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터 노구찌>94-97년, 무쓰 도시유키 작.
9년 전 전주의 고등학교에 있을 때 한 학생이 내게 이 만화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교무실에서 아이가 놓고 간 책을 잠깐 들춰보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만화라니 시간이 나면 나중에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은하의 <만화토피아>에 소개가 돼 있어 합본된 전9권을 3일 동안 읽었다.
1928년에 태어나 28년 죽은 일본의 세균학자 노구찌 히데요의 일생을 그린 만화다. 어릴 적 화상으로 오른쪽 손을 못 쓰는 노구찌는 가난과 냉대를 뚫고 대학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를 누비며 활약한다. 급기야 록펠러재단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지만, 황열병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갔다가 병이 옮아 죽게 된다. <대장금>처럼 장애를 극복해가는 노구찌의 모습은 에디슨이나 링컨을 떠올리게 하는 자수성가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꿈과 용기를 북돋는다는 점에서는 만화의 가치를 인정한다. 신념이 인생을 만든다는 교훈만으로도 이 만화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우선 만화잡지 연재라는 한계가 눈에 거슬린다. 각 편마다 반복되는 패턴의 사건과 해결은 너무 상투적이고 작위적이다.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이 높아지자 시청자를 계속 붙들어두려고 편수를 늘리면서 중반 이후 상투적인 구성의 반복과 늘어짐으로 기운을 뺐는데, 똑같다. 일본만화의 생태적 한계가 된다. 편수 늘리기는 분량 제한은 상업성이 작품성을 손상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아무튼 노구찌는 항상 시기하는 사람을 만나고, 노력하고, 결국 이해받는다. 그것이 너무나 반복되니 노구찌의 현실성이 오히려 반감된다. 입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전형성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이상화된다. 세계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신화 만들기 인상이 강하다. 서양인과 서양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강하게 드러나고, 기타 인종과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식 그대로 깔려 있다. 한편 지나친 경쟁주의와 성공에 대한 집착은 정작 중요한 조화와 뿌리내림의 삶의 감각을 반감시킨다. 그래서 인물 외엔 인식의 새로움을 주지는 못하는 만화다. 더구나 이런 위험한 구태적 상식은 독자의 편견을 조장하게 된다. 헐리우드 영화가 단지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더라도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치적 문화적 선전을 받는 셈인 것과 같다. 대중물은 단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라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다. 이것이 대중물이 대중물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만화도 좋은 만화를 선정해서 몇 편만 보고 싶다. 분명 그런 좋은 만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도 만화도 책도 너무 많은 시대에 태어났다. 인터넷도 너무나 넘치고 시간을 잡아먹는다.
어설픈 구석이 많은 것들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다보면, 문득 다 밀치고 주역과 성경, 불경 같은 책에 깊이 천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