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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양 발원문
삼보께 귀의하오며 법공양 올립니다
바라오니
능히 모든 생명을 구하며
능히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게 하며
능히 모든 생명을 널리 이익되게 하여 지이다
시원한 샘물이 목마른 자의 목을 축여주는 것 같이
추운 자가 불을 얻은 것 같이
아이가 어머니를 만난 것 같이
병든 사람이 의사를 만난 것 같이
이 법공양 공덕도 이와 같아서
모든 생명들로 하여금 괴로움과 병통을 여의게 하고
생사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지이다
이 인연 공덕으로
법공양을 만나는 모든 이웃들이
부처님의 바른 법을 깨달아
사람이 바로 부처님을 알게 하여 지이다
문수법공양회에서 보내주시는 염화실지에 위와 같은 법공양 발원문이 함께 들어있었다.
큰스님께서 매주 화요일 저녁, 대구 동화사의 한문불전승가대학원에서 금강경사가해를 강의하시는데 함께 가셨던 보살님들이 좋은 발원문이라고 챙겨오시고 염화실 분위기에 맞게 수정하여 정리하신 발원문이라고 했다.
‘매달 큰 행사다’라고 하신 16차 화엄법회 날, 빈 책상마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라는 법공양이 놓여있었다. 지난달 법회 시작 전에 저자이신 스님이 오셔서 새 책 소식을 전했는데 큰스님께서 기뻐하셨다. ‘내가 책을 써봐서 안다. 저자도 책을 다 사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손수 구입해서 법공양 하고 싶어 하셨다. 이번에 저자이신 스님이 280권의 책을 대중스님들에게 법공양 올리신 것을 고마워하셨다.
녹음하시는 학무거사님이 한문불전승가대학원에서 강의하시는 스님들의 녹음씨디를 가져오셨다. 불전승가대학원의 법회형식과 내용, 다른 스님들의 강의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셨다.
큰스님은 비염 때문에 봄내내 고생하셨는데, 오랫동안 비염으로 고생하신 스님과 치료법 이야기를 나누셨다. 한 번 똑같은 치료를 받고 싶어하는 스님에게 “그래? 내가 코피보살이라고 적어놨지” 하시며 핸드폰을 보여주셨다. 코에 침을 놓고 치료 하실 때 코피를 아주 많이 쏟아서 그렇게 번호를 적어놓으셨다고 하셨다. 효험이 있었는지 여름이 되자 비염이 나아졌다고 하셨다.
큰스님은 요즘 이동하시는 시간이 많아서 ‘운동을 마음에 찰 만큼은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날마다 꾸준히는 한다고 하셨다.
임원스님들이 8월에 있을 성지순례일정을 논의하셨다. 여행지 날씨를 잘 알고 계셨다. 더우면 지치고 스님들이 일반인보다 약하니 여행날짜를 10월 28일로 미루자고 하셨다.
“스님 저 왔습니다.” 하고 절을 올리시는 스님들께 “네에 왔어요? 한 번만 합시다.” 하고 합장하셨다. 오랜만에 오시는 스님들에게는 일일이 안부를 물으셨다.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BTN 엔지니어 거사님에게는 안보이면 제일 궁금하다고 격려도 하셨다.
6월 법회는 현충일 연휴였다. 문수선원 화엄회상의 자리가 여여하게 가득찼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그대 삶이 경전이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를 법공양 올렸다. 금강경 오가해 중에서 야보스님의 송을 무각스님이 번역하고 해석한 책이다. 무각스님은 처음부터 문수경전연구회에서 함께 공부한 스님인데 서울에서 강의도 많이 하고 해외포교 경험도 많다. 스님은 탄허스님의 손상좌이고 혜거스님의 상좌이다. 공부하는 집안 스님답게 알뜰히 공부를 했다. 후속으로 우리 대중 가운데서 이러한 책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 읽어보시고 포교와 전법에 많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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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萬善同歸中道頌
1. 菩提無發而發 2. 佛道無求而求
3. 妙用無行而行 4. 眞智無作而作
5. 興悲悟其同體 6. 行慈深入無緣
7. 無所捨而行檀 8. 無所持而具戒
9. 修進了無所起 10. 習忍達無所傷
11. 般若悟境無生 12. 禪定知心無住
13. 鑒無身而具相 14. 證無說而談詮
15. 建立水月道場 16. 莊嚴性空世界
17. 羅列幻化供具 18. 供養影響如來
19. 懺悔罪性本空 20. 勸請法身常住
21. 迴向了無所得 22. 隨喜福等眞如
23. 讚歎彼我虛玄 24. 發願能所平等
25. 禮拜影現法會 26. 行道足躡虛空
27. 焚香妙達無生 28. 誦經深通實相
29. 散華顯諸無着 30. 彈指以表去塵
31. 施爲谷響度門 32. 修習空華萬行
33. 深入緣生性海 34. 常遊如幻法門
35. 誓斷無染塵勞 36. 願生惟心淨土
37. 履踐實際理地 38. 出入無得觀門
39. 降伏鏡像魔軍 40. 大作夢中佛事
41. 廣度如化含識 42. 同證寂滅菩提
--永明延壽禪師(904-975) 萬善同歸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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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많고 많은 글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짤막하면서도 불교의 핵심을 담고 있는 유명한 글들 중에 불교의 3대 서문인 왕복서와 일물서와 마방서가 있다.
청량스님이 화엄경의 서문으로 지은 왕복서(往復序)와 함께 함허스님의 금강경오가해 서문인 일물서(一物序)는 그 지견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뛰어난 글이다. 또 마방서(馬防序)는 임제록의 서문인데 마방이라고 하는 뛰어난 학자가 쓴 글이다.
이런 서문 말고도 경으로는 반야심경, 보현행원품, 보안장, 보문품 등이 짧으면서도 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불교인에게 익숙한 발심이나 불도, 6바라밀, 부처님께 예배하는 문제, 향을 사르는 문제, 불사를 하는 문제 등등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불교적인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입장을 짧은 글속에 다 표현한 것으로써 지금 소개할 만선동귀중도송(萬善同歸中道頌)이라고 하는 게송을 지나갈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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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동귀중도송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904~975)가 지은 만선동귀집(萬善同歸執)의 마지막 결송이다. 만선동귀집은 6권짜리 책인데 그 내용을 결론적으로 총정리한 게송이다.
여기에는 온갖 불교적 선(善)과 수행이 결국은 중도(中道)로써 돌아간다고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중도에 입각해서 보시를 하고 발심을 하고 불도를 닦고 선정을 닦고 인욕을 해야지, 중도적인 입장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바람직한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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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도를 통하시고 이론에 밝으셔서 그 나름대로 불교를 아는 것을 정리한 분이 수천 수백만에 이른다.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는 전에 나눠드린 적이 있는 나의 책『보살계를 받는 길』의 원문인 『수보살계법서』의 저자인데 그 가르침만 봐도 불교적인 안목이 최고로 높은 분이다.
내가 성철스님을 모시고 살 때 ‘어떻게 하면 불교를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종경록을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읽어라’ 라고 말씀하셨다. 『종경록(宗鏡錄)』 이라고 하는 책은 100권인데 역시 영명연수선사의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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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세에 불교를 제대로 알고 정리해서 이론적으로 소견을 표현한 분을 탄허스님과 성철스님을 꼽는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를 다 알고 도도 높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그 소견을 체계를 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탄허스님과 성철스님에게는 당신들의 공부를 정리하고 강의한 책과 테이프가 있다.
성철스님은 일체 불교를 ‘중도’라는 한마디로 회통하였다. 성철스님의 유명한 『백일법문』도 처음부터 끝까지 중도로써 일관하였다. 또 당신 스스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중도광(中道狂)이라고 한다’는 말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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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라는 것이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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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에는 원리가 있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와 있는 것, 이런 공부 하는 것, 한 송이 꽃이 여기 꽂혀 있는 것에도 다 원리가 있다. 그 원리를 이름 해서 중도(中道)라고 한다.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 부처님의 설법에도 모두 원리가 있는데 역시 그 원리의 이름이 중도이다. 오늘 우리가 법공양으로 받은 금강경도 전부 중도(中道)이야기이다.
모든 존재, 모든 수행은 모두 중도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의 원리에 맞게 이해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수행이다. 중도의 원리에 맞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고 성공한 삶이며 해탈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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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동귀중도송(萬善同歸中道頌)은 짧은 글속에서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중도로써 해석한다. 중도라고 하는 원리와 그 원리에 맞게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을 설명한다. 내가 많은 글을 보았지만 짧은 글 속에 불교 해석을 이렇게 명확하게 해놓은 글을 보지 못했다. 거의 첫 손가락을 꼽는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글이기 때문에 이 내용만 우리가 잘 이해하고 터득한다면 포교를 하는 일이나 법문을 하는 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활 하는데 있어서도 큰 지침이 된다.
이 원리를 통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걸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며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불교를 아는 분들에게 기회만 되면 이 글을 소개해 주고 싶다.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화엄경 공부를 시작할 때도 언젠가 이 글을 소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유인물로써 만선동귀중도송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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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의 번호는 내가 임의대로, 찾기 쉽도록 매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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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리무발이발(菩提無發而發) :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한다. 첫 게송으로 보리심을 발하는 내용이 나왔다. 우리가 불교에 귀의한 것이 전부 발심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다. 장황하게 말한다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세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리심을 발하는데 발했다고 하는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흔적은 있어서도 안 된다. 가만히 추궁해 들어가 보면 발심한 것이 없다. 발심은 하지만 발함이 없이 발한다. 바꾸어서 말하자면 발해도 발함이 없고, 발함이 없이 발한다. 중도송은 전부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2. 불도무구이구(佛道無求而求) : 불도를 구하는데도 구함이 없이 구한다. 우리가 보리심을 발해서 불도를 구한다. 불도를 구한다고 간판을 걸고 무엇인가 굉장히 하는 척을 한다. 특히 참선하고 계를 잘 지키는 이들을 보면 생색을 내고 모양을 낸다.
중노릇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중노릇 함네’하는 사람들은 결국 말뚝신심이 많다. 멀리 못 간다. 중노릇 역시 함이 없이 하는 중노릇이 제대로 된 중노릇이다.
‘불도를 구하는데도 구함이 없이 구한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한 시간을 설명해도 부족하다.
3. 묘용무행이행(妙用無行而行) : 아름다운 행위는 행함이 없이 행한다. 불도를 구한 다음으로는 묘용이 나왔다. 묘용은 아름다운 행위이다. 어디 가서 봉사를 잘 하고 보시를 잘 하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을 잘 하는 일은 다 아름다운 행위이다. 아름다운 행위란 보살행이고 정법행이며 포교행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행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행위에 ‘한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제대로 된 행이 아니다. 행함이 없이 행하는 것이라야 제대로 된 행위이다.
4. 진지무작이작(眞智無作而作) : 지혜를 지음이 없이 짓는다. 진지(眞智)는 불지(佛智) 혹은 깨달음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지음이 없이 짓는다. 지혜가 ‘나에게 있다’‘나에게 없다’고 하면서 무언가 상(相)이 있고 흔적이 있다면 지혜가 아니다.
5. 흥비오기동체(興悲悟其同體) : 비심을 일으키되 나와 동체임을 깨닫는다. 사무량심도 자(慈) 비(悲) 희(喜) 사(捨) 네 가지로 나누는 것처럼, 자비 역시 자(慈)와 비(悲), 둘로 나눠서 이야기 한다. 흥비(興悲)라는 것은 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심은 연민심이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며 고통 받는 중생을 슬프게 여기고 애석해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비심은 상대와 내가 한 몸이며, 나를 보살피듯이 상대를 보살피는 마음이다.
비심을 일으키되 나와 동체(同體)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6.행자심입무연(行慈深入無緣) : 자(慈)를 행하되 무연(無緣)까지도 깊이 들어간다. 자(慈)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오로지 사랑을 베푸는 마음이다.
우리는 보통 지연과 학연을 따지고 불자인가 비불자인가를 따진다. 나와 뭔가 관계가 있고 인연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교환한다. 그러다가 사기도 당한다. 사실 그런 조건을 마음속에 갖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불교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까지도 깊이 들어간다.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 주고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한다.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일은 지지배배 노래하는 새들이 더 잘한다. 그런데 불교는 인연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깊이 들어간다. 이 차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다. 그러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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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소사이행단(無所捨而行檀) : 여기부터는 6바라밀이 나온다. 버리는 바 없이 단(檀)바라밀을 행한다. 단(檀)은 보시 바라밀이다. 누구에게 희사를 해도 희사하는 바 없이 희사하는 것이다. 무상(無相)이나 무주상(無住相)과 같은 말로 이해하면 된다.
8. 무소지이구계(無所持而具戒) : 가지는 바 없이 계를 구족한다. 이것은 6바라밀 중에 지계이다.
9.수진료무소기(修進了無所起) : 정진을 닦되 일어나는 바 없음을 깨닫는다. 요(了)자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정진은 뭔가 열심히 하는 것, 뭔가 마음으로부터 아주 활발한 작용이 있는 것이다. 일어남이 있는 것인데 일어난 바가 없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마음속에서 열심히 정진하지만 작은 물결 하나도 일어난 사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다.
10. 습인달무소상(習忍達無所傷) : 인욕을 익히되 상하는 바 없음을 통달한다. 우리는 뭔가를 참고 참는 사이에 상한다. 그렇게 상하는 것을 스트레스라고 한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는 사이에 우리는 정말 많은 상처를 받는다.
불교적인 인욕은 ‘참자 참자’고 해서 아등바등 노력을 기울이며 참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전혀 참는다는 흔적이나 작용이 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까닭이 없다. 그렇게 할 때 상하는 바 없음을 통달한다.
참자고 할 것도 없을 때 제대로 된 인욕이다.
11. 반야오경무생(般若悟境無生) : 반야는 경계가 본래 생함이 없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지혜는 본래로 생멸이 없는 도리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12. 선정지심무주(禪定知心無住) : 선정은 마음이 머무는 바 없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어딘가에 머무는 것을 선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지 화두를 들든지 끊임없이 흘러가고 도망가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색이다.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나고 흘러간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우리 마음 됨됨이가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 아무리 붙들어 매어도 흘러가는 것이 마음인데 붙들어 매질 리가 없다. 그런 사실을 알면 아등바등 마음을 어디 한 곳에 붙들어 매려던 것을 다 놓아버릴 수가 있다. 자유로워진다. ‘마음은 이렇게 자유로운 것이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 선정이고 그 때부터는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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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감무신이구상(鑒無身而具相) : 우리의 몸은 본래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임을 환히 비춰서 모양새를 잘 갖춘다. 거울 감(鑒)자는 본다, 비춰본다는 뜻이다. ‘형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소리를 흔히 불교에서 잘 쓴다. 어쭙잖은 수좌생활을 할 때 함부로 옷을 입고 모양새도 함부로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상이나 무신의 도리를 잘 알지만 모양을 잘 갖추고 행위를 잘 갖추면서 산다.
그런데 형상을 갖추고 형식을 갖춘다고 해서 무신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 안다.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으레 관세음보살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몸을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보는 것이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의 안목이다.
관세음보살은 누구보다도 무신을 아는 분이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비싼 영락 구슬을 걸쳤고 가장 비싼 옷을 입었고 가장 화려한 화장을 했다. 우정 멋을 가장 잘 부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나타내고 계신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그것이 구상(具相)이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이다. 이 한 구절만 해도 오늘 큰 소득이다.
14.증무설이담전(證無說而談詮) : 말할 것이 없는 도리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치를 말한다. 끄트머리 전(詮)자는 이치라는 뜻이다. 진리는 한 마디도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도 마지막에 가서는 ‘나는 한 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고 하셨고, 과거 깨달으신 모든 분들이 다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깨달은 분들은 말할 것이 없는 도리를 환히 알면서 이치를 누구보다도 많이 말씀하셨다. 이치를 말하되 사실은 말할 것이 없는 도리를 알고 있어야 된다. 대단한 내용이다.
15. 건립수월도량(建立水月道場) : 우리 모두는 다 각자 나름대로 크고 작은 불사를 하고 있다. 도량을 건립하고 있다. 그런데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는 사실을 알고 건립해야 된다. 이것도 참 좋은 말이다. 우리가 축원문에도 청정도량 수월도량 이런 말을 한다. 불국사 같은 아름다운 사찰을 여러 수백 개 수천 개를 건립하더라도 그것은 물에 비친 달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건립해야 된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실재하지도 않는 것이라면 건립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실재하지 않음을 알고 건립해야 제대로 건립하는 것이다.
‘아 이건 실재하는 것이다’ ‘무너지면 큰일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고 건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에 가면 대작몽중불사(大作夢中佛事)라는 말도 나온다. 꿈에서 하는 불사를 크게 지으라는 말이다.
16. 장엄성공세계(莊嚴性空世界) : 성품이 공(空)한 세계를 장엄한다. 열심히 불사를 해야 된다. 자기가 사는 방이라든지 절이라든지 도량이라든지 온갖 것을 사는 동안 잘 꾸며야 된다. 꾸미되 텅 비어서 공(空)한 도리를 알고 장엄하는 것이다.
성공세계임을 알고 마음껏 땅도 사들이고 절도 사들이고 산도 사들이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내놓을 때는 척 내놓고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떠날 줄을 안다.
공한 줄을 알고 장엄하면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이것은 영원한 것’ ‘이것은 내가 애써서 한 것’ 이라고 하니까 그만 다 해놓고도 복을 까먹고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간다.
17.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供具): 환화와 같은 공양구라는 사실을 알고 나열한다.
참 대단한 말씀이다. 우리가 부처님 앞에 공양구를 많이 올린다. 초파일만 해도 엄청난 공양구를 올린다. 그런데 환화와 같은 공양구라는 사실에 투철해야 된다. 그렇게 알고 열심히 올리고 정성껏 올리고 많이 올려야 된다. 환화와 같다고 해서 하나도 안올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그것은 또 안 되는 것이다.
18. 공양영향여래(供養影響如來)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린다. 환화공구를 나열해서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무슨 공양을 올리겠는가, 세속적인 지식과 논리로 보면 모순덩어리이다. ‘올릴 데가 어디 있으며, 받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뭐 하려고 올리느냐’ 이런 소리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것이 중도적으로 공양구를 나열하고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19. 참회죄성본공(懺悔罪性本空):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한 줄을 알고 참회한다. ‘본래 공한데 무슨 참회할 것이 있느냐’ 그런데 본래 공한 줄을 알고 참회해야 진참회이다.
참 깊은 의미이고 진리의 말씀이다. 참회는 중요하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 참회를 하고 있다. 이 짧은 게송 속에 사실 불교 전체 용어가 거의 다 들어 있다.
20. 권청법신상주(勸請法身常住): 항상 있는 법신을 ‘오래 계십시오’ 하고 권청한다.
법신은 영원한 존재이고 모든 존재의 원리이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 것이고, 부처님과도 관계없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부처님, 오래 계십시오’ ‘법신이여 오래 계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안목과 자세이다.
21. 회향요무소득(迴向了無所得):얻을 바 없음을 요달하고 회향한다. 회향이라고 하면 뭔가 소득이 있고 결실이 있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보살계를 설하고 회향을 하든지 경전을 공부해서 회향을 하든지 한 철 참선을 하고 회향을 하든지 무엇을 회향하든지 간에 회향할 때는 소득과 결실을 바라고 회향한다. 또 우정 그 소득을 한마디씩 피력해보라고도 한다. 옛날에 극락암에서는 수좌들에게 운자까지 내려주어서 한철 공부한 소득을 시로써 표현해 보라고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소득을 평가하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소득임을 알고 회향한다. 무소득이 중요하다고 반야심경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다.
22. 수희복등진여(隨喜福等眞如) : 복이 진여와 같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한다. 이런 말도 불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잘한 것, 공덕을 따라서 기뻐한다. 그 공덕은 다른 말로 하면 복이다. 그런데 보시를 얼마나 했고, 좋은 일을 얼마나 했으며, 봉사를 얼마나 했는가, 등등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의 공덕은 사람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진여의 복과 비교한다면 천만 분의 일도 안 된다.
양무제가 절이나 탑을 많이 세우고 스님들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수십 만의 스님들을 키워냈다. 자신의 공덕을 달마스님에게 물었더니 ‘공덕이 하나도 없다[소무공덕(所無功德)]’고 달마스님이 말하였다. 양무제는 자신이 불사를 한 공덕만을 보고 있었고, 달마스님은 진여의 공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진여의 공덕에 비한다면 해인사 같은 절을 천 개 만 개 지은 공덕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23. 찬탄피아허현(讚歎彼我虛玄): 피아가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찬탄해야 된다. 피(彼)는 남이다. 찬탄은 남을 찬탄하는 것이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다, 공부를 얼마만치 했다고 하는 찬탄도 하지만 그것이 몇 푼어치가 되겠는가. 본래 서로가 무아요 공이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찬탄해야 된다. 찬탄할 거리는 그것이다. ‘당신은 텅 비었구료’ ‘당신은 공하구려’이렇게 알고 찬탄해야 그것이 진짜 차원 높은 찬탄이다.
24. 발원능소평등(發願能所平等): 나와 부처님이 본래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발원한다. 발원하는 나는 능(能)이고 발원의 대상인 부처님은 소(所)이다. 우리가 부처님 앞에서 발원을 하면 부처님이 다 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상식으로는 발원하고 축원하는 우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미물과 같은 중생이고 부처님은 저 하늘과 같은 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발원하는 나나 그 발원을 듣고 있는 부처님이나 궁극적으로는 평등한 존재이다. 여기는 그런 차원이다.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하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발원하는 것이다.
25. 예배영현법회(禮拜影現法會):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로 이해하고 그러한 법회에 예배를 한다. 그림자에게 예배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법회를 그림자로 이해하고 예배하는 것이 중도적인 안목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소견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26.행도족섭허공 (行道足躡虛空) : 발이 허공을 밟는 것으로 이해하고 행도를 한다.
예불하며 법당을 돌고 부처님을 돌고 탑을 도는 것을 행도라고 한다. 그런데 행도를 하면서 ‘내가 부처님을 돈다’ ‘법당을 돈다’ ‘탑을 돈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허공을 밟는다’라고 생각을 해야지 제대로 행도를 하는 것이다.
요즘에 지은 법당은 사람들을 많이 수용하기 위해서 부처님을 벽에 바싹 붙여버린다. 전통적으로 옛날 법당은 부처님이 3분의 1쯤 앞에 모셔져 있다. 부처님 뒤로 행도를 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으레 행도를 했었다.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도 돌고, 법당도 돌고, 혹은 탑을 돌기도 했다. 방에 가만히 앉아서 화두를 들어봐야 제대로 안 들린다. 염불을 하든지 경을 외우든지 화두를 들든지 제일 좋은 것이 행도이다. 도량을 돌면서 하면 망상이 덜 떠오르고 졸음은 얼마든지 쫓을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예불을 할 때 부처님을 뱅뱅 돌면서 행도를 한다.
내가 은해사 승가대학원 스님들과 조계종 스님들을 대표해서 중국의 광화사에서 한 일주일간 생활한 적이 있다. 그 때 예불을 하면 두 시간을 했다. 한 시간은 부처님 앞에서 하고 한 시간은 행도를 했다. 법성도를 돌기도 하고 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염불을 하면서 도니까 신심이 나고 좋았다
경전에 보면 우요삼잡(右繞三帀)이라는 말도 나오고 입법계품에 가면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무량잡(無量帀)하여 한량없는 바퀴를 돌고 떠났다고 하는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온다. 그것 역시 행도이다. 그런데 그렇게 돌았다고 해서 ‘나는부처님을 몇 바퀴 돌았다’고 하는 것이 관념에 남아있으면 수행이 아니다.
나는 예전에 광화사에서 행도한 것을 마음에 두고 그 경험을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마음에서 사라졌어야 옳다. 행도는 수행법의 하나이므로 이런 전통은 살려야 한다. 법당에 부처님을 모실 때도 3분의 1정도는 앞으로 모셔서 행도할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27. 분향묘달무생(焚香妙達無生): 분향을 통해서 무생의 도리를 통달한다. 향을 피우면서 무생의 도리를 안다. 우리는 무심코 좋은 향이니까 부처님 앞에 한 개비 사르고, 악취를 없애려고 또 한 개비 향을 사른다. 그런데 향을 사르면 연기는 피어오르고 향 자체는 차츰차츰 사라진다. 연기 역시 향이 다 탈 때까지는 사라졌다 생기기를 반복한다. 향기와 연기가 짧은 시간에 생멸하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보면서 우리의 생사, 우리의 생멸을 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멸하고 생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생(無生)이라고 하는 사실을 묘하게, 깊이 있게 통달하는 것이 향을 사르는 의미이다.
28. 송경심통실상(誦經深通實相): 모든 존재의 실상의 이치를 깊이 통달하기 위해서 경을 공부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을 읽는데 그 이유는 실상의 이치를 깊이 통달하기 위해서다.
29. 산화현제무착(散華顯諸無着) : 무집착의 도리를 산화로써 보인다. 요즘 법회에서는 부처님 앞에 꽃을 꽂아 놓지만 경전에 보면 부처님 앞에 꼭 산화를 하였다. 전통적으로는 꽃을 흩는 산화가 원칙이다. 꽃을 뿌리면 땅에 떨어져서 착(着)이 되지만, 본래 꽃을 흩는 산화의 의미는 무집착이다.
모르는 사람은 산화 의식 후 꽃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도가 높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는 사람에게 꽃이 붙어있다.
30. 탄지이표거진(彈指以表去塵) : 탄지로써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표한다. 탄지는 두 손을 이용하여 한쪽 손등 위에 다른 한쪽 손가락을 퉁겨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안 하는데 중국사찰에서는 길을 가면서도 탄지를 하고 화장실 앞이나 남의 방 앞에서도 노크대신 탄지를 한다. 신호의 의미도 있지만, 정신을 일깨우는 수행의 한 방법이다. 졸음이 와도 탄지를 해서 졸음을 깨우고 번뇌가 일어나도 탄지를 해서 번뇌를 쫓고 망상이 일어나도 탄지를 해서 망상을 쫓는다. 탄지로써 번뇌나 망상 졸음을 모두 제거하는 것을 표한다.
31. 시위곡향도문(施爲谷響度門) : 골짜기에서 울려나는 메아리와 같은 자세로써 바라밀을 행한다. 시위는 우리가 하는 행위를 말한다. 도문(度門)은 6바라밀이다. 불자의 행위는 무조건 6바라밀이다. 화엄경에서는 10바라밀을 말하는데 부연하면 만행이 된다.
그래서 육도만행이라는 표현을 한다. 여기는 육도만행을 나눠서 도문이라고 하는 6바라밀 내지 10바라밀을 먼저 이야기 하고 아래에 온갖 수행인 만행을 이야기 한다.
32. 수습공화만행(修習空華萬行) : 없는 꽃처럼 만행을 행한다. 공화는 헛꽃이고 없는 꽃이다. 경을 보거나, 부처님께 꽃을 올리고, 예배를 하고, 청소를 하고, 공부를 하러 오고 가는 일이 모두 다 만행이다. 운전하는 것도 목적이 공부하는 일이고 수행하는 일이라면 역시 만행이다. 그러한 만행을 없는 꽃인 허공에 있는 꽃처럼 수습한다.
이렇게 되어야 중도적으로 만행을 하는 것이다. 제대로 꿰뚫어 보면 전부 중도적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도적으로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중도적으로 예불을 하고 중도적으로 찬탄을 하고 중도적으로 향을 사르고 중도적으로 경을 읽고 중도적으로 탄지를 한다. 전부 중도적으로 하는 것이고 또 중도적으로 해야 옳다.
33. 심입연생성해(深入緣生性海)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간다. 바다에 큰 바람이 불면 큰 물결이 치고 작은 바람이 불면 작은 물결이 친다. 바람이 동쪽에서 불면 물결은 서쪽으로 가고, 서쪽에서 불면 동쪽으로 물결이 간다. 인연에 따라서 그러한 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 역시 전부 인연에 따라서 생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중도송을 설명하면 그에 따라 우리 마음에 물결이 일어난다. 또 화엄경 법문을 듣거나 보면 그에 따라서 마음의 물결이 일어난다. 누가 좋은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웃기는 말을 하면 웃는다. 기분 나쁜 말을 하면 금방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한다. 한 순간 한 순간 마음 작용은 전부 인연에 의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이 일어난다.
인연으로 인해서 생기는 성품의 바다이다. 모든 성품의 원리는 전부 그렇다. 이 도리에 깊이 들어가야 된다. 이 한 구절이 경전 한 권의 의미이다. 참 좋은 법문이다.
34. 상유여환법문(常遊如幻法門) : 환과 같은 법문에 항상 논다. ‘환과 같은 법문인데 뭐하려고 거기에서 노는가,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달리 어디에서 가서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 환과 같은 법문이지만 거기에서 항상 놀 줄 아는 것이 불자이고 수행자이다.
우리가 그 동안 화엄경을 공부했지만 남는 것이 없다. 남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된다. 여환법문이기 때문이다. 여환법문인 줄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항상 노는 것 말고는 달리 가치 있는 일이 없다. 이것이 최고의 가치이다. 그런 자세가 중도적으로 법문을 아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여러 스님들이 포교 일선에서 이런 대목으로써 신도님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면 일 년 양식은 충분히 될 것이다.
35. 서단무염진로(誓斷無染塵勞) : 물듦이 없는 번뇌를 맹세코 끊는다. 물듦이 없다는 것은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본래 깨끗하다는 뜻이다. 깨끗한 번뇌라는 말이 우습지만 본래 끊을 것이 없는 번뇌라는 사실을 알고 맹세코 끊는다는 뜻이다.
그 깨끗한 번뇌를 맹세코 끊는다. 번뇌에 물든 적은 없다. 그렇지만 끊어야 된다.
36. 원생유심정토(願生惟心淨土) : 유심정토(惟心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영명연수선사가 염불을 많이 주장하셨기 때문에 염불종에서는 영명연수선사를 초조(初祖)로 모신다. 그래서 영명연수선사는 법안종이라고 하는 선종의 3대 조사이고 염불종의 종주이다.
여기서는 수행의 한 방편으로써 머리로는 부처님을 그리고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되뇌며 몸은 법당에 앉거나 탑을 도는 것이 제대로 하는 수행이라고 가르친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 스님들은 신도님들이 염불을 할 때 ‘우리 절 관세음보살님을 기억하세요’라고 가르쳐야 한다. 머리는 각자 사찰의 관세음보살을 기억하고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고, 법당에 앉거나 절을 하면 신구의 3업을 제대로 갖추는 기도가 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관세음보살만 부르라고 하니까 머릿속에는 놀던 것, 싸우던 것, 온갖 망상이 떠오르면서도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그렇게 하면 기도가 될 리 없다.
물론 관세음보살이 아닌 절의 다른 주불이나 불상을 기억해도 된다. 또 꼭 우리 절의 관세음보살이 아니라도 석굴암관세음보살도 좋다. 어느 곳의 부처님이든지 기도를 할 때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떠올리면서 입으로도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아주 바람직한 기도이다. 이러한 것이 관상법(觀相法)이고 관행(觀行)이다.
37.이천실제이지(履踐實際理地) : 진리의 땅을 밟는다. 밟을 이(履) 밟을 천(踐)자이고 실제이지(實際理地)는 진리의 땅이다. 밟고 다니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의 땅을 밟고 다닌다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은 진리의 땅이고, 나는 진리를 밟고 있다.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눈으로 보면 그것이 사실이다.
38. 출입무득관문(出入無得觀門) : 얻음이 없는 관문에 출입한다. 옛날에는 흔히 관문이나 관행(觀行)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 지관(止觀)이다. 위빠사나나 참선이 모두 관이고 염불도 역시 관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을 하지만 그것을 통해 뭔가 얻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얻음이 없는 관문을 출입한다.
39. 항복경상마군(降伏鏡像魔軍) :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 받는다. 깊이 있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마군을 항복 받는다’라고 상(相)에 떨어져서 일차적인 유(有)의 견해로만 본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有)와 무(無)가 전부 융통자재 하는 입장으로 이야기 한다.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이라면 항복 받을 것도 없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란 내가 그 앞에 서야만 생기기 때문이다. 마군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런 존재이다. 뚜렷하게 뭔가가 있어서 우리의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군이라도 궁극적으로는 항복 받아야 된다.
40. 대작몽중불사(大作夢中佛事) : 몽중불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불사를 지어야 된다.
참 좋은 말이다. 몽중불사라고 해서 손과 발을 묶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도량에 풀도 뽑지 않고, 기와가 떨어져도 ‘얼마 안 있다가 이 절에서 나갈 건데’ 하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절을 맡아 놓고, 벽이 다 떨어져도 그냥 내버려두고, 어느 방에 비가 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면 안 된다. 열심히 불사를 해야 된다. 대작불사(大作佛事)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 대작불사가 몽중불사라고 하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열심히 불사를 하지만 몽중불사라고 하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불사를 한다.
41. 광도여화함식(廣度如化含識) : 환화와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한다. 함식(含識)은 중생을 말한다.
42. 동증적멸보리(同證寂滅菩提) : 다 같이 텅 비어서 고요한 깨달음을 함께 증득한다.
이것도 설명할 거리가 많은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예화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은 각자 스님들에게 맡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서 잘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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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 경전으로써 이보다 더 함축되고 깊이 있는 내용이 없을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내용이어서 오늘 말씀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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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혜명화님, 창에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열심히 올리시는 中...ㅎㅎ 고맙습니다. _()()()_
아아 반갑습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지난 주말엔 아버지 생신 모임으로 가족이 모두 모였었는데, 진짜 생신은 내일이어서 다시 또 가족이 낮에 다 모이기로 했습니다. (남자들 빼고 
여자들만 오겠네요^^
) ......아버지 월급날은 매
17일이었는데 외상값을 갖다 주라고 바로 옆집에 저를 심부름 시키곤 하셨어요. 그러면 너무너무 마음씨 좋은 '금이엄마'는 부피가 큰 과자를 아무거나 덥석덥석 집어서 저에게 주곤 하였어요. "참 예쁘다"는 말씀도 잊지 않고요...또 잊지 않으신 말씀은 "나도 
덩이 처럼 예뻤다"는 말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오늘은 뵙고 싶네요. 어머니랑 친하셨거든요. ^^
'만선동귀중도송(萬善同歸中道頌)'특
한 단어와 말로 씌여진 것도 아닌데 읽을수록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날씨도 더븐데 참으로 고맙습니다
_()()()_
중도에 입각해서 보시를 하고 발심을 하고 불도를 닦고 선정을 닦고 인욕을 해야지, 중도적인 입장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바람직한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 혜명화 님, 잘 계시지요
수진료무소기(修進了無所起) : 정진을 닦되 일어나는 바 없음을 깨닫는다...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永明延壽禪師-萬善同歸集-중도적인 입장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바람직한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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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 한결같이 오르내리시면서 녹취하시고, 까페에 올려서 다시 공부 할 수 이게 해 주시니, 정말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이 말 밖에는...
妙用無行而行...아름다운 행위는 행함이 없이 행한다 .참회하는 중입니다.혜명화님





同證寂滅菩提... 다 같이 텅 비어서 고요한 깨달음을 함께 증득한다..혜명화 님! 너무 수고하셨어요..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_()()()_
밟고 다니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의 땅을 밟고 다닌다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은 진리의 땅이고, 나는 진리를 밟고 있다.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눈으로 보면 그것이 사실이다. ,,,_()()()_
짧은 글 속에 불교 해석을 명
하게 해놓은 첫 손가락에 꼽을 글...萬善同歸中道頌(만선동귀중도송)...
녹취 참 고맙습니다. _()()()_
중도의 원리에 맞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고 성공한 삶이며 해탈의 삶이다...혜명화님, 수고하셨습니다. _()()()_
_()()()_
혜명화님! 반갑습니다. 매번 잘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_()()()_
_()()()_ 감사합니다.
그림 한편이 너무 좋아서 바탕화면에 올려 봅니다.
비오는 장마중에도 청량한 기운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_()()()_ 혜명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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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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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
妙用無行而行......_()()()_ 고맙습니다.
誦經深通實相...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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