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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 인터뷰]① |
나를 사랑해준 세대에 대한 책임, 장미희/ 조현진 |
작성일:2007-07-18 |
장미희. 그녀를 인터뷰하기 전날,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그날 레드카펫위에선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장미희였다.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은 순식간에 플래시 세례로 이어졌다. 각종 포탈사이트에서 갑자기 <장미희> 혹은 <장미희 파격의상>이 검색어 1위가 되었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제 의상 파격이었다.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그래? 확실히 인터넷 무섭다. 부천에서도 소란스럽긴 했지만. 화제를 노린건가? 그럼. 당연하다. 난 배우니까. 그 검은 브레지어가 그려진 브라우스만 보는데 그것만이 아니다.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그 레드카펫에 서는게 아니니까. 그럼? 혹시 지난번 대종상 때 기억나는가? 안다. 겨자색 드레스 입은것도 화제가 되었었지. 젊은 여배우들 다 제치고 장미희가 그날의 베스트드레서였다고 기자들이 다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런거다. 대종상 레드카펫에 서기위해 난 트레이너와 함께 한달 이상을 운동했다. 식이요법도 거들었다. 당일 날은 물 한잔 마시지 않았다. 디자이너 정구호씨가 드레스 두벌을 가져다 주었고, 독일에서 쥬얼 리가 공수되어왔다.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화장을 해주었고. 당신 영화가 대종상에 노미네이트 된 것도 아니잖은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대종상은 상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영화인의 축제다. 나는 거기 초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거다. 그게 내 방식이다. 어제 부천도 마찬가진 거다. 맞는 말이지만 새롭다. 사실 상 줘도 참석 안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직업의식과 책임감이 부족한 거다. 배우는 개인이라기 보다 공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관객에게 그리고 영화에게 받은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을 관객에게 돌려줘야 하는거다. 뭘로 돌려주나? 만날 기회에 준비 잘해서 만나는 거다. 이런 축제에 함께 참석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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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를 만나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 검토한 후, 선배기자들에게 연락을 해서 장미희에 대해 물었더니 ‘쉽지 않은 인터뷰 상대’ 일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답해왔다. 30년 이상 장미희를 기자로 만났던 인터뷰 365의 김두호 발행인의 경우는 ‘너무나 친절해서 혼을 쏙 빼놓지만 단 한 번도 만족스런 대답을 주지 않는 대표적 연예인’으로 장미희를 꼽았다. 특히나 ‘한국의 백여우’로 그녀를 선정하며 역할속의 이름이 아닌, ‘장미희라는 사람’을 꺼내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70년대 중반 영화 <겨울여자>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한 번도 최고에서 비켜본 적이 없는 여자 장미희. 당연히 그녀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를 다 경험한 노련한 인터뷰이다. 인터뷰장소로 가면서 나는 장미희에게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고 여러 번 다짐을 했었다. 그녀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선 이것저것 재지 말고 무대뽀로 밀어 붙이는 것이 상수다. 2007년 7월 현재,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에 장미희 같은 배우는 없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들었음에도 당신은 많은 왕년의 스타들이 자연스레 변하는 것처럼 나이든 엄마나 아줌마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니고. 여전히 당신은 어떤 신비함을 가지고 대중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산다. 동의하나? 난 왕년의 스타가 아니다. 결혼을 안했고 자식도 없기 때문에 난 엄마역할을 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결혼 안한 미스(Miss)기도 하다. 아줌마는 아닌 거지. 그건 내가 경험 못한 부분이다. 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 할 텐데 왜 내가 그걸 해야 하나? 그리고 대중과의 적당한 긴장감이란 무슨 말인가? 작품에서 잘 만날 수도 없다는 말이다. 2년에 한 작품 정도씩은 한다. 2005년에 드라마 (SBS, 그 여름의 태풍)했었다. 그리고 일부러 안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좋은 작품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건 안다. 2003년도에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한 것도 <황태자의 첫사랑><그 여름의 태풍>같은 드라마를 했던 것도 조사해서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내 질문은 그게 아니라 대체로 관객들에게 장미희는 영화 <사의 찬미>를 마지막으로 기억되어져 있다는 뜻이다. 왤까? 글쎄 왤까? 사실 이런 질문이 오늘 당신에게 물어볼 가장 중요한 이슈이다. 좀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뭔데? 해봐라. 압축하자면 장미희를 단순한 배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배우는 작품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의 대다수의 작품들은 장미희를 위해 작품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일예로 배창호 감독과 작업한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황진이>등을 보면 영화가 아닌 장미희만 기억난다. 장미희와 작업하지 않았던 <고래사냥>이나 <꼬방 동네 사람들> <기쁜 우리 젊은 날>에는 배창호가 보이는데. 그건 김호선 감독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내 영화들에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엔 동의 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내 영화주간을 할 때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내겐 김기영 감독님부터 시작해서 김호선, 하길종, 배창호 등 각 세대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영화를 하는 행운이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만들어 준 내 극중 캐릭터들이 다 너무 쎘다. 죽이거나, 미치게 하거나... 김기영 감독님은 <느미>에서 날 벙어리로까지 만드셨다. 물론 장미희라는 배우가 강한 캐릭터에 어울리니까 그렇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들이 내 캐릭터에 몰입되었고 오래 기억한다면 그 영화들은 감독과 내가 함께 앙상블을 이루어 우리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겠지. 그럼 좋은 작품인거 아닌가?
물론 그것은 배우로써의 당신의 출중한 능력에 관한 부분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쉬지 않고 대표작을 내 놓은 배우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장미희라고 말하면 각 세대들은 다른 사진을 기억한다. 긴 생머리의 청바지를 입은 <겨울여자>의 ‘이화’나, 컷트 머리의 짙은 선글라스를 낀 <깊고 푸른 밤>의 ‘제인’, 그리고 물론 <사의 찬미>의 ‘윤심덕’까지. 모두 다 어떤 ‘신명’을 경험했던 영화들이다. 난 지금 대학에서(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학생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동양적 메소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게 쉽게 말하면 ‘신들림’이다. 캐릭터에 집중을 하고, 환상에 빠져들다가 그 극치의 순간에 캐릭터와 배우가 일치되는 경험이다. 나는 영화에서 그런 체험들을 해 왔다. 그리고 그 체험이 영화에 나오는 것이다. 그럼 관객들도 장미희와 제인, 장미희와 윤심덕의 일체를 느끼게 되는 거다. 아직도 알 파치노 하면 <스카페이스>이고 말론 브란도 하면 <대부>가 그냥 떠오르지 않나? 바로 그런 거다. 그것이 장미희가 다른 배우들보다 영화를 끝낸 이후에도 그 캐릭터 이미지를 오래 가지고 가는 이유인건가? 내가 가지고 간다기 보단 관객들에게 오래 남는 것이겠지. 물론 나 개인적으로도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 이후에는 의식의 영역이 많이 확장된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캐릭터를 만났으니까 그 몰입이 가능한 것이다. 70년대에 신문에 연재되던 <겨울여자>를 읽으며 이건 꼭 내가 해야 한다고, 내가 대한민국에서 ‘이화’를 제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이화로 살았다. 김호선 감독, 황기성 기획자 만났을 때 난 이미 이화로써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하길종 감독과 했던 <속 별들의 고향>이나 김기영 감독의 <느미>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꼭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했었다. 그것이 나의 20대다. 무모하리만큼 캐릭터를 닮아내려고 했었다. <깊고 푸른 밤>에서 나는 조금 성장했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최인호씨가 쓴 ‘깊고 푸른 밤’과 ‘물의 사막’ 두 개의 중편을 조립한 작품이다. 그때 미국에서 공부할 땐데 원래 나에게 주어진 캐릭터는 동두천에서 미군에게 몸을 팔다가 미국으로 온 여자였다. 촬영일정은 잡혀있는데 도저히 이 캐릭터를 내가 시간내에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머리도 뽀글뽀글 하게 만들고, 피부도 거칠어야 하고, 말투나 스타일도 바꾸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배창호감독과 상의한 거다. 장미희가 할 수 있는 캐릭터. 당시의 내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연기.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미국에 살기위해 계약결혼을 하는 ‘제인’이다. 이때 나는 캐릭터를 닮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이해하고 만드는 경험을 했다. 정말 제인이 된 거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표현으로도 제인이 읽힌다. 즉, 작은 소리로 말해도 강한 아우라가 표출되는 거지. <사의 찬미>의 ‘윤심덕’은 바로 이 두 가지인 장미희의 열정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만나 폭발한 거고. 그러니 그 다음 어떤 ‘캐릭터’를 만나기 전까지 그 전 모습을 지운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닌 거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당신은 ‘윤심덕’인가? 관객이 장미희를 윤심덕으로 기억한다면 분명히 나는 아직 윤심덕일 것이다. 장미희의 최대 유행가 되어버린 어느 해 시상식에서의 소감이 이제 이해가 된다. ‘아름다운 밤이네요~?’를 말하는 건가? 어떤 이해? 그 표현은 장미희가 한 것이 아니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1920년의 윤심덕이 한 말이라는 거지. 맞다. 호호.
어떤 사람들은 장미희를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그렇게 아우라가 있지 않은 배역은 잘 맡지도 않고, 맡아도 것 돈다는 기분을 주니까. 즉 장미희가 중심이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는 곤란하다는 건가? 배우가 맡는 작품마다 대표작을 만들 순 없다. 그럼 얼마나 좋겠는가? 또 최근에는 내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배역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으로 봐도 어쩔 수 없지만 이젠 그런거 흥미가 없다. <사의 찬미>때는 김호선 감독이 내 연기를 편집할 수 없어서 런닝 타임을 2시간 10분까지 간 거다. 이런 게 배우로써의 명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작품과 감독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이것이 한 제너레이션을 책임졌던 배우로써의 책임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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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를 한 사람 조현진은 한국최대의 인터넷 문학 사이트 <작가네트>를 이끈 경험이 있다. 소설가이며, 문화기획자로 활발하게 일하다가 미국에서 상담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창작활동과 함께 전문 인터뷰어로 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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