뭘 어쩐다고
그러니? 그냥 잠깐만 줘
보라고.”
“너는 맨날 잠깐만 달라고
해놓고 가져가서 안 주잖아.”
재민이 녀석이 나섰다. 재민이가 나서면 일이
꼬인다. 나는 정말 멋진 발차기를
보여줄 테니 터닝메카드 트레인을 높이 들고 서 있으라고 했다. 내 발이 거기까지 닿으면
장난감을 빌려주고, 닿지 않으면 지금까지
빌려갔던 장난감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장난감도 빌리지
않겠다고. 윤호는 달달 떨면서
트레인세트를 한껏 치켜 올렸다. 그러고는 바보같이 내가
발차기를 할 때 점프를 해버렸다. 내 발은 윤호의 얼굴을
차버렸다.
“약속대로 빌려 간 장난감을
모두 돌려줘. 더는 너에게는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을 거야.”
윤호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말했다.
재민이와 영재, 주희가 교실에서
나왔다. 윤호는 아직 교실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한테 모두
일러바쳤냐? 인제 보니 너희 모두
고자질쟁이였구나.”
4학년은 모두
5명. 그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치원 때부터 같이 다닌 친구들이었다. 그 애들 사이에 내가 낄
틈은 없었다. 내가 전학 왔을 때 아이들은
반가워하는 척했지만, 항상 자기들끼리만 어울릴 뿐
나에게 같이 어울릴 여지를 주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게 다 짜증이
났다. 전교생이 스무 명도 안 되는
촌구석 학교도 짜증이 났고, 구정물 줄줄 흐르는 얼굴이
까만 아이들도 싫었다. 구린내 나는 시골 공기도
싫었고, 다 쓰러져가는 외할머니 집도
싫었고, 밤늦게 퇴근해서 인상만 쓰는
엄마도 싫었다.
“네가 왜 아이들을 괴롭히는지
알아. 그건 네가 겁쟁이기
때문이야. 겁쟁이인 걸 숨기려고
아이들을 겁주고 다니는 거지. 너희 집은 부자도 아니고 넌
태권도도 잘 못 해. 넌 그냥 망해서 시골로 전학
온 겁쟁이일 뿐이야.”
재민이가 말했다.
“겁이 나서 선생님한테 다
일러바친 주제에 누구 보고 겁쟁이래?”
“겁쟁이가 아니면 증명해
봐.”
마을 끝 산 아래에 무당집이
있었다. 폐가가 된 지 오래된
곳이라서 날이 어두워지면 어른들도 지나길 거리끼는 곳이었다. 재민이는 그 집 앞으로 밤
아홉 시까지 나오라고 했다.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집에 혼자 들어가 마당에 있는 단골나무에 묶어놓은 몽당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했다.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그동안 네가
우리에게 했던 일을 선생님께 모두 말할 거니까. 그리고 전교생이 널
겁쟁이라고 놀릴 거야.”
“내가
가져오면?”
“그동안 네가 우리에게 했던
나쁜 일들을 모두 잊을 거야. 그리고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거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선생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일어나면 학교에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수업이 끝난 후 교문 앞에
서 있던 주희가 나를 말끄러미 보며 말했다.
“너 정말 무당집에 갈
거니? 아이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을
거야. 정민이 네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무당집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거기엔 도깨비가
살아.”
“거짓말. 도깨비 같은 게 어디
있어?”
“문방구 아저씨는 어릴 때부터
대머리였어. 아저씨가 그 집에 살았을 때
도깨비가 머리카락에 불을 놓았대. 궁금하면 문방구에 가서
물어보렴. 아저씨 어릴 때 찍은 사진도
보여주실 거야.”
도깨비나 귀신같은 거 정말 무섭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다
부서지고 허물어져서 폐가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일 끝나고 열한 시가
다 되어야 돌아오고, 나는 폐가나 다름없는 집에서
혼자 지냈다. 원양어선을 탄다고 나간
아빠는 몇 개월째 전화도 편지도 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나 삐죽 튀어나와 있는
입, 골이 난
이마, 불만이 가득한
눈, 부어있는
볼.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잡아서
사납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쳇, 도깨비 같은 거 나올 테면
나와 보라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