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집’ 아이들
미국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린 1969년 8월에 우리나라에서는 MBC TV가 개국했고 다음해 청평 안전유원지에서는 기독교방송 주관으로 3일간의 포크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통기타 1세대들과 신중현, 히식스, 키보이스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그룹사운드까지 참가한,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행사였다. 수중에 무대가 설치되고 낮부터 밤늦게까지 공연이 계속됐는데 출연자들은 배를 타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밤에는 드럼통에 장작을 태워 무대주변을 밝혔다. 별도보고 흐르는 물에 비치는 불빛도 있는 정취 있는 페스티벌이었다.
그 행사가 끝나고 며칠 지나서 충무로 YWCA에서 연락이 왔다.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광장을 열자는 것이었다. 명동 YWCA 안뜰 구석에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 단층 건물이 있었다. 물가에 서있는 것이 어울리는 버드나무에서 착안해 ‘청개구리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내 이름이 흰개울(白川)인 것과 내가 그 일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쾌히 승낙하고 매주 수요일 밤 쎄시봉에서 사용하던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이름을 다시 내걸며 시작했다. 바닥엔 푸른 카펫을 깔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가지 콜라뿐. 셀프서비스 콜라 한잔 값으로 99원을 받고 저녁 7시에 개장했다.
청개구리집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나타난 이름들이 화려하다.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김도향, 손창철, 은희, 한민, 최안순, 김영세. 여기에 가끔씩 찾아와 어울리던 김세환과 왕년 자니브라더스 멤버이자 현재도 재즈 가수로 활동중인 김준. 김도향과 손창철은 후에 투코리안스를 결성했고 김민기와 김영세는 잠시 ‘도비두’라는 듀엣을 결성해 활동했다.
카펫만 깔았을 뿐 청개구리집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 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모습이었다. 만원이 되면 100명 정도였을까. 콜라를 마시며 잡담하듯이 대화를 하는 것이 시작이었고 아직 손님이 몇 명 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기타 치고 노래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있게 마련이었다. 마이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기타 주위로 모인다.
“장난감을 갖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는 /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헤르만 헤세의 시, 서유석 곡 : 아름다운 사람)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대포집은 열 /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양장점은 열”(파란 많은 세상)
‘아름다운 사람’ ‘파란 많은 세상’을 부른 서유석은 유난히 바다나 산을 좋아해 친구들과 몰려다녔는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올 때면 자신의 소리에 해조음(海潮音)이나 심산의 솔나무 냄새를 묻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이크 깨지니 멀리서 불러달라”
김도향, 손창철은 육군에서 막 제대한 부대 친구였다. 둘 다 성량이 대단했다. 그들은 톰 존스의 ‘키프 온 러닝’ ‘아이 캔트 스탑 러빙유’ 같은 곡을 잘 불렀다.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투코리안스의 대표곡 ‘벽오동’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G 마이너 하나의 코드로만 진행되는 우리 가락이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황진이의 시를 기초로 김도향 작사, 김도향 작곡)
거의 천지개벽하는 소리였다. 나는 어느날 광화문 지하도를 걷다가 ‘투코리안스’라는 듀엣 이름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방송에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 청개구리집에서 그들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고는 그것을 들고 방송 PD들을 찾아 나서게 했다. 1970년 8월이었다. 9월부터 방송출연을 시작한 투코리안스는 한 달간 60여 회의 방송출연을 하게된다. 그들을 안 부른 쇼프로가 없었다. 패티김쇼, 최희준쇼, 쇼쇼쇼, 그랜드쇼…. 물론 그들이 내세운 곡은 ‘벽오동’이었다. 우렁찬 성량 때문에 방송국 오디오 담당자가 마이크 깨진다고 멀리 떨어져서 불러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김도향, 양희은, 방의경, 은희…
양희은은 경기여고 졸업 후 재수하던 때에 청개구리집에 나타났다. 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선머슴아였다. 그녀는 맑고 힘있는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주디 콜린스의 ‘퍼프’를 잘 불렀고 ‘일곱 송이 수선화’ ‘세노야’ ‘검은 장갑 낀 손’도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는 존 바에즈가 인기였지만 양희은의 소리는 존 바에즈보다 훨씬 고왔고 노래에 신념이 느껴졌다.
“세노야 /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세노야를 부르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양희은은 서유석, 김민기, 임문일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하루는 그녀가 청개구리집에서 자신의 리사이틀을 하겠다고 나섰다. ‘형’들이 도와주었다. 공연하는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어땠어요?”
그런데 나의 대답은 그녀가 기다렸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 흥분한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
그러자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달래느라고 애를 썼다. 그 날 나는 겨우 열아홉 살의 그녀에게 매몰차게 얘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방의경이라는 이대 미대 학생도 단골중의 한 사람이었다. 둥근 얼굴에 조용한 미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여린 소리. 그녀는 외국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안하는 일에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 무엇이 이 숲속에서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메일 해밀턴의 노래에 방의경 작사: 아름다운 것들)
방의경은 ‘불나무’라는 곡도 남겼다.
“오, 그대는 아는가 불꽃송이여 / 무엇이 내게…”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가사와 곡으로 족적을 남긴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사랑해 당신을’은 라나에로스포의 노래로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은희가 혼자 부르던 노래였다. 어느 대학생이 애인을 떠나보내고 술집에서 한숨에 가사를 적었다는 곡이었다. 눈이 크고 아리따운 소녀 은희. 그런 그녀의 소리에는 물러서지 않는 제주도 특유의 강한 기가 숨어 있었다.
“사랑해 당신을 / 정말로 사랑해…”
그녀는 청개구리집에서 한민을 만나 듀엣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다. ‘꽃반지 끼고’도 청개구리집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최안순은 원래 한민의 파트너였다. 청개구리 집에 가끔 왔는데 ‘산까치’를 불렀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도 옆 사람과 얘기하는 일이 드물었다.
“산까치야 산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 네가 울면 우리 님이 오신다는데 / 너마저 울다 저산 넘어 날아가면 / 우리 님은 언제 오나 / 너라도 내 곁에 있어다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청개구리집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까치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