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철학박사 가수1호 하춘화[1]
철학박사 된 여섯 살 신동,
교재는 부친의 50년간 기록메모
봄날 피어난 꽃, 하춘화.
우리나라 신민요와 대중가요의 장르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실력파 가수인
이화자-황금심-박재란 계보의 대를 잇고 있는 인물이다.
불과 만으로 여섯 살 때 데뷔해 현재까지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하춘화.
그럼에도 데뷔 당시 상황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부친 하종오씨(90)가 지난 50년간 관련 자료를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덕택이다.
그뿐 아니라 매일 일기 쓰듯 딸의 활동사항들을 빠짐없이 기록해왔다.
스크랩 자료만도 자그마치 22권 분량.
그러다보니 이 기록은 개인사를 뛰어넘어 어느덧 우리 가요사의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 하춘화씨와 부친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이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것은 처음이라 했다.
부녀간의 깊은 신뢰가 그렇듯 '기록의 제왕' 부친의 지극정성 속에 하춘화씨 또한 그에 걸맞게 '기록의 여왕'으로 성장했다.
61년 12월 3일에 첫 취입한 데뷔앨범은 당시 우리나라 최연소 독집음반 으로 화제를 모았고
이어 63년 4월 1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 최연소 정회원이 된다.
"제가 하춘화예요. 금년에 일곱 살입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그의 첫 데뷔음반.
계속되는 대사,
"노래란 것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허지만 나이 어린 제가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퍽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한 번 불러 보겠어요." 라는 앙증스런 멘트가 이어지는 이 독집음반엔
'효녀 심청 되오리다'를 비롯해 모두 여덟 곡의 노래가 수록되었다.
모두 오종하 작사, 형석기 작곡의 노래다.
작곡가 형석기씨는 '대한팔경', '맹꽁이 타령'의 유명작곡가.
그리고 작사자 오종하는 바로 부친 하종오씨로 이른바 '로꾸거 표기'인 셈.
"그 노래들의 작사자 표기가 제 이름을 거꾸로 표기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다만 당시 춘화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사랑타령 같은 걸 부르게 할 수 없어 직접 가사를 손질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할 뿐...
아마도 작곡가 형석기씨의 제안이었을 것 같군요" 부친 하종오씨의 말이다.
이 음반에 담긴 노래는 그밖에도 '비개인 서울거리', '부산항 블루스',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 '목포항 탱고' 등으로
이를테면 어린 춘화양은 노래로 전국 팔도를 순회한다.
마치 이후 전국을 누비며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개인최다공연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것임을 예고하듯.
실제로 그가 91년,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 공연기록은 1260회.
현재도 1년에 30~40차례 콘서트와 디너쇼를 갖는다.
"당시엔 악보는 물론 글씨조차 읽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모두 외워서 했어요." 부친 하종오씨의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입수한 당시 녹음 마스터 테이프를 체크해보니 단지 두 번의 NG만을 냈을 뿐이었다.
당시엔 One Take 방식(편집 없이 한 번에 녹음하는 것)으로 녹음해야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신동'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신동'은 예서 그치지 않고 지난 50년 간 스타로 자리했고
아울러 얼마 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사회변동기(變動期)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갈수록 우리 대중가요가 상당한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에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접근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때문에 스스로 연구를 시작했지요."
만학도, 하춘화씨가 밝힌 동기다.
'하춘화'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노래는
65년에 발표한 '아빠는 마도로스'.
'태풍이 분다 경보가 내려 엄마는 걱정하셔도...'로 시작되는 노래 '아빠는 마도로스'를 취입한 것 또한 불과 열 살 때였다.
아울러 이 무렵 개봉된 영화 '아빠 돌아와요(임원직 감독)'에서는, 주연을 맡음과 동시에 주제가까지 취입했다.
서울수송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로부터 6년 뒤인 71년 '물새 한 마리',
그리고 이어 작곡가 겸 가수 고봉산씨와 함께 '영감타령'을 새롭게 편곡해 발표한 '잘했군 잘했어'로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녀 나이는 불과 열여섯 살, 일신여상 2학년 때였다.
이때 이미 하춘화는 정상의 가수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당시 엄격히 적용되던 '귀밑머리 1cm'라는 교내 규정에서도 열외 되었을 정도로 특혜를 받으며
동시에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계속)
Copyright ⓒ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2007-04-21일자.
기간이나 나이 등은 2011년, 현재로 바꿨습니다.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철학박사 가수1호 하춘화 [2]
'가요계 인형'에서 '가요계 산 증인' 되고 싶어
가수 하춘화씨는 1955년 6월 28일, 부산 초량동에서 부친 하종오씨와 모친 김채임씨 슬하의 네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철강선 제조업체 (주)동아제강의 설립자였던 부친은 이후 야당 정치에 몸담았다가
5.16 이후 정치기반이 무너지자 서울로 무대를 옮긴다.
그때서야 둘째딸 춘화양의 노래솜씨가 이미 주위에 소문이 났을 정도로 '신동'이었음을 알게 된 부친은
당시 가수 고복수씨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 등록, 본격적인 노래 지도를 시작한다.
"춘화는 부산에서 보낸 유년시절부터 놀랍게도 일본노래, 특히 미소라 히바리 노래까지 곧잘 따라 불렀어요.
동화예술학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숙소가 있던 청진동 여관에서부터 명동의 학원까지 걸어 다니면서도
단 한 차례도 거른 적이 없었을 만큼 노래공부에 매우 열정적이었지요.
심지어는 혼자 다니기도 했죠."
때문에 부친의 뒷바라지 역시 어린 춘화의 열정 못지않았다.
첫 독집음반을 발표하던 1961년 12월, 공교롭게도 '아동복리법(이후 '아동복지법'으로 개정)이 공포된다.
때문에 음반발표가수로써 한국연예협회가 발급하는 '가수증'을 취득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만 14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곡예를 시킬 수 없다'는 아동복리법 조항 때문.
이에 부친은 '노래활동과 곡예는 엄연히 다른 분야'라는 청원서를 내기에 이르렀고
결국 그런 후에야 정회원 가수증이 비로소 발급되었다.
'단발머리 시대'에 초, 중, 고 시절을 보내며 학업과 무대를 동시에 병행했던 하춘화.
그러나 헤어스타일만큼은 늘 한결같이 '긴 머리'였다. 이 또한 부친의 의지였다.
'지금은 비록 학생 신분이지만 미래는 연예인으로 장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며
교사들이 바뀔 때마다 꾸준히 설득해왔기 때문에 당시 학교 규칙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었던 것.
그렇듯 이미 가수에 대한 의지가 분명했던 만큼 하춘화의 연예활동은 가속도를 더하며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에 이어
72년 예그린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와 영화 '세노야 세노야'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다재다능한 재능을 선보였다.
이어 '연포 아가씨', '영암 아리랑', '하동포구아가씨' 등
각 지방 소재의 노래를 전국적으로 히트시키며 펼쳐진 전국 순회 '하춘화 리사이틀쇼'는 어디서나 만원을 이뤘다.
아울러 TBC, MBC 10대가수상을 7년과 8년동안 연속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당시 '최연소'라는 각종 기록을 모두 새로 쓸 만큼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를 구가할수록
부친은 주변의 시각에 대해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연예활동은 곧 학업 소홀로 이어지는,
이른바 '10대 소녀가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이었다.
때문에 부친은 누구보다도 엄하게 부족한 학업과 인성에 대한 교육을 하춘화씨에게 강조해왔다.
때문일까, 하춘화씨는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는 가수로 활동해왔다.
동시에 인기가수로 부상한 72년,
취로사업장용 손수레와 새마을공장 등에 재봉틀을 기증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선행은
그동안 각 단체로부터 120여 차례 감사패를 받으며 현재 '국내 연예인 중 최다 봉사활동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심지어 지난 2001년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에서는 1억5천만 원의 수익금 전체를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돕기 성금으로 기증했다.
그 해 정부로부터 옥관 문화훈장 받기도 했던 그는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데뷔 45주년공연에서도 개런티를 포함해 수익금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던 훈훈한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50주년 공연 타이틀 또한 'mbc 창사 50주년 기념, 다문화가정 나눔콘서트'다.)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늘 남을 생각하라, 아울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말이죠."
물론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학구열도 남다르다.
전성기 시절, 부족했던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던 그의 이력서엔 대학관련 학력사항만도 대여섯 개.
최근에는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사회변동기(變動期)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이 모든 것의 지침서는 부친의 50년간 기록메모다.
'아버지는 내가 가슴으로 배운 교과서였다', 라는 헤드카피가 그렇듯,
이 기록을 토대로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격려, 아무도 하지 못했던 뼈아픈 충고...
'현실에 대한 세간의 뜨거운 시선과 미래에 대한 불굴의 의지', 이러한 함수관계가 부녀간의 회고록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Copyright ⓒ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2007-04-28일자.
첫댓글 하춘화씨 아버님이 소위 요즘 한국의 골프대디들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신 분이셨군요.
지구상 존재하는 많은 생명체 중에서 부모에 의한 양육 기간이 가강 긴 것이 사람이라네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캥거루족이 많아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50여년의 기록메모..아버님의 지극정성이 오늘의 님을 만들었네요..
귀한시간 내어 올려주신 자료 감사합니다^^
스타 탄생의 빛과 그늘, 하춘화씨 인터뷰를 하면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고뇌가 읽혀졌습니다.
우리 바람새카페의 품격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주시는 박성서님..ㅎ
덕분에 이렇게 알찬 정보를 맘껏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춘화님의 아버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저절로 부모님의 은혜..노랫말이 흥얼거려집니다...^^
품위 있고 품격 높은 칭찬에 무쟈게 감사... ㅎㅎ^^
공연장에서 부친은 마스크를 쓴 채 관객들과 함께 입장하더군요.
그럼에도 제가 알아보고 인사하니 크게 당황하시더라는...
하춘화가 물새한마리를 발표하기 직전에, 박혜령이었을까요? 다른 꼬마가수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었어요. 그때 하춘화가 인터뷰했던 기사가 기억나요. 쓸쓸한 표정으로 <나도 어려서 유명한 꼬마가수였다, 지금 활동하는 저 꼬마가수들보다 훨씬 유명했다...>하며 어린 나이에 누렸던 인기가 이젠 사라져버린 걸 쓸쓸해하더군요. 그때 막 물새한마리를 발표했을 땐가봐요. 그리고 금방 예전의 인기를 회복했었지요.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찍은 사진도 기억이 나네요.그때 여고생이었는데 말이에요. 별걸 다 기억하고 있죠? ㅎㅎ
그래서 나팔꽃님 글에서는 늘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좋은 소개, 감사
감사, 자주 뵐 수 있기를.
좋은 인물 소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춘하씨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다 아버님 영향을 받았다 하시드만요 부친이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우신것 같습니다. 박성서님 글을 읽으면 정말 귀한 보석을 대하는 느낌이 듭니다. 참 필력이 대단하신분 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늘 베풀어주시는 관심과 격려가 제겐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따금씩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갈매기의 꿈'님이 해주신 말씀을 응원가 삼아 주어진 일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요.^^
제가알기로는200억이상 기부한걸로알고있습니다 얼마전 부친九旬잔치도벌였습니다 어머니오도함께
尊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