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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 객잔》
## 제56화 ― 백노인의 천 년 빚
흑수호 위에 나타난 천검성군은 연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전혀 달랐다.
차갑고 단호했다.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높은 절벽처럼 고독했다.
물 위에 선 천검성군이 투명한 검을 들어 백노인을 겨누었다.
“백현.”
그의 목소리가 검은 호수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흑월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백노인은 대나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웃으려 했지만 입가가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을 판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잠시 빌려준 것이지.”
천검성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결과가 다르지 않다.”
“네 선택으로 봉인에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때문에 흑월의 기운이 제자들의 영혼을 잠식했다.”
백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누구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부터 말해 보아라.”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
설화가 연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정말 천검성군인가요?”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환영의 것이 아니었다.
천명검과 청운도 그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두 검은 주인을 만난 듯 떨고 있었다.
웅—
우우웅—
연우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천검성군이 흑월과 싸웠던 밤.
세 제자를 뒤에 남겨 두고 봉인지로 향하던 순간.
백현이 길을 막아섰던 기억.
“아이들을 데려가라.”
젊은 백현이 말했다.
“이번 싸움은 저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검성군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선택한 길이다.”
“그 선택이 아이들의 것인가?”
“천하를 지키는 일에 개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백현은 분노했다.
“그 아이들은 개인이 아니다.”
“네 제자다!”
그러나 천검성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
기억이 끊겼다.
연우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순간 천검성군의 시선이 연우에게 향했다.
“너는 나의 몸을 쓰고 있으나.”
투명한 검끝이 연우를 가리켰다.
“나의 뜻을 잃었다.”
연우가 천명검을 들었다.
“저는 당신의 몸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연우입니다.”
천검성군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다.
“기억도 없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주장하는군.”
“기억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억이 없다면 사람도 없다.”
천검성군이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검은 호수가 갈라졌다.
콰아아앙!
수면 아래에서 수천 자루의 투명한 검이 솟아올랐다.
그 검들은 모두 백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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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봉인지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천검성군의 말이 떨어지자 투명한 검들이 쏟아졌다.
백노인은 대나무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백운검결.”
“유운만천(流雲滿天)!”
지팡이 끝에서 흰 구름 같은 검기가 퍼져 나갔다.
수백 자루의 투명한 검이 구름 속에 갇혀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나머지 검들은 검기를 뚫고 백노인에게 날아들었다.
연우가 몸을 날렸다.
천명검과 청운이 푸른 원을 그렸다.
“천검비록.”
“호천수호검!”
콰아아앙!
거대한 검막이 백노인의 앞에 펼쳐졌다.
투명한 검들이 검막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천검성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왜 배신자를 지키느냐?”
연우는 백노인의 앞을 막은 채 대답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결과가 죄를 증명한다.”
“결과만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약함이 흑월을 다시 깨울 것이다.”
연우는 검을 놓지 않았다.
“그 강함이 사람들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
천검성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분노가 드러났다.
호수 위의 검들이 한꺼번에 울렸다.
우우우웅—
“너는 내가 어떤 희생을 했는지 모른다.”
“압니다.”
연우가 말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영혼을 봉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비난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당신이 떠난 뒤 남겨진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이제 압니다.”
연우는 백노인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들은 당신의 희생을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원망했습니다.”
천검성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투명한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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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노인이 연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비켜라.”
“백노인.”
“저 녀석의 말대로 이건 내 빚이다.”
백노인은 천검성군 앞으로 걸어갔다.
팔의 검은 초승달 문양이 더욱 짙어졌다.
“천 년 전.”
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
“네가 마지막 봉인지로 떠난 뒤 흑월의 군대가 우리를 덮쳤다.”
흑수호의 수면에 과거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
불타는 숲.
무너진 성벽.
젊은 백현은 세 제자를 보호하며 흑월의 수하들과 싸우고 있었다.
첫째 제자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둘째 제자는 검은 기운에 잠식되어 자신의 팔을 베어 내고 있었다.
어린 진무는 쓰러진 두 사형을 지키며 울고 있었다.
“백현 사부님.”
“스승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백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천검성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봉인을 완성하려면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만 남겼다.
흑월의 수하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백현은 사흘 밤낮을 싸웠다.
검은 부러졌고 몸에는 온전한 곳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세 아이를 품에 안고 흑수호까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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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호수에서 흑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죽어 가는군.”
백현은 부러진 검을 호수에 겨누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내가 직접 베어 주마.”
“검조차 들 힘이 없는 자가 허세를 부리는군.”
호수에서 검은 손이 솟아올랐다.
손끝이 진무의 가슴을 가리켰다.
“저 아이의 심장은 잠시 후 멈출 것이다.”
백현의 얼굴이 굳었다.
“닥쳐라.”
“첫째는 이미 늦었다.”
“둘째의 정신도 곧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시간을 줄 수 있다.”
백현은 그것이 함정임을 알고 있었다.
흑월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품속의 진무가 힘없이 속삭였다.
“사부님…”
“저는 아직 죽기 싫습니다.”
백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검은 물속에 넣었다.
“내 목숨을 가져가라.”
흑월이 웃었다.
“목숨은 필요 없다.”
“네가 오래 살아야 대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
검은 기운이 백현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네 영혼의 절반을 내게 내놓아라.”
“그리고 세 봉인이 무너질 때마다 네 생명으로 문을 열어라.”
백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을 살려라.”
“그렇다면 계약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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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초승달이 백현의 팔에 새겨졌다.
첫째 제자의 숨이 다시 이어졌다.
둘째 제자의 검은 기운이 잠시 멈췄다.
진무도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흑월은 세 제자의 영혼을 각각 다른 봉인지에 묶어 버렸다.
그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천 년 동안 봉인을 지키게 되었다.
백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절규했다.
“약속이 다르다!”
흑월의 웃음이 호수에 울렸다.
“죽지 않게 해 주었다.”
“그 이상은 약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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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광경이 사라졌다.
백노인은 천검성군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천검성군이 차갑게 말했다.
“내 명령을 지켰다면 흑월과 계약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백노인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네 명령?”
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다.
쾅!
흑수호의 물결이 크게 흔들렸다.
“아이들이 죽어도 봉인을 지키라는 명령 말이냐?”
“천하를 위한 희생이었다.”
“천하에는 그 아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느냐!”
백노인의 고함이 호수 전체를 울렸다.
“네가 지키려던 세상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왜 없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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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성군의 투명한 검에 푸른빛이 모였다.
“감정으로 대의를 판단하지 마라.”
백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대의 때문에 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는 목적을 이루었다.”
“그래.”
백노인이 말했다.
“흑월은 봉인되었고 너는 영웅이 되었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진무는 천 년 동안 스승을 기다렸다.”
“첫째는 자신의 이름도 잊은 채 검에 묶였다.”
“둘째는 미쳐 가면서도 네 명령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나는…”
백노인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한 선택이 옳았는지 천 년 동안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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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성군은 대답 대신 검을 들었다.
“죄는 변명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백노인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거대한 투명한 검기가 호수 위를 가르며 날아왔다.
백노인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연우가 외쳤다.
“백노인!”
연우가 그의 앞을 막았다.
천명검과 투명한 검기가 충돌했다.
콰아아앙!
연우의 팔이 크게 흔들렸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검자루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라.”
천검성군이 말했다.
“저자는 과거의 죄인이다.”
연우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백노인만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그 선택을 하게 만든 당신도 함께 심판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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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물결이 멈췄다.
설화와 청아, 묘묘도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천검성군과 마주 섰다.
과거의 자신.
천 년 전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존재.
그가 선택했던 길이 눈앞에 있었다.
천검성군은 강했다.
의심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버릴 수 있었다.
그 힘이 있었기에 흑월을 봉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힘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다.
천검성군이 물었다.
“나를 부정하면 네 힘과 기억도 잃게 된다.”
연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뜻입니까?”
천검성군은 투명한 검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세웠다.
검신 안에서 수많은 기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천검비록의 마지막 초식.
흑월의 진짜 이름.
세 번째 봉인지의 위치.
천검성군이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천 년 전 봉인에 숨겨진 마지막 진실.
“이 검에는 네가 잃어버린 기억의 절반이 들어 있다.”
백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군.”
묘묘가 낮게 말했다.
“흑수호가 천검성군의 기억을 하나의 인격으로 만든 것이다.”
천검성군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받아들여라.”
“그러면 모든 기억과 힘을 되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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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연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지 마요.”
연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기억 속에는 흑월을 막을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천검성군이 말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설화는 그를 노려보았다.
“연우가 원래의 모습이에요.”
“너는 그릇에 붙은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는군.”
“기억만으로 사람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천검성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네 감정은 판단을 흐린다.”
설화가 검을 뽑았다.
“그 감정이 연우를 사람으로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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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성군은 다시 연우를 바라보았다.
“선택해라.”
“백현을 버리고 나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부정하고 연우라는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것인가.”
백노인이 말했다.
“나 때문에 망설이지 마라.”
연우가 돌아보았다.
백노인은 평소처럼 웃으려 했지만 눈빛은 쓸쓸했다.
“저 검을 받아라.”
“흑월을 막으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백노인께서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오래 살 만큼 살았다.”
“그것은 대답이 아닙니다.”
“어른이 하는 말을 너무 따지지 마라.”
청아가 백노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또 혼자 결정하려고요?”
백노인은 말문이 막혔다.
청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다들 왜 자꾸 혼자 사라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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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는 눈을 감았다.
천검성군을 받아들이면 힘을 얻는다.
흑월의 약점도 알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연우의 기억과 마음은 과거에 삼켜질 수 있었다.
설화와 함께했던 시간.
청아가 만든 소란스러운 아침.
묘묘가 생선을 훔쳐 달아나던 모습.
백노인이 술값을 떼먹고 잠든 모습.
객잔을 찾았던 수많은 손님의 얼굴.
그 모든 것이 천검성군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감정으로 취급될지도 몰랐다.
연우는 눈을 떴다.
“선택하겠습니다.”
천검성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연우는 천명검을 들어 그에게 겨누었다.
“나는 당신이 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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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천검성군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흑월을 막을 힘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연우가 말했다.
“당신의 힘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잘못까지 운명이라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기억만 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빼앗겠습니다.”
천검성군의 눈빛에 분노가 떠올랐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누는가?”
연우는 천명검을 바로 세웠다.
“당신은 제 과거일 뿐입니다.”
“제 주인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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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성군의 몸에서 거대한 검기가 폭발했다.
수천 개의 투명한 검이 호수 위를 뒤덮었다.
“천검비록.”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제구식.”
백노인이 놀라 외쳤다.
“피해라!”
천검성군의 검이 내려왔다.
“천상무극검(天上無極劍)!”
수천 개의 검이 하나의 거대한 검으로 합쳐졌다.
하늘을 가를 듯한 검기가 연우에게 떨어졌다.
연우는 천명검과 청운을 교차했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두 검이 비명을 지르듯 울었다.
설화가 연우의 등에 손을 댔다.
붉은 마기가 그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혼자 하지 마요.”
청아도 황금 열쇠를 들어 올렸다.
금빛 보호막이 연우의 앞에 펼쳐졌다.
묘묘는 황금빛 영력으로 그의 발밑을 지탱했다.
백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연우가 외쳤다.
“백노인!”
백노인은 이를 악물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늙은이까지 부려 먹는구나!”
흰 구름 같은 검기가 연우의 두 검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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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힘이 하나로 모였다.
푸른빛.
붉은빛.
황금빛.
하얀빛.
연우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천검비록에는 없는 검.”
천검성군이 냉소했다.
“이름 없는 검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연우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기운을 느꼈다.
“이름은 지금 만들면 됩니다.”
그는 천명검과 청운을 하나의 선으로 겹쳤다.
“동행일검(同行一劍).”
네 가지 빛이 하나의 검광으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두 검이 흑수호 위에서 충돌했다.
호수 전체가 뒤집히고 검은 물이 하늘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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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성군의 투명한 검에 금이 갔다.
쩌저적—
그의 눈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어떻게…”
연우가 검을 밀어 올렸다.
“당신의 검은 가장 강하지만 혼자입니다.”
투명한 검의 균열이 점점 커졌다.
“우리의 검은 약해도 서로를 받치고 있습니다.”
쨍그랑!
천검성군의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검신에 갇혀 있던 수많은 기억이 빛의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천검성군의 몸도 서서히 투명해졌다.
그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는 깊은 피로만 남아 있었다.
---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천검성군이 물었다.
연우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당신의 선택 덕분에 세상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행복했는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천검성군은 백노인을 바라보았다.
“백현.”
백노인은 지팡이를 내리지 않았다.
“왜.”
“나를 원망하느냐?”
백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천 년 동안 실컷 했다.”
“지금도 그런가?”
백노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지쳤다.”
천검성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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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에서 빛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왔다.
조각들은 연우의 가슴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설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연우는 눈을 감았다.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천검비록의 잃어버린 초식.
흑월의 탄생.
세 봉인의 진짜 역할.
그리고 마지막 봉인지가 숨겨진 장소.
그러나 기억은 연우를 삼키지 않았다.
천검성군의 목소리만이 그의 안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네가 선택한 길이 옳기를 바란다.”
연우가 대답했다.
“틀리면 함께 고치겠습니다.”
“함께라…”
천검성군의 마지막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가장 배우지 못한 검이었군.”
그 말을 끝으로 그의 형상은 완전히 빛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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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호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백노인의 팔에 새겨진 검은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호수 아래의 붉은 달과 연결된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백노인이 팔을 움켜쥐었다.
“으윽!”
연우가 그를 붙잡았다.
“백노인!”
검은 문양에서 쇠사슬이 뻗어 나와 호수 속으로 이어졌다.
흑월의 목소리가 물 아래에서 울렸다.
“첫 번째 빚을 갚았으니.”
“이제 두 번째 대가를 받아야겠구나.”
백노인의 몸이 호수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설화와 청아가 그의 옷을 붙잡았다.
묘묘는 발톱을 드러내 쇠사슬을 끊으려 했지만 검은 기운이 튕겨 냈다.
백노인이 소리쳤다.
“놓아라!”
청아가 울먹이며 외쳤다.
“싫어요!”
“함께 끌려간다!”
“그래도 안 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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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가 천명검을 쇠사슬 위에 올렸다.
천검성군의 기억 속에서 흑월과의 계약을 끊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계약자의 피가 아니라.
계약을 맺게 한 원인의 소멸.
백노인이 흑월과 계약한 이유는 제자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영혼은 아직 세 봉인지에 묶여 있었다.
진무는 해방되었지만 나머지 두 제자는 남아 있었다.
연우가 말했다.
“계약을 당장 끊을 수는 없습니다.”
백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모두 놓아라!”
“대신 잠시 옮길 수는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연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쇠사슬 위에 올렸다.
“백노인의 빚을 저도 함께 지겠습니다.”
설화가 놀라 외쳤다.
“연우!”
“혼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우는 모두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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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가장 먼저 연우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청아와 묘묘도 뒤따랐다.
백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미친 것들.”
묘묘가 말했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니다.”
청아가 울면서 웃었다.
“객잔 사람들은 원래 조금 이상해요.”
설화가 주문을 외웠다.
“동심연혼.”
연우가 천검성군의 기억에서 얻은 봉인술을 더했다.
“분계쇄혼(分契鎖魂).”
네 사람의 빛이 검은 쇠사슬을 감쌌다.
쇠사슬의 문양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각자의 손목에 작은 초승달 형태로 새겨졌다.
백노인의 팔을 뒤덮었던 검은 문양은 절반 이상 흐려졌다.
호수로 끌려가던 힘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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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노인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연우 일행의 손목에 생긴 작은 표식을 보았다.
“왜…”
“왜 이 늙은이의 빚을 나눠 가지느냐?”
연우가 대답했다.
“백노인이 혼자 만든 빚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의 시작에는 천검성군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연우는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표식을 가렸다.
“그의 기억을 받은 제가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백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별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청아가 물었다.
“우는 거예요?”
“호수 바람이 눈에 들어갔다.”
“바람 안 부는데요.”
“오늘부터 분다.”
---
그 순간 흑수호 중앙의 물이 갈라졌다.
호수 아래에서 거대한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끝에는 두 번째 봉인석이 놓여 있었다.
봉인석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진무.
청운.
그리고 마지막 이름.
**풍백.**
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풍백?”
백노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이름이 왜 여기에…”
묘묘가 봉인석을 살폈다.
“풍백은 천검성군의 제자가 아니었다.”
연우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기억이 깨어났다.
전쟁이 끝나기 전날.
천검성군은 한 젊은 장수에게 검은 나무패를 건넸다.
그 젊은 장수는 바로 풍백이었다.
“객잔을 지켜라.”
천검성군이 말했다.
“모두가 죽더라도 마지막 문은 열어서는 안 된다.”
풍백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끝나는 날은 언제입니까?”
천검성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
연우가 기억에서 깨어났다.
멀리 떨어진 천하제일 객잔의 모습이 봉인석 위로 떠올랐다.
객잔 주변에는 검은 군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 중심에 풍백이 홀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오래된 창.
다른 손에는 천검성군이 남긴 검은 나무패.
풍백은 무너진 결계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명령을 완수할 때입니다.”
그의 뒤편 객잔 지하에서 검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 다음 화 예고
## 제57화 ― 풍백의 마지막 명령
천 년 전 천검성군에게 객잔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풍백.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그는 가족과 이름, 인간의 삶까지 포기했다.
흑월의 군대가 객잔을 포위하고 마지막 봉인을 깨뜨리려는 순간, 풍백은 홀로 창을 든다.
그러나 연우가 되찾은 기억 속에는 풍백에게 결코 전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명령이 숨겨져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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