循環하고 緣起하는 生老病死 -김지하 시집 {유목과 은둔}
이은봉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김지하를 가리켜 우주생명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얼마 전에 발표된 에세이 [생명 평화 선언](2004. 8. 24)를 보면 최근의 김지하에게는 확실히 그러한 점이 없지 않다. 물론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은 기존의 생명론을 발전, 확장시킨 결과라고 파악된다. 하지만 이에 추진 로켓를 단 것은 蓮潭 李運奎 선생의 시구 "影動天心月"이 아닌가 싶다.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라고 번역, 탐구되고 있는 이 시구를 중심으로 우주생명의 다양한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근래의 김지하라는 것이다.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라고 했을 때의 '그늘'은 그동안 그가 줄곧 탐구해온 '흰 그늘'의 미학과 무관하지 않다. 흰 그늘이라고 할 때의 '그늘'은 陽과 대비되는 陰의 運氣로서 판소리 등 우리 민족의 전통 예술에서 흔히 논의해온 한이나 설움, 슬픔이나 아픔 등의 의미를 망라한다. 따라서 '흰 그늘'의 내포는 빛나는 그늘, 밝은 어둠, 환한 우울, 기쁜 슬픔, 희망의 절망, 즐거운 아픔 등 모순과 역설의 의미를 거느리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모순어법, 역설어법에 의해 저 자신의 고유한 의미망을 확산시켜 온 것이 '흰 그늘'의 미학이다. 말하자면 '흰 그늘'의 미학은 이 세상에 상존해온 일종의 비주류적 運氣를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이러한 뜻에서의 '흰 그늘'의 미학은 이미 필자에 의해 상세히 考究된 바가 있다.([불연기연, 카오스모스, 흰 그늘], {시와사람} 2004 가을)
물론 김지하의 이 시집 {유목과 은둔}이 이처럼 크고 거대한 문제만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크고 거대한 문제를 노래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구체적인 창작의 과정에서는 그도 역시 아주 작고 사소한 계기에서 시적 발상을 얻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시인 김지하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보통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그리하여 그것을 고뇌하고 두려워하며 나머지 생을 살아가는 소외된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김지하가 좀더 새로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늘 깨어 있는 존재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천지부모를 모신 나 또한 천지의 한 부모.
나로부터 사람들이 아직은 자유자연 지향이라 어설피 알고 있는
새, 풀잎과 나무, 구름과 물과 다람쥐들이
이제 새로이 태어나리라
아 푸르른 창조의 새벽 나 또한 다시 태어나리라
한 작가로, 꼭 자유자연만이 아닌 활동하는 무(無), 흰 그늘로 -[재진화] 부분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 김지하는 늘 새로이 "뜻을 세"우고, 늘 "새로이/태어나리라"고 자기다짐을 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처럼 항상 깨어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도 개인인 이상 生老病死라는 유기체의 순환과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生老病死의 '生'과 관련하여 그는 그동안 매우 독특한 사상을 펼쳐 온 바 있다. 이 때의 독특한 사상, 즉 생명사상은 모심, 곧 상생과 살림을 전제로 하거니와, 상생과 살림은 또한 상극과 죽임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의미를 갖기 어렵다. 따라서 각각의 개인이 갖는 運氣의 과정을 살펴보면 상생이나 살림, 그리고 상극이나 죽임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老와 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生老病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전에 가졌던 화두이다. 이 시집에 이르러서는 김지하 역시 그에 대한 깊은 탐구를 보여 주고 있어 두루 관심을 끈다. 그가 자신의 화두를 生뿐만이 아니라 '老病死'에게까지 확장시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시를 통해 그가 "나는 언제나/반역의 사람"([바람이 가는 방향])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도 주목이 된다. 이 시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바람 없이는//내 삶도 없다"라고까지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바람은 그가 추구하는 삶과 방향을 함께 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하는 삶은 "바람과 같은 방향 아니"라 "바람에 맞부딪치는/역류의 길"이기 때문이다. '老病死'에 대한 탐구와 함께 하는 生에 대한 탐구가 좀더 진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러한 그의 삶의 방향, 곧 역류의 길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죽임이 전제되지 않은 살림의 탐구가 그렇듯이 '老病死'와 짝하지 않는 生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절름발이다.
生老病死 가운데 정작 짝을 이루며 상호 순환하는 것은 生과 死이고, 老와 病이다. 이들 중 처음과 끝을 이루며 맞물려 순환하는 것이 生과 死이고, 중심을 이루며 맞물려 순환하는 것이 老와 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生과 마주하고 있는 死, 老와 마주하고 있는 病은 상호 마주하고 있는 동시에 서로 껴안고 있다고 해야 옳다. 구조적으로 보면 生과 死가 老와 病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상호 순환하는 형국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生老病死가 언제나 상호 뒤얽혀 순환하는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연유한다.
그동안 김지하가 죽임에 반하는 모심, 즉 살림과 상생으로서의 생명을 주로 노래해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생명을 노래하고 있는 그의 시에 대해 여기서 논의를 피하려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요컨대 이 글에서는 老病死에 대한 사유와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시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이 시집 {유목과 은둔}에는 시인 김지하의 구체적인 삶의 면면들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시집을 읽다 보면 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저런 병을 앓아왔다는 것부터 확인이 된다. 일단은 먼저 그가 "동대문/이대병원" "외래"([전신두뇌설 근처에서])에 다니며 "정신신경과"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좌골신경통"을 앓아 수시로 "중국 연길에서 사 온/호랑이 고약 파스를 붙"([ANA])이기도 하는 것이 그이다. 이 좌골신경통을 치료하기 위해 거의 매일 그는 아내와 "함께 뜸 뜨러 여의도"([선풍기 근처에])에 나다니기도 한다. 병에 대한 언급은 이 밖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鳴川] [생명 평화의 길] [아주까리 꽃그늘] [예순 넷]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처럼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 조금은 쓸쓸하고 허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그이다.
이제 어디라도 고즈넉한 곳에 가 깃들이리
비 맞은 새모냥 빗방울 털고 털면서 서 있으리
남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한 오리 선뜻 내게 와
옛 연인의 지금 주름살 하나 둘 셋 넷 헤이는 소리 듣고 살으리
나 이제 아무것도 아니고 즐거워 사는 것도 아니매
꼭 이렇게 말하리
'삶은 그냥 오지 않고 허전함으로부터만 온다'고. -[삶] 전문
이 시에서 그가 깨닫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은 그냥 오지 않고/허전함으로부터만 온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허전함'이라는 단어는 개념의 폭과 깊이가 충분하지 않은 일상의 평범한 용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이 시에 함유되어 있는 허전함에 대한 자각은 곧바로 허무에 대한 자각을 가리킨다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김지하는 허무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를 발상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내 영혼은/너무 오래되어/이제 깊이 잠들고//되풀이 되풀이되는/잠이여"([내 영혼은 오래되어])라고까지 노래하고 있는 것이 김지하이다. 허무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또 다른 시의 "헛된 희망/덧없는 흐름 위에/마음을 띄워/하나/둘//허무 속에서 끝나간다"([2004년 여름 서울])와 같은 구절에 의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 다시 말해 허무에 골몰해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아의 運氣에 깊이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질병에 시달린다는 것은 늙어 가는 것의 실질적인 증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투병의 날들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기 마련이다. 한 때는 민주화운동과 예술운동의 사상적 거점으로 존재했던 그도 이제는 늙고 병들 수밖에 없는 나이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런저런 질병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병원이 좋다/조금은" 하고 노래하는가 하면, "나는 역시/'움직이는 종합병원이던가'"([병원]) 하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가 그동안 질병의 고통을 잘 감내해 왔다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질병과 친숙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나날의 일상이 마냥 즐거웠을 리는 만무하다. 이제는 그도 이미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耳順을 훨씬 넘긴 나이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지금 그는 "꽃잎으로부터는 아득히 멀고/꽃은 더욱 그러한"([오늘]) 세월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그는 지금 "나이가 들면서 거꾸로 우아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귀향])라고 노래하고 있다. 물론 그도 한스 아르프처럼 "젊었을 땐 추하고 병든 것을 지극히 사랑했"을 것이 분명하다. "방랑과 감옥과 행동의 날들//증오와 격정과 비탄의 날들//또/알코올과 색정의 그 숱한 밤들, 새벽들"을 보낸 것이 젊은 날의 그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무것도 없고/외로움밖에 없고//후회할 일밖에 없으니//참/개똥같은 인생이다"([김지하 옛 주소])라고 노래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참혹한 심정으로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하이얀 외길/하이얀 하늘/예순 다섯에 처음으로/이도백하(二道白河)로부터 끝도 없는/천지 가는 길 -[천지 가는 길] 부분
예순 넷/이 나이에/선뜻 /고향에 못 가는 것은/기억 때문이다 -[예순 넷] 부분
예순을 넘긴 나이에 대한 그의 이러한 언급들은 점차 늙어 가고 있는 현존의 자아와 관련한 깊은 반성적 성찰을 토대로 한다.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그가 지나온 삶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회한에 잠기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새벽에 "홀로 일어나 앉아/그동안 버려 두었던 것/일기를 쓰고//'잘못 살았다'//한마디 말 쓰고"([새벽 난초])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회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살펴보더라도 病에서 비롯되는 허무만큼이나 老에서 비롯되는 허무도 최근의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매우 중요한 화두라고 해야 마땅하다. 病에 대한 반성적 성찰만큼이나 老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이 시집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시집에 老와 관련된 회한을 담고 있는 시들이 이러한 정도에 그쳐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늙는다는 것" 하고 탄식하고 있는 [위안], "늙어서인가//허나/여전히 모를 것은/나"라고 반추하고 있는 [솟대] 등의 시를 더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老에 따른 회한의 정서는 또 다른 시 [오늘]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늙어 가는 길/외로움과 회한이/가장 큰 병이라는 데"와 같은 구절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에 따르면 무엇보다 그가 "늙어 가는 길", 곧 "외로움과 회한"을 이내 "큰 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내 나이 예순 넷./이제 보니/환갑이 훨씬 지난 늙은이였구나./'제길헐!/이제 막 시작인데……'"([귀향])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때문이다.
老를 病으로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가 언제나 외로움과 회한에 젖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미래를 향한 꿈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인데, 이는 우선 그의 시의 "내일 들로 가리라" "빈 하늘 환영에게/꿈을 배우리라"([2004년 여름 서울])와 같은 구절에 의해 증명이 된다. 자조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내 삶/이제 늙었으나/낡지는 않았구나"([관악산])라고 하여 여전히 자기다짐을 보여주는 것이 김지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老와 病을 껴안고 사는 것이 죽음을 사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한성이라는 원죄를 타고난 것이 인간인 만큼 언제나 사는 것은 곧 죽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 본래의 생명이거니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삶의 길은 죽음의 길이 되는 법이다.
가자 몸 성할 때 가자
가 조용히 엎드리자
엎드려 귀를 크게 열고 바람소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네 시간 일하고 열 시간 잠자고. -[흙집] 부분
이 시에서 김지하는 "몸 성할 때 가자//조용히 엎드"려 "바람소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자"라고 곱씹고 있다. 하지만 이를 빨리, 서둘러, 급하게 '죽음'으로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궁극적으로 죽을 때까지 "귀를 크게 열고", 즉 세계와 큰 갈등 없이, 하루에 "네 시간 일하고/열 시간 잠자"는 가운데 천천히 게으르게 살자는 뜻을 담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시의 내용이 죽음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80년대 이후 "입만 열면/생명을 말"([오늘])해온 것이 그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죽음' 역시 '생명'과 맞물리는 가운데 상호 순환하는 不二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탐구되는 과정에서는 그것이 生의 뒤를 이어 老와 病의 결과로 드러나는 소멸의 내포를 갖는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단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의문과 자각만이 아니라 老와 病을 포함하는 生과 死 일반에 대한 의문과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내포되어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죽음은 이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관념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耳順을 넘긴 나이의 그가 나날의 일상에서 부딪는 老와 病의 실제로부터 구체적으로 유추하고 있는 것이 예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시 짓고 그림 그리고
가끔은 후배들 놀러와
고담준론도 질퍽하게 아아 무엇이 아쉬우랴만
문득 깨닫는다
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 -[김지하 현주소] 전문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그의 의식과 사유는 기본적으로 나날의 삶을 소멸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실존적 고뇌 및 두려움과 함께 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는 일상의 나날이 죽음의 한 과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항용 그가 실존적 고뇌와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하는 것이고, 따라서 매순간 "죽으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해야 마땅하다. 나날의 역사에서 "산다는 것이 죽는다는 것이" 되는 것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죽어 가는 매순간을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의 현존인 것이다.(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솔 출판사, 194면∼204면) 시인 김지하가 자신의 에세이 [생명 평화 선언]에서 "생명이 삶과 죽음을 다 포함하는 우주적 순환, 관계, 다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매개로 하여 김지하의 시세계를 이해하다 보면 김수영의 시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본래 김수영의 시정신에 대한 강한 극복의지로부터 출발한 것이 김지하의 시정신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정신에 대한 그의 극복의지는 널리 알려져 있는 에세이 [풍자냐 자살이냐]({시인}, 1970년 6·7월)에서 가장 먼저 구체화된 바 있다. 이 에세이의 주요 내용은 김수영의 시세계가 갖는 의미와 한계를 비판하고, 그 극복의지를 가다듬는 데 바쳐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 김지하의 다양한 사상적 모색에는 김수영의 시정신을 뛰어넘기 위한 은근한 노력이 도사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지하가 김수영의 시세계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하지 못한 데는 그의 등단의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는 듯싶다. 그의 시단 진출이 일차 좌절된 것은 김수영의 부정적인 평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동일에 의해 1966년 신인투고 형식으로 {창작과비평}의 백낙청에게 건네진 [황톳길] [육십령] 등 김지하의 시 6편이 검토를 맡은 김수영에 의해 '인민군 노래 같다'라는 이유로 반려된 바 있기 때문이다.(강웅식, ['한'의 폭력에서 '흰 그늘'의 생성으로], {서정시학} 2004 가을) 그렇기는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단지 이러한 사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지하가 그동안 추구해온 시정신이 김수영의 그것에 비해 너무도 많이 다르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김수영이 자신의 시를 통해 추구해온 세계는 대강 근대적응과 근대완성에 있다고 판단된다. 탈근대적인 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김수영의 시정신은 이처럼 자본주의라고 하는 역사의 한 시기 안에 자리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김수영이 자신의 시를 통해 의식하고 사유해온 근대적응과 근대완성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의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골간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김수영이 자신의 시를 통해 추구해온 유토피아가 그만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범주의 안에 자리해 있다는 것인데, 또한 이는 그의 상상력이 그만큼 갇혀 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김지하의 상상력은 김수영의 그것에 비해 애초부터 훨씬 더 크고 거대하다고 해야 옳다. 출발부터 그가 자신의 시정신의 목표를 근대극복, 나아가 근대 밖의 세계에 새로운 피안을 건설하려는 데 두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지하가 詩作의 초기부터 민족형식의 이월가치를 재창조하는 동시에 민중적 정서와 열망을 담아내려고 한 것도 이러한 시정신의 발현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근대극복과 관련하여 줄기차게 탐구해온 그의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東道東器 혹은 同道同器로 상징되는 세계사적 비전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의를 요한다. 이를테면 한국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서양의 새로운 정신(?)이 아니라 동양의 낡은 정신(?)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것이 그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낡은 정신은 오늘날 너무도 새로운 정신, 즉 우주생태학에 이르러 있지만 말이다.
근대적응 및 근대완성과 관련하여 김수영이 탐구해온 시정신의 요체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통과과정을 매개로 하여 초월과 새로움, 자유와 사랑의 세계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김수영의 시정신이 갖고 있는 핵심내용이다.(이은봉, [김수영의 시와 죽음], {실사구시의 시학} 1994) 따라서 김수영이 추구해온 죽음의 화두를 명확히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김지하가 추구해온 생명의 화두도 명확히 알게 된다. 김지하의 생명의식에는 김수영의 죽음의식을 넘어서기 위한 그 나름의 뜨거운 열정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김지하가 이 시집에서 죽음의 화두를 들고 나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의 死가 生과 함께 하는 老와 病의 과정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음'이 김지하가 그처럼 극복하고자 애써온 김수영의 화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김지하가 자신의 시를 통해 죽음을 탐구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죽음과 짝을 이루지 않는 생명에 대한 탐구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김지하가 자신의 시에서 죽음을 생명과 대립되는 가치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생명과 대립되는 가치는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정작 죽임과 대척되는 가치는 살림이거니와, 그렇다면 생명은 모심, 즉 살림이나 상생의 가치와 同軌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모심, 즉 살림이나 상생의 가치를 생명운동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그이다. 그의 에세이 [생명 평화 선언]에 따르면 결코 "생명은 죽음과 대립하지 않는다." 활동하는 無의 깨어있는 실제로서 생과 사의 바른 순환을 꿈꾸고 있는 것이 그라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은 일상의 도처에서 순간순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삶의 일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시에서 김지하가 "죽음이 선풍기 근처에 와/빼꼼이 날 쳐다보고 있다"([선풍기 근처에])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의 깨달음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나날의 일상을 소멸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과 사유의 실제라고 할 수 있다. 김지하의 죽음에 대한 사유와 의식은 이처럼 김수영의 그것이 지니고 있는 관념성으로부터 훌쩍 비켜 서 있다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죽음에 대한 그의 의식과 사유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주지하다시피 씨앗을 떨어뜨려 자식이라는 독립된 개체를 남기고 이승의 밖으로 떠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존재법칙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미끄러지면서부터 고아의식이라는 근원적 결핍감을 지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존적 자아이다. 이러한 근원적 결핍감은 때로 神聖의 恍惚이나 시의 白熱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자리한다. 신성의 황홀이나 시의 백열은 그 안에 생명과 죽음이 상호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한한 존재로서 모든 인간이 겪게 되는 사랑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옥타비오 파스, 앞책, 194면∼204면)
사랑의 체험은 그 자체로 생명의 체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의 안에서는 언제나 상호 공존하는 것이 사랑과 죽음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이 역설적 不二의 관계를 이루며 상호 순환하는 것이 생명의 세계라는 것이다. "작은 꽃 속에/큰 하늘이 피어 있어/법(法)이라 한다/네 작은 담론 안에/우주가 요동하는 것/사랑이다//깊은/죽음"([화엄])라고 하여 그가 법과 사랑과 죽음이 상호 緣起하는 관계, 즉 一卽多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시에서 그가 "단 하나/고리 속의 무궁"([절두산 근처])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해야 옳다. 이는 그의 시의 "아파할 줄을/슬퍼할 줄을//알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사랑]) 등의 구절을 통해서도 넉넉히 확인이 된다.
이러한 논의가 십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감은 때로 그 자체로 남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이는 실존적 고뇌나 두려움으로 현현되기 십상이다. 神聖의 恍惚이나 시의 白熱로 태어나지 못할 때 그것이 실존적 고뇌나 두려움의 차원에 머물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가 다음의 시를 통해 일체의 것을 죽음과 함께 하는 회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털털털 다 털고 나서 떠나도 되겠구나! 단 하나
막내 놈 그림공부 밑천은 어떻게든 벌어놓고 그 뒤에
그 뒤에 전에 또 하나 어머님 모시고 난 그 뒤에 뒤에
아아 내 죽음에서 어느덧 피냄새 가셨구나
진리고 혁명이고 유토피아고
모두 다 허허허 강 건너 등불. -[강 건너 등불] 부분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과 사유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그가 이 땅에 떨어뜨린 씨앗에 대한 깊은 책임감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이 된다. "털털털 다 털고" 이승을 떠난 뒤 인간이 정작 이승에 남기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할 때 "막내 놈/그림공부 밑천은 어떻게든/벌어놓고"자 하는 그의 마음, 즉 죽음에 대한 그의 의식과 사유는 좀더 잘 이해가 된다. 그가 남긴 예술과 사상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더라도 대를 이어 이승을 살아갈 사람이 없다면, 향유하고 배울 사람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이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과 사상을 낳고 기르는 것 못지 않게 아들과 딸을 낳고 기르는 것이 크고 중요하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이 시에서처럼 막내 놈의 이승(생명)을 위하여 저 자신의 저승(죽음)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그이다. 이를 통해서도 상호 맞물려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죽음과 생명의 실제라는 점은 증명이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집에 이르러 그는 생명의 쪽에서 죽음의 쪽으로 다가가기보다는 죽음의 쪽에서 생명의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듯싶다. 이는 이 시집의 도처에서 '죽음'의 언표를 담고 있는 시들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병원] [삼소굴 13] [죽음] [흙집] [부안] [일본에서] [사까이에서] [소건(消健)]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하지만 그의 시세계 전체와 관련해 보면 죽음에 대한 탐구는 이제 막 발걸음을 떼고 있는 듯하다. 죽음과 관련된 좀더 진전된 인식이 그의 시를 통해 좀더 빛나는 형상으로 창출되기를 빌며 글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