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56회 ― 미송의 슬럼프
1979년 7월.
한빛여성복 디자인실.
여름 상품이 성공적으로 출시된 뒤 회사는 곧바로 가을 신상품 기획에 들어갔다.
디자인실에는 매일 새로운 스케치가 쌓여 갔다.
하지만.
미송의 책상만은 달랐다.
새하얀 도화지.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지워진 흔적뿐이었다.
"하미송."
디자인실장이 미송을 불렀다.
"네."
"가을 재킷 시안."
"오늘까지 가능하지?"
미송은 애써 웃었다.
"...네."
하지만 돌아와 앉은 뒤에도
연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그려도
어딘가 익숙했다.
'이건 지난번 같아.'
'이건 너무 평범해.'
종이는 어느새 구겨져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하나.
둘.
셋.
열 장이 넘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미송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서정임 대리가 다가왔다.
"아직 안 가?"
미송은 작게 웃었다.
"조금만 더 해 보려고요."
서정임은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구겨진 종이가 가득했다.
"안 되지?"
미송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아무것도 안 떠올라요."
서정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그만해."
"억지로 그리면."
"억지 디자인밖에 안 나온다."
그날 저녁.
강인은 회사 앞에서 미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먼저 달려오던 미송이
오늘은 천천히 걸어왔다.
강인은 금세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
미송은 애써 웃었다.
"아니."
"거짓말."
미송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안 그려져."
두 사람은 한강 둔치를 천천히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송이 조용히 말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디어가 넘쳤는데."
"회사에 오니까."
"전부 사라진 것 같아."
강인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미송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디자이너 자격 없는 걸까?"
강인은 걸음을 멈췄다.
"아니."
"그럼?"
강인은 가방을 열었다.
낡은 스케치북 한 권을 꺼냈다.
"이거."
"뭐야?"
"내 스케치북."
미송은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엉성한 재킷 그림이 있었다.
선은 삐뚤었고,
비율도 맞지 않았다.
다음 장.
소매 길이가 서로 달랐다.
그다음 장.
패턴이 엉망이었다.
미송이 놀란 얼굴로 강인을 바라봤다.
"이게..."
"네가 그린 거야?"
강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미송은 한 장 한 장 넘겼다.
실패.
실패.
또 실패.
그러다가 중간쯤부터
조금씩 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에는
공모전 대상을 받은 작품의 첫 스케치가 있었다.
미송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인이 조용히 말했다.
"난."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계속."
"못 그렸어."
미송이 스케치북을 꼭 안았다.
"몰랐어."
"아무도 몰라."
"안 보여 줬으니까."
잠시 침묵.
강인이 미소를 지었다.
"선배."
"지금."
"첫 번째 실패 중이잖아."
"난."
"백 번째쯤이었어."
미송은 피식 웃었다.
"백 번째?"
"조금 넘었어."
둘은 함께 웃었다.
다음 날.
회사.
미송은 빈 도화지를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멋진 옷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선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선들이 천천히 이어졌다.
가을바람처럼 부드러운 재킷.
움직임이 편안한 허리선.
단정하지만 따뜻한 실루엣.
미송은 어느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리고 있었다.
서정임 대리가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네."
미송도 웃었다.
"네."
"조금요."
며칠 뒤.
기획회의.
미송은 새 스케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실장은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졌네."
"힘이 빠졌어."
미송은 처음엔 칭찬인지 몰랐다.
실장이 웃으며 설명했다.
"힘이 빠진 디자인이."
"오래 입는 옷이다."
"좋아."
"샘플 만들어 보자."
미송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날 저녁.
강인은 학교 작업실에서 공모전 이후 새로운 과제를 하고 있었다.
미송이 실습실 문을 열었다.
"강인아."
강인이 돌아보았다.
미송은 그의 스케치북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덕분에."
"다시 그렸어."
강인이 웃었다.
"다행이다."
미송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근데."
"이 스케치북."
"내가 보관할까?"
강인이 깜짝 놀랐다.
"안 돼."
"왜?"
"창피해."
미송은 웃으며 스케치북을 꼭 안았다.
"난."
"이게 제일 멋있어."
"왜?"
"실패가 있어서."
"지금의 송강인이 있는 거잖아."
강인은 잠시 미송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빌려줄게."
"아니."
"평생."
"같이 볼게."
강인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실습실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천천히 교정을 물들이고 있었다.
꿈은 언제나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언제나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사람이 있었다.
― 제56회 끝 ―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