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언양의 위치는 상북면 명촌리 일대 지화마을 추정 고려말인 1391년 간월산 기슭 떠나 현재위치 읍성 축성 올 11월 KTX 역사 개통으로 교통 요충지 옛 명성 회복
▲ 1832년에 제작된 경상도읍지 언양지도. 화장산이 언양읍성의 뒷산으로 그려졌고 읍성은 산기슭에 있는 것처럼 묘사됐다.
올 11월 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이 완전 개통되면 울산도 고속철시대를 맞게 된다. KTX 울산역 개통은 울산 전역은 물론 서부지역 도시 및 관광·산업 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특히 고속철 역사(驛舍)가 들어선 언양은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도시 기능도 지금까지의 단순한 교통 분기점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울산 관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KTX 시대 개막은 언양을 비롯한 울산이 하나의 지방도시에서 우리나라 중심도시로 성장할 기회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국의 다른 도시나 지역과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도시 경쟁력은 시민 욕구를 만족시키며 다른 도시와 차별적이고 매력적인 조건을 얼마나 잘 창출해
▲ 1971년 언양시가지 전경. (언양읍지 수록사진)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도시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요인은 사회·경제·교육·문화 등 모든 측면에 걸쳐 있지만, 그 중에서도 도시 이미지 제고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지역문화는 역사적인 보편성과 지역적인 특수성이 결합되어 나타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KTX시대 개막을 계기로 울산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될 언양의 도시 이미지나 정체성 정립도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지역문화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사실 언양은 국내 여느 도시 못지않은 천년 이상 형성과정을 거친 전통도시로 오 백년 이상의 나이를 먹은 읍성(언양읍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언양의 중심은 어디였을까? <삼국사기>에 초기 언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헌양현(巘陽縣)은 본시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742~765년)이 헌양(巘陽)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불린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언양은 거지화현(居知火縣)이었다가 헌양(巘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대 언양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지화마을.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이 거지화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서 지금의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일원 ‘지화마을’을 들고 있다. 이 지화마을은 상북면 서쪽에 솟은 간월산 동쪽기슭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동쪽에 남천(南川·태화강 상류)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이름은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언양지역의 테두리 안에 위치해 있는 ‘지화(知火)’라는 이름의 마을이 거지화(居知火)와 관련이 깊은 곳임에 틀림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거지화’는 ‘지화’라는 마을의 이름만 남기고 현재의 언양읍 지역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 그리고 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언양읍성이 만들어졌다.
그러면 왜 언양의 읍치(邑治)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을까. 현재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읍성 입지에 대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하여 배산임수(背山臨水) 원리를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고대 거지화현의 중심지였던 지화마을의 입지를 살펴보면 간월산의 동쪽기슭에 있지만 산이 남서쪽으로 비켜있고 남천도 마을 앞이 아니라 옆으로 흘러 배산임수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옮겨온 지역인 현재의 언양읍성도 배산임수라는 경관 틀에 비춰보면 잘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에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는 화장산(花藏山)이 언양읍성의 뒷산으로 그려져 있고 읍성은 그 산의 기슭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고지도는 한 마디로 개념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화장산은 언양읍성의 북서쪽으로 비켜나 있고 읍성 뒤편으로는 개방된 평지가 위치한다. 이러한 입지적 특성은 뒷산을 배후로 평산성(平山城)의 형태를 띠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 고려 말~조선시대에 축조된 경상도 지역 읍성을 살펴보면 재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경상도의 읍성은 모두 46곳이며 평지에 위치한 읍성은 언양읍성을 비롯해 16곳인데 이 평지읍성 대부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이다. 따라서 평지에 입지한 읍성은 고식(古式)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풍수지리가 산에 의탁하고 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 말~조선 초기에 축조된 읍성은 풍수지리와는 다른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어떤 왕조에 비해 풍수지리가 팽배했던 고려시대에 축조된 언양읍성(1391년 축조)은 무슨 이유로 풍수지리와는 무관한 평지에 위치했을까. 그 해답은 길(路)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언양지역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경주와 양산을 잇는 길이 일찍이 개통되었다.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조에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21년(77년) 8월, 아찬(阿湌) 길문(吉門)이 가야병(加耶兵)과 황산진구(黃山津口·현재 양산 물금)에서 싸워 1000여 급(級)을 얻었다. 길문(吉門)으로써 파진찬(波珍湌)을 삼으니 그의 공로(功勞)를 상(賞)함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기원후 77년에 신라군이 경주에서 언양을 지나 양산으로 갔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어 102년에 김수로왕도 파사왕을 만나러 이 길을 따라 김해에서 경주로 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언양은 지리적으로 동쪽 울산 굴화(屈火)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서쪽으로는 운문산과 가지산을 넘어 내륙지역과도 연결됐다. 다시 말해 고대부터 언양은 주변 지역을 잇는 요로(要路)의 교차점에 있었기 때문에 한 읍을 다스리는 읍치(邑治)의 성격보다는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에 더 이상 간월산 기슭 지화마을 일원에 치소를 둘 수 없었고, 보다 실질적으로 교통 중심지 역
▲ 이창업 울산과학대학 겸임교수(공간디자인학부)
할을 할 수 있는 지금의 언양읍내로 옮겨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 울산의 대표적인 산물인 철(鐵)과 소금(鹽·염)의 생산이 증대되어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는 절점에 위치한 언양의 효용성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전통적인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도저히 풀리지 않은 언양읍성의 입지는 교통의 요충지와 길이라는 관계에서 명확히 이해된다.
올해 11월 언양에서 KTX 울산역 시대를 여는 것은 고대로부터 언양이 주변지역을 이어주었던 교통 요충지라는 정체성을 되찾는 것과 같다. 역사는 어떠한 형태로든 반복된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원리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본연의 성격(정체성)이 변하지 않고 항상 내재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 곧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교통의 중심지인 언양의 정체성이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