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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1 통권 563 호 신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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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쓰는 이 사람의 삶] |
‘원조 국세청맨’ 이철성 박사의 개발시대 세무비화 |
“‘見金如石’ 넥타이 매고 전국 누비며 세무사찰, 털어도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유한양행”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
● “정권의 몰락은 독재가 아니라 세금 때문” ● 과세(課稅) 기술, “아프지 않게 살살…잘못하면 죽어” ● 엘리트 공무원의 부정 조장한 자유당 정권 ● ‘서(署)’자 붙은 관청의 전통은 ‘낮은 직급, 적은 인원’ ● 1966년 국세청 개청 3대 목표 ‘세수증대, 오명(汚名)불식, 국민계몽’ ● “정권이 더는 세무공무원에게 악역 안 맡겼으면…” |
“한정권의 몰락은 독재나 부패 때문이 아니라 알고 보면 부당한 세금이 원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재정학자가 있다길래 그를 만나러 갔다. 이철성(李喆晟·75) 박사다. 처음 들어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았다.
“6·25 전쟁 때 군량미와 구호미를 조달할 목적으로 한시적으로 현물세인 토지수득세란 걸 거뒀거든요. 당장 사용할 식량이 아쉬웠으니까. 그런데 공약대로 휴전 후에는 폐지했어야 하는데 현물이 들어오는 재미에 그대로 뒀거든요. 수백만 농민과 그 자손들이 이것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어요. 그 현물세만 없었어도 우리 농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으로 쫓겨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더 들어보자.
“민주당 정권도 신구파 싸움을 그만두고 3·15 부정선거의 원흉과 부정축재자들을 신속하게 처벌했더라면, 그래서 그들의 재산을 세금으로 환수했더라면 군부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명분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에 간 것도 따져보면 부가가치세 때문이에요. 박 대통령이 17년 동안 침식(寢食)을 잊다시피 하며 고민한 것이 중화학공업 육성과 부가가치세인데, 부가가치세를 남징(濫徵)했어요. 그게 부산 국제시장 상인들에게 사무친 반감을 자아내 시민봉기를 일으킨 것이 부마항쟁이라고요.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차지철이 그렇게 날뛰지 않았을 것이고 김재규가 총을 쏠 명분도 없었겠지요.”
그는 재정학(財政學)을 ‘세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세금은 거두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렵다. 쉽게 거둬 쉽게 쓰는 게 세금인 줄 알았다간 반드시 국민에게 보복을 당한다고 경고한다.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게 정치사라는 것이다.
“원래 세금은 곡식을 뜻하는 ‘벼 화(禾)’변에 기쁨을 뜻하는 ‘태(兌)’자를 합쳐서 만든 말이거든요. 1년 농사를 끝낸 농부가 신에게 수확을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제단에 바치는 제물, 그게 바로 세금의 원형이에요. 우리 국민은 올 한 해 좋건 싫건 한 사람당 465만원의 세금과 국민연금, 건강보험료를 내야 합니다. 건국 이래 가장 무거운 세금입니다. 그런데 공무원 수는 2만명이나 늘었고 장관급 자리가 148개나 된다잖아요. 이거 큰일난 거 아닙니까. 세금을 겁 안내면 안 됩니다. 임자 없는 돈이 세금인 줄 알다간 큰코다친다고요.”
국가재정과 관련해서 생겨나는 수많은 낭비와 허비를 이제는 국민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게 바로 납세주권운동인데, 세금 낸 사람이 자기가 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낭비되지 않는지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자는 것이다.
“물론 세금 없이는 나라 살림을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과세(課稅) 기술을 발휘해서 세금을 거둬야지, 무조건 걷을 수는 없다고요. 과세 기술은 가능한 한 잡음 없이 오리의 깃털을 뽑는 것과 같거든요. 껍질에 손대면 오리는 펄쩍 뛰면서 꽥꽥거려요. 자칫하면 오리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리가 아프지 않게, 살살 털을 뽑는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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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첫날 들은 말이 ‘빽’
그에게서 초창기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의 일화를 듣다 보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남 통영에서 나고 자라 부산대를 다니던 25세 청년 이철성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인 1956년, 제7회 행정고시 재정경제 부문에 합격한다. 출두 통지서를 받고 맨 처음 재무부에 가서 들은 말이 바로 ‘빽’이었다. 총무부 인사계장 송씨(그는 자신의 책에서 ‘실록’답게 당시 인물들의 실명을 모조리 밝혀놓았다)는 수습행정관들을 세워놓고 재무부에 관한 브리핑을 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러분은 고등고시 합격자라는 똑같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누가 어느 과(課), 어느 국(局)에 배치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받은 연수성적과 소위 빽이라는 힘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순진한 것인지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냉소적인 것인지 알 길 없지만, 공식적으로 빽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공무원 사회라니 코미디 같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 1인당 국민소득(GNP)은 50달러.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문맹인이 인구의 80%였고 국가재정이나 국민경제는 전적으로 미국 원조에 의지하는 꼴이었다. 그는 첫 월급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산비탈 문간방에 점심 없는 하숙비가 될까말까 한 돈이었다.
“수습행정관이면 3급이니 고급공무원 반열에 들었고, 일반 직원인 서기나 주사보다 높은 간부직이었거든요. 당시 3급 공무원은 지방에서 군수나 경찰서장으로 근무했는데, 그 월급이 한 달 하숙비가 채 안 된다는 것은 자유당 정권이 공무원들에게 관권을 이용해 백성을 뜯어먹고 살라고 임명장을 줬다는 얘기밖에 안 되죠.”
하숙 대신 적선동(종로구)에 방을 구해 통영의 어머니가 보내준 식모를 데리고 밥을 해먹으며 광화문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재무부로 출근했다.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어느 날 중앙청 앞을 지나다 꼭대기를 쳐다보니 그 건물의 녹슨 쇠다리 끝 지붕의 기둥 옆에 고시 동기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약사 마누라를 구하라!
“중앙청 건물은 당시 전화(戰火)로 깨어져 괴물처럼 버려져 있었거든요. 그 꼭대기에 숨어 있던 친구는 나중에 문교부 차관을 지낸 장인숙 군이었어요.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왜 여기 올라와 있냐니까 ‘다들 밥 먹으러 나가는데 따라가려니 돈이 없고 혼자 자리에 앉아 있기는 멋쩍어서 매일 점심시간이면 이 꼭대기로 올라온다’는 거예요. 우린 그날 중앙청 꼭대기에서 광화문 쪽을 향해 오줌을 갈겼어요. ‘점심을 굶게 하고 주사, 촉탁, 임시직원까지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고 살게 만드는 자유당 놈들아, 우리 오줌 맛이나 실컷 봐라!’ 하면서 명색이 3급 공무원들이 말이죠.”
그 어린 공무원들의 기개가 분명 오늘 우리 삶을 만드는 한 부분이 됐을 것이다. 수습 시절의 오줌 덕분에 그들은 남의 것을 뺏어먹을 수가 없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가 찾은 자료에 따르면 1954년 10월, 3대 민의원 윤보선씨의 월급봉투에 기입된 지급액은 세비, 거마비, 수당 등을 합쳐서 총계 3만1600환. 거기서 세금, 경조금, 탄값을 제외한 실제 수령액은 당시 쌀 두 가마 값이 채 안 되는 돈이었다. 국회의원 윤보선의 월급이 그 정도였으니 일반 국민이야 말해 무엇하랴.
묻혀 있는 옛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오늘 우리 삶과의 비교에서 온다. 1958년 재무부 통계연표를 보면 1인당 평균소득은 8만3800환, 조세부담액은 7838환, 한 가정이 네 명이라고 치고 소득에서 세금을 빼면 가구당 소득은 30만4000환 정도, 그것을 12개월로 나누면 월 평균 2만5000환쯤이 된다.
월급만 받아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공무원, 그렇다고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남의 것을 뺏기도 싫었던 공무원, 그들이 사는 방법은 부자집에 장가들거나 그도 아니면 돈을 벌 수 있는 아내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부정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부심과 의기는 넘쳤어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고 싶으면 부정한 짓을 해서는 안 됐고요. 그러니 장가들 때 돈 버는 부인을 얻기는 해야겠는데,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돼 있으니 직업이랄 게 뭐가 있나요. 은행원, 교사, 의사, 약사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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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보니 교사와 은행원은 한낮에 집을 비워서 아이를 기를 수 없겠고, 의사는 몸에서 약 냄새가 날 테니 싫고, 약사는 약국과 살림을 한꺼번에 할 수 있으니 주부의 직업으로는 최고더라 이거예요. 나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해 약사가 신붓감으로는 최고였어요. 실제로 고시 동기생들 중에 약사에게 장가간 친구들이 꽤 많았어요.”
그런 이 박사 본인은 약사 아닌 교사와 결혼했다. 어머니가 ‘충청도 색시이고 교수집안의 딸’이라고 워낙 맘에 들어 하셨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공무원 사회도 달라졌지만 가정 내 부부 역할과 위상도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이철성 박사의 회고에서 새삼 느낀다.
“고위직 공무원 수가 많은 건 좋을 게 없어요. 수가 몇만 줄어도 중하위직 공무원의 처우가 크게 개선됩니다. 세금이 절약되는 건 또 얼마겠습니까. 공무원이라면 자기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명심해야지요.”
‘서(署)’자 붙은 관청의 관습
아버지가 일찍 타계한 후 통영에서 미곡상을 하던 어머니는 공무원이 된 자랑스러운 장남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내 건강이 허락되는 한 미곡상을 계속할 터이니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동생들 걱정도 말아라. 다만 공무원 생활을 하는 중에 부디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짓은 하지 말거라. 남들에게 죄짓는 짓을 해서는 애미가 용서하지 않겠다.”
일경에 잡혀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 안중근의 어머니가 그랬듯, 우리 역사 어느 갈피를 뒤져봐도 이렇게 올곧고 의연한 어머니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들의 편지가 있다. 그들은 아들에게 한결같이 의를 가르쳤지 세상의 영달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들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려 애쓴다. 그게 무너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일까. 아무튼 이 박사는 어머니의 뜻을 가슴에 깊이 새긴다.
아직 국세청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국세청의 전신은 재무부 사세국(司稅局), 관세청의 전신은 세관국, 경찰청의 전신은 내무부 치안국이었다. 그는 재무부 사세국 조사계에 발령받아 거시경제학과 국민소득론 등 새로운 학문을 기반으로 전문적인 조세징수의 틀을 최초로 짠다.
“그전까지 조사 업무는 한국은행으로부터 필요한 통계자료를 전달받아 국민의 조세분담률, 산업별 경제성장률 따위 경제지표를 계산하는 정도였거든요. 최신 경제학을 공부한 내가 그리 갔으니 조사계에서는 구세주 같았겠죠.”
박봉에 무미건조한 조사업무가 싫었지만 재무부의 구석자리 책상에 새벽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 재정학과 조세학을 억지로라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직책이었다. 이때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던 재정학과 경제원론은 후에 예상치 않게 국세청을 나온 후 그에게 교수자리를 보장한다. 인생은 아이러니투성이의 새옹지마인가.
두 해 후 조사계장이 됐을 때 그에게 배당된 직원은 둘뿐이었다. 행정계나 법인세계도 서너 명의 인원뿐이었다. 그 이유를 선임자에게 물었을 때 나온 대답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세무서, 전매서, 경찰서 등 ‘서(署)’자가 붙은 관청은 권력을 가지고 일반 국민을 단속하는 기관이지. 기관장의 직급이 높거나 종사 직원 수가 많으면 권력을 남용하고 민폐를 끼칠 우려가 많거든. 그래서 ‘서’자 붙은 관청은 총독부 시절부터 낮은 직급과 적은 인원으로 구성되는 것이 전통이고 관습이야.”
일제의 전통이든 말든 그건 아주 훌륭한 정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위직 인플레’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 좋은 전통은 깨져버린 게 아니냐고 이 박사는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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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동안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와 소득이 늘어났으니 공무원 수가 늘어나야 하겠지요. 그러나 고위직 공무원 수가 많은 건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고위직 공무원 수가 몇만 줄어도 중하위직 공무원의 처우가 얼마나 개선되겠어요. 세금이 절약되는 건 또 얼마겠습니까. 공무원이라면 자기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명심해야지요. 국세청 직원이 아니라도 항상 세금 아낄 걱정을 해야 한다고요.”
‘윗사람의 마음가짐’
부임 첫날 들은 것이 ‘빽’이라는 말이긴 해도 당시 사세국의 인사기록은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했다. 장·차관의 간섭도 원칙적으로 배제돼 있었다. 개인별 신상카드에 그가 과거에 교육받은 실적과 성적, 각급 수상과 수훈 내용, 시말서 견책, 징계 등 상벌사항이 빠짐없이 기록돼 누구나 기록카드만 찾아보면 다음에 영전할 것인지 좌천될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설사 빽으로 간다 해도 그게 실력 아닌 빽이란 것을 주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 겁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5·16 이후 군인들이 공무원 사회로 대거 들어오면서 그런 식의 기계적 인사 기록 체계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세제 개혁안을 만들던 그 무렵 그는 재무부 장관의 고문이던 김만기씨에게서 ‘윗사람의 마음가짐’이란 탁월한 지혜를 교육받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가 그랬듯 평생 잊지 않고 실생활에 그 원칙을 적용하려 애썼다.
“지금도 욀 수 있어요. 말해볼까요? 첫째, 자기 부하들이 가진 장점을 찾아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라. 부하의 단점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둘째, 부하가 어려운 일을 끝냈을 때는 절대로 맨입으로 보내지 말라. 백 마디 칭찬보다 술 한잔, 그게 안 되거든 담배 한 개비라도 먹을 것을 권해야 부하가 기뻐하고 만족한다. 셋째, 부하가 손대거나 이룬 공로는 절대로 자기가 가로채지 말고 그대로 상관에게 전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성공을 위해 부하를 이용하는 상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간단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계율 같다.
사람이 흘러가듯 제도도 흘러간다. 그 시대에 맞게 재빨리 옷을 바꿔입어야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섰을 때 나라 재정은 엉망이었다. 돈이 없었다. 돈이 없으니 아무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세금을 걷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원래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최고회의는 탈세하고 재산을 해외 도피한 기업인과 부정축재한 공직자와 군인들로부터 각각 470억환과 70억환을 환수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재벌회장 10명을 연금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박정희 의장이 연금 중이던 이병철 회장을 만나면서 부정축재 환수조치는 ‘부정이득자로서 국가재건에 필요한 공장을 건설하거나 부정축재 통고액에 물가상승률을 곱한 금액에 해당하는 부분을 국가에 납부하면…강제환수를 하지 않는다’로 어물쩡 바뀌어버린다.
지역·계층 갈등의 싹
“이병철 회장이 박 의장에게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하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거다. 그렇게 되면 우선 환수금이야 받아먹을지 몰라도 결국 조세수입이 줄어 국고가 텅텅 비게 된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에 일익을 담당케 해야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있다’고 설득했던 모양이에요. 경제인 전원 석방에 반대하는 최고회의 이석제 의원을 박 의장이 이렇게 달랬답니다. ‘아, 이 사람아.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니 이제부터 국민을 배불리 먹여야 할 것 아닌가. 이북보다 경제력이 나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드럼통 두들겨 물건 만들어본 사람들이니 그래도 저 사람들이 뭔가 해내지 않겠나….’ 사실상 그때부터 우리 사회의 지역간, 계층간의 알력과 갈등의 싹이 튼 거라고 봐야 할 겁니다. 박 대통령의 공이 많지만 그 부분에선 후대에게 큰 부채를 남긴 거예요.”
군사정권은 경제개발에 관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금·적금 비밀보장법을 만들어 금융기관에 일단 예입된 돈은 그 원천이 설사 탈세 밀수 도박 뇌물이라고 해도 출처를 가리지 않고 철저히 비밀을 보장해줬다. 부정축재자라도 환수채무액의 3분의 1만 국가에 납부하면 회사 설립을 허가했고, 조세범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1960년 이전에 발생한 사채 투기 등을 포함한 일체의 탈세행위까지 완전 사면했다. 1962년 6월엔 10환을 1원으로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민간인이 장롱 안에 감춰둔 현금을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도록 유도했다. 그렇게라도 돈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재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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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랏돈은 늘 모자랐다. 국가 기간시설 건설말고도 자유당 정권이 남긴 엄청난 부채에다 군사정권이 감원한 군인·공무원의 퇴직금, 대홍수로 입은 수해복구비, 도시 실업자의 농촌정착비, 수출진흥을 위한 지원금 등등 쓸 곳은 산더미인데 나올 곳이 도무지 없었다.
700억을 걷어라!
“돈 나올 데야 빤하죠. 일반경비 절감하고 담뱃값 인상하고 부정축재환수금 받는 것말고는 세금이 전부인데…. 그래서 돈 나올 구멍을 궁리하다 못해 박 대통령이 결심한 게 월남파병이었다고요. 1965년 1월, 파병에 따른 월남 특수와 미국이 제공할 파월경비 지원을 예상해 우리 군인을 월남에 보냈죠. 그해 12월 한일협정을 채결해 일본의 경제협력을 약속받고, 또 독일에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주는 대신 1억4000만마르크를 차관으로 받았죠. 그 돈은 우리 청년들을 거기로 보낸 일종의 담보였다고요. 젊은이들이 몸을 판 돈으로 포항제철을 세우고 고속도로도 닦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 이철성 박사는 재무부에 신설된 감사과의 과장이었다. 감사과는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신설된 기구였다. 그의 나이 30세. 젊은 과장이지만 남들이 영감이라고 부르는 큰 벼슬이었다.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은 후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 예산국장은 나중에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김학렬씨였다. 정부 주요 부서는 옛 총독부 건물을 수리한 중앙청 5층으로 이사했다. 불과 5년 전 부서진 그 지붕 꼭대기를 드나들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던 청년이 그 지붕 아래로 들어와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감사과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전산도 팩스도 컴퓨터도 과세자료도 없던 시절 감사과는 고작 탈세 정보를 모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드디어 국세청이 생긴다. 1966년이었다.
초대 청장은 혁명 주체세력이던 이낙선씨였다. 수십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을 깨알같이 기록하며 살아온 이철성 박사는 그해 이낙선 청장이 했던 국세청 개청 연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국세청은 7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함으로써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자금면에서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그동안 세무공무원이 사회로부터 받아온 오해를 이번 기회에 깨끗이 씻어내며…, 세금은 국민이 국가에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해 애국하는 행위임을 국민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러니까 국세청을 만든 목적은 세 가지라는 것이었다. 세수증대, 오명(汚名)불식, 국민계몽! 그중에서 이 박사는 오명불식이 가장 맘에 들었다. 청탁을 경계해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못하게 했기에 아내도 불만이 있었고 통영의 어머니도 아들의 위치를 늘 조마조마해했기 때문이다.
존경스럽던 유일한 회장
700억원! 한 나라의 총예산이라기엔 지금 보면 우스운 액수지만 1966년에 그 돈을 거둬들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국세청은 전쟁 수준의 열기와 긴장으로 가득했다. 탈세정보 수집과 조사를 담당하는 조사국은 고시 출신 젊은 요원 20명을 반장으로 뽑아 전국을 누비며 누수되는 세금을 찾았다. 탈세 자수 기간을 설정해 탈세신고를 접수하고 자진납부하지 않는 기업은 세무사찰 요원을 대량 투입, 세무사찰을 벌였다. 당시 그의 직함은 서울국세청장!
“그때 다들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고 쓰인 초록 넥타이를 매고 다녔어요. 돈을 보되 돌같이 하라는 뜻이지. 하하.”
이낙선 청장의 자동차 번호는 700번이었고 요원들은 모두 007가방을 들었다. 모두 세수목표액 700억원을 상징하는 숫자들이었던 것이다. 700억원은 전년도의 거의 두 배가 되는 세수목표액이었다.
“그때까지는 ‘세금은 떼먹는 게 장땡’이라는 탈세 풍조가 일반화되어 있었거든요. 전산이 있어, 뭐가 있어. 안 낸다 해도 일목요연하게 파악도 안 될 때니까. 다소 무리하게 밀어붙이더라도 근본적으로 세금은 ‘내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는 돈’이란 인식을 국민 일반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 세수 목표 700억원을 달성한다면 납세의식이 크게 바뀌고, 과거 경찰·검찰 등 외부기관에서 함부로 건드리던 세무사찰을 세무관서만이 담당하도록 하는 세무사찰 일원화의 의미도 크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해 연말 국세청은 기어코 700억원 목표를 달성한다. 경사가 났다. 대통령의 치하가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 돈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사업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세청 공무원의 노력 때문만일 수는 없었다. 1차 경제개발계획을 진행하는 중에 우리 경제가 그만큼 자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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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조사국장 시절 유한양행을 세무사찰한 일은 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서류영치에서 서류분석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도 아무런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청장의 명령이라 어떻든 혐의점을 찾아내야 했다. 사찰반 두 개를 추가 구성하고 국장인 그가 직접 지휘했다. 그래도 깨끗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데가 없다는 건 물리적 상식인데, 그 큰 회사에서 탈세근거가 하나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들 했다. 그런데 정말 없었다.
“내가 국장 자리를 내놨어요. 정말 없으니 국장을 바꿔서 한번 조사해보라고. 그때까지 조사국장으로서 취급해본 크고 작은 사건 중에서 무혐의 사건은 정말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상부에 “혐의 없다”고 보고하고 그 일은 마무리됐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한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상공부 장관으로 입각하라고 권유하자 정경분리원칙을 내세우며 사양했고, 종업원 지주제를 맨 처음 시작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경영을 가족 아닌 외부 경영인에게 맡긴 것도 처음이며, 역시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실시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또한 육영사업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었다.
세무공무원, 악역은 이제 그만
“그때 유한양행이 아마 공화당의 정치자금 제공 요구를 거절하다 정치권의 미움을 받아 세무사찰 대상이 됐을 거예요. 주무부서의 장으로 몹시 가책을 느꼈어요. 탈세자를 파헤치는 것도 좋지만 모범납세업자를 칭송하고 보호하는 것도 국세청의 일이 아닐까 싶었지요. 유한양행 앞에다 국세청 이름으로 ‘모범납세업체’라는 동판을 만들어 붙이자고 제안했지요. 유일한 회장은 그 동판을 오래도록 자랑스러워했다고 들었습니다.”
세금이 행정의 편의를 위한 징벌수단으로 남용되거나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무기로 악용되는 시절을 우리는 거쳐왔다. 부마항쟁 때 성난 시민들은 부산 세무서를 불태웠고 5·18 때도 시민들은 광주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유한양행의 예처럼 정부에 밉보이면 세무사찰을 당해야 했던 시절, 이철성 박사는 국세청의 고위 간부였다.
이제 70대 중반에 이른 그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세무공무원을 악역으로, 국세청을 원한의 부서로 모는 시절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다. 세무뿐 아니라 경찰, 검찰, 보안 등 국가의 중요 직책에 종사하는 직업 공무원을 정권이 사병 내지 속죄양으로 삼아서는 절대 안된다며 경계하자는 것이 ‘실록 국세청’을 쓴 뜻이라고 말한다.
“난 국세청에서 억울하게 퇴진했어요. 한 해 전에 최고훈장인 홍조근정훈장이란 영예를 줘놓고선 이듬해엔 숙정이란 이름으로 사무관 이상 전원에게 ‘도의적 사표’를 내라는 지시가 떨어지데요. 아내가 우겨서 지었던 우리 집이 2층집이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지금도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어머니 말씀을 지켜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짓이라곤 한 적 없다고 맹세하지만 어쩔건가. 퇴임 이후 그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박사가 됐고, 성균관대 교수(세법학·재정학 전공)로 조용한 정년을 마쳤다. 지금도 여전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깨알 같은 글씨로 일기를 쓰고 있다.
개인의 역사가 국가의 역사이고 또 인류의 역사다. 그것들은 다 흘러가며 강을 이룬다. 우리는 거기 떠 있는 한 나뭇잎배일 뿐이다. (끝) |