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우리말과 글의 중요성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최초 말과 글이 등장했을 때는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말은 마음을 전하고 교류하기 위함이었다. 요즈음 표현으로 ‘소통’이고 ‘힐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은 어원적으로 ‘긋다’ 혹은 ‘긁어서 흔적을 남기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말은 사라지고 글은 영원히 남는 다는 것이다. 이로써 글의 목적은 기록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문명은 문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문명이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역사일수록 남아있는 기록물이 많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진위여부로 논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고사에 해당되는 고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가 그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 상고사를 기술한 사서들은 많지도 않지만 대부분 위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한 사서 중에서 한국 고대사를 온전하게 기록하고 있는 빛나는 두 사서가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고려 시대 때 이전의 역사인 삼국시대와 남북국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시대를 포함하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 나온 것이다.
단군과 고조선이 처음 나오는 사서가 바로 『삼국유사』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제1 고조선 왕검조선에 나오는 단군관련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고조선은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함이고 친절하게도 왕검조선이라고 부가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삼국사기』는 그야말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역사서이다. 언뜻 보기에는 단군과 고조선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역사서가 그렇듯이 행간과 자간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실 기록 이면에는 숨은 뜻이 있다. 그것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역사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으면 곳곳에 단군과 고조선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기록이 「고구려본기」동천왕 21년조의 기록으로,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인은 단군을 뜻하고 왕검의 땅이란 왕검성을 말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왕검성을 왕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본기」권 제20 영양왕 21년 기록에 따르면,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대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5권을 만들었다. 나라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깎고 고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단고기』「단군세기」에는 3세 단군 갸륵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3세 단군인 갸륵 단군이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했다."고 적혀 있다. 어쩌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배달유기』는 고조선 이전의 역사인 배달국의 역사서이고, 『유기』는 고조선과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고구려의 역사서인 것이다.
이러한『삼국사기』는『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꼽힌다. 총 50권으로 본기(本紀)가 28권(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 연표 3권, 지(志) 9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이용될 뿐 아니라, 고려 중기의 역사의식과 문화수준을 아는 데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와 비교되는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로,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삼국유사』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여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제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여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이러한『삼국유사』가 출현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는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국내 정치와 사회가 불안한 가운데 최충헌에 의하여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돌입했으나 이 때 고려사회는 국가적으로 가장 큰 환란인 몽고족의 침입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수난을 겪는 동안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민족 공동체로서의 집단의식은 오히려 강화되고 현실적 수난을 민족의 자주적인 전통의식의 강조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역사의식 또한 고조되고 있었다. 『삼국유사』는 곧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의한 민족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다.
『삼국사기』는 왕명을 받들어 김부식을 비롯한 여러 사관들이 함께 편찬한 관찬사서로 왕조시대에는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사서만이 정사이었고, 개인이 저술한 사서는 야사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에 대한 상상력과 함께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삼국사기』 보다 낮다고 할 수 없다.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를 본떠 기전체로 서술되어, 본기·연표·지·열전 순으로 편찬되어 있으나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로 사건별로 제목을 앞 세우고 관계된 기사를 한데 모아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삼국사기』는 정통사서이고 『삼국유사』는 대안사서 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인물에 대한 역사서로 많은 부분이 같고 많은 부분이 다른 엄연히 다른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우리 역사 사료로서 영원한 빛날 존재이다. 앞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연구되고 교육되며 재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할 우리의 기록유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