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날.. 추적추적.. 지하철 노원역을 빠져 나왔다.
문제는 비가 왔다는게.. 아주 괴로울 노릇이다.
우산까지는 그렇다 치고, 우산을 썼음에도 바지에 빗방울이 떨어져 점점 내 허벅지와 착 달라 붙은 상태가 됬다. 조금씩 걷다가 우산 한손에 쥐고 손가락으로 바지를 허벅지에서 떼어가면서 빨리 걸었다.
그리고 전철을 내려 한참 찾던 소개팅 장소를 찾았다.
노원 전철역 앞에 있는 "엑스"라는 커피숍..
엑스... X .... 그 간판을 멀리서 바라보며 입구로 들어가는데.. 엑스라는게 걸리적 거리기만 할 뿐..
엑쓰 커피숍에 들어갔다.
소개팅 주선자인 친구 문희와 문희 앞에는 피부에서 눈이 부신 광채가 나는 왠 멋진 소년이 앉아있었다.. 쌍커풀이 없는 큰 눈.. 말랐지만 근육이 있어보이는 몸매, 그리고 얼굴의 중심부에 곧게 세워진 콧날... 하지만 가장 멋진 것은.. 그의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빨이었다.
"빙고~~!"
"딩동~~ "
"딸랑 딸랑~~"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만날 때 꼭 저런 소리가 난다.
그때마다 "머야~~ 열라 유치해~~" 그러던 나였는데...
그 멋진 소년을 봤을 때 정말 나는 "딸랑~ 딸랑" 하는 운명의 종소리를 들었다.
늦게 왔다는 것도 잊고 내 주책맞은 입이 귀에 걸려버렸다. ㅋㅋㅋㅋ
혼자 막 웃고 있는데 소년이 말했다.
"이빨이 참 재밌게 생겼네요."
그 덕분에 그 소년은 내 톱니 이빨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년...
그의 이름은 "겸이"다..
난 참고로 만화책광이라~~ 예전에 와우 껌! 선전할 때 만화에서 왠 소녀가 풍선을 불면서
"현겸아~~~ " 하고 부르는 선전을 되게 좋아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름도 .. 겸..이었다.
너무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겸이는 이름 외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40분이 지났다.
40분이 그렇게 길어보긴 처음이다.
소개팅 주선자는 민망해하며 분위기를 어떻게든 띄워보려고 애썼지만,
겸이 때문에 민망해야 하는 나는 주선자 때문에 미안해 하기 까지 해야했다.
겸이는 아무 표정없이 비오는 창문 밖을 쳐다 봤다.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 맑은 눈동자를 가진 겸이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처럼 소개팅자리가 끝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왠지 겸이의 그런 분위기 있는 모습이 싫지 않고, 멋있어만 보였다.
겸이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커피를 마셔서인지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지만, "흐흠.."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1. 거울을 봤다.
2.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마스카라가 비 때문에 번져있고,
이눔의 비 때문에 머리가 또 이상은의 담다디 머리가 되어 있었다.)
3. 머리에 물을 묻혔다. 침도 바르고.. 화장도 고쳤다.
4. 그러다 갑자기 화가 났다.
5. 말 한마디 안 거는 그에만 쳐다보고 있던 내 자신이 불쌍해졌다.
6. 작전을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배반의 장미 머리를 다시한번 매만지며 앞을 향해 걸었다.
또각.. 또각... 또각..
'자신 있게 행동하자~~ 자신있게.. '
하며 주문을 외웠다. 저 멀리서 겸이가 나를 쳐다본다.
표정은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난 또각또각 잘 걸었다.
겸이를 앞에 두고 왼 발이 꺾였다.
맨날 운동화 쪼가리만 신고 다니던 나이니.. 당연히 언니의 굽높은 샌들이 휘청했다.
머리 망가질까봐 휘청할 때 옆에 테이블을 집고 일어났다.
쪽팔렸다. 혹시나 겸이가
'저렇게 큰 머리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지 머리 보라고 저러는 건 아닐테고.. 뭐야. 도대체. 왜 저런 머리 하는거야.
머리가 하두 대용량이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구만~''
하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겁이 많이 났다.. 하지만 난 아싸리 아줌마 스타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태연한 척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느끼하게 웃으며..
"뭘 쳐다 보아?~~ 예뻐서 쳐다 보아아"?
겸이는 피식 하며 웃었다.
입을 가리면서 조용히 웃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내 속은 타들어갔다.
'저 미소.. 저 미소.. 심장까지 녹여버릴듯한.. 하유... 하유...'
그러다 자꾸만 한숨이 났다.
왠지 겸이의 오늘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같아서.. 마음이 아파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한번 보고 말꺼라면 잘생긴 사람 실컷 쳐다나 보자~~~!"
라는 생각에 그 후부터 난 겸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겸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그제서야 겸이가 말했다.
"왜 봐요?"
1. 얼굴 철판 깐 나 왈 "니가 나 먼저 쳐다봐아았지~~"
2. 겸이 왈 " 언제요? 그 쪽이 먼저 봤잖아요"
3. 나 왈 "내가? 나(리듬타며)아아는~~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4. 겸이는 웃는 표정인지, 미안한 표정인지 모를 표정이다.
그러다 겸이 왈 "이제 나가요."
커피숍을 나온 겸이와 나.
주선자는 어느 드라마에서나 자주 나오는 대사를 때렸다.
"어머머~ 약속잊는 걸 깜박했네~~"
이로 인해 주선자는 먼저 가버리고...,
나는 "아싸~~" 는 마음과.. 겸이가 그냥 집에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겹쳐왔다.
알고 보니 겸이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겸이는 주선자 문희의 동아리 후배로, 착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런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달라는 말에... 나왔다고 한다.
나두 착하긴 한 것 같지만, 겸이도 착했다.
차값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주머니 속의 만원을 오늘 꼭 쓰고 집에 가야겠다고.....
술집을 가자니..
만원으로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택해야 했다. 그렇다고 또 커피숍을 갈 수도 없고..
정말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난 칭구들과 자주가는 스타일로 정하기로 했다. ..
1. 형 어디가를 들어갔다.
2. 순대볶음 2,900원, 소주 한병(3,000) 을 시켰다. 돈이 남아 뿌듯했다.
3. 순대볶음이 나왔다. 난 젓가락으로 순대볶음을 헤집었다. 난 순대를 무지 좋아한다.
비싼 아바이 순대나, 병천 순대 이런건 참고로 싫어하고, 싸구려 비닐같은 거에 오직 순대잡채만 들어있는 것을 주황색깔 나는 소금에 찍어 먹는걸...
4. 순대볶음에 순대가 4개 들어있다, 나머진 양배추였다.
5. 겸이가 안주를 안 먹는다..
6. 겸이는 순대를 못 먹는 단다.
그래서 난 만원에서 남은 4,100원으로 안주 하나를 더 시켰다.
순대볶음과 같은 가격의 치킨 탕수육....
치킨 탕수육이 나왔다. 치킨 탕수육 8개 있었다....
술을 못먹는 나는... 남은 1,200원으로 콜라 한병을 시켰다.
200원 남았다.
돈이 200원 밖에 안 남았다는 것도 심란했지만, 겸이가 배고플까봐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부티가 자르르 흐르는 겸이는 주문한 것들에 대해 아무 말 없이 먹었다.
나도 그랬고...
그냥 고마웠다. 그리곤..
술집을 나오려는 데 말없는 겸이가 그 9,800원 나온 것을 냈다.
꼭 내가 내고 싶었는데....
술까지 모두 마신 시간이 7시 반이었다.
정말 소개팅 나온지 3시간도 채 안되서 헤어지긴 싫었다.
더군다나.. 이게 겸이와의 끝일까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난 나의 운명의 종소리를 들었기에...
그 소리를 믿고 싶었다....
겸이는 나에게 말했다. ".. 노래방 갈래요?"
1. 우린 노래방을 갔다.
2. 노래방 입구의 아저씨 왈 "몇명이예요?"
3. 나, 겸이 왈 (밝게 웃으며) "두명이요~~ "
4. 아저씨 왈 "만 삼천원, 4번 방요~~"
5. (겸이 바라보며) 나 왈 "겸아~ 먼저 들어가 있어. 내가 계산하고, 음료수 사가지고 갈게~~"
6. 난 돈을 내려고 주춤거리는 겸이를 억지로 4번방으로 밀어넣었다.
7. 노래방 주인에게 다가갔다. 나 왈 (불만섞인 표정으로) "아저씨! 만원으로 깍아주심 안돼여?"
8. 아저씨 왈 "오늘 토욜이자나? 토욜은 안됏!~"
9. 나 왈 "아유! 무슨 비오는데.. 누가 노래방 와욧~! 아까 간데는 장사 안된다고 7000원에 오라던뎅"
10. 아저씨 왈 "그래도 안돼지~" 하는데
11. 난 얼굴을 갖다 대며
"아잉~~ 아저씨~~" "아아아아잉~~ 아저씨이이~ 깎아주세요~~
12. 아저씨는 내 큰 머리가 부담스러웠는지 흠칫 하며 뒷걸음질 쳤다.
13. 이 때를 기다린 나.... 무작정 아저씨 잠바 주머니에 만원을 찔러 주고 화장실로 튀었다.
내가 "아잉" 을 하면 아저씨가 돈을 깎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1. 아빠가 돈 안주시려고 할 때마다 문을 부여 잡고..
"아잉~~아~~ 빠"
하면 딴 집 아빠들은 딸이 사랑스러워서 주는데,
난 태어나면서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2. 그러던 어느날 마음먹고 더 오바해서
"아아앙~~ 아빠~~ 나 귀엽~ 찌 않아~~" 하고 말했다.
3. 1초뒤 아버지는 씩껍 하는 표정으로.. (참고로 우리 아빠 이봉걸씨 닮았다. 키랑 말투가..)
"구역질 나!" 하며 돈 던지고, 화내면서 나가신 적이 있다.
4. 딸이 애교부리는데 아빠가 화내면서 나가서.. 우울함에 양파링 먹다가 울었었다.
여하튼 화장실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음료수도 사 가지고 간 댔는데... 큰일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니.. 아저씨가.. 1번방?인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난 최대한 등을 수평으로 숙인 채 카운터 쪽으로 엉거주춤 걸었다.
카운터에 숨어 냉장고 문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난 코코팜.. 2개를 들고 열라 달렸다...
4번방으로.......
신은 공평했다...
겸이에겐 잘생긴 얼굴과 맑은 목소리를...
나에겐.. 외형적으론 잘난게 하나도 없었지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으니...
난 이때가 기회다 싶어
멋진 노래를 부르는 겸이를 보며 난 최대한 재밌는 표정과 제스쳐로 겸이를 신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HOT 의 "캔디"를 부르며 윙크를 하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를 한참 바라보던 겸이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만해요.. 바보같아 보여요..."
그 후 난 말하기가 싫어졌다.
의기소침해있는 나를 보고는 겸이는 미안했는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겸이가 혜화동에서 내릴까 봐 겁났다.
텅 비어있는 지하철을 탄 겸이와 나..
노약자석에 앉았는데 옆에는 누군가가 놓고간 우산이 있었다. 내 우산이 놓인 똑같은 자리에.....
누가 보면, 우리 아빠의 우산이 버려진 우산이고, 버려진 우산이 주인 있는 우산인줄 알 것 처럼...
내가 가져온 아빠의 우산은 그렇게 안쓰러워보였다...
이런 내 맘을 모르는 겸이는 말했다.
"저기 있는 우산 바꿔서 가지고 갈래요?"
허걱...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다.
속으론 정말 누군가가 놓고간 우산을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난 우리 아빠의 우산을 사랑한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때부터 집에 있던 특별한 우산이었기에.....
우산을 두 개 모두 다 가지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겸이와 난 우리 동네로 오기 위해
동대문 운동장에서 갈아타기 위해 걸었다.
북적이는 길에서 혼자 다닐 때 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치인다.
예쁜 여자들이 지나다니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여자를 피해간다던가,
멀치감치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처럼 치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투명인간 수준이다...
무시하는 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양아치 여자애, 아저씨, 중학생, 고등학생, 직장인을 막론하고,
내 어깨를 툭툭 치인다거나, (그 중 길에서 철가방 모서리에 허벅지 찍혔을때가 제일 아팠다.)
근데 이날 따라 유독 배반의 장미 머리나, 내 바지쪽을 쳐다 보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겸이와 갈아타는 곳으로 걷는 그 길엔..
사람들의 시선이나 치임 같은 따윈 신경쓰이지 않았다.
겸이에겐 막 빨래가 끝난 피죤 냄새가 났다.
옆모습이 멋진 겸이의 하얗고 긴 손을 난 만지고 싶었다.
큰 키로 내 얘기를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매너를 지닌 겸이를 보며...
정말 내 분수에는 맞지 않지만..
콤플렉스 때문에 이런 아이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손을 잡고 싶었다.
나 역시 꽤나 보수적인 편이지만,(것두 그렇지만, 남자랑 악수 빼고는 손잡고 다정하게 걸어본 적이 없다. )
겸이라면 여자가 먼저면 어때서.. 라는 생각에
작전을 짰다.
1. 겸이가 내 왼쪽에 있었다.
2. 우산도 내 왼쪽에 있었다.
3. 일단 우산을 오른쪽에 옮겼다.
4. 왼손을 흔들며 겸이의 오른손과 자꾸 스치게 걸었다.
5. 그러다 누구나 잘 써먹는 방법..."저 쪽이야"
하며 나 먼저 발걸음을 빨리 걷다가 돌아보며 겸이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자" 하면서....
자연스레~ 잡았다.
겸이의 손.. 그의 체온은 참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