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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인물설교]낙타 무릎 야고보
야고보서 1:1~12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람은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란 구약식으로 말하면, ‘야곱’입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둘째 아들인 야곱과 같은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인 이 이름 야곱을 좋아하여 신약 성경에도 사도 중에만 해도,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형 야고보도 있고, 일명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우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신앙 인물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보호자인 요셉 사이에 태어난 아들 딸 중에 맏이입니다.
야고보는 어렸을 때부터 한 가족으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정이 두터웠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집의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장자인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이 되자 세례 요한에게 가시고 세례를 받으시더니 딴 사람이 되셨습니다. 40일 금식을 하시고 광야에서 돌아오신 후에 집에 곧장 오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시면서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돌아다니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마리아의 큰 아들 예수가 이상해졌다는 말을 여기 저기서 했습니다. 귀신 들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까지도 했습니다. 참다 못한 야고보는 동생들을 데리고 어머니 마리아까지 모시고 예수님을 찾아서 고향으로 모시고 내려오려고 찾아갔더니, 마침 예수님께서 어느 건물 안에서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쭈기를,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주변에 있던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마 12:50)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은 야고보는 예수님이 육신의 혈육까지 부인할 정도로 무엇인가에 쏙 빠져버렸다고 생각하고, 고향 사람들의 비난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라고 그의 기적과 이적에 또 놀라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야고보와 다른 동생들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 특별히 메시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며 따를지라도, 여전히 야고보 생각에는 육신의 형으로만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고향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7:3,4)
이 말은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야고보와 다른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큰 일을 행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보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출세하려면 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갈릴리 촌구석에서 일하지 말고 더 사람들이 몰리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라고 권한 것입니다. 매우 육신적이고 사탄적인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십자가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아직 결정적인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수들과 정면 대결을 펼치지 않고 지혜롭게 적의 간교한 술책을 피하여 처신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 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죽이려 들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야고보와 형제들이 한 말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염려하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위기에 몰아넣고자 할 정도로 그들은 믿음도 없었고 예수님의 사역에 비협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 내내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분명 야고보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골고다 언덕에 슬픔과 비통에 잠긴 어머니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는 형이 미웠을지도 모릅니다. 끝내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길을 자초한 형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야고보가 어떻게 신앙인으로 돌아서게 되었을까요?
야고보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를 찾아와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3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증언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약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는 동안에 동생 야고보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고보는 예수님을 더 이상 육신의 형님으로만 보았던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과 가르침과 이적이 진실한 것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구약 성경에서 예언해왔던, 오시리라 하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은 더 이상 어떠한 의심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의 형님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구주요 만왕의 왕으로 온전히 믿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들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의 집 다락방에 모여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함께 성령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10일 동안의 뜨거운 기도 끝에 거기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고, 야고보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주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교회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 인물로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 보며 자라난 야고보는 성령의 인도함 속에서 행동이 매우 신중하고 경건했습니다. 그의 말은 신실했고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 사도 바울이 회개한 후에 만 삼년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사도 베드로를 만나고자 했으나 어디 갔는지 못 보고 대신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사도 베드로는 그 당시에 교회 핍박의 주된 대상이 되어서 몸을 잠시 피했거나 복음 전도 때문에 자리를 자주 비워서 예루살렘 교회의 다스리는 직임을 주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담당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이른 시기였는데, 나중에 사도 바울이 일차 선교 여행 마치고 돌아와서 이방인 교회 성도들에게 할례를 억지로 주려는 유대주의자들과 변론이 생겨서 예루살렘 회의를 열었을 때에도 최종 결론을 내고 지침을 내린 분도 다름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중용을 지키는 분이었는데, 이방인 교회 형제들은 할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방인 교회 성도들도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리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 15:29)고 권면하여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중용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이러한 결정 과정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의 말은 사도 바울 일행에게 뿐 아니라 당시에 바리새파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다른 불만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야고보의 권위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 권위가 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그가 율법을 힘써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나 생명이 있는 고기 음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실인처럼 머리를 깎지 않았고, 베옷을 주로 입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는 덕이 많고 경건하여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 ‘의인’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기독교인 공동체에서만 불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남다른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조차 주의 형제 야고보를 진정한 존경을 담아 그를 향하여 ‘의인이여’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처럼 존경스러운 신행일치의 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안팎으로 크게 존경을 받았는데,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그는 유대지파 사람인데도 성전에 들어갈 특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를 나실인이요 거룩한 선지자로 인정하여, 제사장들조차 그를 성전 안 깊은 곳에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인정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야고보는 성전에서 얼마나 자주 오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곤 했는지, 그의 무릎은 ‘낙타 무릎’이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경건은 소문이 났고 그의 영적 권위는 더욱더 힘이 보태졌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 지도층까지도 야고보의 신앙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속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야고보의 경건과 그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영향력이 커지자 드디어 악한 자들의 분노와 도전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몰려와서 야고보에게 이렇게 강요하였습니다. 마침 이 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로마 총독 베스도가 죽었고 그 후임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대제사장이 불법적으로 야고보와 경건한 성도들을 죽일 기회를 잡았기에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러한 살벌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들이 야고보에게 와서 감언이설로 꾀이기를, “백성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기대하면서 그를 추종함으로써 바른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들을 막아주십시오. 이번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하여 올바르게 권면해주기를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백성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요 사람의 외모에 휘둘리지 않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모습을 다 볼 수 있고, 당신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성전의 높은 곳에 서셔서 말씀해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강요를 따라 야고보는 잘 보이는 성전 높은 곳에 서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그대 의인이여, 우리는 모두 당신을 믿습니다. 백성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구원의 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대답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구주라고 말해야 하는가, 양단 간에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섰습니다. 만약 예수님은 이단자요 그를 따르는 것은 미혹된 잘못이라고 말하면 살 것이지만,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대답한다면, 야고보는 무서운 죽음이 기다릴 것입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야고보는 성전 아래에 자기를 주목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큰 소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님에 관하여 묻습니까?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전능자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잘못된 이단자라고 말해주길 기대했던 성전 마당의 바리새인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고 분노가 들끓은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그 마당에 예수님을 믿고 있던 유월절 참석자들이나 아직 믿음이 적었던 제자들은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저러한 증언을 제공하도록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제 저리로 올라가서 그를 내려 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야고보를 밀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옛적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어 내 앞에 섬길 자가 끊어지지 않겠다고 보장했던 레갑의 후손 제사장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만 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은 지금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갑 출신 제사장의 만류에도 소용없었습니다. 그 때 가죽 만드는 일을 하는 한 유대인이 가죽을 두드릴 때 쓰는 곤봉으로 돌을 맞고 있는 야고보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 곤봉을 맞고 야고보는 결국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결국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고귀한 피, 무죄한 피 값을 치르게 한 악한 유대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가를 곧장 치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군대가 얼마 후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2년 동안이나 철두철미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에워싸서 그들은 약 백만 명이나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죽거나 서로 싸워 죽거나 나가다가 로마군대에 맞아죽었고, 또 성이 함락된 후에는 아직 남아 있던 100만명이 로마군에 의하여 떼죽임을 당하여 그 피가 예루살렘 거리에 강같이 흘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사도 야고보는 칼로 목베어 죽였고 또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이렇게 성전에 밀어뜨린 후 돌로 치고 곤봉으로 때려 죽였기에, 그 대가를 처참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포위 직전에 예루살렘 성에 있던 기독교회 성도들은 신앙이 인정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계시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서 요단강 건너 펠라라는 마을로 옮겨겼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예루살렘 성과 유다 땅을 완전히 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군대인 로마 군대가 이곳에 와서 모든 것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증언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도 살펴보았습니다. 또 그의 신학과 사상이 무엇인지는 잘 나타내주고 있는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는 그의 생애와 어울리는 가르침들을 담겨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강조된 가르침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하면 다음 몇 가지입니다.
첫째, 신앙의 시험을 잘 이기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인내하며 잘 견딤이 진시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잘 이겨낼 때 인격과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구비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가 예루살렘의 총 감독으로 크게 쓰임받은 야고보의 삶의 여정입니다.
둘째,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늘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2:1)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배당에 가난한 자를 차별하고 부자를 우대한 모습을 보면서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0 말씀에 보면,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도 바울을 인정하면서 한 가지만 부탁하였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항상 기억하며 배려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점을 잊지 말고 항상 우리 심령과 삶 속에서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는 자 없고 더욱 어려운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평생 베옷을 입고 투박한 음식을 먹으며 살았던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그렇게 늘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셋째, 행함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선행과 순종과 복음 전도의 증거가 없는 신앙생활하는 말만 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러한 신앙을 귀신적 신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알고 떨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여 행하지 않지 않느냐면서, 이런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됩시다. 평생 믿음과 삶이 일치되었던 야고보의 삶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귀감이 됩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을 담대하게 함으로써 죽음의 행함으로써 그의 믿음의 진실함을 선포했습니다.
넷째, 말의 실수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씌우리라”(약 3:2)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혀에서 형제에 대한 참소와 비방, 저주 등은 결코 나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오직 감사와 찬양과 축복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노하기도 더디하라고 조언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참 말을 진중하게 했던 것을 봅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도 깊은 훈련을 해서 진실하고 참된 말, 예수 믿는 자로서 합당한 단 물 내는 샘이 되도록 합시다.
다섯째,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고 하였습니다. 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4:10)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본인 자신이 평생에 겸손하고 온유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존귀를 얻었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까지 의인이라는 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겸손하고 의롭고 온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야고보를 본받아서 겸손합시다.
여섯째, 무엇보다 기도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또 서신 마지막에서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의로운 자로서 살았던 야고보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마다 하나님은 늘 응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야고보처럼 의롭게 살아가는 자가 될 뿐 아니라 기도에 항상 힘써서 엘리야처럼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참으로 야고보의 삶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으로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여 영광의 자리에 오른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보고의 삶을 한번 뒤따라 가보면서 생각해볼 점을 점검해보았습니다. 우리도 야고보처럼 주님의 계명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계명을 힘써 존중하여 살아가는 의인으로 살아갑시다. 그가 행했던 것처럼 무릎 꿇는 기도의 사람이 됩시다. 또한 시험과 고난을 만날 때 이를 싫어하거나 부끄럽게 여기거나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잘 견디고 기도하며 이겨냅시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겸손합시다. 우리 주 영광의 주님을 행함과 입술로써 힘써 증거합시다. 어떠한 위협이 닥친다 해도 그 위기 속에서 기꺼이 예수님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선포합시다. 하늘나라에서 야고보가 받는 하늘나라 복된 영광을 우리도 흠모하며 믿음으로 정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