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최고기록 3시간29분 73세 마라토너…석병환 “10년만 젊었으면 서브3 문제없는데…”
그는 66세에 풀코스에 처음 도전해 3시간44분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결승점을 밟았다. 69세에는 100km 울트라마라톤을 9시간57분에 뛰었고, 71세에 풀코스 1백 회 완주를 달성했다. 73세인 금년 10월 25일 현재 풀코스를 1백70회 완주했고, 내년 봄 무렵엔 2백 회 완주라는 금자탑을 쌓을 예정이다. 80세가 되는 해에는 다시 한번 100km 울트라를 완주하겠다는 ‘영원한 청춘’ 석병환옹을 만났다.
글·유인종 기자 / 사진·김정미 기자 / 용품 협찬·나이키
독자들은 이번 달 표지 인물인 석병환옹의 출생년도가 1933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의 경이로운 마라톤 기록들이 과연 몇 살에 수립됐는지 계산해 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이가 됐을 때 과연 그처럼 달릴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 뒤, 옷깃을 여미고 그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경하의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보다 더 드라마틱한 석옹의 마라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청계산 다람쥐’와 마라톤 1990년대 중반, 그의 별명은 ‘청계산 다람쥐’ 또는 ‘다람쥐 할아버지’였다. 서울과 경기도 성남·의왕·과천시에 걸쳐있는 청계산(해발 618m)을 다람쥐처럼 빠르게 오르내려 붙여진 별명이었다. 서울 서초구에 집이 있던 그는 청계산의 매봉이나 옥녀봉 등을 걸어서 올라가는 법이 없었다. 늘 뛰어 올라갔다가 달음박질로 내려왔다. 그가 매봉 등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면 그와 함께 출발한 등산객들은 이제 겨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머리가 허연 노인네(그때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가 산을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니 중년의 등산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젊을 적에 특별한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한 운동은 환갑이 넘어 시작한 수영이 전부였다. 하지만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서 청계산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지금까지 절제된 생활을 고수해 왔다. 담배는 여태 입에 대본 적이 없고, 사업을 시작한 30대 중반까지는 술도 마셔본 적이 없다. 화투도 평생 손에 쥐지 않았다.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 다니는 부인 김영자(1935년생)씨는 이런 말을 했다.
“올해로 결혼한 지 50년 됐는데, 저 양반은 새벽 4시가 지나서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딱 4시면 칼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점심도 정확하게 정오에 먹어야 해요. 제가 12시에 점심을 차려놓지 않으면 밖에서 사먹고 들어올 정도예요.”
이처럼 욕구를 억누르는 생활은 그에게 건강이라는 재산을 안겨 주었다. 산행을 한 지 5년이 됐을 때였다. 그는 자신처럼 산에서 뛰어다니는 30대 남자들과 마주쳤다. 산악 마라톤을 한다는 그들은 그를 보더니 “마라톤대회에 나가 보시라”고 권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에게 그들은 서울 마라톤과 동아 마라톤이 곧 열린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가 만 66세가 된 1999년의 일이었다.
대회 공고가 실린 동아일보를 찾아보니 달리는 사람들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서 그해 3월 21일에 열리는 동아 마라톤에 덜컥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서울 마라톤은 이미 접수가 끝나 있었다. 무슨 일이건 일단 시작하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그가 신청이 마감됐다고 해서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는 서울마라톤대회 조직위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마침 박영석(1929년생) 회장이 있었다. 지금은 명예회장인 박 회장은 “늦었지만, 참가 신청을 받아줄 수 있다”면서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그에게 훈련량과 훈련방법 등에 관해 물어 보았다. “산만 뛰어다녔다”는 말을 들은 박 회장은 “마라톤은 결코 만만한 운동이 아니다”라면서 하프코스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평소엔 점잖고 겸손하지만, 그도 ‘한 고집’ 하는 사람이었다. 풀코스와 하프코스를 놓고 한동안 승강이를 벌인 뒤 결국 박 회장이 손을 들었다. 그의 풀코스 첫 참가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결정되었다.
1999년 3월 7일, 서울 여의도에서 제2회 서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2천명쯤 되는 풀코스 참가자들 틈에 섞여 그도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내심 42.195km를 우습게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반환점까지는 쉽게 갔는데, 그 후부터는 다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져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게다가 날씨는 얼마나 추운지 걷노라면 몸이 금세 얼어 들어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억지로 달릴 정도였다. 골인 뒤 따끈한 우동을 먹으려고 했더니 입이 얼어서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동장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던가,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결승점이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3시간44분27초 만에 골인하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박영석 회장이었다. 마라톤 ‘초짜’가 풀코스를 완주한 것도 놀라운데, 66세 노인이 서브4(풀코스를 4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기록했으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기네스북에 올려야 한다”는 주위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그는 연령별 시상대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마라톤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야 했다. 60대 1위 상을 받는데, 시상대까지 걸음을 옮길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귀가할 때도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마라톤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 그러나 그로부터 2주일 뒤인 3월 21일, 그는 다시 동아 마라톤에 참가해 가뿐하게 서브4(3시간42분13초)를 기록하며 완주했다. 그때부터 그는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족족 참가했다. 물론 한결같이 풀코스만을 고집했다.
당시만 해도 마라톤대회가 많지 않을 때여서 1999년에 6개, 2000년에 9개, 2001년에는 10개의 대회에 참가했다. 2001년까지 풀코스를 25회 완주하며 서브4를 못 한 것은 2001년 8월 15일에 열린 혹서기 대회(4시간16분46초 기록)뿐이었다. 한편 67세이던 2000년 동아 마라톤에서는 지금껏 경신하지 못하고 있는 개인 최고기록(3시간29분16초)을 달성하기도 했다.
2002년 이후에는 마라톤대회가 급증해 일요일마다 대회에 참가하는 게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됐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이 인상적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해요. 몸이 찌뿌드드하다가도 마라톤대회장에만 나가면 신이 나고 힘이 솟거든. 풀코스 1백 번을 뛸 때까지는 나도 출발선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그런데 이젠 그런 두려움도 없이 마음이 편안해요. 이건 마라톤을 우습게 본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냥 마라톤이 내가 됐고, 내가 마라톤이 됐다고나 할까…, 그런 일체감을 느낀다는 말이에요.”
시계를 보지 않고 달리는 그는 후반에 강한 편이다. 반환점까지 달려본 뒤 컨디션이 좋으면 속도를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달려오던 속도를 유지한다. 어느 쪽이 됐건 그는 반환점을 돌고 난 이후에는 숱한 젊은이들을 추월하면서 나아간다. 그때 그는 ‘자신 같은 노인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힘이 빠졌다가도 다시 기운을 내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걷거나, 쥐가 나서 주저앉아 있는 참가자를 앞지르면서 그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힘!”이라는 말을 외칠 때 그의 가슴속에는 이런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육군 중령 큰아들과의 ‘기 싸움’ 그러나 막상 그에게 추월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달랐다. 어떤 마스터스는 “대회장에서 그분에게 추월당하는 날은 스트레스 왕창 받는 날”이라면서 “형편없는 내 실력을 자책하면서 대회 뒤 애꿎은 술만 축낸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요즘도 그는 한겨울과 한여름, 마라톤대회가 뜸할 때를 빼고는 일요일마다 대회에 참가한다. 그렇게 달리면서도 보통 3시간40∼50분 정도면 골인한다. 그래서 “대회 참가를 좀 줄이고, 서브3에 도전해 보시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브3, 그도 물론 욕심이 있었다.
“마라톤을 조금만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지금도 10년만 젊었으면 서브3를 할 자신이 있어요. 그러나 이젠 나이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무리죠. 괜히 욕심부리다가 다치면 그 좋은 달리기를 못 하니까 이젠 기록 욕심을 접기로 했어요.”
대회 참가가 워낙 많고, 기록 욕심도 버렸기 때문에 훈련은 지구력 유지 및 보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회에 참가하건 아니건 매일 달리는데, 기본 거리는 6km이다.
월·화요일에는 아침에 6km를 달리는데, 방법이 색다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선 스트레칭을 한다. 과일과 채소로 아침식사를 한 뒤 6시경 집에서 나와 3km 거리에 있는 단골 목욕탕까지 달려간다.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 또 그만의 운동을 한다. ‘매일 탕 속에서 하는 스트레칭과 마사지’가 부상 없이 달리는 그만의 비법이라고 한다. 목욕탕에서의 운동이 끝나면 다시 집까지 3km를 달려간다. 점심식사는 정오에 밥으로 든든하게 먹고, 오후 5∼6시에는 저녁식사를 한다. 그리고 밤 10시면 잠자리에 든다.
수·목요일에는 몸 상태에 따라 20∼25km를 달린다. 이 날은 집에서 나와 양재천을 거쳐 과천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금·토요일에는 다시 6km를 달린다.
그는 아들이 둘 있다. 규칙·정확·절제가 몸에 밴 생활을 하는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들 둘은 모두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큰아들(승규·48)은 육사 38기로 현재 중령이고, 육사 49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작은아들(용규·38)은 소령이다. 또 셋째 딸은 대학 졸업 뒤 간부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대위로 복무하다가 제대했다. 2남3녀의 자녀가 모두 부모를 끔찍하게 위하는 효자·효녀들이다.
어느 날 자식들이 긴급회의를 했다. “아버지가 너무 많이 달리는데, 오히려 건강을 상할까봐 걱정된다”는 대책 회의였다. 토의 결과 큰아들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일요일 새벽에 연락 없이 부모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가 대회에 참석 못 하도록 방문을 걸어 잠근 것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결국 그날 대회를 포기한 아버지는 “오늘 대회가 마침 집 부근인 성남을 지나니까 응원이나 가자”고 아들을 설득했다.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아들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작전도 그의 머릿속에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회 후반부에 접어든 참가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패잔병 같은 모습을 본 아들은 “아버지는 절대로 마라톤 해서는 안 된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현재 독일에서 근무 중인 큰아들은 이제 ‘마라토너 아버지’를 이해하는 쪽이다. 단, “제발 살살 달리시라”며 늘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한다. 그 큰아들이 지난 10월 1일, 아버지를 독일로 초청하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오셔서 독일과 유럽 여행을 하시라”면서 비행기 표 등을 다 구입해 놓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0월 1일만 해도 하이서울 마라톤이 열리고, 또 이틀 뒤인 3일에는 국제평화 마라톤, 15일에는 여주, 22일은 아디다스 MBC, 29일은 춘천, 그리고 11월 5일은 중앙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데 어떻게 독일에 가느냐?”는 것이 그의 거절 이유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해 아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네 엄마와 함께 마라톤대회에 다니려니까 돈이 많이 든다. 차라리 유럽 여행 경비를 내게 다오. 그러면 네 엄마와 좀더 편안히(그리고 더 많은)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겠다.”
그는 1933년 충북 음성에서 8남2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 중에선 차남이다. 대전상고와 단국대를 졸업했으며, 1953년 군복무를 마친 뒤 상경했다. 나이를 먹으니까 키가 좀 줄어서 지금은 161cm이지만, 젊을 때는 163cm였다. 요즘 체중은 48kg이지만, 이 시기에는 61kg까지 나갔다.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군대에서 구보할 때면 늘 앞장설 정도로 젊을 때도 건강체였다. 4년여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누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공무원 생활을 접은 뒤에는 여러 가지 사업을 했다. 연료·건축 자재 등등의 부문에서 펼친 사업 운은 썩 좋지 않았다. 사업을 벌이는 ‘타이밍’이 시류(時流)를 타지 못하고 조금 빠르거나 늦었던 것이다.
“욕심 버리면 빨리 뛴다”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에는 청계산 자락에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닭이나 토끼·염소·개 등을 치는 농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들이 닭이 괜찮다고 해서 닭을 키우면 조류 독감으로 닭값이 폭락하고, 개가 돈벌이가 잘된다고 해서 시작하면 또 무슨 일로 판로가 막혔다. 5년여 고생만 잔뜩 하고, 그동안 모아놓은 저축을 다 까먹은 뒤 농장을 접었다.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후회는 없다. 요즘은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는 자식들 덕에 생활하고 있다.
|
첫댓글 석병환선생님은 우리 거북이마라톤클럽의 무한질주님과 100회클럽 소속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