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항에서)
출발하는 날 아침, 장마 끝이라더니 찌는
더위다. 그래도 그 쯤 무덥더라도 젖은 것들이 말라 습분이 빨리 거두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뉴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기상이변 폭염으로 벌써
5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한다. 가야 할 로마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울은 그때부터 대단한 폭염이었으며 반면 로마는
건조한 탓에 바람 불어 꽤 시원하였으며 줄곧 쾌청하였다. 떠날 비행기는 에어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여 로마로 들어갈 예정이다. 당초엔 루프탄자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로마로 가는 것이었는데 통사정을 하여 에어프랑스로 바꾸었다. 지난 유월 초 프라하를 갈 때도 타 본 바로 그 시각의
그 에어프랑스 비행기다.
바꾼 데는 안락함도 조금 차이가 있다고 느껴서도 그렇지만 로마 도착시간이 문제였다. 독일비행기로는 밤 11시 반이
넘어서 도착하게 되어있고 프랑스 것은 조금 빠른 밤 10시 15분이다. 1시간 차이지만 밤 11시 반이면 공항에서 테르미니라고 하는
우리나라로 쳐서 서울역쯤 해당되는 곳의 공항직통 고속기차가 끊긴다. 그렇다면 야간공항버스를 타던지 택시를 타야 할 것인데 공항버스는 운행간격이
1시간이라서 문제가 있고 택시는 알아주는 바가지요금이라 하니 이 또한 큰 문제꺼리라 늦은 시각 허둥대다가 여행 첫날부터 잡쳐버릴 것도 같아 바꾼
비행기다.
여행은 계획하여 짜 맞춘 대로 실행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정해진 대로 꼭꼭 다 맞아떨어지면 당시로선 좋다할
것이지만 지나고 나면 별 기억에 남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간혹 예정에 어긋난 상황이나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겨 결과적으로 고소한 맛을 행사할
때가 많다. 당시론 말 못할 객지에서 죽을 맛이지만 안절부절 못하고 당황하다가 겨우 실마리를 풀어낸 순간의 안도감은 두고두고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파리엔 예정대로 도착을 하였는데 갈아타고 갈 비행기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1시간이나 늦게 출발하였다.
그렇다고 미안하다는 방송 멘트 하나 없고 승객들 또한 으레 그런 것이라 하는 것인지 불평 한마디 없다.
드디어 밤 11시 20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였다. 고속기차는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찌 테르미니 역까지 갈 것인가. 수화물을 찾는 중 점잖아 보이는 이탈리아인에게 물었더니만 12시까지는 기차가 확실히 있을 것이라고 한다.
관광책자를 그에게 보여주며 11시 반이 막차로 되어있다고 하니 Sure라고 표현한 말에서 물러나 웃으며 Maybe라고 말을 바꾼다. 그런 그는
만약 기차를 놓치면 택시를 타는데 타기 전 얼마인지를 확인한 후 타고 45유로이상은 절대 주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들도 그들의 실정을 잘
아는 모양이다. 드디어 출구로 나섰다.
심야의 공항은 예상과는 달리 북적대기가 동대문시장과 다를 바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아마도
기차가 끊긴 모양이다. 택시기사들이 호객을 하느라고 정신들이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 기차역 쪽을 향하였더니 아예 닫혀있다.
그렇다면 버스 아니면 택시인데 어찌 할 것인가. 마조레 삐에로 뽀르떼! 마조레 삐에로 뽀르떼! 내가 갈 곳을 말하는 것이다. 택시기사가 마구
달라붙는다. 75유로를 부른다. 버스를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문을 향하였다. 안내원이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택시기사들만 졸졸
쫓는다. 이 오밤중 어디서 버스를 찾고 또 내려서는 마조레로 어찌 기어들어갈 것인가.
순간 생각을 해보았다. 기차요금이 9유로이니 네 명하여 36유로, 거기서 내려 원래는 지하철을 타고 가서
만쪼니라는 역에서 내릴 작정이었으니 2유로 씩 해서 8유로, 거기서부턴 걸어서 백 미터라 하였으니 발품이 4유로라 하면 도합 48유로다.
48유로라 할 것이면 이 오밤중 60유로정도면 괜찮은 흥정이 되지 않을까. 머리가 벗겨지고 넥타이를 맨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선뜻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덩치가 작은 것이 마음에 든다. 65유로 아래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손을 내젓는다. 흥정을 하자고 시간을 끌기엔
너무 늦었고 지쳤다.
중급정도인 곳이라 택시기사가 잘 알까 싶어 두세 번 그에게 호텔이름을 말하였다. 65유로를 결의에 찬 모습으로
말하던 때완 다른 아주 여유 있는 표정이다. 국내에 나와 있는 관광지도엔 묵을 숙박지 위치가 그렇게 외곽도 아닌데 안나와있어 스케줄을 잡을 때
애를 먹었었다. 여행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달랑 ‘만쪼니’라고 하는 지하철 역 부근이란 것뿐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YAHOO USA'에는
정보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대로 미국야후엔 정보가 많았다. 호텔이름을 치자 지도까지 곁들인 정보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에
따르면 ‘테르미니 역’으로 부터 해서 지하철 A선으로 두정거장 떨어진 외곽에 호텔은 자리한다.
만쪼니라는 역에서 걸으면 3분 이내라고 적혀 있었다. 만쪼니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호의 이름으로 작곡가 베르디는
61세 때 문호 만쪼니의 영혼에 바치기 위해 <레퀴엠>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지도를 살펴보니 호텔에서 콜롯세움이 가깝고 마조레교회가
지척이다. 여행은 어떻게 시간을 잘 쪼개어 쓸 것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우린 그 정보를 이용해 7시에 문을 여는 호텔 근처 마조레 교회를
보고 늘 붐빈다는 콜롯세움을 9시 문 여는 시각에 맞추어 바로 찾아가기로 정하였었다. 2년 전 줄을 기다리다가 콜롯세움 내부 보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차가 고속도로 같은 길을 세차게 달린다. 아마도 이
길은 로마시대 오스티아가도라 불리는 옛길에 아스팔트를 입힌 길일 것이다. 황제들이 사는 팔라티노언덕 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 테베레강을
따라 오르는 뱃길을 열어두었으며 가도를 만들어 두었다고 했다. 로마가 망하고서는 그 뱃길을 따라 많은 유물들이 흘러 내려가 로마시대에 세워진
등대 언저리가 지금은 퇴적되어 뭍으로 변하였지만 땅을 파헤치면 여전히 많은 유물이 출토된다고 했다. 바로 그 옆에 지금의 로마공항이 있다.
로마시대엔 공들여 넓게 뚫린 로마로 들어서는 길에 거두어드릴 아무런 것이 없었다는데 지금은 들어서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65유로라 하면 우리나라 돈 8만원이 넘는다. 긴 길을 달리던 차가 갑자기 큰 고적을 중심으로 한 회전을 하더니만
시내 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책에서 본 그림과 똑같은 건물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분명 마조레 교회다. 그렇다면 호텔이 이 부근이다. 드디어
어느 이름 모를 성곽 바로 옆 기다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약속한대로 65유로를 냈다. 그러자 그가 팁은 안주냐 한다. 그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아는 나는 일부러 영어를 길게 늘여 무어라 되지도 않는 말을 하였다. 안준다는 것을 그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주고 되돌아가면서 그가 불쑥 명함 하날 꺼낸다. 로마를 떠날 때 자기를 부르라는 것 일게다.
팁을 안주었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다. 그는 바로 떠났다. 명함을 그때서 자세히 보았다. 명함엔 ‘로마공항에서 시내까지 55유로’ 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바로 밑엔 ‘노 팁’ 이라고 적혀 있다. 팁을 안내어 잘되었다 하였는데 결과는 내가 당한 꼴이다. 문득 예전 확실한 시대의
고대 로마를 Sure 로마라 하고 지금의 어정쩡한 로마를 Maybe로마라 한다면 맞을 것이란 생각도 드는데 아마도 이는 분명 나의 억측
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