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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탄절에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 본 문 : 누가복음 2장 1절 - 7절 (신약성경 89쪽)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사랑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성탄절은 무슨 날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일날입니다.
그런데 어느 조사기관에서 우리나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성탄절은 무슨 날이지요?”
이 대답에 놀랍게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생일입니다.” 라고 대답한 학생이 무려 64%나 되었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성탄절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로부터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핸드폰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C D 게임기, 성탄절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크리스마스 트리꾸미기와 영화보기였습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성탄절이면 호텔이나, 콘도 예약율이 가장 많은 날이랍니다.
그런가하면 성탄 이브는 모두 술 마시고 노는 날입니다. 한마디로 성탄절의 주인공 예수님은 아예 없습니다.
아들딸을 잘 길러 결혼을 시켜서 손자 손녀까지 둔,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여기저기서 다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딸, 손자손녀 온다고 아침부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이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났는데도 그 많은 아들 며느리, 딸 사위 가운데 상을 치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70이 넘으신 늙으신 어머니가 혼자서 부엌에서, 덜거덕덜거덕 거리며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축하를 위해 모였지만, 결국 어머니가 음식 만들고, 어머니가 설거지까지 다 했습니다.
누가 그날의 주인공입니까? 과연 누구 생일입니까? 누가 누구를 축하하기 위해서 거기 다 모였습니까?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성탄의 생일이 누구의 생일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인 성탄절에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없는 사람들만의 성탄절, 그저 빨간 날이니까 하루 쉬어 좋은 날이라면 무슨 성탄절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려고, 호적신고 명령을 내립니다.
호적신고는 본적지에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지금 나사렛에서 살고 있지만,
본래 본적지는 베들레헴이기에, 나사렛에서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여기저기에서 호적 신고를 하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마구간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에 만삭이 된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해산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누울 곳이 없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 누우신 곳이 짐승의 밥통인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겸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구유에 눕기까지 겸손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까지 겸손했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 천사가 세 친구를 찾아와, 소원 하나씩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소원은 “별처럼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습니다.”- 약속대로 스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의 소원은 “나는 킹, 왕이 되고 싶습니다.” - 약속대로 그를 킹, 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스타도 되고 킹도 되고 싶습니다.”
그의 소원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타-킹” 이 되어 여성들의 다리를 예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올라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만하지 마십시오. 섬기십시오. 겸손해야 합니다.
금세기 최고의 영성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는 필립 얀시 목사님께서는,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신 것도, 마구간에 오신 것도, 구유에 누우신 것도 겸손 중에 겸손이요.
낮아짐 중에서도 한없이 낮아지신 겸손이요, 작아짐 중에서도 한없이 작아지신 겸손입니다. 믿습니까?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S. Louise 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합니다. /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가를 깨닫기만 해도,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농구 코치로 유명했던 존 우든은 선수들에게 이런 훌륭한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 어떤 재능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손해라. 명예는 인간들이 주는 것이니 감사해라.
자만은 내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 그러므로 우리는 금년 성탄절에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여! 나로 하여금 낮아 질대로 낮아지게 하옵소서. 잃어버렸던 겸손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우리가 성탄절에 오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희생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그 자체가 곧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희생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삽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대속물이 소 양 염소 비둘기였습니다.
짐승의 죽음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인 피의 제사이기에 일 년에 한 번씩 꼭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보혈이기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단번에 죄 사함을 해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말씀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12, 26, 28)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희생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는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자기밖에 모르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개그맨이 외쳤습니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내가 우선이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만 사랑해 달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주님은 똑똑한 사람을 원하지 않고, 희생하는 사람은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축복과 희생은 비례합니다.
옛날 페르시아에 사이러스 왕이 전쟁 중에, 적국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생포해 왔습니다.
사이러스 왕은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죽이기 전에,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왕자인 당신을 살려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너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에는 내 재산의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네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 아내를 놓아준다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이러스 왕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왕은 적국의 왕자이지만, 왕자의 말에 너무 감동되어, 그들을 다 풀어주었습니다. 살려 주었습니다.
그 날 밤, 늦게 자기나라 왕궁으로 돌아온 왕자는 살아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 축하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이러스는 적국의 왕이지만 참 훌륭한 분이더군요.
내가 보니 정말 잘 생긴 미남이더군.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답더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물음에 왕자의 아내의 대답이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아,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 합니다. 오직 나는 나를 위해 대신 죽겠다고 늠름하게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희생은 이처럼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기에 죽기 위해 마구간에 오셨고, 겸손하게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천국 복음 사역에 온갖 핍박과 훼방도 받으셨습니다. 희생의 십자가의 모진 고난도 다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탄절에 오신 겸손하신 예수님, 희생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 지금 내 삶에 계신 예수님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아멘! -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곳에 늘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성탄절 전야예배와 축하잔치를 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축하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우리 예수님의 겸손함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희생을 바라보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