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집을 찾아서(2)
- 정수자시인의 『저녁의 뒷모습』
이 승 현
정수자시인의『저녁의 뒷모습』을 읽고 그 속내를 짚어내려 상념의 빈 뜨락을 여러 날 서성거려야만 했다.
마지막 쪽을 덮고 난 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떠올랐던 낙동강 하구언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왜, 이 하구언 노을을 무작정 찾아 와야만 했을까?
시집을 읽는 내내 하구언 노을빛이 머리 속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저녁의 뒷모습이 노을마냥 연분홍빛이었다가 결국에는 한 줌 빛으로 사라지는 것이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을이 진 바다 속에서 한 점 빛으로 떠오르는 별 또한 저녁의 뒷모습의 연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저녁의 뒷모습』에서 처연히 스러지는 별뿐만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또 다른 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그 모습의 밑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 보고자 한다.
1. 저물녘에 들려오는 범종소리는 아름답다
언젠가 어둠이 깃든 산사에서 법고소리와 범종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여승의 가냘픈 손끝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산천을 휘감아 도는데 그 속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울림에 동화되어 숨 막히는 줄만 알았다.
‘범종 저물 무렵’이란 시조가 바로 그 때 그 감동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흔한 일상 속의 소재로 쓴 시조인데도 그 울림은 자못 크다.
혼자 또 먹겠다고, 방금 씻은 한줌 쌀이
혀를 차면서도 제 몸 불리는 소리
저녁 종 그 끝에 스며 길들 붉어지다
벌레들 기어기어 집으로 드는 동안
한 톨 쌀이 이르는 무언의 낮은 말씀
길 밖의 시린 발들을 가만가만 흔들어
생각느니, 나 무얼 몸 불려 품어 봤나
쓰다 만 시 몇 줄 모과처럼 붉을 켤 때
지상에 홀로 선 것들 손이 문득 젖는다 - ‘범종 저물 무렵’ 전문 -
저물 무렵 범종소리의 묵직한 여운을 시인은 ‘방금 씻은 한줌 쌀이’ 부글부글 ‘혀를 차면서 제 몸 불리는 소리’에서 듣는다.
혹, 압력밥솥의 자명종일지라도 그 소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생명들을 위해
한 몸을 기꺼이 내어 주는 쌀 한 톨의 숨소리이었고,
시인은 자신도 저 쌀 한 톨 마냥 그리 살아왔는가? 되물으며
‘쓰다만 시 몇 줄 모과처럼 불을 켤 때 지상에 홀로 선 것들 문득 젖는다’라고 조용히 살아 온 길을 되짚어 본다.
시인은 아름다운 소리를 남기고 떠난 다된 밥을 먹으며 ‘늦저녁’이란 시를 일궈내 다음과 같은 절절한 득음의 소리를 또 풀어놓고 있다.
“저기 / 혼자 밥 먹는 이 // 등에서 문득 / 주르르륵 // 모래 흘러내려 / 어둠 먹먹해져 // 지나던 / 소슬한 바람 // 귀 젖는다 // 鳴砂……” - ‘늦저녁’ 전문 -
쌀은 밥솥의 ‘쿠쿠’하는 소리만을 남기고 가지만 외롭게 홀로 앉아 밥을 먹는 이의 등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사랑, 명예, 등 어리석었던 지난 세월의 모든 것을 주르르륵 흘러내리게 한다.
그 모든 것이 녹아내리면 지나가던 소슬한 바람까지도 무릎 꿇고 앉아 귀를 적시는 찬란한 보석 같은 명사鳴砂가 되는 것이다. 저물 무렵 범종소리는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때가 되어 사라지는 것에는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 무엇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2. 여정에서 건져 올리는 저녁의 뒷모습
저녁의 뒷모습을 한 발짝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은 삶의 끝자락을 살짝 엿보는 눈빛으로 변한다.
“저녁내 우두망찰 푸릇해진 눈자위가 / 제 안의 우물을 긷다긷다 저물 때 / 해거리 늙은 목련이 젖빛의 등을 켰다” - ‘우두망찰 비를 보는 봄날 저녁’ 부분 -.
시인은 저녁내 처마 끝을 붙잡고 용쓰던 빗물이 마침내 손을 놓고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모른다.
푸릇해진 눈자위로 제 안의 우물을 긷다, 긷다 저물어 질 때
비로소 그 빗물이 떨어진 곳에 ‘해거리 늙은 목련이 젖빛 등을 켜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이라는 것을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놓는다.
저녁의 뒷모습은 이렇게 오고 가는 길목에 있다.
십 원짜리 민화투판 낙화에 잠시 젖어
그 중 고운 꽃잎을 주워 든 할머니들
틀니를 덜그럭거리며 속절없는 봄을 씹네
가끔은 씹을 일로 한 세상 견디는 것
지는 꽃잎 사이 켜켜 앉는 한숨 사이
회심곡 그물거리더니 그예 저 산 넘겠네
흰나비 잡이 삼아 봉토나마 쓸고 있나
길은 이미 졌는데, 목이 싸한 공산명월
연분홍 추억 갈피에 주름골만 환한 날 - ‘질긴 추억’ 전문 -
이 땅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저녁 냄새 자욱한 경로당을 담담한 눈빛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 덜그럭거리는 틀니소리와 함께 저마다 고운 꽃잎이 그려진 화투장을 앞 다투어 챙기는 쪼글쪼글한 손등을 본다.
어제까지 민화투를 함께 치던 앞마을 할멈이 낙화되어 떨어진 것을 애써 잊으려는 듯,
손에 든 화사한 꽃패를 꼭 움켜쥐고 내놓지 않겠다는 듯 왁자한 싸움소리도 나고,
‘가끔은 씹은 일로 한 세상을 견디는 것’이라며 속절없는 봄을 씹어대기도 하고,
‘지는 꽃잎 사이 켜켜 앉는 한숨 사이’를 슬쩍 비껴 앉아도 보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해 저물어 오는 칼칼한 뒷모습을 예견한다.
시인은 경로당의 애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의 뒷모습을 가장 아릿하게 들춰내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저녁의 뒷모습’을 ‘연분홍 추억 갈피에 주름골만 환한 날’이라고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해 낸다.
이런 시적 표현을 절창 중에 절창이라고 어찌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3. 저녁의 뒷모습을 채색하는 물감들
아침에 뜬 해는 저녁노을로 지기까지 많은 산과 강을 건너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강물 흘러가듯 그렇게 가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저녁의 뒷모습’의 물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때로는 맑고, 때로는 육중한 시어로 뿜어 올리고 있다.
“데었다 / 당신이 아닌 / 주전자의 입술에 / 쓰라린 추억이듯 / 화농 깊어갈 때 // 때때로 검은 입술의 / 우기가 어른댔다 // 이제 모두 저를 향해 / 돌아앉는 처서 무렵 / 상처를 꿰매주는 / 투명한 손을 본다 // 한참씩 / 경배를 하듯 / 속삭이는 시간을 - ‘시간의 입술’ 전문 -.
살다보면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닌 주전자의 입술에 데일 때도 있고
그 화농 진 밑그림의 상처를 ‘한참씩 경배 하듯 속삭이며 꿰매주는 투명한 시간의 손’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 묻은 거즈 뭉치 아니면 가위 따위
뱃속에 넣고도 몇 년은 그냥 살 듯
잘 닦인 당신 창에도
기웃대는 금 있네
벌써 꿰맨 상처라며 시들방귀 웃던 생도
추석 전날쯤은 진물 콧물 다 부풀어
예제서 툭 툭 터지는
실밥들이 길을 덮고
실밥을 들고 보니 제 설움만 깊더라고
서로 가슴 후비다 달이 휘청 기울면
아리랑
어깨를 겯고
또 한 고개를 넘는다네 - ‘봉합’ 전문 -
그런가하면 때때로 황당하게 ‘피 묻은 거즈 뭉치’나 ‘가위 따위’ 같은 것을 뱃속에 넣고 사는 것처럼,
잘 봉합된 밑그림에도 기웃대는 빗금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살다보면 실밥 터지듯 툭 툭 터지는 아린 슬픔이 어찌 없겠는가?
그게 없다면 아마도 저녁의 뒷모습도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저녁의 뒷모습이 아름다울수록 채색되는 물감의 농도 또한 짙었으리라.
그런 이치가 바로 생이라고, 저녁의 뒷모습을 그리는 물감이라고 말한다.
4. 그녀의 빈집을 채우는 저녁의 뒷모습
시인의 밑그림에는 여러 빈집들이 있다.
때로는 허전한 집이고, 누군가 그리워 함께 지새우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도 하지만 결국은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집이라고 한다.
어떤 때는 ‘온종일 해가 와서 술래 잡고 놀다가는 응달집’이며 ‘해만 지면 귀를 닫는 자귀나무 잎새처럼 온 뜰을 붉게 젖도록 서성이다가 결국에는 섬처럼 혼자 시드는 집’이기도 한 것이다.
혼자 시드는 집일망정, 그냥 그렇게 시드는 집은 또 결코 아니란다.
시인은 ‘결락……문자’라는 시에서는 스스로 눈이 되는 빛나는 저 집을 보라고 한다.
‘눈먼 자의 길이 되라 / 속삭이는 어둠 속에 // 천년의 꿈만 꾸는 / 미완의 碑 / 허공의 집 // 스스로 / 눈이 되는 날 / 빛을 불러 / 명하리라’ - ‘결락……문자’ 전문 - 라고 힘주어 외친다.
비록 미완의 碑, 허공의 집일지라도 눈먼 자의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을 불러 환하게 밝히는 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의 오랜 주문에 응답 못한 눈물처럼
한 달에 한 다발씩 죽은 꽃을 피우는
뜨거운 귀머거리 집 그녀의 성소라네
선바람 익은 바람 두루 통한 늦바람도
애당초 못 들이는 긴 마법에 걸린 듯
침묵의 무딘 노래로 꿈을 에운 어둔 집
어느덧 꽃도 없이 추억 홀로 늙는 즈음
집 잃은 정령들이 속삭이는 밤이면
오, 끝내 제 집을 앗긴 아기의 말이 끓네 - ‘그녀의 빈 집’ 전문 -
그녀가 추구하는 빈 집은 신의 주문에도 불응하는 ‘한 달에 한 다발씩 죽은 꽃을 피우는 뜨거운 귀머거리 집’이며,
‘선바람 익은 바람 두루 통한 늦바람도 애당초 못 들이는 마법에 걸린 듯 침묵의 무딘 노래로 꿈을 에운 어둔 집’이기도 하고,
‘집 잃은 정령들이 속삭이는 밤이면 끝내 제 집을 앗긴 아기의 말이 끓’는 집이라고 한다.
그런 아픔까지 감수하며 결국 빈집에 채우고자 하는 것은 ‘제 집을 앗긴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아니고, 웃음소리는 더욱 아니다.
시의 언어로 가득 채운 집을 갈망하기에 그녀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빈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며 이제는 그 빈집을 그녀가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시어들로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홀로 밥을 먹으며 등줄기에서 서걱거리는 모래를 쏟는 고통도 이겨내도록 하는 힘이고,
때로는 ‘용암처럼 들끓는 눈물도 씹어 삼키기도’ 할 줄 알게 하고,
또는 ‘번번이 넘지 못할 산 앞에서 그은 금을 가끔은 해일로 일어나는 일상을 메어치’고 싶은 생각을 참아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것만이 빈집을 채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이토록 절절한 시조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녀의 빈집에는 절명시가 잉태되어 간다. 한세상 활활 타는 불꽃의 모습으로
5. 저녁의 뒷모습도 결국에는 한줌 먼지일 뿐
저녁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사람들은 혼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신명을 다해 일궈온 저녁의 뒷모습도 결국에는 한줌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아주 짧은 시로 나긋이 적고 있다.
거대한 우주 자궁 한 점 먼지였다가
못내는 서로 당겨 별이고 너였다가
한 세상 잠시 기대어
글썽이다
갈 그 뿐…… - ‘별먼지’ 전문 -
낙동강 하구언 어둠 속에서 오롯이 빛을 발하는 별을 본다.
시인의 뒷모습과 내 어머니의 뒷모습, 아니 바로 나의 뒷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이다.
저 별은 나의 별이고, 나는 저 별이 되는 거라고 시조집은 예언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념 속을 헤매게 한 감흥이 오늘 하구언까지 정신없이 나를 끌어낸 것이리라.
‘거대한 우주 자궁 한 점 먼지였다가 한세상 잠시 기대어 글썽이다 갈 그 뿐…’이라는 이 시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저 조용히 시조집을 가슴에 품어 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6. 무진장의 무게를 담은 그릇
이 시조집에는 밝고 경쾌한 시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낫 둘! 할 때마다 꽃망울 터지듯 / 꿰고 싶은 노래로 꽃그늘 환해지듯 / 가끔은 늦은 편지가 저런 길로 온다나’ - ‘봄, 소풍에 물들다’ 전문 -처럼 환하고 풋풋함을 노래한 시도 있었고,
‘백담사 여름 한낮’이란 시에서는 ‘백로처럼 나붓 앉은 하복의 수녀들이 백담百潭의 하늘 들어 장구 치는 한나절’이라는 수녀들이 백담계곡에서 발 담그고 환하게 웃음소리를 내는 광경을 그린 시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조집의 큰 울림은 삶의 뒷모습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싶었다.
한 시집을 이렇게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엮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시조집은 무진장의 무게를 담아낸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런 큰 그릇이었다.
아주 보기 드문 항아리다.
시집이라고 하면 써놓은 글들을 모아 종합선물세트처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것으로만 쉽게 생각해온 나에게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말라는 교훈까지 들려준다.
특히, 시조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시조집은 필히 몇 번씩 반복 필사를 해 가며 시조를 곱씹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곱씹을 때 마다 색다르게 우러나오는 그 감칠맛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엄숙한 인생의 길을, 그리고 삶의 뒷모습을 블랙홀의 뒷면처럼 적막의 톤으로 그려내 준 이 시조집은 아름다운 시어의 갈증에 목말라하는 모든 이에게 생수처럼 온 몸을 촉촉이 적셔줄 것이라 믿는다.
책꽂이 한 켠에 눈부시게 꽂혀 있는 이 시조집을 바라볼 때마다 괜히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하다.
『저녁의 뒷모습』은 고요아침에서 2004년도에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