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에 들어온 송대 성리학은 이전의 유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명확히 했다. 성리학이 불교적 효행을 부정하고 유교적 효행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 유교적 가례의 정비와 실천이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주자가례(朱子家禮)>로 불리는 예서의 편찬이다. <주자가례>에서 관혼상제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의도는 바로 불교적 효행을 유교적 효행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말기부터 성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적 효사상을 담은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했다.
1)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효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 1434년에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책은 1428년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강상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을 때 세종이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포해서 국민에게 일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삼강행실도>는 교민화속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의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선덕(宣德)(명나라 선종) 9년(1434년, 세종 16년) 4월 26일 도승지 신 안숭선이 삼가 교지를 받드니 이러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내려 준 착한 성품과 사람이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생민(生民)으로서는 누구나 다 같은 것이며,
인륜을 돈독히 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선무(先務)이다. 그런데 세상의 도리가 이미 떨어지고 순박한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아 천경(天經)과 인기(人器)가 점점 진실을 잃고 있어,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아들로서 아들의 직분을 다 이바지하지 못하고, 아내로서 아내의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다.
생각하면 옛날 성제(聖帝), 명왕(明王)도 도를 실천하고 몸소 가르치며 본보기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였으며 그 당시는 집집마다 봉(封)함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돌아 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하여 비록 감히 그 만분의 일도 바랄 수 없지만 간절한 뜻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직 오전(五典)을 돈독히 하여 오교(五敎)를 펴는 도리에 대해서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고 있으나,
한편 생각하면 어리석은 백성이 추향(趨向)에 어두운데, 따라서 본받을 바도 없었다. 그래서 유신에게 명하여 고금의 효자, 충신, 열녀 중에서 뛰어나게 본받을 만한 자를 가려서 편집하되, 일에 따라 그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시찬을 덧붙이게 하였으나,
그래도 어리석은 남녀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림을 그려서 붙이고 이름을 <삼강행실>이라 하여 이를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는 바이다.
이것은 아마 거리의 아이와 시골의 아낙네까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니, 펴 보고 읽는 가운데 감동하여 분발하는 바가 있게 되면, 이끌어 가르치며 개도(開導)하는 방법에 있어서 작은 도움이나마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서민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책은 비록 나누어주었더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그 뜻을 알아서 분발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주례>에 '외사(外史)는 책이름을 사방에 알리는 일을 맡아서 사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책의 문자를 알아 이를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니,
이제 이를 모방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회유하는 방법을 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서울은 한성부 오부, 지방은 감사, 수령이 학식이 있는 자를 널리 구하여 적극적으로 권장하되 귀천을 막론하고 항상 가르치고 익히게 하라. 부녀들까지도 친속으로 하여금 성실하게 가르쳐서 모두 다 환하게 알도록 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 배우고 저녁에 더 진행할 것 같으면 누구나 그 천성의 본연을 감발하게 되어, 아들된 자는 그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신하가 된 자는 그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며, 지아비와 지어미가 된 자도 모두 그 도리를 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올바른 법을 알아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떨쳐 일으킬 것이며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풍교(風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오직 너 예조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체득하여 중외(中外)에 효유하라."
<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 외에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 여영이 상강에서 죽다 외에 94명의 열녀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효자도에는 중국인과 우리 나라 사람을 합해서 모두 111명의 효행사례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각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사례, 부모가 병이 났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한 사례, 부모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부모를 구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에 효행으로는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거나 항거하는 사례, 부모의 유해를 마치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신 사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애틋하게 사모하거나 행동을 근신하는 사례들이다. 효자의 경우 그 제목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순임금의 큰 효성, 문왕의 문안, 문제가 약을 맛보다,
백기가 서리를 밟다, 증삼이 그 뜻을 받들어 봉양하다,
민손의 홑옷, 자로가 쌀을 져오다,
약정이 발을 다치다,
양향이 범을 움켜잡다,
백유가 매를 맞고 울다,
노래의 색동옷, 고어가 길에서 통곡하다,
제영이 아버지를 속이다,
진씨의 시어머니 봉양, 채순이 오디를 따다,
유평이 도둑을 감동시키다,
염범이 유골을 져오다,
강혁의 큰 효성, 설초의 쓰레질, 강시가 잉어를 나오게 하다,
효아가 주검을 안다,
신도의 애절한 감동,
모용의 반찬 장만, 황향이 베개에 부채질하다,
정남이 목상을 새기다,
동영이 돈을 빌다,
고초가 관에 엎드리다,
포산이 광주리를 지다,
종승이 대나무를 나게 하다,
육적이 귤을 품다,
곽거가 아들을 묻다,
원각이 아버지를 깨우치다,
두효가 물고기를 보내다,
맹희가 금을 얻다,
왕부가 시를 폐하다,
맹종이 대숲에서 울다,
왕상이 얼음을 갈라지게 하다,
성언이 굼벵이 때문에 울다,
유은이 꿈에 곡식을 얻다,
허자가 짐승을 묻다,
왕연이 물고기를 나오게 하다,
반종이 아버지를 구하다,
법종이 유해를 찾다,
오맹이 모기에게 물리다,
왕팽이 샘을 솟게 하다,
자평이 무덤을 만들다,
허지가 신명을 감동시키다,
검루가 똥을 맛보다,
숙겸이 약을 구하다,
길분이 아버지를 대신하다,
자여가 강물을 물러나게 하다,
불해가 주검을 들추다,
왕숭이 우박을 그치게 하다,
유하의 효덕, 보림이 개를 울리다,
효숙이 초상을 그리다,
노조가 어머니에게 순종하다,
소현이 뼈에 피를 적시다,
계전이 어머니를 따라 물에 빠지다.
허탄이 맹수를 치다,
원사가 이리를 따르게 하다,
인걸이 구름을 바라보다,
문정이 광을 파다,
의부가 다리 살을 베다,
당씨가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이다,
유정의 분향, 명달이 아들을 팔다,
두고가 어버이를 감동시키다,
문양을 까마귀가 도와주다,
곽종이 장수를 빌다,
수창이 어머니를 찾다, 서
적의 독실한 행실, 소송이 어머니를 구하다,
첨씨의 딸이 도둑을 속이다,
조효부가 아들을 팔다,
오이가 화를 면하다,
왕윤이 아버지를 안다,
왕천이 아버지의 수명을 늘리다,
양호가 하늘을 감동시키다,
황빈이 아버지를 꿈꾸다,
소조가 아버지를 지키다,
탕임이 얼음을 구하려고 울다,
손억이 어버이를 구하다,
오우가 칼을 빼앗다,
주악이 아버지와 함께 죽다,
왕흥이 얼음에 눕다,
진씨가 가슴이 두근거리다,
유씨가 시어머니에게 효도하다.
이상 효자, 효부는 모두 111명이다. 또한 그 이외에 효행은 아래와 같다.
(이 중 이미 앞에서 설명한 사람은 내용을 생략할 것이다) ·지은이 몸을 팔다(知恩賣身, 신라) ·설씨가 거울을 쪼개다(薛氏分鏡, 신라) ·향덕이 넓적다리를 베다(向德, 백제) ·성각의 어머니 봉양(聖覺養母, 백제) ·위초가 다리 살을 베다(尉貂割股, 고려)
산원 동정 위초는 그 아버지 위영성(尉永成)이 악한 병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아들의 고기를 쓰면 고칠 수있다."하니, 위초가 곧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만두 속에 넣어 먹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재상 문준 등에게 명하여 그 포상을 의논케 하니 문준 등이 아뢰기를, "당나라 안풍현의 백성 이흥(李興)은 그 아비가 악한 병에 걸렸을 때에 이흥이 스스로 다리의 살을 베어 다른 것으로 속여서 먹였는데, 자사가 이 일을 아뢰어 그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하였습니다.
이제 위초는 본디 거란의 추한 종족이고 글도 모르는데, 능히 그 몸을 아끼지 않고 효성을 다하였으니 옛 법대로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 해야 마땅합니다."하니, 그리하라고 분부하였다.
2) 충개가 손가락을 자르다(蟲介斷指, 조선) 충개는 가주 사람이며 중랑장 김사안가문의 딸이다. 16세 때에 그 어머니가 간질을 얻어 여러 해가 되어도 낫지 않았는데 충개가 산 사람의 뼈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곧 오른손의 무명지를 잘라 국에 넣어 끓여서 바치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찰리사가 조정에 아뢰니 포상하고 정표 하였다.
3) 석씨가 시어머니를 업다(石氏負姑, 조선) 석씨는 의령 사람이며 심치의 아내이다. 20세 때에 지아비가 죽었는데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 아버지가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말하기를, "지아비가 외아들로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께서 제 뜻을 빼앗으면 죽은 지아비의 병든 어머니를 누가 봉양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명에 따르지 않고, 시어머니를 더욱 성실하게 섬겼으며, 시어머니가 뒷간에 갈 때마다 몸소 업어 갔다.
4) 임씨가 시어머니를 구해내다(林氏救姑, 조선) 임씨는 태인 사람이며 사정 박조의 아내이다. 지아비는 당시 서울에 있었는데, 한밤에 집에 불이 났다.
시어머니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므로, 임씨가 곧장 불길 속으로 들어가 시어머니를 업고 나왔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에 데어 머리를 그을고 팔이 데었으나 모두 죽음만은 면하였다.
5) 자강이 무덤에 엎드리다(自强伏塚, 조선) 김자강은 성주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를 받들매 승순하여 한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도 늙어서 죽으니 자강은 불법을 쓰지 않고 한결같이 가례에 의해서 장사를 치르고, 아버지와 합장했다. 그러고는 3년 동안 외막에서 살면서 거상을 마쳤다.
3년 거상이 지났건만 또다시 아버지를 위해서 3년 동안 더 외막에서 살려고 하매 처족들이 억지로 자강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자강은 외막이 타는 불빛을 돌아다보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땅을 치면서, 데리고 돌아가려던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도로 무덤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사흘 동안 무덤 앞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처족들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외막을 지어주어 살도록 했다. 이리하여 자강은 다시 3년 동안을 외막에서 살았으나 처음 어머니 초상 때와 똑같았다.
6)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石珍斷指, 조선) 유석진은 고산현의 아전이었다. 아버지 천을이 악질에 걸리어 날마다 한번씩 발작을 하는데, 기절해 나자빠지니 사람으로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석진은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있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하늘을 향해 울면서 사방으로 의원과 약을 구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 병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서 먹이면 낫는다'고 하였다. 석진은 즉시 자기의 왼편 무명지를 잘라 그 말대로 이것을 피에 섞어서 그 아버지에게 먹이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7) 귀진이 손가락을 자르다(貴珍斷指, 조선) 양귀진은 옹진 사람이며 양인길의 아들이다. 9세 때에 그 아버지가 간질을 얻어 한 달에 두세 번씩 발작하였다. 양귀진이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쓰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넷째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바치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감사가 조정에 아뢰어 정문하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8) 박선의 여묘살이(朴善廬墓, 조선) 박선은 안악 사람이다. 13세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무덤 곁에서 여묘살이 하면서 아침저녁의 상식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돌을 져다가 담을 쌓고 3년을 마쳤다.
9) 은시가 손가락을 자르다(恩時斷指, 조선) 은시는 태천 사는 수순 광우의 딸이다. 21세 때에 그 아버지가 악한 질병을 얻어 한 달에 두 번씩 발작하는데 은시가 '그늘에 말린 자식의 손가락을 약으로 쓰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왼손의 넷째 손가락을 스스로 잘라서 술을 타서 바쳤더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감사가 임금에게 아뢰어 그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하고 오역을 면제하였다.
10) 사월이 손가락을 자르다(四月斷指, 조선) 사월은 곽산 사는 군인 김말건의 딸이다. 19세 때에 그 어머니가 광역병을 앓았는데,
1년이 지나도 낫지 않고 봄과 가을이면 더욱 심하여 지아비에게 버림받았다. 사월이 '산 사람의 뼈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감사가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어 정문하고 그 집의 부세를 면제하였다.
11) 성무가 물고기를 구하다(成茂求魚, 조선) 낭장 이성무는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79세였는데 이성무가 그의 아우 선무, 춘무, 양무와 함께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영락 정유년에 어머니가 병을 얻어 수개월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잉어회를 먹고 싶어하므로 이성무가 여러 아우와 고이 소리내어 울며, 함께 강가로 가서 얼음을 뚫고 구하였더니 한 마리의 잉어가 뛰어 나왔다.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에게 바치니 어머니가 먹고 몹시 기뻐하고 병이 드디어 나았다.
12)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殷保感鳥, 조선) 윤은보와 서즐은 지례현 사람이다. 이들은 같은 마을 지의주사 장지도에게 함께 글을 배웠다. 어느 날 이들은 이런 의견에 대해 토론했다. "사람이란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마찬가지로 섬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옳은 말일세. 그런데 우리 선생님에게는 자식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선생님을 자식대신 섬겨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이들은 좋은 음식을 보면 우선 이것을 갖다가 스승에게 올리고, 명일을 만나면 술과 안주를 갖추어 꼭 아버지 봉양하듯이 하였다. 그러다가 장지도가 세상을 떠나니, 이 두 사람은 각기 부모 앞에 나아가 선생님 무덤 옆에 외막을 짓고 살기를 청하였다.
부모들도 이 뜻을 옳게 여겨 승낙하니 두 사람은 검은 관에 용질을 띠고 무덤 옆에 살면서 손수 밥을 지어 조석 제사를 올렸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은보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약을 달여 올리면서 잠시도 옷의 띠를 끄르지 않았다.
아버지 병이 나으매 다시 스승의 외막에 돌아온 뒤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밤 은보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은보는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아버지는 그가 꿈을 꾸던 날부터 다시 병이 시작하여 열흘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은보는 아침저녁으로 땅을 치며 호곡(號哭)하면서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아버지 무덮 곁에 외막을 짓고 거처하였다. 어느 날 모진 바람이 불어 책상 위에 놓아둔 향합을 잃어버렸다. 그런지 몇 달이 지나서였다.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무엇인가 물어다가 무덤 앞에 놓고 날아갔다. 은보가 이상히 여겨 즉시 쫓아가 보니 그것은 잃었던 향합이었다.
초하루 보름이면 꼭 스승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서즐도 역시 스승의 외막에서 3년을 마치었다. 선덕 임자년에 임금께서 이 일을 듣고 윤은보와 서즐에게 나란히 정문을 세우고 벼슬을 내리었다.
13) 퇴계의 효 퇴계는 태어난 지 일곱 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뒷날 퇴계는 이를 자신의 불효라 하였거니와 열두살 때 숙부인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면서 그 중의 한 구절 "들어가면 효도를 다하고 나가면 공경한다"에 이르러 아버지 모시지 못함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아들 된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퇴계는 <효경>의 공부를 학문에 들어가는 길로 삼았다. 이것은 자손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제자 김성일의 말을 인용하면, 퇴계가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효경>과 <소학> 따위를 먼저 하였다. 그래서 글 뜻을 대강 알게 된 뒤에는 4서를 익히는데, 이렇게 차례를 따랐으며 함부로 뛰어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인륜사상으로 순효(純孝)와 전인(全仁)을 강조했다. 그는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 되는 것이니 한 가지 행실이라도 어그러짐이 있으면 순수한 효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인은 만 가지 선에 으뜸이 되는 것이니 한 가지의 선이라도 갖추지 못하면 인은 온전한 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퇴계의 이러한 인 사상에서부터 나오는 효는 경천애인의 효가 된다. <육조소>의 제 육조에서 "임금이 하늘을 대하는 관계는 자식이 어버이를 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을 추진해서 하늘 섬기는 도를 다 하거니와 일마다 덕을 닦고 반성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 없이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퇴계는 <수신십훈(修身十訓)>의 제 7훈에서 "가정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효를 극진히 하고 悌를 극진히 하여 윤리를 바로 세워나가되, 늘 은혜와 사랑을 돈독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예안향약문(禮安鄕約文)>에서는 효와 제와 충과 신이 사람으로서 지켜가야 할 도리의 근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벌칙을 구분하였다.
즉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
형제간에 다투는 자,
집안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자,
세도를 마구 부려 관기를 무너뜨리고 사욕을 채우는 자,
고을의 어른을 능멸하는 자,
절개 지켜 가는 과댁을 꾀고 위협하여 나쁜 짓을 하는 자는 상벌에 처하고,
친척간에 화목하지 아니하는 자,
조강지처를 소박하는 자,
이웃 사람과 화목하지 아니하는 자,
무리를 지어 싸움을 일삼는 자,
염치도 없이 선비된 체모를 더럽히는 자,
힘이 있다 하여 약한 자 능멸하고 남의 재산 넘나보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
무리를 지어 행패를 일삼는 자,
거짓말을 꾸며 남을 모함에 빠뜨리게 하는 자,
환란을 구해낼 수 있는 여력이 있으면서도 못 본 체하고 돌보지 않는 자, 벼슬길에 나서서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그릇된 것을 만들어 내는 자는 중벌에 처하며,
공적인 모임에 늦게 오는 자,
인색하게 앉아서 품위를 잃고 있는 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다툼하는 자,
자리를 비워 놓고 물러간 자,
까닭 없이 자리를 먼저 뜨는 자는 하벌에 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4) 율곡의 효 율곡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요도가 들어있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선조에게 올려 우선 국왕부터 성군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백성들이 가정정신이 희박하였기 때문에 총체적 난국을 초래하였다고 보고, 자신부터 효를 실천하는 수범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해주 석담(海州 石潭)에 가서 '청계당(聽溪堂)'을 지어 종족을 모두 모아 놓고 함께 살면서 경계하여야 할 훈사(訓辭)인 동거계사(同居誡辭)를 지었다.
동거계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생(同生) 즉, 형제가 부모의 몸으로써 나누어 낳았으니 한 몸이나 다르지 아니하니 서로 사랑하여 조금도 내 것, 남의 것하는 마음 없으며 진실로 사랑하여 살지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구족(九族)이 동거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부모님 일찍 여의였었고 맏형님도 일찍 돌아가셨으니 우리 살아있는 이가 서로 사랑하여 한 세간에 살며 서로 떠나지 말지어다.
서로 떠나서 살게 되면 인생이 사는 보람이 아니므로 동거의 계획을 하나니, 비록 고향을 떠나 이리로 왔어도 일가가 和同하여 즐거이 지내면 우연한 일이겠는가.
마음 가질 일을 잠깐 기록하여 초하루마다 모두 듣게 하는 일이다. 부모께 효도하기는 행실로의 으뜸이로되 안 계신 부모는 효도할 길이 없으니 정성으로 하여 아무 것도 없어도 제사에 쓸 일을 헤아려 헛되게 쓰지 않고 제사할 마음을 가장 정성 되이 먹고, 마음을 극진하게 가져 아무쪼록 신령이 흠양하시게 할 것이다.
젊은 사람이 어버이 봉양하는 이는 어버이 향한 마음을 옛 성인이 가르치신 대로하여야 아무쪼록 효도를 이룰지니라.
일가 맏아주머님은 동생류의 맏이시고 제사 받드시는 사람이시니 일가의 으뜸이다. 아랫사람이 각별히 공경하여 어버이만큼 일에 서로 마음을 좋으나 궂으나 측측이 여기는 마음이 없이 낯빛을 온화이 하고 말씀을 부드럽게 하여 서로 가르칠지어다.
조금도 탓하지 말고 밖에서 서로 의논하지 말며 남의 말을 곧이 들지 말 것이요, 사이에 거짓말하여 서로 측측케 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자제가 나의 종을 치며 가르치고 첩은 엄히 경계하여 고치지 않거든 내어 보낼 것이다.
일가의 사람이 동거함에 있어서는 각각 사사로운 세간이 아주 없을 것이니 부디 사사로이 쓸 때가 있으면 사제를 들지라도 집안을 주관하는 사람이 나누는 양으로 하고, 은밀하게 갖고자 하는 마음은 일체 없어야 한다.
아내와 첩 사이에 첩은 공손하기를 정성으로 지극히 하고 아내는 어여삐 여기기를 진실로 틈이 없이 하여 다만 각각 지아비의 마음을 어기지 말기를 정성으로 하면 어찌 그른 일이 있겠는가. 일가의 사람이 앉아서 일하다가도 내 윗사람이 오시게 되면 일어설 것이니 항상 조심하여 매사를 공손하게 벗삼을 지니라.
일가의 모든 사람이 삼촌은 아버지의 예로 하고, 사촌은 친형제의 예로 하여 서로 사랑하며 한 몸같이 하여 대저 모두 몸가지기를 공손히 하며, 말씀은 온화하고 기쁘게 하며, 낯빛은 평화롭게 꾸짖지 말고 부드러운 말로 가르쳐 듣지 아니하거든 가장에게 고하여 그르다고 할 것이요, 젊은 사람이 내 종이라고 손 가벼이 때리지 말고 가장께 말씀드려야 한다.
일가의 사람이 다 화동(和同)하여 마음이 화평하면 집안이 어질고 길한 일이 생기고, 서로 치우쳐서 거슬러지고 사나운 일이 있으면 사나운 일이 나니 그 아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우리가 진실로 모여서 어버이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지아비는 아내를 중하게 여기고,
아내는 지아비를 공경하며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며,
아내는 첩을 불쌍하게 여기고
첩은 본처를 공경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정성으로 예대로 대접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며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조용히 가르치고 서로 치우치지 말라.
어진 일은 다투어서 하고 섭섭한 일은 서로 참으며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기고 종은 주인을 사랑하여 불평한 말씀이 없으며 불평한 얼굴빛을 하지 말며, 집안이 그릇 씻은 듯하며 어질고 귀한 기운이 일가에 모여 매양 좋은 일이 있게 되리니 이 아니 즐거운가. 모두 이 뜻을 알아 각각 힘쓸지어다.
율곡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을, 26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공을 여의었다.
그 후 맏형도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되었는데 충청도 회덕에 가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율곡은 먼저 맏형수 곽씨에게 조상의 신주를 모셔오게 하여 제사를 관장케 하고, 의지할 곳 없는 형제자질과 동복(同腹)을 모두 합하니 무려 1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많은 식구들과 함께 날이 새면 일찍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 하고 자제를 거느리고 먼저 가묘(家廟)에 가서 분향한 다음 서모와 형수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다음으로는 부인과는 읍(揖)을 하는 것으로 예를 하고,
자제와 조카의 절을 받고, 또 대 시첩(侍妾)의 절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야 서당에 물러가서 경전을 읽고 집필하는 것으로 그 날의 일과를 시작한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언제나 자제들을 거느리고 사당에 참배 예를 마친 후 정침에 회합하여 선생은 동쪽에 앉고 서모와 형수 곽씨는 부인과 함께 서쪽에 앉아, 아들과 조카 및 부녀의 예배를 받았다.
그리고 자제 중의 한 사람을 명하여 위에 번역한 계사를 읽게 하고, 그 뒤에 비복들을 뜰 아래에 나누어 서게 하여 배례를 행하게 하였다.
율곡은 서모를 대함에 있어서 친모와 다름없이 하였으며, 출입할 때는 사당에 고하고, 부인과는 서로 맞절을 하며, 측실 이하는 뜰 아래서 절하게 하였다.
그리고 계집종은 중간 안에서 환송하고 사내종은 대문 밖에서 환송케 하였다. 이런 율곡의 모범으로 처음에 해주의 풍속은 아주 투박하였는데, 그 후 문풍으로 변하고 예속이 성습(成習)되어 비록 우매한 농민이라도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위의 계사의 주요 내용은, 형제는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니 재물에 사욕 없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고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를 극진히 하여 신령님을 흠향케 해야 한다는 것과,
한 집안의 큰형수를 공경하고 삼촌을 부모처럼 모시고 사촌형제는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과, 일가의 어른에게 공경과 질서를 다해야 한다는 것과, 어버이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남편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며 어진 일은 다투어 하고 서운한 일은 참으면 화한 기운이 집안에 돌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종족을 모아놓고 모범적인 가정교육을 실천하려고 만든 이 계사에서 율곡이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효이다. 이런 점은 율곡의 저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도 효를 매우 강조한다.
무릇 사람들이 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되 효도하는 자가 심히 드무니, 이것이 부모의 은혜를 깊이 알지 못하는 데서 말미암은 연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시니 그 은덕을 갚고자 할진댄 (그 은덕이) 하늘같아 다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자식이 생명을 받을 적에 성명과 혈육이 모두 어버이가 남겨주신 것이다. 숨을 쉬어 호흡함에 기맥이 서로 통하니 이 몸은 나의 사유물이 아니요, 바로 부모께서 남겨주신 기운이다.
그러므로 시경에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수고하셨다" 하였으니, 부모의 은혜가 어떠한가. 어찌 감히 스스로 자기 몸을 소유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능히 항상 이 마음을 둔다면 저절로 부모를 향한 정성이 있을 것이다.
무릇 부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 한 가지 행동이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명령을 받은 후에 행할 것이요, 만일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상세히 설명을 드려서 승낙을 얻은 후에 행하되, 만약 끝내 허락하지 않더라도 제 의사대로 곧장 밀고 나가서는 안될 것이다.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춘 후에 부모의 침소에 나아가 기색을 낮추고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덥고 추운 것에 안부를 여쭙고,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 부모의 침소에 가서 이부자리를 보아드리고 덥고 추운 것을 살피며, 곁에서 모실 때에는 항상 화평하고 기쁜 안색으로 공경스럽게 응대하여 매사 제 성의를 극진히 하여 받들어 모시되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절하고 말씀드려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으로 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니, 만약 이렇게 세월만 보내다 보면 종내 부모를 모실 때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집안 일을 맡아 스스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을 다한 연후에야 자식된 직분을 바로 닦는 것이다.
만일 부모가 굳이 듣지 않으시면 비록 집안 일을 맡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뒤를 보살펴 드려서, 부모에게 잡수실 것을 갖추기에 극진히 하여 구미에 맞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 만일에 생각마다 부모 봉양에 있다면 산해진미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매양 왕연이 엄동설한에 성한 옷 한 벌도 없으면서 극진히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렸음을 생각할 때마다 감탄하는 눈물이 흐른다.
보통 아버지와 자식의 사이에 흔히 사랑이 공경보다 지나치니, 철저히 구습을 씻어버리고 그 존경함을 극진히 하여 부모가 앉거나 누워 계시던 곳에 자식이 감히 앉거나 눕지 않을 것이요,
부모께서 손님을 맞이하던 곳에서 자식이 감히 사사로운 손을 맞이하지 못하며, 부모께서 말을 타고 내리는 곳에서 자식이 감히 말을 타고 내려서는 아니 된다.
부모의 뜻이 만약 의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받들어 추호라도 어기지 말 것이요, 만일에 의리를 해치는 것이라면 화평하고 부드러운 기색과 말소리로 거듭해서 아뢰어 반드시 들으시도록 할 것이다.
부모께서 병환이 있으시면 마음으로 근심하고 기색이 저상되어 있으시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 오로지 의사에게 묻고 약을 지어 오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병환이 회복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 순간이므로 부모를 섬김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항상 제 능력을 다해 섬기면서 그래도 정성과 힘이 미치지 못하지나 않는가 하듯 해야 한다. 옛사람의 시에, "하루의 부모 봉양은 삼공의 부귀와 바꿀 바가 아니다."고 하였은즉, 이른바 "해를 아낀다."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격몽요결 후미는 별도로 제의(祭儀)를 붙였는데 시대적으로 효를 생활화하고 조상숭배 정신을 갖기 위하여 배려한 것이다. 또한 율곡은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에서는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를 떠밀어 넘어뜨리는 행위를 대과악이라고 하여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사형(私刑)을 함부로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계(契)에서는 범인을 관청에 고발하여 처벌을 받게 하고, 그 후에 계에서 제명하고 대화도 주고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모에게 낯을 붉히며 대드는 행위, 순종하지 않는 행위, 봉양하지 않는 행위, 제사를 엄숙하게 지내지 않는 행위는 그 범인을 불러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꾸짖고, 뜰에 세워 놓거나 따로 앉혀 놓았다.
또한 부모 앞에서 단정하게 앉지 않고 걸터앉거나, 소나 말을 타고 가다가 내리지 않는 행위도 그 사람을 불러다가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도록 하였다. 그러나 만일 불복하고 개과할 뜻을 보이지 않으면 관청에 고발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