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
노비도 성이 있었다.
같이 살아야 호적에 올랐다.
처가에 갔다가 시집을 오기 시작했다.
군역 등 다양한 의무와 세금 등의 문제로 호적은 뻑하면 고쳐졌다.
족보는 그야말로 동성에 대한 기록일텐데 성씨마저도 심심하면 바뀌었다.
계급 사회에서 계급까지 기록했는데 그것도 수정이 가능했고, 수정을 많이 했고,
계급 따라 호칭이 달랐고...
결국 신분을 살 수 있었던 건 돈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역사가 반복되는 건 인간의 욕망이 그대로이기 때문일지도.
양반제도가 무너지면서, 부계사회로 전환된 셈.
동일성끼리 사는 집성촌이 많아지고 재산을 한 곳에 모으는 게 힘을 유지하거나 키우는데 유리했는데 남자가 자기 집에 살게 되니 자연스럽게 재산은 남자에게 상속.
양반을 모방하느라 성씨가 보편적인 문화가 됐는데 지금도 부자를 모방하며 과시하는 듯...
그리고 인생은 타이밍.
8. 이 책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양반을 꿈꾸었던 한 노비 가계의 2백 년의 이력을 기록한 것이다.
9.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방향은 양반 기득권의 직접적인 해체가 아니라 모두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이었지만, 근대 이후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상당한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19. 조선시대는 아버지나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이라는 원칙이 통용되는 시기가 오랫동안 존재했다.
26. 수봉은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했던, 양인과 천인이 결혼하는 양천교혼의 방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28. 수봉의 주인, 심정량: 1678년 노비 수봉의 호적에는 그의 주인이 명기되어 있다. 노비의 소유자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수봉의 주인은 같은 단성현에 거주하는 심정량이라는 사람이었다. / 같은 마을이라고는 하나/ 별도의 호를 구성해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30. 실제 관료를 역임했던 인물은 그의 조부와 증조부, 외조부였다. 조부 심인제는 매우 긴 직역을 가지고 있는데, 앞부분은 죽은 뒤 추증된 품계와 관직명이고, 뒷부분은 생전에 실제 지녔던 품계와 관직명이다. 사후 추증된 그의 품계는 정3품 통정대부였다. 소봉과 똑같은 통정대부이지만, /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하천민들을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조선 왕조는 관료들의 품계와 관직을 일치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순조롭지 않은 경우도 많았따. 이때 품계가 높은 사람이 그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될 때에는 관직명 앞에 행 자를, 반대의 경우에는 수 자를 붙여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냈는데 이를 행수법이라고 한다.
34. 양반 남성이 과거에 급제해 관료로 나가지 못했을 때 직역은 대개 유학이었고, 그가 죽으면 호적에서 학생으로 바꾸어 기록했다.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조상의 신주에 적힌 '학생부군신위'의 학생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호적이나 신주에서의 학생이란 결국 관료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양반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35. 초혼인 경우 여녕 차이가 평균 3.4살에 불과했다.
38. 양반가에서는 비슷한 연령대의 인물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재혼의 경우 남성의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격이나 경제력이 높을 때는 부부간의 연령 차이가 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부인과 사별한 양반 남성이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해서 재혼 대상자를 찾지 못했을 때는 달리 방법이 없다. 여생을 자식들의 봉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재혼을 포기하고 첩이라는 또 다른 부부관계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46. 그녀는 비슷한 연령의 평민 남성의 처가 아니라 열일곱 살 많은 양반 남성의 첩이라는 길을 걸었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안락한 삶을 누렸을 것이고, 그녀의 아들도 서자로서 완전한 양반 신분은 아니지만 중인층의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윤소사에게 있었고 심정량도 아들이 필요했다면, 첩이라는 형식을 단지 양반 남성의 애정 문제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원래 결혼을 하면 처가에서 살았다. / 부계가 근간이 되는 중국식 가족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조선은 왕실에서부터 먼저 처가살이의 바탕이 되는 남귀여가혼 대신 시집살이로 곧바로 이어지는 친영례를 행하려고 했다/ 마침내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시집살이라는 새로운 전통이 정착되어 나갔다. 그때도 혼례는 처가에서 올렸지만 다시 본가로 되돌아와 신혼 생활을 했다.
49. 노비인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난 얼자녀보다는 차별이 적었다. 얼자녀의 경우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평민이나 그 이상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러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노비로 살아가야 한다. 노비로 남은 얼자녀들은 때로는 그들의 이복형제인 적자녀의 상속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51. 족보에서는 적자와 적녀를 먼저 기록하고, 뒤에 서자녀를 올릴 때는 '서자'나 '서녀'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아 놓았다. 더구나 첩이었던 그들의 어머니는 족보에 올라가지조차 못했다.
53. 외거노비들은 주인의 감시가 어려워 상대적으로 도망이 쉬웠고,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평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 심정량의 집 근처에 초가를 짓고 그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집안일을 돕는 노비들이었다. 이들은 심정량의 호적에는 '별호'로 기재되어 있고, 그들 자신의 호적에는 주인이 심정량으로 표시되어 있다. 수봉 역시 이 범주에 들어가는 노비였다.
57.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는 딸을 상속으로 점차 배제시키고 아들들이 같은 마을에 모여 살게 되면서, 그들의 노비들도 일상에서 친 인척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58. 어떤 경우든 노비들의 결혼에는 소유권 문제가 개입되어 주인의 간섭이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재혼은 양반들처럼 까다롭지가 않아서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65. 100세가 넘는 노비들은 이처럼 행방이 묘연하거나 사실상 도망간 이들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66. 도망간 이들이 다시 노비로 살 리는 없었다. 행상을 하든 남의 집 소작인이 되든 간에 과거의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새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67. 수봉은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 그가 이미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모아두었기 때문이다. / 그가 가진 재산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고자 했다.
69. 노비의 이름은 양반과는 달리 동물, 식물이나 시간, 성격 등에 빗대어 흔하거나 천한 이름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71. 고유어로 된 노비 이름을 조금 더 호적에서 찾아보자. / 강아지, 도야지, 송아지, 두꺼비, / 막동이나 끝동이, / 더부사리, 담사리 / 개불알, 소불알을 뜻하는 개부리나 소부리가 있었다.
73. 노비들에게 붙여진 천하고 흔한 이름은 작명을 통해 발현되는 욕망의 거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90. 조선의 노비들은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반드시 성씨와 본관을 만들었다.
91. 노비들은 지리적으로 가깝다거나 인구수가 많아 자신들에게 익숙한 지명을 본관으로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103. 수봉과 후손들의 정착지(표)
108. 흥발의 후손들은 주로 등광촌과 용흥촌에 거주했는데, 그들 중에서 완전한 평민 마을인 등광촌 거주자들의 개명이 더욱 활발했다.
109. 호적이란 문서에 한 사람의 이름이 시기에 따라 바뀌고 그것이 세대를 이어 거듭된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 직역까지 달라진다면 혼란은 가중된다. / 흥발의 손자 김명재는 / 필중으로 이름을 바꾼 뒤 직역도 중간층의 업유로 올라갔다. / 모든 개명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로 그것은 의도된 혼란을 통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111. 수봉의 후손들이 심씨가의 손길을 벗어나 다른 마을로 이주하면서 성장을 꾀했다면, 심정량의 후손들은 한 곳에 집거함으로써 다른 양반가와 경쟁했던 것이다.
113. 당시 양반들이 배우자로서 기피했던 대상은 동성동본의 인물이었다.
114. 여깃 본관이 시기에 따라 바뀌고 있으며, 가계를 추적하기도 어려웠다. / 더 중요한 사실은 수봉의 경우처럼 많은 이들이 성과 본관을 어떤 특정한 시기에 획득했다는 점에 있다.
117. 이월의 아버지인 수봉만이 아니라, 조부, 증조부, 외조부까지 모두 흥발의 형제와 같았다. / 형제간에도 부모의 관심 차이나 자신이 가진 재력의 정도에 따라 신분이 노비와 평민으로 나뉠 수 있었다. 동생 끝용은 노비였으나 형 기룡은 평민이었고, 끝용의 부인 이월은 노비였으나 그녀의 오빠들은 노비 신분에서 이미 해방되었던 것이다.
128. 결혼 대상자의 지역적 범위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과 맞물려 있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수봉 후손들의 통혼 범위는 가까운 곳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141. 수봉 후손의 직역 변화 추이(표)
143. 일반적으로 양반 여성은 '씨', 평민 여성은 '소사'로 지칭하다가 18세기 중엽부터 둘 사이의 중간층에 '성'이란 새로운 지칭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 결혼 후 여성의 지칭어는 남편이나 주호의 직역에 영향을 받았다.
150. 많은 양반들은 호적상의 직역이 유학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따. / 문제는 전통적인 양반이 아닌 사람들까지 유학을 칭하기 시작한 데 있다. / 벼슬을 하지 않았따면 호적상 직역은 모두 유학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직역 명칭에서는 양반의 적자와 서자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반가 내부에서 사적으로 적자와 서자 사이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고 과거 같은 공적인 관료 임용 제도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 유학이라는 직역의 사용은 결국 적자와 서자 사이에 가로놓인 수많은 차별 장치 가운데 하나를 제거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151. 유학은 양반층에서 양반의 서얼, 다시 평민의 일부로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O오가 처음부터 유학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21세였던 1759년까지는 어영청 보인으로 평민 군역자였다. 3년 뒤 그의 아버지 김흥발은 장남 O오를 비롯해 3명의 아들 가운데 2명을 업유라는 중간층 직역으로 올려 놓았다.
152. 하지만 김O오의 행운도 그렇게 길게 가지는 않았다. 유학이 된 지 3년 만에 그의 직역은 중간층의 교생으로 강등되었고, 이후 여생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유학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부인의 지칭 역시 이씨에서 이성으로 격하되었다. / 지방 양반들의 대다수는 여러 세대 동안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지방에서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그것은 신분 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154. 호적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유학을 칭했다. 그 시기는 대개 19세기 중엽부터다. / 한때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유학이란 호칭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는 수봉이 노비에서 해방되고 약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이때 수봉 후손의 가계는 완전히 탈바꿈해서 형식적으로는 양반의 가계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이는 앞 시기의 김O오와도 달랐다.
157. 도산면 남성 주호의 직역별 비중 변화(표)
17세기 말 10% 정도에 머물렀던 상층의 비중은 18세기 전반 20%, 18세기 말 40% 선을 넘어섰다. / 급기야 1867년에는 67%에 이르렀다.
165. 본관은 특정한 혈연집단의 시조나 중시조가 나온 지역을 지칭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같은 혈통을 가진 인물들이 여러 지역으로 분산해 나갈 때 각각의 지역에 정착해서 세거한 일파를 가리키는 표식이기도 했다.
168. 토성은 진주의 읍 중심부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키웠떤 이 지역의 대표 성씨들이다. 입주후성은 읍 중심 인근에 있던 지역이 행정 개편과 함께 중심부로 통합되면서 뒤이어 토성이 된 성씨들이다. 이들의 본관은 물론 진주가 된다. 속성은 새롭게 편입된 성으로, 다른 지역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토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169. 결국 성씨는 발달 과정에서 일찍부터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에 차이가 있었고, 다양한 갈래로 존재했던 본관은 군현 명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77. 대를 잇기 위한 입양. 조선 후기 양반의 가족과 친족은 부계를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변화를 맞았다. 처가살이의 전통은 시집살이로 전환되었고, 상속도 적장자를 우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부계가족이 당시 양반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 차남들도 주변에 모여 살았고, 그들의 친척들도 인근에 거주하면서 문중이 탄생했다. 때로는 동성 촌락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 아들이 존재해야 한다.
178. 조선 후기에 들어서 아들을 두지 못해 가계가 끊어지는 것을 대단한 불효로 여기는 관념이 생겼났다.
181. 양자는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모두 생존해 있을 때 결정되기도 하지만, 이처럼 양아버지나 혹은 양부모가 모두 젊은 나이에 사망했을 때는 사후에 정해지기도 했다. 어떤 형식이든 간에 목적은 아들이 없는 집의 가계 계승이었다.
182. 성씨가 다른 양자는 조선 전기에 여러 사례가 있었는데, / 양반가의 입양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하천민층에서 노동력 확보나 노후 봉양 등을 목적으로 한 입양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4. 변담이 큰집에 양자를 간 것은 양반들과 달리 가계 계승보다 양부모의 봉양 등 다른 데 목적이 있었으며, 그 목적이 사라지면서 입양 관계도 끝나 버린 것인다.
185. 수봉들의 후손들에게는 / 양반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하면서 양반가의 가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도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을 추진했던 것이다. / 안정적인 가계 계승이라는 양반들의 관심이 아래 계층으로도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 족보에서 조상에 대한 기록을 조작하거나 윤색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때로는 가계 이력 자체가 바뀌거나 위조된 족보도 만들어졌다. / 족보 그 자체가 부계친족 집단의 발달과 양반 지향 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어야 할 것 같다.
193. 양반들은 유학이 된 수봉의 후손들을 인정하고 있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의 하나를 통혼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전통 양반 세력이 수봉의 후손들과 혼인을 맺었다면 수봉가의 성장을 양반들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수봉의 후손들은 이들 유력 양반들과는 혼인을 맺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양반들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해 나갔지만, 다른 계층을 향한 그들 내부의 폐쇄성은 여전했던 것이다.
196. 양반을 양반답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직계 조상 가운데 과거에 합격해 관료로 진출한 이가 있는지, 학문적 명망을 주위에 드날린 이가 있는지의 여부였다. / 하천민에서 성장한 이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이라는 직역을 얻고 양반의 문화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과 학문에 대한 욕구가 형성되어 갔다. / 조선 후기에 들어 서당이 확산되면서 비양반층 자제들에 대한 교육 기회가 서서히 늘어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200. 많은 이들이 양반 지향 의식을 현실에서 표출하면서 한국에서의 신분 관념은 역으로 해체되었다. / 하지만 조선시대 하천민이라는 신분은 본인의 의지로 획득한 것이 아니었다. / 학력은 새로운 성장의 도구가 되었고, / 자녀들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