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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06년 10월 14일
* 코스 : 연신내-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승가봉-문수봉-대남문-대성문-형제봉-정릉국민대입구
* 산행시간 : 오전 9시 45분 ~ 오후 5시 45분(휴식시간 포함 8시간)
* 참가 산우 : 允峰, 柳溪, 寸哲, 仁松, 裕峴, 進山, 明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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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사태에 버금가는 근심꺼리를 안겨 주는 개인적인 일로 연이틀 밤을 뒤척이느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매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데 그 마음 바로먹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서두르느라고는 했으나 모이는 장소에 시간 맞춰 도착하기에는 이미 10여분 늦은 시각이다. 원래 토산회 초기에는 모이는 시간이 10시였는데, 산행에 한껏 맛이 든 당시 총무가 산행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으로 30분을 앞당긴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주중에 늘 아침시간을 쫓기며 생활하고 있으니 일주일에 한번, 산행을 하는 날만이라도 느긋하게 집을 나섰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와 같은 조치에 은근히 반대를 해보기도 했으나 당시 총무의 막강한 위세에 눌려 별 저항도 못한채 기각당하고만 기억이 있다. 어쨌든 종종 늦는 입장이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저께인가 카페 메모장을 일별하면서(사실 요즈음 찬찬히 읽어 볼 여유가 없다) 받은 느낌으로는 오늘 산행에 참가할 산우가 允峰, 柳溪 정도 아닐까하는 생각에 다른 때와는 달리 允峰에게 감히 기다려 달라는 문자를 보내 본다. 도착해보니 의외로 토산회 정기토요산행에 참가하는 산우가 많다. 거기다가 원로급 산우 서너명이 끼어 있어 토요산행이 총산 백두대간 산행에 의해 侵蝕(?)당한 것을 고려하면 의외의 성황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주관적이고도, 비딱한 시각에서 웃으며 해보는 생각인데, 산우간 논란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지만, 토산회 역사의 큰 줄기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속으로 웃는다. 이 문제에 관하여 논란을 하고 싶어지는 산우가 있다면 일찍이 관련 논란을 대장 允峰이 일응 정리한 바 있는 ‘정기산행’의 정의를 古史에서 찾아보기를 권한다.
족두리봉을 오르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햇살도 밝지만 낮에는 제법 무더위를 느끼게 되는 날씨이다. 산행들머리로 이동하는 동안 족두리봉 쪽으로 향하는, 재경모임의 일환으로 산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함양군민회 등 여러 단체 등산객들을 만난다. 그 무리들을 피해 갈 수 없을까 생각하며 걷는데 주등산로 우측으로 난 좁은 샛길이 보여 앞장선다. 조금 오르자마자 암릉(릿지) 구간이 나타난다. 그리 길지 않고 또 그리 험하지도 않은 암릉길이지만 의도되지 않은 채 오늘 산행의 성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凡川의 댓글로 어느 정도 예견이 되었던 것이라기도 하지만 그 길을 앞장선 사람으로서 산행 초기에는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알리바이를 대라고 한다면 당초 계절이 단풍철인만큼 오늘 산행은 단풍이 좋은 삼각산 호랑이굴 밑 대동샘 근처나 도봉산 마당바위 근처 산행이 어떨까 생각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암릉길로 들어선 김에, 떡본 김에 제사 지내듯 부단한 릿지산행연습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이미 릿지화를 신고 오기도 했다는 明滿을 進山과 함께 암릉길로 재촉한다. 5~6미터 바위길 몇 개를 통과하여 明滿과 進山이 처음 올랐다는 족두리봉을 올랐는데, 明滿보다 進山이 암릉길을 더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 관찰자의 소감이다. 족두리봉 정상에서 주위 경관을 눈맛 시원하게 즐기고 과일을 나누어 먹은 후, 요즈음 부쩍 암릉산행에 재미를 붙인 柳溪와 함께 족두리봉 북면 암릉길로 하강한다. 하지만 차마 이곳까지 明滿과 進山을 인도할 수는 없어 다른 일행과 함께 우회하도록 한다. 원래는 하강 암릉길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로프에 의지하여 하강하던 초보자가 로프에 흔들리면서 로프에 의지하지 않은 채 하강하는 사람을 차버리는 바람에 중상을 입힌 사고가 난 후 철거되었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보니 대신 경사가 급한 부분에 인공 시멘트 홀드 너댓개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위험을, 짜릿한 모험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도 있구나 하면서 하강하는데, 그곳에서 조심조심 하느라 정체를 빚고 있어 다소 위험부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 안전한 면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옆 크랙부분으로 하강하여, 우회한 산우들과 합류, 향로봉으로 향한다.
향로봉을 오르다.
향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등산객들로 북새통이다. 비봉, 문수봉, 대남문으로 이어지는 내내 그럴 것이다. 옛날 홀로 산행을 많이 하던 시절에는 주로 인적이 드문 곳을 다녔지만, 함께 산행하면서부터는 주로 본전통으로 다니게 되어 마땅치 않으나 교통의 편리성과 산행의 안전성, 뒤풀이장소의 용이성 등을 우선 고려할 수 밖에 없는 때문으로 받아들인다. 향로봉 암릉길 초입에서 암릉길을 오르려는 柳溪 앞에 국립공원 관리인이 길을 막고 서서 장비를 구비하여야 통과를 시켜준다 한다. 하회를 지켜보기 위해 산우들이 모여 쉬고 있는데, 관리인과 함께 그곳에서 쉬고 있던, 별 장비를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나이가 연만한, 한눈에 보기에도 산사람처럼 보이는 털부숭이 중년 사내와 젊은이를 통과해주는 것이 보인다. 우리도 모르는 채 오르자고 신호를 보내는 柳溪와 함께 몇 자욱 발을 떼는데 관리인이 뭐하는 것이냐며 가벼운 역정을 낸다. 일순 '북핵의 위험은 사소한 것이라고 하던 국가가 언제부터 그렇게 국민 개개인의 목숨까지 일일이 챙기는 거냐’라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사고가 많은 위험구간이라면 충분한 경고를 보내고 그래도 스스로 모험을 즐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면 그 책임 하에 놓아두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는 수 없이 전원이 우회를 하는데, 향로봉 주 암릉길 옆을 살짝 돌아서니 향로봉 동측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바위 계곡이 나타나고 위를 쳐다보니 오르는 사람이 보인다. 옳다구나 하고 이를 본 柳溪가 꿩 대신 닭이라며 오르자고 한다. 즉각 동의, 바위 계곡을 오르는데 중간까지는 그런 대로 전에 올랐던 주 암릉길과 고만고만했으나, 양손을 힘껏 뻗어 닿은 바위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잡고 그 힘으로 당겨 온몸을 허공으로 차고 올라야 하는 구간을 위험스럽게 통과하여 정상을 오른 후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매’였다며 가벼운 불평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유두봉 함몰되다.”
향로봉 암릉길을 조금 우회해 향로봉 능선 위로 합류한 산우들과 향로봉 근처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멀리 지나온 족두리봉을 바라보는데, 족두리봉이 사실은 유두봉이라 불리었으나 점잖지 못하다 하여 이를 순화한 이름이라며 감상해볼 것을 권하자, 明滿이 ‘유두가 함몰되었다’며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꺼내놔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함몰 이유는? 오늘 우리가 지~긋이 밟아준 때문? 아니면... 다시 몇 몇 향로봉 능선의 암릉을 통과한 후 길 한편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생맥주, 보드카 한잔씩 하면서 김밥과 호박콩꿀떡, 호두케익, 과일, 즉석 떡국 등으로 점심을 즐긴다.
某某는 이기적?
산행 휴식도중 進山이 모모가 이기적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었다며 묻는다. 그렇다. 모모가 이기적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이기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산에 자기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나오기 싫을 때는 나오지 않고, 산에 나올 때도 처음부터 나오지 않고 중간에 나오고, 뒤풀이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번개모임에도 나오지 않는다’ 등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토산회 초기에, 동창 중 건강을 위해 토요일 오후에 산에 가는 사람이 있다는데 산에 가려는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는 것이 어떠냐 하여 모임 산행이 시작된 것이 토산회이다. 총무가 모임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면 모임장소에서 특별히 늦겠다고 연락해오는 산우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10여분 기다렸다가 출발하여, 서너시간 산행하고 내려와 1만원씩 추렴한 돈으로 두부김치, 파전, 살아가는 이야기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굳이 잡지 않는다." 훗날 산행 모습이 바뀌고 뒤풀이도 럭셔리해지고 산우간 정도 도타와지는 등 여러가지 발전이 있었지만 이게 토산회 산행의 기본 정신이지, ‘계’ 모임(계모임이 좋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러 산에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토산회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토산회 원류 정신이 어땠는지 각자 가지고 있는 소회가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기에 총무보조가 산행 참여가 저조한 산우를 질타한 사건이 있었는데, 농담하는 것으로 웃어 넘긴 일이 있다. 지금 전임 총무의 산행 참여는 초기 참여가 저조했던 산우의 산행 실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임 총무의 산행 저조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온당한가. 산행 참여는 각자의 사정, 산행능력, 의사에 따라 알아서 하는 것이고, 산행을 언제 참여하는지, 뒤풀이에 참여하는지, 번개모임에 참여할 것인지도 산우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등반사에 기록된 어느 젊은 산악인이 "산은 자유다"라고 했다는데, 산행에 함께 하지 못한 산우로 하여금 부담감을 갖게 하거나 참여하지 못한 사정을 일일이 해명해도록 산우들에게 권리ㆍ의무로써 속박할 일이 아니고, 조직체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할 것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뒤풀이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음주에 관하여는 절제하여야할 개인적 사정이 있고, 직업병으로서 목과 어깨 통증을 달고 사는데, 온몸을 쭉 펴고 걷는 산행시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몇시간씩 앉아 하는 뒤풀이 시간에 오는 어깨 등의 고통이 산행의 힘겨움에 못지 않고 그 후유증 또한 있어 장시간의 뒤풀이가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수봉을 오르다.
산행 중 암릉길은 모두 거쳐가려던 柳溪가 공사를 이유로 등정을 막은 비봉을 지나며 아쉬움의 발길을 돌리던 중 사모바위 근처에서 만난 3~4미터 높이의 바위에서 明滿과 進山에게 릿지산행 연습을 반복하게 하더니 끝내 문수봉 암릉길을 전원이 오르게 한다. 향로봉과 비봉의 암릉길 통과를 막았던 탓인가 문수봉 암릉길이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柳溪와 仁松이 7부능선쯤 올라, 토산회 초기 원시시절 그곳 암릉길을 내려가며 공포에 떠는 이용호를 끌고가기 위해 이름을 불러가며 용을 쓰던 산우들의 외침을 들은 한 베테랑 아줌마가 “그래 용호가 문제야, 용호가”라며 달려들어 이용호의 손을 잡아내려주었다는 전설이 깃든 이른바 ‘용호바위’를 더듬어 간다. 裕峴이 이를 따르던 중 자신이 없다며 우회를 한다. 내친 김에 문수봉 정상도 오르기로 하는데, 明滿이 중간 5~6미터 높이의 직벽을 오르며 進山에게 “당신은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우회하는 것이 좋겠다”며 호기롭게 한마디 하자, 분기탱천한 進山, 仁松이 비교적 편안한 옆 암릉길을 가리키는 것도 마다하고 기어코 용을 쓰며 직벽을 오른다. 그곳 문수봉이 처음이라는 明滿과 進山에게 이왕이면 2~3미터 높이의 ‘연인봉’(움푹파져 2인이 딱 들어가 있기 적당함)도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연인봉에 올라도 두사람이 함께 할 일이 없다며 사양한다.
새로운 산행코스와 참살이 마무리
문수봉 정상에서 주위 경관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한 후 대남문으로 내려온다. 당초 允峰은 문수봉에서 의상능선을 타고 북한산성쪽으로 하산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인데, 允峰이 전날 음주가 있었던지 평소와 달리 산행 시초부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안도하고 있는데 允峰 역시 산우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남문, 대성문,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을 택한다. 형제봉으로 향하는 하산길이 유순하여 편안함을 즐기는 가운데 裕峴이, 형제봉을 거쳐 정릉터널 위를 지나 요즈음 새로 개설하였다는 북악산 산책길을 거쳐 인왕산까지 내닫는 새로운 三山 산행코스를 제의하고, 여러 산우들이 동감을 표시한다. 자신도 정릉터널 위를 지나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의 통행이 가능한 것으로 들었다는 柳溪가 당장 二山(삼각산, 북악산) 산행을 결행하여 혜화동 김영삼칼국수집까지 걸어 가자고 제의하나, 오늘 산행이 8시간에 이른 점을 감안, 柳溪를 진정시켜 후일의 과제로 남기기로 하고, 오늘은 형제봉능선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탐색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하는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미수에 그치고 만다. 길머리를 찾으며 영불사에 이르렀는데, 초기 산행시 근처의 영추사 뒤 오름길에서 암릉 때문에 이용호 등이 고생을 한 일과 이로 인한 산행코스에 대한 불만 제기 사건이 있었음을 柳溪가 상기한다. 그 사건으로 집행부에 그곳을 산행코스로 제의하였던 仁松이 ‘암릉으로 인도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즈음 그곳 단풍이 좋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추천한 것뿐이다’라는 취지의 해명 메일을 보낸 기억을 떠올린다. 그 산행 후 모씨가 메일을 보내 산행 소감을 말하면서 “단풍이 우거졌다”고 표현, 당시부터 만만치 않은 필력의 일단을 보여주던 南嶺이 모씨에게 서울고 문예반 출신이 맞는냐고 힐난 사건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모두들 한바탕 웃는다. 산행 끝에 산행의 피로를 빨리 푸는데 도움이 된다는 스트레칭으로 마무리운동을 하자는 산우의 제의가 있어 삥둘러 서서 함께 10여분의 스트레칭을 하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한다. 국민대 앞 골목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이는 분식ㆍ한식을 지나 그 옆 호프집에서 뒤풀이를 하는데, 進山이 젊은이들의 출입이 없음을 여러차례 아쉬워하는 가운데, 각 一甁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로 하여 생맥주 3,000CC 2병과 소주 4병으로 두시간만에 마친다. 각 일병의 원칙을 논하는 가운데 각 일병의 원칙을 깨는데 일조하는 원흉(?)으로 明谷과 宗山, 南嶺 등이, 지하철 안에서 눈길이 마주치면 위험한 인물로 裕峴이 거론되었다. 릿지산행이 많았던 탓에 산행시간이 다소 길어졌지만 여러가지로 모범적인 참살이산행이었다고 할만한 산행이었다.(2006년 10월 17일)
첫댓글 산행기 판결문에 소외 당사자인 南모가 몇 장면에 나오는데 仁松의 산행기 또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네요.산행하고 싶은데 못하는 기분은 그런 상황을 경험한 사람은 다 알것이외다.산행을 해야 각 일병이든 뭐든 하지...단풍 운운 건은 壽岩이 최초로 문제 제기한 것임.
그런데 북핵사태에 버금가는 근심꺼리가 무엇이오?그런 것을 안가르켜 주는 것이 이기적???
예상대로 찍을수 있는 꼭지점은 다 찍은 모범적인 山行이었군요. 여러가지 바위타기進法에 대한 소개가 그림과 함께 바로 아래 산행기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향로봉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2주전 염초봉에서 우리를 쫓아와서 안전장비를 보여 달라던 친구인데, 아는 척을 해도 안전장비가 없다고 김세게 하더군. 세상에 향로봉에 안전장비를 차고 가는 사람이 정상인가?
그래도 지하철에서 劉모와 눈이 마주처 행복해할 산우가 있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3년전 8월 말에 아들놈이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습니다. 입대하기 며칠 전에 등산을 전혀 가지 않는 이 녀석을 데리고 연신내-쪽두리봉-향로봉-문수봉-대남문으로 가는 코스를 갔습니다. 35도의 엄청 더운 날씨에다 안하던 등산을 하려니 이 녀석이 따라 오지를 못하고 헉헉 댔습니다. 향로봉 못 미쳐서 이 녀석 더러 앞장을 서라고 했더니 뒤에서 따라 오는 것보다는 훨씬 힘이 덜 든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가 보는 향로봉과 문수봉을 이녀석이 앞장서서 올라 갔습니다. 제가 말했죠."군대가서 구보할 때는 제일 앞에 서는 것이 힘도 훨씬 덜 들고 기합도 안받으니까 절대로 뒤에 줄서지 말고 앞으로 나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