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북(在北])시인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白夔行)
타고난 미남으로 많은 여성들의 로망이었지만
기생에 빠진 후 북한에서 노예로 살게 된 백석의 마지막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AyRzvxp0psQ
Aug 3, 2024
안도현의 "백석 평전"
안타까운 백석의 친일 및 북한 찬양 논란
한국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받아 천재적인 감수성을 발휘하지 못한 백석
Cited from Wikipedia
백석 白石
시인 백기행 (白夔行)
출생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現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
사망 1996년 1월 (향년 83세) 량강도 삼수군
학력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전문부 (영어사범과 / 졸업)
데뷔 1930년 조선일보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
경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평안도 사투리를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고향의 풍물, 세시풍속, 생활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으로는 여우난 곬족이 있다.
생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시인으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유학했다.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그의 작품이 한국 문학계에서 명성이 높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전까지 만주국 공무원(통역, 세관 공무원 등)으로 근무
해방 이후 고향인 이북에서 김일성 찬양시를 쓰는등 순수문예 활동보다는 김일성과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에 전념했으며,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로 인해 1960년대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했고, 부업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학 과외를 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으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 가운데 '석(石)'을 가져다 필명 겸 아호(雅號)로 삼고 백석(白石, 白奭)으로서 작품 활동을 했다. 등단 이전 1933년 12월 방응모 장학금 회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서명에 이미 '백석(白石)' 및 '백석(白奭)' 이름이 등장한다. 이 밖에 '한얼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이 갓 되었을 무렵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 시인 신경림, 동화작가 김요섭, 윤동주, 북한의 한설야 등이 있다.
여성편력
백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여성 소설가 최정희와 친해지면서, 여러 여성 문학인을 소개받아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최정희와 더불어 노천명, 모윤숙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들 여성 3인방은 백석을 사슴이라 불렀다고 한다. 2001년 <문학사상>에는 최정희가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힌 편지도 받았다고 한다.
무척 좋아하던 박경련(란)이 결혼한 이후에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시절에는 제자 김진세의 여동생을 마음에 두었다는 설이 있다. 미모의 여인으로 함경남도 영흥군에 살았으며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백석이 정식으로 청혼했지만, 박경련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 집안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여기까지가 백석이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 알려진 주변 여인들로, 모두 명문학교를 다닌 신여성들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여인도 나오게 된다.
란(박경련)
백석은 통영을 아주 좋아했다. 경상남도 통영시에 가면 백석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통영>으로 연작시만 3개가 있을 정도이고, 백석은 통영 바다를 거닐며 <바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는 통영에 그가 사랑했던 란(박경련)이라는 여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백석이 박경련을 처음 만난 곳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장이었다. 허준은 백석의 또 다른 친구 신현중의 여동생인 신순영과 결혼했는데, 당시 24살이었던 백석은 결혼식장에서 박경련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경련은 통영 출신으로, 당시 18살이었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신여성이었다.
뜨거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통영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에게 인사를 겸한 청혼을 했으나 끝내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다. 당시 박경련에 대한 백석의 마음은 주변인 모두가 알 정도였으며, 그 마음은 박경련이 살고 있는 통영으로 이어져서, 백석은 통영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긴다.
그러나 백석과 박경련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박경련은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결혼한다. 신현중은 백석과 조선일보에 같이 근무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고,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었다가 파혼하고 박경련과 결혼한 것이다. 이에 백석은 많은 충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주 너저분한 일이 있었다. 백석이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어하자, 박씨 집안의 어른들은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신현중은 따로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내심 박경련을 좋아하고 있어서, 백석을 배신한다.
신현중은 "백석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거나 첩의 자식입니다."라고 백석의 출신을 헐뜯었다. 실제 백석의 모친은 단양군수의 딸이었고, 서울 출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는 나이 차가 13살이나 났다. 당시 이런 기우는 혼사에 대해 '백석의 모친이 기생 혹은 첩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다. 신현중은 박씨 집안의 어른들에게 "제가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하여, 끝내 성공하고 만다.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 신순정의 제자였고, 신씨 집안도 통영 출신이었다. 그래서 박씨 집안과 신씨 집안은 피차에 집안 사정을 다 아는 사이였고, 부모님 대에도 서로 면식이 있었다. 또한 신현중의 아버지는 군청에 근무하여 형편도 꽤 좋았다. 반면 백석은 타향, 특히 이북 출신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결국 백석과 신현중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박경련의 어머니는 신현중을 택했다.
아무튼 그렇게 결혼한 박경련과 신현중은 부부 금슬이 좋았으나, 폐결핵을 앓고 병약했던 박경련의 건강 문제인지 자식은 낳지 못했다. 신현중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교육자가 되어 경상남도와 부산 일대를 떠돌다가 1980년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박경련은 한참을 더 살았다.
통영 바다를 거닐며 연인 란에 대한 사랑을 읊은 시로, 사랑에 빠진 백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바다』와 『통영』 3편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았으며, 수필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란(박경련)과 헤어진 후 사건의 전말을 들은 백석이 지은 시. 절절하게 실연의 아픔이 느껴진다. 1938년 4월에 쓴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여인과 결혼한 친구에 대해 담겨져 있다. 이 무렵 백석은 신현중에게 이끌려 그의 신혼집에서 란과 인사하게 된다.
배우자
"백석의 첫 번째 혼례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의 첫 부인 장정옥은 남북간 갈등이 고조되자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는 기사가 있으나,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2번째 부인 문경옥(1920∼1979)은 평양의 유명 변호사인 문봉의 서녀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문경옥은 김일성의 후원을 받아, 소련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했다. 그녀의 오빠 문학수는 화가였다.
1940년 9월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소속 측량 보조원을 그만두고 백구둔이라는 농촌에 잠시 체류하며 농사를 짓다가,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안둥세관에 자리를 얻어주며 안동로 간다. 당시 문학수와 가까이 지내던 백석은, 문학수의 중신으로 1942년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처제 문경랑은 형부 백석에 대해, 지인인 작가 김자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백석의 2번째 결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 8개월의 아이가 유산되며 고부갈등 등 관계가 악화되며 이혼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부인 리윤희와는 3남 2녀를 두고 50년 넘게 해로했다. 백석은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리윤희와 삼수군 농장의 농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김영한(김자야)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김자야)이다. 길상사 시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당시 김영한과 백석과의 일화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김영한의 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가쿠인에 유학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영한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돈으로도 1,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어서, 1987년 처음 제안을 받은 법정스님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김영한이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법정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시주를 받아들여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사찰로 개조한다. 그리고 김영한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 등의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김영한이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의 주변인들은 김영한과 백석의 교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여인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백석이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의 여동생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김영한이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학교 교수는 말년의 김영한에게 내사랑 백석을 내도록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