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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55) 2024. 1. 10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
사무엘하 21:1-9
‘사무엘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0장까지는 ‘다윗의 올라가는 이야기’, 즉 그가 왕으로 등극하고 승리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11~20장까지는, ‘다윗의 내려가는 이야기’, 즉 범죄하고 징계를 받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1~20장까지는 역사의 순서를 따라 연대기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21~24장은,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다윗이 왕이었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시간적 언급 없이 독립적으로 기록해 놓은 일종은 부록입니다. 때문에 21~24장까지의 사건들은 정확하게 언제 일어난 사건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대강 짐작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시작한 다윗 왕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의 말년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는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다윗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은 사울처럼 왕위에서 내쫓지 않으시고 후계자도 준비해주심으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결국, 인간이 의지할 것은 인간의 신실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
<흉년과 그 이유>
다윗 시대에 흉년이 3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의 시대에', 이 말은 정확한 연대를 말해 주지 않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어느 때에 일어난 사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7절 이하에서 다윗이 므비보셋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아 므비보셋을 찾은 이후의 사건임을 알 수 있을 분입니다.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자연적인 재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기근은 칼(전쟁), 사나운 짐승, 온역 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일종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레 26:26, 겔14:21, 왕상8:35).
다윗 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약간의 신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사건을 추적해야 합니다. 이에 가장 근접한 이야기는 바로 사울이 에돔 사람 도엑을 보내서 ‘놉’의 제사장들을 몰살한 일입니다.
다윗이 놉으로 피신했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준 것을 에돔 사람 도엑이 알고 사울 왕에게 고발합니다. 이에 사울 왕은 도엑에게 놉 땅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고 명합니다. 이에 도엑이 제사장을 팔십오 명이나 죽였고, 제사장뿐만 아니라 남녀와 아이들, 그리고 짐승들까지 다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삼상22장).
<사울의 범죄>
그런데 그 사건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2절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본래 가나안 원주민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함락시키자, 그들은 꾀를 내어 마치 멀리서 온 사신처럼 꾸며서 조약을 맺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사실을 확인해 보거나 하나님께 묻지 않고 덜컥 그들과 화친을 맺어버리고 말았습니다(수9장).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나중에 기브온이 가나안 원주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도록”(수9:23)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사장들의 성읍 놉과 기브온 사이의 연결점이 생겨납니다. 실제로 놉과 기브온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놉 성읍을 몰살할 때 상당수의 기브온 사람이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는 사울이 평소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 말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명예에 광적으로 집착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언젠가는 기브온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김에, 그들을 도우며 살아가던 기브온 사람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사장을 죽인 일을 변명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불가피하게 제사장들까지 죽이게 되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조약을 맺은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과 어떤 경우에도 조약을 맺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출34:12). 그러나 그 잘못은 여호수아가 책임질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한번 맺어진 조약은 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그들과 맺은 조약은 '여호와의 이름으로'(수9:15, 18-20) 맺어진 화친 조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약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해하지 않고 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수9:15). 따라서 사울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이들을 죽인 행위는 하나님의 성호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킨 변명할 여지 없는 살인죄였습니다.
신명기 19:10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고, 신명기 19:13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울의 범죄로 인해 3년 연속 이스라엘에 가뭄이 든 것입니다.
<다윗 왕이 속죄의 방법을 물음>
이유를 안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3~4절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4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다윗은 어떻게 하면 사울의 죄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원한이 풀리면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어 달라고 말합니다. 가뭄이 끝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자신들의 문제는 은금으로 보상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피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고 힘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살인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속전(贖錢)을 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부유한 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고살자(故殺者)에 대해서는 속전 내는 것을 금하고 반드시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민35: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이렇게 볼 때 기브온 사람들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즉,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그 집이 고의로 자기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반드시 죽음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율법의 규정대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피의 복수를 허락해줍니다. 그동안 기브온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사울 왕의 기세에 눌려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시려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의 목숨을 구함>
다윗이 피의 복수를 허락하자 이들은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5~6절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그들이 지명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지 않지만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사울 왕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달라’고 원합니다.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처형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죽임으로 살육당한 기브온 사람 전체의 원한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를 택합니다. 사울의 자손들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원한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 앞에서’란 말을 강조합니다. 즉 이 처형이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적으로 사울과 사울 집에 대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런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일곱 명 선택>
다윗은 일곱 명을 택하여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7~8절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다윗은 이들에게 내어줄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일단 므비보셋은 제외합니다. 다윗이 요나단과 여호와 앞에서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꼈다고 설명합니다(삼상18:3, 20:16, 42, 23:18). 사실 사울의 죄를 감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므비보셋이지만, 다윗은 이번에도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은 살려준 것입니다.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두 아들(알모니와 므비보셋)을 택합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이었으며, 사울 사후 아브넬과 통간하였고 그 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입니다(3:7).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그들에게 넘겨줍니다(다윗을 환대한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와 혼동하면 안 됨. 삼하19장. 동명이인).
‘메랍’은 사울의 장녀였으며, 사울이 다윗에게 주기로 하였다가 그 약속을 어기고 아드리엘에게 시집 보낸 여인이었습니다(삼상18:17-19).
이렇게 첩의 아들들과 딸의 아들들까지 잡아들인 것은 사울 집 아들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아들은 역대상 8:33에 따르면 네 명인데 이들 중 세 명은 블레셋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었고, 이스보셋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 미갈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브온 사람의 일로 인해 다윗 왕국에서 살아남은 사울 가문의 남자는 므비보셋과 그의 자식들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한 요나단의 선견지명이 자신의 자식을 여러 번 살린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
기브온 사람들은 일곱 명의 사울의 자손을 기브아에 있는 산에서 공식적으로 처형합니다.
9절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 있는 '산 위에서' 일곱 명을 동시에 목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시기는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라고 했는데, 히브리 종교력으로 니산(Nisan)월 중순이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말하자면 4월경입니다.
사울의 잘못을 후손들이 책임지는 것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4:16에 따르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을 죽이면 안 되고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하여 연좌제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경우는 왕으로서 보호해야 할 약자를 집단적으로 죽인 것에 대해 공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왕이 범죄를 저지를 때 왕과 왕의 가족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서 더 엄한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너와 네 집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인간의 죄는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부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3년 동안 연속해서 기근이 든 것은 결국 사울의 숨겨진 죄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에서 기근은 단순한 재해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죄’는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사울 왕가는 망하였고, 이제 새로운 왕조, 곧 다윗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죄는 그가 죽었다고, 그의 왕조가 망했다고 그냥 묻어두질 않으셨습니다.
‘학살’이란 예나 지금이나 있어서는 안 될 범죄입니다. 가해자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 피해자에게는 현재형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아직 그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 결과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근을 통해 사울의 범죄의 진상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조 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갈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진정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우리의 죄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해한 죄는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교훈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를 숨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속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없는가 늘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배타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이방 민족을 제거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순수한 히브리 민족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열심은 아마도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신7:2)에 근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행동은 나름대로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다는 열심에서 나온 행위일 수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심을 가지고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호수아가 기브온 민족과 맺은 조약 역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9:19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이는 오늘 우리도 저지를 수 있는 실수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종합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특정한 구절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행동한다든지, 특정 이념이나 민족적 배타성을 가지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열심히 개인과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성도는 사회의 불의한 일을 척결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그 한을 풀어줄 수 있는지를 묻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즉 다윗은 그 사회를 고통으로 몰고 갔던 불의한 일을 척결하고 뿌리 뽑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사회의 부정이나 불의를 보고 못 본체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자리를 털고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죄가 전공동체에 미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넷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내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명은 사울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한 ‘희생 제물’과도 같습니다.
사울과 같은 엄청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우리는 안전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겠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죄인에 불과합니다. 우리 역시 대속할 ‘희생 제물’이 필요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가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희생 제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도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은혜를 입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죄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열심’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억울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그 사랑은 이웃에게 전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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