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의 한갓진 주택가 골목, 주차장을 리모델링한 듯한 소박한 스튜디오가 하나 있다. 〈해운대〉 〈마더〉 〈괴물〉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왕의 남자> 등 한국 영화의 화제작들을 빛나게 한 영화음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기타리스트이자 한국 영화계의 ‘황금 손’으로 불리는 영화음악감독 이병우(46). 함께했던 영화마다 그 영화만의 영상미와 스토리를 음악적으로 완성시켰다는 호평을 받아온 그다. 그가 회색빛 스튜디오 문을 열어 고개를 내민다. 이병우 씨의 첫인상은 호기심에 가득 찬 소년 같다. 그의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갖가지 종류의 기타뿐 아니라, 기타가 되다 만 나무들이 인테리어 소품처럼 놓여 있다.
영화음악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멀티 기타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클래식, 어쿠스틱, 일렉트릭에서 록, 발라드, 재즈, 팝, 블루스까지, 그는 어떤 장르든 자유자재로 연주한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학 클래식 기타과를 수석 졸업한 그는 피바디음악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쳤고, 클래식 기타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예일 고든 콩쿠르에서 우승하는(1998년) 영광을 안았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협연해온 그는 오는 4월, 피바디음악원에서 필름-미디어 전공 학생들을 위해 여는 마스터 클래스에서 강의한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로 대한민국영화제 음악상, 〈왕의 남자〉로 청룡영화제 음악상,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상하이국제영화제 음악상을 받았던 그. 칸영화제에서 〈마더〉가 상영될 때는 김혜자가 기쁨인지 슬픔인지, 집착인지 놓아버림인지를 알 수 없는, 혹은 그 모든 것을 품은 듯한 눈빛으로 춤출 때 흐르는 음악 ‘춤’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마더〉는 어떻게 보면 대중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 중 하나였어요. 봉준호 감독도 〈괴물〉로 엄청난 스코어를 낸 후라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요.”
그가 손댄 작품마다 화제를 일으키며 관객을 불러 모았다는 점에서 요즘 그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가 ‘황금 손’이다. 그 평가가 기분 나쁘진 않지만, 혼자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외부 평가에 예민하지는 않다고 한다. 3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는 그에게 단독 무대를 내주었다. <이병우 영화음악 콘서트 with TIMF 앙상블>(3월 21일 오후 8시,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해운대〉 〈마더〉 등의 작품에서 OST 연주를 맡았던 TIMF 앙상블(최우정 예술감독)과 함께하는 무대로, 음악과 영화뿐 아니라 미술・무용・문학・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해 실험적으로 꾸밀 것이라 한다. 어느 장르 음악이든 좋아한다는 그는 현대음악제에 영화음악으로 참여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TIMF의 예술감독인 최우정 교수와는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영화음악을 구상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가 들어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해요. 현대음악 연주단체였던 TIMF 앙상블도 영역을 넓히고 싶던 차에 서로 뜻이 맞아떨어졌죠. 요즘 TIMF는 저 말고도 다른 영화음악감독들과도 많이 작업합니다.”
“내 음악 색깔은 힘을 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영화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팔자’라고 대답했다. 물론 공식적인 데뷔는 알려져 있다시피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였는데,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에서 시화(詩畵) 같은 그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제가 좀 수동적이에요. 어떻게 하다 보니 기타를 치게 되었고(집안에 늘 기타가 있어서 열한 살 때부터 기타를 쳤다고 한다), 대중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진과 영화를 좋아하다 영화음악도 하게 되었죠. 처음부터 뜻을 세웠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제 삶이 이 방향으로 흘러 왔어요.”
클래식 음악에 비해 영화음악은 열이면 열 모두 한마디씩 할 수 있는 분야라 재미있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고 한다.
“가장 힘들 때는 제가 처음 만든 음악을 듣고 ‘어렵다’고 할 때예요. ‘그러면 쉬운 것은 어떤 것일까?’ 고민이 커지죠.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니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어렵죠. 불협화음이 들어가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을 알아가는 재미, 호기심이 이제껏 영화음악을 할 수 있게 이끌어온 힘이라고 그는 말한다.
“호기심이 정말 많아요. 생각하는 대로 바로 옮기다 보니 주위에서 정신없어 해요. 이 악기(몸체가 따로 없는 디자인으로 직접 고안했다)도 실패를 거듭하면서 실험하고 있어요. 시간이 너무 없어 어디든 들고 다니면서 곡을 만들고 연습할 수 있는 악기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기타리스트에게는 직업병이 있어요. 악기가 인체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기타를 치려면 다리를 올리고, 목은 내려뜨리고, 허리는 돌려야 하는데, 의학적으로 정말 좋지 않은 자세예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고, 바른 자세로 연주할 수 있는 기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실험을 거듭했어요.”
기타 외에 그가 정말 좋아하는 악기는 베이스리코더. 주위 사람들은 그가 베이스리코더와 퍽 닮았다고 한단다.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힘없고 우울한 음색의 베이스리코더가 저랑 닮았다고 하네요. 충격적이었어요. 2003년에 기타 솔로 앨범 <흡수>를 발표할 때는 그게 나름 제 색깔이라 생각했는데, 나라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비치는구나, 하고요. 정말 내 색깔이 뭘까, 많이 생각했죠.”
<흡수>에 실린 곡들은 세계의 기타리스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외국의 유명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이 그들의 연주회나 음반에 레퍼토리로 자주 올린다. 또 그가 만든 영화음악 OST들은 유럽, 미국, 아시아의 유명 레이블에서 발매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속에 한국음악의 저력을 심고 있는 그가 자신의 색깔을 ‘힘을 빼는 데’서 찾고 있다. 힘을 뺀 그의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힘없는’(그는 이 말을 참 많이 쓴다) 그가 힘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진 : 진구
사진자료협조 : 통영국제음악제
▣ 통영국제음악제 (www.timf.org) 아시아 최고의 클래식 음악축제. 제9회 통영국제음악제는 오는 3월 19일부터 25일까지 통영시에서 열린다.
⊙ 개막연주회 - 音樂 + 오페라 : 오르페오 & 에우리디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앙상블인 TIMF 앙상블과 국립오페라단이 공동 작업한 바로크 오페라. 오르페우스 신화를 기반으로 만든 글룩의 작품으로, 1762년 10월 5일 빈에서 초연돼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3월 19일 오후 7시 30분, 20일 오후 2시,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 ‘가슴과 머리를 함께 공명시키는 창법’ ‘여성의 고음과 남성적인 깊이를 아우르는 음악성’으로 평가받으면서 세계 3대 카운터테너로 꼽히는 안드레아스 숄의 무대. 헨델과 퍼셀, 하이든 등의 작품을 노래한다. 3월 20일 오후 8시,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 피아니스트 임동혁 & 알렉산드르 타로 한국과 프랑스의 촉망받는 두 젊은 피아니스트가 통영에서 만난다.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독창적 해석으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이 쇼팽 탄생 200주년을 맞아 쇼팽을 연주한다. 3월 21일 오후 2시,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 音樂 + 문학 : 카프카 - 프라그멘트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짧은 글 40편에 헝가리의 대표적인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이 곡을 붙여 실존주의 문학의 함축미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음악과 문학, 그리고 낭독이 어우러져 하나의 복합적인 예술을 선보인다. 소프라노 토니 아놀드와 바이올리니스트 모브세스 포고시안이 출연한다. 3월 22일 오후 7시 30분,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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