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이 남긴 일화를 몇개 소개한다.
- 정승몰래 쌓는 담 -
황희가 정승이 되었는데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담장도 없이 살아 마당이 더럽다는 얘기를 들은 세종은
황희를 위해서 비밀리에 공조판서를 불러들여
황희의 집 주변에 몰래 담장을 쌓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공조판서는 건축업자 여러명을 모아
비가오는 밤 시간을 맞추어 황희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 둘레에 담장을 쌓기 시작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갑자기 한쪽의 담장이 무너지면서
황희가 방문을 열어 이들의 행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공조판서는 황희에게 불려갔는데
공조판서가 원래는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자
황희는 비록 자신이 정승이지만
아직 백성들은 가난하여 담장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담장을 쌓으라고 했던 세종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주청하였다.
그러자 세종과 주변의 신하들은 황희의 청렴함을 확실히 알고
감동하며 울기도 하였다.
- 혼수 준비없는 딸이 시집 가는 날 -
황희는 너무 청렴하게 살다보니 자신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도
혼수품을 살 돈 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황희의 청렴함이
크다는 것을 알던터라 신하들과 상의하여
황희의 딸이 시집을 갈 때 혼수품을 살 돈은 물론
그 규모도 공주나 옹주 못지 않게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본 백성들은 황희는 하늘이 내려주신 인물이라며
더욱 더 존경하고 따랐다.
- 짐승도 말을 알아 듣는다 -
젊은 날에 들을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고 묻자
농부가 밭 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 와서
귓속말로 답하여 의아한 황희가 되묻자
“ 아무리 짐승이라도 잘못한다는 말을 좋아 할리가 있느냐”
하는 말을 들은 후로는 평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에밀레의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야기이다.
- 네 말이 옳다 -
두 계집종이 다투다가 황희에게 와서 고하는 말을 듣고
각자에게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 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조카가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른 법이지
어찌 둘 다 옳을 수가 있느냐?”고 하자
“응,듣고보니 네 말 또한 옳다”고했다는 이야기.
- 의자 다리 고쳐 드려라 -
김종서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회의에 참석했는데
자세가 바르지 못했던지 회의가 끝난 후,
영의정이던 황희가 큰 소리로
“ 여봐라 병판대감 의자 한쪽 다리가 짧은가보다
빨리 고쳐드려라”
깜짝 놀란 김종서가 의자에서 황망히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이를 민망하게 본 좌의정 맹사성이 퇴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퍽 관대하신 대감께서
유독 김종서에게는 왜 그렇게 엄하게 하시오” 했더니
“우리는 늙었고 장차 김종서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니
그를 바르게 키워야 하지 않겠소.” 했다고 하는 이야기.
- 황희 정승과 딸과 박 광대 -
황희 정승이 정승으로 지내도 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다.
황희 정승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치마가 없어서
하나를 가지고 서로 빌려 입고 변소에 갈 정도였다.
(이 대목에서 보면, 과장과 미화가
그 극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황희 정승이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딸들이 모여
울면서 여쭈었다.
"아버님 돌아가시면 저희는 어찌 삽니까?"
"공작새는 날거미줄을 먹고 사나,
너희들은 이제 남산 밑의 박광대가 알아하리라."
이런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얼마 후 중국에서 공작이라는 새가 왔는데
어떤 걸 주어도 안 먹고 굶는다.
그 소식을 들은 누가 딸들에게
"대감님이 아시는게 하도 많았는데
혹시 돌아가실 적에 무슨 말씀이 없었나?" 하고 물었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저희들이 어찌 사나 하고 여쭈었더니
그래 공작새는 날거미줄 먹고 사나,
너희는 남산 밑의 박광대가 알아하리라 하셨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이가
"그러면 날 거미줄을 걷어 오라." 일러,
걷어 온 날 거미줄을 주니 공작새가 먹었다.
그래 살을 찌워 공작새를 보내고 한 걱정을 덜었다.
그 후 나라 임금님이 등극하는데 광대들이 나와
재주를 피우는데 박 광대가 나오더니,
치마를 위로 던지고 다른 광대들은 쫓아가
잡아당기는 장면을 연출한다.
구경하던 대감이 보니 괴이하기 그지없어
박 광대에게 "무슨 짓이냐?" 고 물었다.
"황희 정승님은 아는 것은 많았어도 사는게 하도 어려워서
변소 갈 때 따님들이 치마 하나를
서로 당겨 입고, 벗고 하였습니다."
하고 아뢴다.
대감이 듣고 보니 딱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서울 남문에 환곡은
모두 황희 정승 댁으로 보내거라." 이르고
그 날 종일 기다려도 들어오는 대동곡이 없었다.
저녁 때 겨우 계란 바리 하나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라도 보내야 하겠는데,
그나마도 삶아 먹으려하니 모두 뼈가 있는 썩은 알이었다.
복 없는 사람은 계란에도 뼈가 들었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부터 유래한 말인 것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72현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던 황희는
“젊은 자네는 나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라”는
선배들의 간곡한 권유로 두문동을 나와
새로운 정권에 참여했다.
반대 인사였다는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로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펴기 시작했다.
그 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년,
그 동안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 경세육전 >, < 국조오례 > 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했다.
세종 31년(1449),
그의 나이 87세 되던 해에
60여 년간의 관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3년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문병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노인이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었다.
이를 본 왕이 깜짝 놀라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 늙은 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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