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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비림박물관 원문보기 글쓴이: 비림박물관
중국 길림성 신문에........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초고)
중한 문화교류의 공신 한국비림박물관 관장 허유선생
창포(蒼浦) 허유선생 프로필
■허유(許由), 한국비림박물관 관장, 서예가(아호:蒼浦)
▲1946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에서 출생
▲1970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지역개발과 수료
▲1973년 서울 광화문에 “해강서예학원”을 설립
▲1976년 서울 강북구에 “창포서예학원”을 설립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 수상
▲1978년 국전에 서예작 출품해 입선.
▲1989년 한국인 최초로 무순에서 우푸광씨와 공동으로 서예전시회를 개최
▲1991년에는 할빈공대 한어과에 입학하여 한국류학생 제1호
▲1991년 9월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 개최
▲1997년 8월 리공도선생을 명예총재으로 초빙
▲1998년 5월 세계미술대전 개최
▲2002년 5월 11일 한국비림원 개관, 설립후 해마다 세계서예미술대전 개최
▲2006년 6월 중국한원비림과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 공동발기
■한국비림박물관 서화대전운영위원장, 해강서예학원 원장,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 중국 한원비림 고문, 중국 상지비림(尙志碑林) 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등 력임
지난 10월 23일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위치한 한국비림박물관에서는 개관 8주년을 맞으며 한중작가와 한국 각계 인사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중서화전” 행사가 융숭하게 치러졌다. 비림박물관의 초청으로 중국 길림, 하남, 북경 등지 박물관, 서협, 미협의 서예미술가 등 60인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필자도 그중 일원으로 함께 했다.
그날 동정리 옛 동정초등학교 자리라는 곳에 이르러 대문 현판에 “藝文館(예문관)”이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져 있는 붉은 솟을대문 입구에 들어서니 널다란 정원에 도열하듯 세워진 비석들이 시야에 안겨왔다. 부지 8450㎡되는 정원 전체와 , 건평 1333㎡ 규모의 건물 외관에 비석이 숲을 이룬 이곳이 바로 창포(蒼浦) 허유관장이 사재를 다 털어가며 일으켜 세운 한국최초의 비림박물관이라 한다.
시공을 뛰여넘는 력사명인들과의 만남
한중 석경전문가들이 제작한 비석들이 숲을 이룬 이곳에는 김생, 최치원, 강감찬, 한석봉, 안평대군, 이항복, 김정희 등 한국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서예가나 유명 인사들의 유묵과 중국 상나라 갑골문 및 왕희지, 안진경, 소식 등의 필체를 담은 석경 500여점을 포함하여 금석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양국 고전작가들의 작품 1,000여점이 비석에 담겨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시되고 있는데다 미술서예대전 등으로 기증받는 수상작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 히딩크 감독의 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물을 제작해 보존하고 있고 그 외에도 3000여점의 실물이 전시된 산호․패류관과 미술관, 공예관도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력사문화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역대 대학자들과의 시공을 뛰어 넘는 만남 때문인지 선인의 사상이 깃든 비문은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좀 여유를 갖고 비석들 사이를 둘러보면 정갈한 느낌을 주는 예서와 부드러운 해서, 흐르는 듯 이어지는 초서, 파격과 개성미를 보여주는 추사체(秋史體) 등 서체에서 최고서예작품의 묘미도 만끽할 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오른켠 바로 앞에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구조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국 한원비림(翰園碑林)의 창시자 리공도(李公濤)선생(1927——)의 동상이었다. 동상의 기록문에는 리공도선생이 한국비림박물관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공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박물관에 세운다는 허유관장의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아직 세상에 건재한 한 외국인의 흉상을 어찌하여 여기다 세우게 되었을까? 그 사연을 알자면 우선 이 글의 주인공 허유관장부터 만나봐야 하겠다.
중한문화의 접목에 향한 격조높은 정감과 의지
허유선생은 1946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에서 한학자인 고(故) 허연 선생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연기군에서 초등학교와 성남 중, 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지역개발과을 수료했다.
선친의 영향으로 5살 때 천자문을 깨우쳤고 300여수의 한시를 암기했을 정도로 한학에 뛰어났던 그는 이미 1973년도 27세 때 서울 광화문에 “해강서예학원”을 설립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는 강북구에 “창포서예학원”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서예진흥을 위해 앞장서 왔다고 한다. 그는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을 수상하고 1978년 국전에 출품해 입선될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국전에 입선됐던 바로 그해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던 박종국씨의 소개로 서봉 김사달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게 됐는데 이러던 중 88올림픽에 참석했던 중국조선족들의 소개로 심양의 우푸광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여 중국과의 교분이 시작되는데 마침내 그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그 연분을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1989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 요령성 무순시에서 우푸광선생과 공동으로 서예전시회를 개최했고 1991년에는 할빈공대 한어과에 입학하여 한국류학생 제1호가 됐는데 그해 9월 할빈공대 양사근교장의 주선으로 중국과 아직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홍콩을 경유해 작품 40여점으로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하니 중한문화의 접목에 향한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 아니랄 수 없다.
당시 한국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으로 있던 허유선생은 중국작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민간인으로서 중국한원비림(中國翰園碑林)을 창설한 하남성 개봉시 리공도선생의 사적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줄은 당시 그 자신도 생각 못했던 일이였다. 소실적부터 서예를 좋아했다는 리공도선생이 별로 긴 시간은 아니지만 10여 년간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손3대의 전 재산을 쏟아 붓고 각계각층의 지원을 받으면서 역대 7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었던 천년고도 개봉시에 세계최대의 민영비림을 일떠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허유선생이 받은 충격은 여간 컸던 것이 아니었다.
하여 허유선생은 1992년 8월 중한수교가 이루어질 그 무렵 숙연한 마음으로 자신이 다년간 소중히 소장해온 서예정품들을 리공도선생에게 우편으로 기증한다. 그 작품들은 전달된 즉시 전부 비석에 새겨져 비림의 일부분으로 되었다고 한다.
사명감의 호소: “한국에도 비림원을!”
이듬해인 1993년,중국한원비림을 대외에 개방하자 허유선생은 드디어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리공도선생의 창업사를 경청하고 산수 수려한 자연 속에 현대의 비석과 송조의 비석, 황제의 비석, 그림비석, 국제비석 등 3,700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조각의 문화재들이 장장 3km에 걸쳐 펼쳐져 있는 한원비림을 답사하면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개인의 힘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한 허유선생은 특히 리공도선생이 한원비원건설을 시작할 때 제정해 석비에 새겼다는《家訓》을 읽고 감동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모종의 사명감이 괴여 올랐다--
“…(한원비원)건설자금은 전용으로 투하하되 누구든 생활용으로 인출 못하며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대를 이어 건설을 견지한다. 비림이 완성되면 나라에 무상으로 바친다. 비림에 리익금이 생긴다 해도 리씨가문에서는 자자손손 한푼도 챙겨서는 안된다...”
이 “가훈”을 통해 한원비림건설에 바탕한 저력을 터득하게 된 허유선생의 뇌리에는 “한국에 비림원을 세워야 겠다”는 생각이 고집스레 자리 잡는다. 이로인하여 허유선생은 한원비림에 이어 섬서성 서안비림 등 중국 처처의 비림문화를 고찰하면서 넓고 심오하고 유구한 중국전통문화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돌이켜보면 진왕조 이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유물로서의 비림문화는 진시황이 전국을 순방할 때 석각으로 력사를 기록했던 것을 발단으로 후세에 크게 성행하면서 점차 중국인들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서안비림의 시작은 당나라말 오대시기인 900년 전 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정품서예의 석비를 보존하고 있는데 그것이 5000년 력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허유는 그것을 한국의 비림문화와 즉각 련계시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 중국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 비석문화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에서 흔히 만나는 무덤가의 비석이나 절에서 보는 탑비, 문화유적지 곳곳에 세워진 각종 비석은 분명 비림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차원의 비림문화로 집결승화 되지 못한 채 아직 분산 상태에 머물러 있다. 대한민국의 후손에게도 이러한 력사적 작품들을 한 곳에서 감상하고 배우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유선생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몸소 이 일을 실천하기로 작심한다.
뼈 깎는 고통을 각오하고 설립준비에 돌입
우여곡절을 겪으며 문화관광부에 한국비림원 설립허가를 신청해 1997년 6월 5일 정식으로 사단법인 인가(문화관광부 허가번호 444호)를 받아낸 그는 그 즉시로 설립 전 준비 작업에 돌입한다.
1997년 8월 6일 허유선생은 14인 방문단을 이끌고 재차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을 명예총재로 초빙하며 이듬해 3월에는 리공도선생으로부터 비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경청하고 동시에 한원비림과 자매결연을 함으로써 한원비림으로부터 많은 자료도 확보한다.
한편 역대 서예정품의 탁본과 복제품을 수집하기 위해 전국 국립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찾아다니는데 그 와중에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명예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998년 5월 허유는 서울디자인 포장센터 미술관에서 세계미술대전을 개최하고 대회에 한원비림 창건인 리공도선생을 초청했다. 성대한 개막식에서 리공도선생은 "필묵은 천추의 력사를 기록하고 묘필은 만리강산을 그리노라(翰墨書千秋青史,妙筆繪萬裏江山)"라는 제사를 대회현수막에 올리고 각국 대표들의 추대로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화란 등 12개 나라와 지구를 대표하여 연설, 중한 양국 인민의 우의와 양국간 예술교류를 위해 유익한 기여를 하련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비림, 한국 전대통령 김영삼의 관심사로
허유선생이 한국비림원 건설 준비로 로심초사하고 있을 때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마련됐으니 바로 그의 지속적인 유력홍보활동으로 리공도선생의 영향이 한국에서 날로 커져 당시 김영삼대통령의 관심까지 끌게 된 그 것이었다. 하여간 김대통령은 중국방문기회에 개봉시에 몸소 찾아가 이 전기적 인물을 만나보려고 한다. 2000년 5월,허유선생은 김영삼대통령의 방문사항을 의논코자 리공도선생를 만나 김영삼전대통령이 한원비림을 위해 쓴 “東方文化藝術寶庫”, “松柏長青”과 “良心” 등 3폭의 족자를 전달했다. 리공도선생는 크게 기뻐하며 그 휘호를 전부 비석에 새겼다.
2000년 6월 16일 김영삼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일행 18인이 한원비림을 방문했다. 김영삼대통령은 흥미진진하게 비림을 참관하면서 한원비림은 “과연 천하제일”이고, 리공도선생은 “손색없는 세계문화명인"이라고 평가했다. 리공도선생은 “무괴(無愧)”라는 족자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또 “매향(梅香)”이라는 족자를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녀사에게 증정했다.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호연정기(浩然正氣)”,“중국모범가정(中國模範家庭)”이라는 두 폭의 글을 써서 리공도선생에게 답례했다.
이처럼 허유선생의 서예전으로부터 시작된 문화교류는 점차 양국 정부간의 우호교류를 이끌어내는 결실을 낳게 된다. 그해 12월 1일 김영삼대통령이 부산에서 서도전(書道展)을 개최하고 대회에 리공도선생을 특별 초청했는데 당시 리공도선생은 심장수술로 다녀가지 못하고 대신 파견된 맏아들 효천과 둘째아들 효평이 방문기간 보은군 김종철군수에게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 도시 개봉의 빛나는 력사와 현대건설의 성과를 소개하여 김종철군수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낸다. 결국 김종철군수가 보은군과 개봉시간에 우호도시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 개봉시지도부에서는 그 제안을 쾌히 수락하고 김종철군수를 개봉시에 초청하게 되며 드디어 쌍방은 협의를 거쳐 정식으로 우호도시를 결성, 중한간 문화교류와 무역왕래에 길을 틔워놓게 된다.
비림건설과 국내외 지성들의 합류
사재를 전부 털어가며 한국 최초의 비림원을 만들려는 허유선생의 진정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물심량면으로 비림원 건설을 지원해나섰다. 한국 청주문화방송총무국장 최정준, 농수산물주식회사 양승인회장의 천거로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50무에 달하는 현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청주시의회 서병각의원이 충청북도 중소기업지원센타 박재식본부장 및 제자를 인솔하여 개봉시 한원비림을 방문한 후 귀국하여 허유선생에게 많은 격려로 지도를 준다하여 마침내 원 학교건물과 정원을 비림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막을 올리게 된다.
허유관장은 전국 국립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발뿌리 닳게 뛰어다니며 전시품 수백 점의 탁본과 복제품을 수집했다. 그 와중에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명예회장등 유지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허관장은 명품을 모으는 한편 질 좋은 석재 마련에도 혼신을 다하며 전국각지에서 우수한 석공을 물색, 그들에 의뢰해 력대 서예작품을 돌에 새겼다.
리공도선생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2년 3월 한원비림에서는 서예조각정품 55점과 잘 가공한 석재 50점을 컨테이너로 한국비림원에 무상으로 보내주며 또 석경 제작에 전문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주소종 등 기술자 3명까지 보내어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을 돕게 한다. 그들은 짧은 석달 동안에 110여점의 조각을 원만히 해냄으로써 한국비림원의 건설을 크게 밀어주었다.
한국비림박물관에 깊은 애정을 갖고 물심량면의 방조를 아끼지 않은 리공도선생의 정과 공을 허유는 꼭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정을 담아 제작해 세운 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리공도선생의 흉상인 것이다. 이 사실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미담으로 전해졌다.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년
천신만고 끝에 한국비림원은 2002년 5월 11일 정식 개관하여 참관자를 맞기 시작했다. 산수 좋은 충북 보은군에 마침내 력대의 문화정품을 통해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한국의 첫 비림원이 탄생한 것이다. 그때로부터 해마다 기념행사로 개최해온 “국제서화대전”은 중한 및 국제 문화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2006년 6월, 개관 4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행사차로 한국을 방문한 한원비림 리공도선생, 하얼빈시 서법가주석 홍철군선생, 상지시 비림박물관 하수령관장 일행과 공동으로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서 “세계비림협회”를 정식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허관장은 “개관 8년여에 이곳에 참관을 다녀간 사람은 연인수로 100만명(?)을 웃돈다. 면서 “시작 당시 돌에 글자를 새겨 박물관을 만든다는 말에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로 변했다”고 했다.
비림원 설립 후 허관장은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 상지비림(尙志碑林)박물관 명예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 한국대표 등을 력임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러시아, 미국 등의 석학들과 함께 한 “국제학술교류”를 비롯해 매년 개최되는 “국제미술(서화)대전”, 각국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 각국 교육기관과의 교류 등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분야를 망라하는 국제교류에 앞장서 왔으며 또 사설박물관의 입장을 넘어 한국의 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이런 공적으로 말미암아 허유원장은 한국에서 추사체(秋史體) 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 김정희, 1919년 3·1 운동 시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인 오세창, 금석문과 한학 영역에서 당대 한국의 최고인자인 임창순선생으로 이어지는 금석문의 맥을 이어 한국비림박물관을 설립한 금석문(金石文)의 중시조로 불리고 있다.
허유관장 왈: “아직 갓 시작일 뿐이다”
행사 일정이 발 빠르게 돌아가는 틈 사이에 허관장은 기자에게 창업사와 함께 현재사업진척과 향후의 목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허유관장은 “한국비림박물관을 성인의 뜻을 기리고 후손들의 정신문화 함양을 위해 여러 해전부터 성경비림, 공자론어비림, 불경비림 등 세계인을 아우를 수 있는 정신문화의 성지를 비림으로 형성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마련되는 대로 지난해부터 이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현재 권오실선생과 이현종선생을 비롯한 kn nm국전작가 133인의 성경필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며 중국한원비림에서 현재 이 필사본을 1914개의 돌판에 새기고 있다고 한다.
금번 8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이수성 전 한국국무총리는 대회에 드린 축사에서 “사설박물관의 입장을 넘어 한국의 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다해 온 허유관장의 예술혼과 민족혼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치하하고 “한중우의가 한국비림박물관을 통하여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했다.
중국 측 대표 백산시미술가협회 주석 주련덕과 하남성하남박물원 부원장 전기는 대회축사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양국 문화인, 경제인들이 서로에 유익한 민간외교를 할 수 있는 것은 허유관장이 20여년 긴 세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구축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한 사람 선각자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떠밀어준다”고 했다.
이런 평가에 직면하여 허유관장은 “아직 갓 시작일 뿐” 이라는 한마디 말로 향후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