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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한 국민 멘토 안철수 씨
빌 게이츠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한국에서 더 어려운 것은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는 일일 것이다.
빌 게이츠라는 이름은 단순히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융합된 개념으로 봐야 한다.
초창기의 ‘컴퓨터 천재’, 전성기의 ‘경영 귀재’, 지금의 ‘큰손 기부자’ 등으로서 말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스스로 한탄한 ‘빌 게이츠도 성공하기 어려운 한국’에서 23년간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더니, 이제는 빌 게이츠마저 뛰어넘고 있다.
적어도 한국 대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 취업포털 알바몬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안 원장은 ‘함께 일해보고 싶은 최고경영자(CEO)’ 1위에 올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을 2~4위로 밀어내고서 말이다.
‘안철수’라는 이름이 요즘 여러 영역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직자가 가장 존경하는 CEO, 과학기술인이 꼽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과학기술인, 정보통신(IT)·미디어 분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네티즌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고 싶은 국내 지식인, 직장인이 멘토로 삼고 싶은 인물 등 각종 설문조사에서 단골 1위다.
여·야 정당의 ‘영입 0순위’이자 ‘십고초려’ 대상이기도 하다.
‘시골의사’ 박경철씨와 3년째 전국을 순회하며 진행하는 ‘청춘콘서트’도 폭발적이다.
특별히 홍보하는 것도 아닌데 2~5천 명이 몰린다.
연 6천여 건의 강연·인터뷰·면담 등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며, 그를 다룬 책만도 300종이 넘게 출판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국민 멘토이자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는 누구인가.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우리 돈 수천억 원을 아껴 준 사람.
해마다 최고의 정보 인물로 꼽히는 사람.
천신만고 끝에 개발한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을 무료로 공개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포기한 사람.
초등학생들한테 온 편지까지도 꼬박꼬박 답장해주는 사람….
컴퓨터 의사 안철수 님.
그는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많은 일을 해놓고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를 만큼 계산속이 없다.
그저 성실하기만 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별난 컴퓨터 의사'라 부른다.
“가만 보면요, 사회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도록 돼 있어요. 자동차 한 대만 봐도 그렇잖아요. 여러 사람의 노력과 지식이 합해서 한 대의 자동차가 완성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군의관 3년 빼고 지금까지 쭉 공부만 하며 살아왔어요.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을 때도 학생이었죠. 그 동안 늘 받기만 하고 살다가, 드디어 나도 무언가 사회에 공헌할 게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보급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런 원칙을 계속 지켜 나갈 계획입니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고, 또 배울 때는 뭐든지 기초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어요. 컴퓨터 분야는 순전히 독학이었죠. 컴퓨터 역시 기초부터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응용공학을 다시 공부하게 된 겁니다.”
그가 컴퓨터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대 의대 다니던 시절이었다.
친구 하숙방에서 우연히 애플 컴퓨터를 보고는 그 맛에 깊이 빠져 든 것이다.
컴퓨터에 매료된 이 의대생은 컴퓨터와 관련된 외국 서적은 모조리 뒤적이며 컴퓨터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미래가 컴퓨터와 관련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88년에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게 처음 생겼는데, 지금은 9천 종을 헤아리지만 그때는 단 한 종류였죠. 그런데 아무도 손을 못 쓰고 속수무책으로 퍼져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백신 개발에 뛰어든 겁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 있는 것도 아니고, 의사의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휴가 한번 가지 않고 매일 새벽 세시부터 컴퓨터를 두드렸다.
마침내 그는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지면을 통해 컴퓨터와 관련된 수많은 글을 썼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 통신을 통해, 우편을 통해, 또한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고충을 일일이 들어주었다.
어느새 그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컴퓨터를 고치는 의사, 때론 인생 상담도 해주는 젊은이들의 친구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재가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까진 부산에서 자랐는데 뭣 하나 뚜렷하게 잘하는 게 없었죠. 때로 천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눅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실수가 있으면 반성하되 좌절은 하지 않았어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안철수 님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도록 해주었다.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보면 왜 굳이 파괴하는 데 힘을 쏟는 걸까, 그 힘을 좀 더 좋은 곳에 쓰면 자기 마음도 훨씬 기쁠 텐데 싶은 거죠. 과학은 빠르게 발전해 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기술에 노예처럼 끌려가는 것 같아요.”
그는, 젊은이들이 컴퓨터를 대할 때 자기에게 필요한지는 생각지 않고 무조건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선호하는 것, 과시하기 위해 첨단 기능만 고집하는 경향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개성대로, 자기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겠느냐면서.
그는 의사, 벤처 사업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안철수는 14년간 의사 생활을 했으며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대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대 생활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88년 그 취미 덕분에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후 7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백신을 무료로 제작·배포하다가 백신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1995년에 의대 학과장을 그만두고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2005년 초까지 10년간 CEO로 활동하다가 경영을 그만두고 펜실베니아대학교 와튼스쿨 MBA로 들어가 경영을 배운 후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재임하면서 공대 학생들에게 경영을 가르치다가 현재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및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안철수는 학창시절 반에서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 게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치는 걸로 의심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연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다.
그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간정도의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해 1등을 차지하고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안철수는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서울대 의대에서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안철수가 컴퓨터를 공부한 이유는 의사로써 전공 실험을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중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50장 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해보니 3장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 바이러스는 최초 파키스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형제 둘이 컴퓨터 가게를 차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가게를 운영하려 했는데 하나만 팔아도 불법 복제가 되어 가게가 망하자 이 형제들이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오는데 3년이 걸렸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이러스 때문에 디스켓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 디스켓이 깨진다느니, 바이러스가 사람에게서 옮는다는 등의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는 전공실험을 위해 열심히 배워두었던 컴퓨터 언어 공부를 막 끝낸 참이어서 절묘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중 후배가 안철수를 찾아와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묻자 안철수는 바이러스 치료를 연구하게 된다.
밤새워 분석한 안철수는 1988년 6월 10일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 앤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그 뒤로 안철수는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후 당시 악명을 떨친 LBC,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을 치료하는 기능이 추가된 ‘V2’, ‘V2Plus’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였다.
그렇게 안철수는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간 이중생활을 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 제작을 하고, 의대에 가서는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당시에 한국에는 안철수 말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중 안철수가 군대에 가게 될 즈음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미켈란젤로의 탄생일인 3월 6일에 활성화되는 바이러스로 컴퓨터의 기억 자료를 파괴시킨다.
안철수는 자신이 장교 훈련을 받는 3개월 동안 백신을 만들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1991년 2월 6일 혼자서 밤새 백신을 만들어 PC통신을 통해 배포했으며 이것이 V3이다.
그리고 그날 아침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입영했다.
그러나 백신 제작에 몰입한 나머지 입대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학생 때 만난 부인은 1년 후배로 대학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다.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 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안철수는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의과 대학교에서 굉장히 유명한 커플이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다녔다.
당시 궁핍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아무것도 없이 같이 살자며 프로포즈를 했다.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안철수는 의사 생활과 백신개발을 하는 생활을 7년 정도 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매년 2배씩 증가해 안철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의대 교수로 재직하려면 지도 학생을 받아야 하는데 지도 교수가 학생 몰래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학생은 불행한 것이라 생각하여 고민 끝에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더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백신 제작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러나 돈벌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7년 동안 모아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 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던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철수연구소이다.
안철수는 기업을 만들더라도 백신을 개인에겐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들에만 사용료를 받아 기업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으며 안철수연구소는 현재도 개인에게는 V3 Lite라는 이름으로 무료 배포하고 있다.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회사가 적자로 힘들던 시절인 1997년, 회사 창립 2년 만에 미국의 거대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천만 달러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안철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갔다.
보통 재벌그룹 회장정도가 되면 직접 발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당시 인수에 의욕을 가졌던 맥아피 회장은 안철수 앞에서 직접 발표를 하며 인수를 제안했으나 안철수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회사를 매각했던 일본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줬다.
일본 대표는 ‘당시 회사가 적자나서 힘들었으나,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난 후 걱정도 없이 잘 지낸다’라며 안철수에게 회사를 팔라고 설득했으나 안철수는 끝내 거절했다.
당시 맥아피는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안철수연구소 때문에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안철수는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안철수는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던중 1999년 4월 26일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터져 적자가 나던 회사는 흑자로 전환됐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 대 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화하게 되어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 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 원을 돌파했고 이후 세후 순익 100억 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
2005년 당시 회사 경영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기업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1년간 고민했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회사를 창립한지 만 10년이 되는 날인 2005년,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를 사임하였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
당시 발표 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회사 경영하던 당시 안철수는 직원들에게 주식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안철수는 혼자서 이룬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원들과 나눈 것이었다.
CEO를 그만두고 스탠포드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니아대학교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부인이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안철수는 그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30일 귀국한 안철수는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과거에는 바이러스가 장난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최근의 바이러스는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 유포를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낸 후 중국 등에서 한국인들의 개인정보를 암거래 하는데 사용되며 러시아 마피아가 동원되는 등 조직범죄로 발전했다.
안철수는 ‘백신 회사는 범죄율(바이러스)이 높을수록 이익이 높아지는 아이러니한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명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안철수가 와튼스쿨 MBA에서 법학 강의를 들을 때 법대 교수는 ‘A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똑똑한 학생들이 10년 후에 보니 대부분 감옥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며 똑똑하지만 개인적인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만 하고 자신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범을 보이지 않고 강요만 한다면 아이들은 책 읽는 흉내만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도 함께 책 읽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철수는 부부싸움을 할 때도 존댓말로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잘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대 장교 대위로 복무하던 시절에도 병사들에게 반말을 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이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안철수에게 매번 존댓말로 대해주었으며 혼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철수는 그동안 어머니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늦잠을 자 택시 타고 등교할 때 어머니가 ‘학교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어떻게 어머니가 존댓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것을 듣고 어머니의 존댓말이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안철수는 모범적인 사생활로도 유명하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엔 술을 자주 마셨으나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 과음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이후부터 술을 끊어 전혀 마시지 않고 있으며 흡연도 하지 않는다.
안철수는 직원들이나 남들 앞에서 화를 내본 적도 한 번도 없으며 욕을 해본 적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청교도적인 삶을 산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안철수는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은 뭔가를 참아본 적도 없고 오히려 마음 편한 대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며, 명예보다 자기 마음 편한 게 중요하며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안철수는 매순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의사로써 계속 생활을 했다면 훨씬 단순하고 집중할 수 있는 생활을 했겠지만 의사를 그만둠으로 인해서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안철수는 자신이 크게 성공한 것에 대해 시기가 잘 맞았다고 말한다.
바이러스는 기계어를 알아야 분석할 수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기계어를 배운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어 이런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운이라는 것은 기회가 준비와 만난 순간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재능과 노력, 운이 모두 맞아떨어진 것이며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며 사회적 성공이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안철수는 ‘대한민국의 벤처기업 95%는 망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혹자는 ‘요즘 세대들은 너무 안정 지향적이다.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안철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카이스트에서 학생을 가르쳐온 안철수는 학생 개개인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학생들은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고 호기심이 왕성하다며 다만 그런 도전정신이 강한 학생들을 사회가 더 큰 힘으로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몰아붙이는 사회 구조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는데 안철수는 실패의 요람이라고 바꿔 말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100개의 기업이 나타나면 99개는 망하고 1개만 생존한다.
실패한 기업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없고 최선을 다했다면 계속 기회를 준다.
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여 천 배의 성공을 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실패를 전부 갚고도 남게 된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이것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실패한 사람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는 게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길이며 벤처와 청소년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안철수는 강력한 추진력과 기업가정신, 도덕성,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인해 젊은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멘토로 손꼽히고 있다.
안철수는 교수직에 임하면서 동시에 박경철과 함께 시사평론을 비롯한 강의를 해오고 있다.
젊은 층의 지지로 인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의한 적도 있고, 참여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 제의를 받은 적도 있으나 안철수는 거절했다.
안철수는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이나 권력을 즐기지 못하기에 거절했다’며 ‘실무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앞으로 정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첫댓글 언론매체를 통해 안철수님을 뵐때마다 참으로 대단한, 훌륭한, 위대한 분이시다 싶어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