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헌법 1조가 바뀌었다죠? "대한민국은 사고 공화국이다."라고요. 소위 문민정부의 출범을 전후로 해서 시작된 대형사고 대형참사의 행진이 드디어는 TK의 심장 대구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걸 불교에서는 인과 응보라던가 하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93년 1월 7일 충북 청주시 우암동 우암상가 아파트에서 액화 석유가스가 폭발하면서 5층 상가아파트가 무너져 주민 28명이 숨지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어 김영삼 대통령 취임 1개월 뒤인 93년 3월 28일 경부선 구포역에서 승객 600여명을 태운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 78명이 숨지고 163명이 부상당하는 한국철도 1백년 사상 최대의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또 그해 4월 19일에는 충남 논산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불이나 '발목이 묶여 있던' 입원환자 34명이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걸로 끝났나요? 7월 26일에는 하늘에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110명을 태우고 목포로 간 아시아나 항공소속 여객기가 좋지않은 기상상태에서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66명이 숨지고 44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해 10월 10일 전북 위도면 해상에서 승무원과 승객 400여명을 태우고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 훼리호가 침몰해 선장을 포함한 292명이 참사당하는 국내 최대의 해상 재난이 발생했군요.
해를 넘겨서도 사고행진은 끊이지 않습니다. '인재니, 예견된 사고니,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를 갖추겠다느니...' 한바탕 난리 법석을 떨고 잠잠해질 무렵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대형 참사가 또 발생했죠? 94년 10월 21일 출근 시간에 일어난 성수대교 상판 붕괴사고를 접한 국민들의 반응은 '그럴줄 알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고로 32명의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3일 뒤 충북 충주호에서 유람선 화재가 발생해 30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가 그와중에 또 발생합니다. 민심이 뒤숭숭해지고 '육해공에서 다 사고가 났으니 이제 사고날 곳은 땅속이다. 포자가 들어가는 땅속을 조심하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그러다 12월 7일 한밤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 마포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올해들어서도 2월 7일 한진해운 컨테이너 운반선에서 불이나 19명이 유독가스에 질식되 숨진 사고가 있었고 급기야는 4월 28일 오전 7시 50분경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네거리 지하철 공사구간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사망 98명 실종 3명 부상 121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고 말았습니다. 불과 2년 반만에 이 좁아터진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초 대형사고를 열거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이가 없는 일 아닌가요? 이걸 우연으로 보아 넘길순 없죠.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이런 사고가 근절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남한 사회가 걸어온 과거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댓가요, 그걸 통해 우리의 미래를 점검하게 해주는 가늠자 입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책임전가하고, 그러다 잘 잊어주는 국민들이니 세월이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계속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될 터이니 말이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사고들은 우리사회가 걸어온 지난날의 흔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명백한 심판과 더불어 사회구조의 일대변혁이 없이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시작된 잘못 끼운 단추가 시정되지 못하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씨에 이르는 동안 계속 증폭되고 확대된 결과가 지금 이런 양상으로 뻥뻥터지는 겁니다. 말로만 개혁하고, 행동으로는 취소하는 허약한 정부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들입니다. 세계화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또 다시 우리 국민들에게 가져다줄 고통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 그지 없읍니다. 우리 사회 전반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수 밖에 없는 질병에 걸려 있는데, 근본적인 치유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더큰 병을 유발시킴으로서 일시적 고통을 잊게하는 식의 처방으로는 도데체 희망을 가질수 없는 노릇이죠?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그저 남는 것은 돈, 권력, 명예 그리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현실, 사회구조 뿐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인간이니 생명이니 자연이니 하는 소중한 것들은 묵살되기 일쑤이고, 아니 오히려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회가 무었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잘아는 성경말씀 한군데를 읽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겼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기에 앞서 우리는 이 사건의 정황과 그 분위기를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안식일날 벌어졌습니다. 어디를 가나 들판에 밀이 무르익고 있었으니 5,6월 경쯤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한지도 오래! 그간의 고생이야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더더욱 안식일만되면 그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니 안식일을 잘 넘기기 위해 그전날 음식준비와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안식일 전날 장에가면 모든 물건이 비싸지고 그나마 물건이 딸려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지팡이 하나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말라 엄히 당부하셨으니 돈이나 음식을 미리 준비해 갖고 다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던 거죠. 이리되니 떠돌이 들에게 안식일이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것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하층민의 경우도 매 일반이죠!
안식일에는 밥을 굶기 일쑤였습니다. 그 전날 음식 준비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반겨주는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왠만한 부자가 아니고는 13명이나 되는 일행이 먹을 음식을 내놓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날에도 일행은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일행을 밀밭 사이로 끌고 들어가셨습니다. 뒤 따르던 제자들은 잘익은 밀이삭에서 풍겨나오는 냄세에 참을수 없어서 결국은 밀이삭을 잘라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바리새파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일을 합니까?' '안식일 법을 어기면 어찌되는지 알지요?' 음흉한 미소 뒤에 감추어진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죄는 절도죄가 아닙니다. 남의 밭이라도 낫을 대고 곡식을 자르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신23:26). 문제는 안식일에 추수할 수 없다는 규정입니다. 이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단 한가지, 죽음이었습니다(출31:14). 마카베오 시대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 때문에 안식일 법이 좀 부드러워 지긴 했어도 그 법의 냉혹함은 여전했습니다. 마카베오 시대 적국 시리아는 안식일에 만 공격해 왔고 당시 율법을 엄하게 지켰던 유대인들은 반항도 못한채 집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에 안식일 법을 그대로 지키다가는 민족이 멸절하게 되리라는 위기감이 고조되 랍비들은 안식일법에 예외 조항을 신설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 법을 어겨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상황은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꼼짝없이 안식일 법이라는 올무에 걸리고 만것입니다.
본래 안식일 법의 제정 취지는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휴식, 다시말해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인 것입니다. 출 23:12에는 이 법이 노예와 가축에까지 확장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6일동안 일하고 7일째는 쉬어라, 즐겨라. 그날에 일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아니 그런자는 죽어도 싸다.' 이것이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취지를 가진 이념이나 법이라도 똑똑하고 잘난놈들 손에만 들어가면 요상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랍비란 자들이 안식일법을 쉽게 풀어논다고 상세한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39가지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규정해놓은 것을 보면 대부분이 그들의 생활과 관계없는 일입니다. 처음 부분은 농사에 관계된 일로 파종, 쟁기질, 수확, 단으로 묶는 일, 타작, 키질등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빻기, 제분,반죽, 굽는 일, 털 깍기, 염색, 실꼬기, 사냥, 가죽손질 등등인데 랍비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들이었습니다. 39가지 금지 조항중 랍비에게 해당하는 것은 단 한가지 두글자 이상 쓰지 말라는 것 뿐입니다. 이런 안식일 법이니 하루 하루 벌어 사는 막노동 꾼들은 안식일이 되면 굶을 수 밖에요, 그러니 안식일이 어찌 기쁠 수 있으며, 그 날을 즐길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법 그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가진자들 입장에서 해석한 랍비들의 교활한 작태에 대해 반대한 것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것인데 몇몇 가진놈, 똑똑한 놈들 때문에 사람을 고통스럽게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오히려 짐이 된거죠! 율법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제정된 것인데 어느틈엔가 그 율법에 매여 종살이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본래 법의 취지를 깨닫게 하려 하신 것이 이 사건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모양이 되었습니다. 국가, 사회 조직, 법률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국민이 국가의 종이되어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권력자, 재벌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모든 구조를 바꾸어 놓고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게 부실해지기 마련이고 그 댓가는 국민의 희생으로 매꾸어 가게 되는 거죠? 얼마전 대형 부도 사건이 잇따를 때도 정작 실질적인 피해자는 소박하게 살아온 힘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 하느님 나라는 이런 힘없는 백성들이 활짝 웃는 나라입니다. 꼬깃 꼬깃한 주름살이 펴지고 해맑은 웃음이 피어나는 나라입니다. 주인과 종이 제자리를 찾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며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