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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생몰년 : 1833(순조 33)~1906 자 : 찬겸(贊謙) 호 : 면암(勉菴) 본 관 : 경주 조선 말기의 대표적 의병장. |
2.무학대사
무학(無學)은 고려 말엽에 태어나 나옹(懶翁)의 법맥을 이어 조선 불교의 터전을 닦은 고승(高僧). 스님의 법명은 자초(自超), 법호는 무학이며 속성은 박(朴)씨로서 삼기군(三岐郡) 즉 경남 합천군 사람이다. 고려 충숙왕 14년(1327) 9월 20일 태어났으며 거처하는 방의 이름은 계월헌(溪月軒). 서산(西山)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釋王寺記)》에는 무학과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밀접한 관계와 함께 조선 건국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3. 권율
시 대 : 조선
생몰년 : 1537(중종 32)~1599(선조 32)
자 : 언신(彦愼)
호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 호 : 충장(忠莊)
본 관 : 안동
관련전투 : 행주산성(幸州山城)전투
관련성곽 : 행주산성(幸州山城)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명장.
권보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를 지낸 권적,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며, 어머니는 적순부위 조승현의 딸이다. 명신 이항복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활약하였고, 행주대첩 후 도원수로 승진되었다. 1596년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에 제수된 권율는 그해 가을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으로 전라감사에 승진한 후 12월에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길에 올라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의 연락이 단절될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의 보급 추진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권율 군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우키다는 2만여 병력을 차출하여 수원에서 오산·과천·용인 등지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독성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하여 행주산성을 택하게 되었다.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을 완성하게 하고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이때 휴정의 제자 처영이 의승병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미만이었다.
한편, 왜군은 권율이 행주산성에 포진한 것을 알고 총대장 우키다가 3만의 병력을 7대로 나누어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왔다. 한때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으나, 권율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하고 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던 중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휴전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사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사액된 행주 기공사에 향사되었다.
4. 노량해전
시 기 :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전투지역 : 경상도 남해군 노량 앞바다
전쟁상대국 : 일본
1598년(선조 31) 11월 19일에 조선군과 명군 연합함대가 후퇴하는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수군함대를 격멸한 전투.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죽은 후 철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부산방면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선 전라도 왜교성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한 조·명 수군의 연합함대는 5백여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광양만 일대를 차단하였다. 고니시군은 명 진린 제독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어 철수로 보장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먼저 이동하여 사천 남쪽의 창선도에 대기중인 소오군과 시마즈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창선도의 일본군은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5백여 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11월 18일 밤에 광양만으로 출동하였다.
일본군이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음을 탐지한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 구원부대를 먼저 격멸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우고 노량 부근에 포진하여 일본군 구원부대의 이동경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11월 18일 밤 척후선이 수집한 정보를 통하여 일본군 대선단이 노량해협을 통과하여 대도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다음날인 11월 19일 새벽에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연합함대의 주력은 일본군 선단을 좌우에서 포위하였으며 명군 부총병 등자룡이 지휘하는 선단이 선봉이 되어 일본군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전투가 개시되자 일본군은 교전을 가급적 회피하고 전력을 보전한 채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 편대가 앞장서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연합함대의 기세를 꺾기 위해 명수군 제독 진린이 승선한 대장선을 표적 삼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함대가 신속히 기동하여 이를 구원하고 연달아 수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은 파괴력과 살상능력이 우수한 원거리 화포를 사용하여 일본군 함대에 많은 타격을 입혔으며, 일본군 역시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용한 전력을 총동원하여 전투에 임하였다. 하루 종일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은 결국 진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선수를 돌려 퇴각하였으며 일부는 배를 버리고 남해도 서북해안과 관음포 부근에 상륙하여 육로를 따라 남해 방향으로 탈출하였다.
이리하여 고니시군은 조명연합군이 전투 후 전장정리를 하는 동안 해안 봉쇄가 소홀해지자 11월 20일 새벽에 왜교성을 탈출하여 남해도 남단을 거쳐 거제도에서 시마즈, 소오군과 합류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전기간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전투인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5백여척의 총 함선 중 2백 척을 잃었으며 조·명연합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조선군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투 중에 전사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5.헌경왕후
헌경왕후 홍씨는 혜경궁 홍씨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인현왕후전』과 쌍벽을 이루는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는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빈으로 뿐 아니라, 정조의 어머니이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1년(1735) 서울에서 홍봉한의 4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홍봉한은 딸 홍씨가 세자빈이 되면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에 오르며 노론의 거두가 되었다. 홍씨는 어려서부터 유순하고 덕성이 있었으며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아들 정조에게 의복을 검소하게 입고 음식을 절약하도록 교육시켰다. 홍씨는 10세에 동갑인 사도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의소세손을 출산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고, 영조28년(1752) 9월에 정조를 낳았고 1754년과 1756년에 두 딸을 낳았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이 되었을 무렵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조는 영조 25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대리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세자는 점차 노론에 반대되는 정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반해 영조는 노론을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영조와 사도세자는 점점 갈등을 겪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점차 반 노론의 정치관을 분명히 하자 위기를 느낀 노론인 병조판서 홍계희는 영의정 김상로,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함께 세자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38년(1762) 나경언이 세자가 저지른 여러 가지 비행들과 영조 몰래 석 달 가량 평안도를 여행한 사실 등을 일러바치며 세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자는 그해 윤 5월 13일 폐위되어 뒤주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게 되었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폐서인이 되어 궁중을 떠나야 했으므로 막상 세자가 사망할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갈 당시 영의정에 있던 장인 홍봉한은 세자를 구명하려는 어떠한 적극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동생 홍인한이나 심지어 세자빈 홍씨도 그러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빈궁에게는 ‘혜빈’ 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영조에 의해 다시 궁으로 돌아온 홍씨는 아들 세손(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세손을 자신의 곁에서 떼어 영조의 곁으로 보내는 등 영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론계 중진들 특히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홍인한 등 풍산 홍씨 일가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의 즉위를 극력 저지하게 된다. 특히 홍인한은 더욱 적극적으로 세손을 폐위시키고자 하였는데, 세손의 즉위는 곧 노론의 죽음일 뿐 아니라 홍씨 일가의 멸문의 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친정이 관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정에 반대하지 못하였던 혜빈 홍씨는 아들 세손을 폐위시키려는 친정의 방침에는 반대하고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하고 세손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주어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세손 정조가 어렵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혜빈은 혜경궁이 되었고 왕의 모친인 홍씨는 이제 궁중 내에서 대비 버금가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 곧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홍씨 친족들에 대한 탄핵상소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을 물어 숙부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시켰다. 이어 홍봉한과 오라버니 홍낙임 등도 죽음의 위기에 몰렸으나 혜경궁 홍씨는 단식까지 하면서 정조에게 시위하여 겨우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홍씨는 아들은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그 결과가 친정의 몰락임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나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홍인한을 제외한 친정식구들의 복권으로 혜경궁 홍씨는 이후 만족스런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은 네 번에 걸쳐 씌어진 것으로 저술 시기, 저술동기, 내용이 각각 다르다. 첫 번째는 홍씨가 회갑이 되던 해에 저술한 것으로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세자빈으로 입궁이후 50여 년 간의 궁중생활에 관한 회고담이다. 두 번째는 1801년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고 아버지 홍봉한이 역적 누명을 쓰게 된 것에 충격 받고 씌어진 글이었다. 1802년에 씌어진 세 번째 글은 정조의 자신에 대한 효성과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시켜 주겠다는 약속에 대한 회상이며, 네 번째는 임오화변의 내막에 대해 증언한 글이었다. 이러한 네 편의 글을 통해 주로 홍씨는 임오화변에 대한 입장 정리와 친족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을 철저하게 세자의 병환 탓으로 돌리고 아버지 홍봉한의 주장대로 나라의 종사를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아버지 홍봉한이 끝까지 세자와 세손을 지키려 했다고 기록하여 자신의 친족들을 변호하고 있다. 이렇게 정쟁에 휘말린 친족들을 변호하는 모습을 볼 때, 혜경궁은 노론 집안의 딸로서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던 정치적인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홍씨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왕의 생모, 현왕의 친조모라는 위치 때문에 한중록을 통하여 친정식구들을 변호하고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왕후의 친족에 대해 정면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정순왕후 사후에 아버지와 동생의 복권을 이룰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순조 15년( 1815)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헌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899년 고종황제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소감 : 우리나라 역사는 매우 깊고 다양한 것 같다. 이번 숙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아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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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이 박형씨, 출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